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줄거리
독자에게 고(告)함
이 작품은 흔히 보게 되는 만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독자의 무의식 속에 있는 잠재적 능력을 겨냥하면서 정신과 내면(內面)깊은 곳에 호소한다.
이러한 마술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선, 감수성에 가장 적합한 환경, 즉 정적, 고독, 특히 저녁 나절, 이상적으로는 밤...에 독서하기를 권한다.
경우에 따라서 독자는 외부의 형이상학적 혼란으로부터 벗어나 혼자가 되기 위해 철제의 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독자는 이 작품의 52쪽과 53쪽을 안쪽으로 반으로 접어 병풍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
멋진 환상의 상태, 그러나... 불안해 할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원하는 시간에 밝혀질 것이다.
옮긴이 글
만화를 단순한 여가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임몽디스』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특이한 소3재를 놀랄 만한 깊이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몽디스』가 단순한 만화가 아니라는 것은 몇 컷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도처에서 죽음의 냄새를 고약하게 풍기고 있는『임몽디스』는 현실과 꿈을 하나로 묶어 우리의 현실 생활에 편재되어 있는 죽음에 근접하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러한 깊이를 지닌 만화는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만화의 혁명이다.
랭보는 "나는 타인이다"라고 말했다.
임몽디스에서 말풍선 밖의 대사는 바로 '나'안에 존재하는 타인의 모습으로, 작가의 전지전능한 필치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아주 괴망은 치통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일터에서 작업실로 돌아온다.
그런 그에게 이상한 물건이 다섯 번이나 연속적으로 배달된다.
이 조각들은 어디에 사용하는 것일까?
지타 블랑샤는 그림 앞에서 현기증을 느낀다.
그녀의 정신은 마치 열기가 서서히 퍼지듯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현실 세계는 앙주 괴망과 지타 블랑샤 두 인물의 꿈과 같은 세계, 즉 환각의 세계로 이어진다.
통증을 제외하고는 외견상 아무 것도 이들을 현실과 연결해주는 것은 없다...
그들의 세계는 조금씩 이상해진다.
악몽에서 왜곡으로, 작중인물들은 그들을 완전히 일상의 상궤에서 벗어나게 하는 조종자에게 대항하기 위해 서로 연합한다.
그렇다면 등장인물들의 악몽은 어떤 차원으로 발전할까?
그들은 이미 죽었을까, 아직 살아있는 것일까, 아니면 삶과 죽음의 중간에 있는 것일까?
혹은 단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리고 독자들을 둘러싸고 있는)현실에 대한 해석일까?
다니엘 윌레는 말풍선의 대가인 빌랄과 라바테와 같은 반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80년대 출간한 3부작 『병적인 상태』에서부터 만화의 존재 이유를 근본적으로 탐구해온 작가다.
그는 만화가들에게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기 위해 만화의 고전적 규준을 승화시키는 한편 전위주의자적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
그 한 예가 이 만화의 판형이다.
『임몽디스』의 판형은 만화에 대해 세워졌던 모든 규칙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것은 판에 박힌 규격으로부터 벗어나 일본 만화나 미국의 코믹물이 남긴 흔적과는 전혀 다른 길을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만화에서 정사각형 판형이 이야기의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의 탐구가 그것이다.
이를 위해 30X30 판형은 시네마스코프가 영화인들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했던 것처럼, 만화에서 창작의 영역을 확대할 것이다.
그러나 정사각형은 그리 낯 설은 것이 아니다.
레코드판에서 우리는 정사각형을 익히 보아 왔다.
정사각형의 판형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이야기의 리듬에 적합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만화에서 처음 시도되고 있는 이 정사각형 앨범은 말풍선에 익숙한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
다니엘 윌레는 이 판형의 색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작품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에 근거한 만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독자의 무의식 속에 있는 잠재적 능력을 겨냥하면서 정신과 내면 깊은 곳에 호소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임몽디스』는 만화라는 장르에서의 혁명과 만화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는 작품이다.
다니엘 윌레는 『임몽디스』에서 정사각형 판형을 통해 몽상의 영토를 모험하고 있다.
30X30 판형은 도판을 큰 컷으로 만드는 만큼 이야기도 늘어나지만, 이야기 전개를 느추는 효과도 갖고 있다.
우선 시나리오가 그렇다. 독자들은 복잡한 구성과 스토리 전개로 인해 만화에서 으레 기대하는 쉬운 독서습관에 심각한 방해와 고통을 받게 되며, 어두운 무의식의 굴곡 속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그러나 『임몽디스』의 진정한 요지는 이야기 속에 있지 않고, 그림 속에 있다.
핏빛과 언뜻 떠오른 기억을 홉하고 있는 이 수채화는 신성불가침한 직각 틀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게 한다.
악몽의 풍경화와도 같은 이 수채화는 의식의 흐름에서 인물들에게 심한 충격을 주어 의식을 유린하고 그 특성을 하나씩 드러낸다.
여기에 더하여 작가는 그림들을 뒤집어 놓으면서 독자들의 감각을 끊임없이 혼란스럽게 만든다.
독자들은 다음 칸으로 가기 위해서 는 곰곰이 생각해야 하며, 방향감각을 잃지 않고는 이 작품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물론 그림에서 위대한 거장들, 예를 들면 헨리 밀러, 앤디 워홀, 장 끌로드 포레, 특히 프란시스 베이컨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제 1권에서 방향을 잃은 독자에게 좌표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서술적 혼란이 가져다 주는 궁극적인 효과가 이 이야기의 유일한 주인공이 독자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면, 독자가 이 작품에서 느끼는 묘미는 더욱 배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