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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도 국민입니다.

그렇게 시민들의 뜻이 모이고, 그 대의를 짊어진 정치인들이 선거로 선출되어 민의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겠지요. 그것이 선거고 정치지요.

2024-04-18 굽시니스트

만화가도 국민입니다.

  만화가도 국민입니다. 국민.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인 정치 참여- 선거를 소홀히 할 수 없지요. 만화가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당과 후보자들을 평가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투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민들의 뜻이 모이고, 그 대의를 짊어진 정치인들이 선거로 선출되어 민의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겠지요. 그것이 선거고 정치지요. 물론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치 게임이 그렇게 간단하고 명랑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공익과 사회 정의에 대한 신념의 차이들이 양극단으로 수렴하여 격렬한 보혁 진영 갈등으로 터져 나옵니다. 이념과 지역, 성별, 세대, 계층 등등 개인 각자의 집단 정체성이 충돌하며 혐오와 분노를 쏟아냅니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정치 게임은 살벌한 보혁 진영 전으로 진행됩니다.

  개인 각자의 정의와 공익에 대한 신념, 이를 땔감 삼아 타오르는 상대 진영에 대한 적개심, 동료 시민들과 나누고자 하는 공익과 정의의 복음, 시국에 대한 감상 등등, 이 모든 걸 입 밖으로 토로해야겠지요? 언어는 이 정치 게임 진영 전의 전장에서 날아다니는 총알들입니다. 연설하고, 논평하고, 기사가 쓰여지고, 팜플렛이 뿌려지고, 대자보가 붙여지고, 게시글이 공유되고, 댓글들이 달립니다. 실로 인류가 문자 발명 이래 지금까지 작성해 온 모든 텍스트 중 절반은 정치적 텍스트일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문자와 그림이 분화되기 이전 시점에서부터 그림은 그런 정치적 텍스트와 어깨를 나란히 해왔습니다. 정치라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간단한 문장과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정치에 대한 뭇사람들의 이미지를 밧줄 삼아 사회 구조를 묶어 정치를 진행하는 시스템은 가히 전근대 정치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문맹률이 높았던 시기 백성들에게 정치·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려 할 때, 이해하기 쉬운 간단한 그림은 가장 훌륭한 메신저였을 것입니다. 이윽고 그러한 그림 메시지들은 조각과 벽화를 벗어나, 제지 기술과 인쇄술의 발전을 통해 다량으로 복제된 출판물의 형태로 대중에게 전달됩니다.

  근세에 접어들면서 종교전쟁, 왕위 쟁탈전, 왕당파와 의회파간의 내전 등등에서 각 진영은 여러 팜플렛들을 출판하며 자신들의 정당함과 적들의 부당함을 알렸고, 거기에는 늘 간단한 삽화가 첨부되어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이 그림들은 오늘날 정치 만평의 직계 조상이라 하기에 부족하면 없는 작품들이었습니다. 텍스트와 함께 대량 인쇄된 선화라는 부분에서 현대 만화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17세기 이탈리아 풍자화가 주세페 마리아 미텔리는 아카데믹한 미술계 바깥에서 사회의 다양한 인물들과 양태를 판화로 그려냈습니다. 그 그림들의 심볼릭한 선화는 만화적인 표현이라 하기에 충분합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을 둘러싼 당대 국제 정세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판화는 정치 만평의 모든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18세기 풍자화가 윌리엄 호가스가 근대 코믹의 원형을 제시한 선구자로 여겨집니다. 사회 곳곳의 구질구질한 세태를 과장되고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려낸 그의 그림들은 동판 인쇄물로도 제작되어 널리 판매되었지요. 그 주제에 있어서는 사회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었고, 당대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는 부분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사실 18세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예술가들이 정치에 너무 관심을 갖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었겠지요. 18세기 말~19세기 초, 호가스의 다음 세대인 토마스 롤랜드슨에 이르러 사회 풍자화는 더욱 과장된 캐리커처와 개그 감성으로 진정 만화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레벨에 이르게 됩니다. 뭣보다 동시대인인 제임스 길레이는 국내외 정치 시사 문제를 다루면서 오늘날의 관점으로 봐도 완벽한 정치 만평의 형태를 완성시켰습니다. 정치인들은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로 그려졌고, 영토 분할은 케이크 자르기 등으로 비유되어 그려졌습니다. 심지어 인물들의 대사가 말풍선에 담겨 나오기까지 했으니, 실로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만평의 형태 그대로입니다. 19세기 중후반 프랑스의 오노레 도미에에 이르러서는 만평의 정치적 성격과 기능이 분명하게 자리잡혔으며, 만평이 갖는 고유의 예술적 깊이 또한 완숙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펀치>로 대표되는 시사만평, 유머 잡지가 크게 흥하면서 매스 미디어를 통한 만평 유통의 생태계가 확고히 자리 잡기에 이르렀습니다.

 

<자두푸딩이 위험하다(제임스 길레이 작)>

  혁명과 전쟁의 시대를 장식하는 그 프로파간다들에는 분명 격렬한 정치적 격정의 에너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타락한 교회에 대한 적의, 봉건 귀족 계급에 대한 경멸, 외적에 대한 분노 등등. 그렇습니다. 글쟁이들이 텍스트에 정치적 에너지를 가득 담아 토해내듯이, 그림쟁이들도 분명 그림에 정치적 에너지를 듬뿍 쏟아붓고 있었던 것입니다. 먹물 좀 드신 지식인들이 정치적 주의 주장을 담아 텍스트로 뿌리시는데, 사실 만화가들도 정치적 주의 주장을 담은 그림을 뿌릴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런 주의 주장은 대개 특정 정파의 편에 서서 반대 정파를 공격하는 모양새를 띄게 마련이었습니다. 이런 만평들이 실리던 19세기 신문들은 대개 뚜렷한 정치 성향을 지닌 독자들을 위한 정파지였기에 만평이 정파 간 진영 전의 이미지 무기로 기능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좌파지의 만평에서는 부르주아들이 탐욕스러운 돼지로 묘사되고, 우파지의 만평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피에 굶주린 아귀 떼로 묘사되기 마련이었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파를 위한 신문 잡지에서 자신들 취향에 맞는 만평을 보며 낄낄거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이후,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시대가 열리면서 매체를 통한 광고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광고주들은 소수의 충성 독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정파지가 아닌 대중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신문, 보편적 성향의 일반론을 펼치는 지면을 찾게 되었지요. 상업 자본의 그런 니즈에 발맞춰, 20세기를 맞이한 언론계는 저널리즘 철학을 정립해 나갔습니다. 사견 없이 정확한 진실만을 전한다는 보도 윤리, 공익적 사명감, 기자 정신 등을 강조하며 언론은 불편부당 공명정대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20세기 언론이 가졌던 불편부당 공명정대의 신화는 언론에 사회 이슈 전반에 대한 대법관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정치를 논함에 있어 여야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사실에 근거해 보편 윤리의 잣대로 평결하는 것이 언론의 정도가 된 것입니다. 매우 바람직한 양상이지요. 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길이기도 합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사실 언제나 흑백이 명확하게 갈리는 것이 아니고, 대개는 시시비비 간에 어슴푸레한 그러데이션의 회색 지대가 넓게 자리하고 있기 마련이지요. 언론이 휘두르는 판단의 칼이 그 회색 지대의 어느 선을 가르던 국민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선은 없습니다. 건조하게 사실만을 전달하는 팩트 위주 기사조차 그 자료의 선별과 내용의 비중 밸런스를 놓고 볼 때, 정파적 치우침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 경계하다 보니, 결국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다루는 기사는 의식적으로 기계적 중립 프레임을 강하게 걸고 나오게 마련이었지요. 이쪽을 타박한 분량만큼, 저쪽도 같이 타박해 주는 양비론적 시각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했습니다. 텍스트로 작성되는 기사는 그래도 그런 양비론적 기술과 분량 배분을 통해 중도를 지키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만평은 어떨까요?

  악의적인 과장과 주관적인 풍자를 이미지화한 만평이 그리 점잖게 공명정대한 중립 논조를 지킬 수 있을까요. 텍스트는 어떠한 논지 전개에 대해 그 지면 내에서 충분한 배경과 논거를 통해 이성적으로 독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화가 그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는 주관적 이미지와 공감입니다. 만화 안에서 분명 누군가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얼간이가 되어야 하고, 펀치라인은 논리적 이해가 아닌 감성적 쾌감으로 작동합니다. 결국 그 풍자의 대상이 속한 쪽 진영 사람들에게는 그 만평이 정파적으로 치우친 만화로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화 안에서 얻어터질 샌드백 역할이 꼭 필요한데, 그 샌드백이 정파성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지요. 딜레마에 직면한 메이저 언론의 만평 작가들은 해법을 내놓습니다. 정치권 전체를 샌드백 삼고, 작가는 '국민 정서 전체'와 한 편에 서서 샌드백을 두들기면 되는 거지요. 여당이든 야당이든, 보수건 진보건, 결국 모두 권력 싸움에 눈이 먼 정치꾼들이고, 만평가는 보편 국민 감정을 담은 펜 끝으로 정치 모리배들을 꾸짖고 풍자하며 까대는 것입니다. 그런 류의 모두까기 만평은 한 때 만평 사조의 정석으로 여겨졌습니다. 사실 그런 정치권 모두까기는 TV 뉴스를 보면서 '이놈이나 저놈이나 쯧쯧' -하며 혀를 차는 대중의 정치 혐오 정서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만평에 있어서 선거라는 이슈는 대개 '국민의 준엄한 회초리', '당리당략을 넘어 국익을 바라는 국민의 지시' 등등의 워딩으로 그려지기 마련이었습니다. 이런 작풍이 사실 좀 밍숭맹숭하게 느껴지긴 합니다만, 그래도 정파적 만평에 비해 점잖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대충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언론 환경이라는 것이 다시 크게 뒤집어집니다. 인터넷 매체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기존 매스미디어가 가졌던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상업 광고 파이의 대부분을 인터넷 방면에서 가져가 버리면서 언론사의 살림은 크게 쪼그라듭니다. 특히 신문, 잡지와 같은 인쇄 매체에게는 존폐의 기로라 할만한 위기의 시대가 펼쳐지게 되었지요. 이 상황에서 몇몇 언론사들은 먼 옛날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정파적 독자들의 충성스러운 구독에 의지하는 정파지로서의 면모를 강화하게 됩니다. 진영 전의 최전선에 나서게 된 언론 지면에서 만평은 더 이상 예전처럼 점잔빼며 중립 코스프레하고 있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 만평의 샌드백은 언제나 확고하게 저쪽 편 정치인들이고, 저자들은 내 펜 끝에서 발가벗겨진 채 브레이크 댄스를 추게 될 것이다- 라는 화끈한 사조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정파성 강한 독자들을 위한 정파성 강한 만평이 확실히 만화적 측면에서 좀 더 매콤 팔팔한 맛을 내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정파지들에서 반대 진영의 인사들만 까는 정파성 강한 만평을 이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만평들이 좀 더 점잖았던 옛 시절을 그리는 목소리도 없지 않지만, 사실 이 날것 그대로의 비린 정파성이 근대 만평의 근본에 더 가까운 것임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윽고 맞이하는 선거는 정치 진영전의 빅 이벤트로, 우리편이 반드시 이겨야 하는 대회전입니다. 정파지의 만평 지면을 맡은 만화가들도 더욱 가열차게 응원전에 나서며 더욱 날카롭게 벼린 펜을 휘둘러댑니다. 만화가도 국민입니다. 국민. 여느 다른 국민처럼 지지하는 정당, 인물이 있고, 정파적 신념과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우스꽝스러운 그림과 나름의 센스로 버무린 만평으로 세상에 내보이는 일을 하고 있지요. 우리 편에는 웃음을, 저쪽 편에는 화를 선사하는 작업이 아주 고결한 사명처럼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정치라는 거대한 모자이크 벽화에 윤곽을 더하고, 근대 만평의 잔혹한 야성을 계승하는 펜 선은 앞으로도 쭈욱 이어져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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