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기만적 무지(無知)의 앎(知)

사랑과 희망을 믿지 않는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은 단순한 염세주의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의미에 대한 심오한 탐구로 이어진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와 비슷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신들에게 반항하다가 영원히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의 삶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한다. 영원히 반복되는 무의미한 노동, 절대로 완성되지 않는 목표. 이는 마치 사랑도 희망도 없는 삶의 무한한 반복처럼 느껴진다. 카뮈는 시지프의 형벌이 바로 인간의 운명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절망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삶의 부조리를 온전히 끌어안을 때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역설한다.
우리는 모두 때때로 삶의 무의미함 앞에 좌절한다. 특히, 관계의 파편화와 개인의 고립이 심화한 현대 사회에서 '사랑'과 '희망'이라는 가치는 점차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만약 한 인간이 그러한 가치들을 모두 거부한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호쿠마 작가의 「알고 있습니다」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날카로운 통찰을 담아낸다. 1인 출판사 청귤 출판사를 운영하는 호쿠마 작가가 자신 있게 공개한 첫 독립 출판 만화인 이 작품은, 일반적인 일상 만화가 추구하는 따뜻한 서사나 소소한 감동 대신, 회피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주인공의 우울한 일상을 화려하고도 비현실적으로 묘사한다.
염세주의에 갇힌 불행한 청소년의 내면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알고 있습니다」는 기존의 만화 문법과 이질적인 모습을 띤다. 이 작품은 독자가 공감하기 어려운, 때로는 불편하기까지 한 주인공의 극단적인 심리를 통해 독자들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이러한 독자적인 노선은 독립 출판이라는 형식이 가진 작가 개인의 깊은 목소리를 그대로 반영하며, 기존 상업 만화에서는 쉽게 다루기 힘든 존재론적 고뇌를 전면에 내세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인생 첫 펀딩 프로젝트이자 새로운 도전을 응원해 달라고 말하지만, 작품 속 주인공은 바로 그 '도전'과 '응원'을 철저히 거부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주인공
‘사랑은 유한하다.’ 이 강렬하고도 직설적인 한 문장은 주인공이 던지는 가장 강력한 서사적 선언이다.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고 성장을 이룬다는 일반적인 서사와 달리, 이 작품은 모든 관계와 사랑은 결국 끝난다는 전제 아래 주인공이 철저히 자신을 방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주인공 같지 않은 주인공', 즉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지만 서사적 성장을 거부하는 이질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만화의 문법을 파괴하는 그의 모습은, 독자가 기존의 영웅 서사에 대한 기대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그의 내면을 오롯이 들여다보게 만든다.
주인공 '그'는 자기중심적이고, 애정결핍에 시달리며, 매사에 부정적이다. 소극적이며, 친구도 없다.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야 할 집은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스스로 기저귀를 갈지 못하는 갓난아기뿐.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난 어머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 탓일까, 그는 비극을 극복하려는 의지조차 없이 모든 것을 외면하고 도망치는 인물이다. 세상을 통달한 것처럼 굴며 인간은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라 여기고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독한 현실에서 자신을 구해줄 동화 속 공주를 기다리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은 그가 '엑스트라'처럼 행동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는 사건의 중심에 뛰어들거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대신, 관찰자로서의 위치에 머무르려 한다. 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는 그의 믿음에서 비롯된 자기방어 기제이다. 그는 이미 세상의 진실을 알고 있으므로, 더 이상의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이에 따라 그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서사에 무관심하며, 오직 자신의 고통과 결핍에만 집중하는 극도의 자기중심적 인물이 된다.
이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주인공'을 통해, 현대 사회의 자기방어적인 인간상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는 영웅이 아니며, 영웅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고통으로부터 안전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의 삶은 무미건조한 흑백의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고 그저 '견디는 것'에 만족하는 처절한 생존 투쟁인 것이다.
희망이 꼭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는다
사랑과 희망을 믿지 않는 그의 태도는 단순히 현실을 비관하는 것을 넘어,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결여와 염세주의로 이어진다. 그는 삶의 모든 현상을 냉철하고 이성적인 계산의 문제로 파악한다. 같은 반 학생들을 속으로 그들의 관계를 철저히 이해득실의 관점으로 평가하고 따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러한 속마음을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이는 내면의 너덜너덜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기방어이며, 동시에 인간관계의 표면적인 질서를 깨트리고 싶지 않은 소극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그의 내면은 이미 수많은 상처와 실망으로 인해 닳고 닳아, 더 이상의 긍정적 기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춤을 열심히 추는 아이를 보면서도 안쓰럽다고 생각한다. 그 순수한 열정과 아름다운 몸짓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는 대신 그가 보는 것은 그 열정이 언젠가는 시들고, 그 아이에게 쏟아지는 관심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뿐이다. 그의 눈에 비친 아이의 모습은 열정이 끝나고 홀로 남겨질 미래의 비극적인 모습이다. 이는 그가 미래의 상처를 미리 예단함으로써 현재의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자기방어적 회피의 극단적인 예시이다. 그는 희망이 결국은 덧없는 환상이며, 그 환상이 깨졌을 때의 고통이 너무 크다는 것을 이미 학습했다. 따라서 그는 타인의 희망을 동정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에게는 그런 허무한 감정을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 그의 닳은 내면은 여러 모습으로 묘사된다.
천사와 악마
그의 현실에선 물고기와 도깨비(뿔이 달린 캐릭터로 묘사되기에 도깨비라 칭하겠다.)라는 독특한 형태가 나타난다. 이 두 모습은 그의 끊임없는 내적 갈등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핵심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물고기는 '넌 할 수 없어', '사랑은 없어'와 같은 부정적인 메시지를 던지지만, 귀엽고 뿔 달린 모습의 도깨비는 '넌 할 수 있어',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와 같은 밝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들은 마치 주인공의 어깨에 앉아 속삭이는 천사와 악마처럼,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충돌하며 갈등을 증폭시킨다.
이 작품에서 물고기는 육지에 둥둥 떠다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물고기는 본래 물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지만, 공중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형상화된다. 이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비극적인 세상 속에서 필사적으로 생존하려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물고기는 그의 염세적인 자아, 즉 '넌 할 수 없어'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내면의 목소리이다. 그의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통해 학습한 물고기의 말은 새로운 시도 자체를 막아 실수를 피하게 하고, 관계에서 오는 실망감을 근본적으로 차단한다. 이는 과거의 상처와 부정적인 경험들이 축적되어 형성된 자기방어 기제이며, 그가 새로운 희망이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물고기의 메시지는 주인공에게 익숙하고 편안하다. 변화를 요구하지 않고, 현실의 비참함을 그대로 인정하며, 그 속에서 안주하도록 유도한다. 반면, 귀여운 모습의 도깨비는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 즉 희망을 갈망하는 자아로 보인다. 이 도깨비는 '넌 할 수 있어'라고 격려하며,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라고 용기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이 도깨비의 메시지는 물고기의 메시지처럼 주인공에게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는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나 희망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그저 내면의 욕구로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도깨비의 존재는 그가 완전히 절망에 빠진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나마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희망이 현실감이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도깨비는 '성장'과 '변화'의 상징이지만, 그는 언제나 상황을 회피하며 진심을 숨긴다.
이러한 내적 갈등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는 순간에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주인공은 줄곧 물고기의 말을 따랐지만, 처음으로 도깨비의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커지는 경험을 한다. '괜찮아', '네가 네 마음을 숨긴다면 누가 네 마음을 알아주겠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주인공은 조심스럽게 선물을 건넨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방어 기제를 허물고 세상에 손을 내민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무시였다. 여자아이의 시선은 다른 남자에게 향해 있었고, 주인공은 그녀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을 뿐이라는 잔인한 현실에 직면한다.
이 결정적인 좌절은 주인공의 내면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희미하게 존재하던 도깨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물고기의 목소리는 이제 단순한 속삭임이 아니라 건물을 뒤덮을 만큼 거대한 존재로 확장된다. 이 거대한 물고기는 주인공의 확정된 절망을 상징한다. 한 번의 시도로 세상의 잔인함을 다시 한번 확인한 주인공은 더 이상 희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그의 모든 자기방어 기제는 이제 완벽한 확신으로 굳어지고, 그의 내면세계에는 오직 물고기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치게 된다.

그림1 <알고 있습니다> 中
물고기와 도깨비는 마치 천사와 악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천사나 악마가 아니다. 그들은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는, 그의 복잡한 내면의 목소리일 뿐이다. 내면의 목소리에는 선과 악이 없다. '저 애의 있는 그대로가 맘에 드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절망적인 속삭임은 과거의 상처가 만들어낸 자기 보호의 외침이었고, '난 널 응원해'라는 희망적인 외침은 그가 간절히 바랐던 욕망의 투영이다. 어떤 말을 수용할지는 오직 본인의 선택이다. 그가 처음으로 희망을 믿기로 했을 때, 돌아온 것은 절망이었다. 그는 더 이상 도깨비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는 희망을 품는 데 실패했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인간의 삶은 보는 거리에 따라 그 본질이 완전히 달라지는 기묘한 연극과도 같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이 자신을 존재하게 하지만, 자유를 제한한다고 말했다. 그는 바로 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인물이다. 작품은 그를 미술품처럼 멀찍이 떼어놓고 관찰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그의 모습은 대부분 뒤돌아선 뒷모습이다. 이러한 연출은 단순한 작화 기법을 넘어, 그가 타인에게 자신의 나약하고 초라한 내면을 노출하기를 극도로 꺼린다는 심리적 상태를 상징한다. 그는 세상을 향해 결코 정면을 응시하지 않으며, 자신을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하고자 한다.
가끔 앞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얼굴은 입술이 묘사되지 않고 눈썹마저 없는 인형처럼 공허하게 그려진다. 이는 그가 감정을 표현하거나 소통하는 능력을 상실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입이 없는 것은 진심을 말하지 못하는 그의 회피적인 성격을, 눈썹이 없는 것은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내면을 반영한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마네킹처럼, 그는 세상의 표면에 떠다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처럼 뒤돌아서고, 얼굴을 지워버리는 행위는 주인공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가장 근본적인 자기방어 기제인 것이다.
그의 자기방어는 물리적인 행동으로도 나타난다. 그는 상황을 회피하고 싶을 때 항상 눈을 감는다. "잠시 눈을 감으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나를 떨게 하는 시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습니다. 듣기 싫은 소리가 난다면 귀를 막으면 됩니다." 그는 조별 발표를 해야 하는 압박감, 좋아하던 여자아이에게 이용당했다는 잔인한 현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을 들키고 싶지 않을 때마다 눈을 감는다. 이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부정(Denial)의 기제와 일맥상통한다. 눈을 감음으로써 그는 불편한 현실을 보지 않고, 귀를 막음으로써 듣기 싫은 진실을 외면한다. 하지만 이러한 회피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그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영원히 가로막는다.
그의 회피는 결국 도망치고 싶은 상황을 '액자 속'으로 가두는 행위로 이어진다. 그는 "자신이 병신 같다고 느낄 때 참 유용합니다. 이렇게 멀리서 보면 내가 아닌 사람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그의 내면에 깊게 뿌리 박힌 자기혐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가까이서 보면 나약하고 실패한 자신이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마치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비극을 보는 것처럼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객관화하고 예술 작품처럼 대상화함으로써 고통을 무력화시키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그를 더 고립시키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게 만든다. 주인공의 삶은 멀리서 보면 그저 평범한 청소년의 일상처럼 보이지만, 그가 짊어진 내면의 고통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때 비로소 뼈아픈 비극으로 다가온다.
흑백의 미학
이 작품에선 기본적으로 흑백 만화의 미학을 극대화하여 주인공의 내면을 표현한다. 거친 선과 단조로운 흑과 백의 색채는 세상을 향한 그의 시선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는 세상을 희망이 없는 단조로운 곳으로 인식하며, 그 속에서 자신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여긴다. 이러한 인식은 마치 자신의 흑백 TV 속 세상에 갇혀 있는 것처럼, 주인공의 삶에서 모든 다채로운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는 삶의 기쁨, 슬픔, 사랑, 분노 등 모든 감정의 스펙트럼을 회색 조로 축소해 버린다. 이는 곧 ‘사랑은 유한하다’라는 그의 믿음과도 연결된다. 사랑이라는 가장 찬란한 감정조차도 결국 퇴색하고 사라질 것이라는 확신이 그의 시야를 흑백으로 물들인 것이다.
하지만 작품은 단 두 번, 이 흑백의 세계에 컬러를 허락한다. 이 두 번의 순간은 주인공의 내면에 희망의 색이 잠시 스며들었던 때이자, 동시에 그의 욕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치이다.
첫 번째 컬러는 그가 짝사랑하던 여자아이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짝 피구 경기에서 그녀가 자신을 멋지게 구해냈을 때, 주인공의 눈에는 그녀가 이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동화 속 공주처럼 보이며 세상이 컬러로 물든다. 아름다운 꽃잎이 휘날리는 환상적인 배경은 그의 마음속에 피어난 희미한 희망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그녀와 셔틀콕을 주고받을 때조차, 그는 셔틀콕이 화려한 꽃잎으로 변한다. 이는 주인공이 현실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상화'를 통해 자신을 기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쫓는 희망은 현실적인 관계가 아닌, 자신을 구원해 줄 완벽한 영웅에 대한 판타지에 불과하다. 이처럼 그의 내면에 잠시 스며들었던 컬러는 현실의 빛이 아닌, 자기 위로 적 망상에 가깝다.
두 번째 컬러는 조별 과제에서 만난 '고양이' 소녀가 건네는 화분에서 피어난다. 그녀의 얼굴은 고양이로 묘사되지만, 이 인물이야말로 주인공과 가장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다. 친구가 없고, 자기 비하를 하며,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외로운 존재이다. 그가 외면하고 싶었던 자신의 거울인 셈이다. 물고기는 '혹시 널 구하러 온 공주가 아니냐'라고 묻지만, 주인공은 자신이 이상화했던 짝사랑 소녀를 지목하며 이를 부정한다. 고양이 소녀는 짝사랑 소녀와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짝사랑 소녀가 그에게 희망을 준다면, 고양이 소녀는 그에게 진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이 현실을 회피하고 도망칠 때, 고양이 소녀는 그 현실을 인정하고 맞선다. 그는 눈을 감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치지만, 그녀는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잖아"라고 말하며 현실을 직시한다. 그가 "멀리서 보면 내가 아닌 사람 같다"라며 자신을 액자에 가두지만, 그녀는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인간은 좋은 기억만 보고 살아가는 거라고"라며 나쁜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순간들을 찾아낸다. 그녀가 건네는 화분은 짝사랑 소녀가 선사했던 덧없는 환상이 아닌,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소중하고 생명력 있는 희망의 상징이다. 이 화분에 핀 꽃은 그에게도 작지만 다채로운 기억이 되어, 그의 흑백 세계에 색을 불어넣는다.

그림2 <알고 있습니다> 中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공감의 가면을 쓴 자기 위로
‘위로와 공감이 의미 없이 다가왔던 적이 있나요. 아마 그 이유는 그런 것들이 현실을 바꾸지 못함에 있을 것입니다.’
책 소개는 주인공의 삶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며, 그의 회피를 현실적인 고통의 결과로 정당화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독자들이 그에게서 '재미'와 '공감'을 느낄 수 있다고 단언하는 작가의 시선은, 오히려 그의 가장 큰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행동은 단순히 현실이 고통스러우므로 회피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고통을 유일한 진실로 여기며 타인을 도구화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이기적인 태도에 가깝다.
그는 모든 실패와 불행의 원인을 '변하지 않는 현실'과 '유한한 사랑' 탓으로 돌린다. 그는 ‘알고 있습니다’를 반복하지만, 철저히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지 않다. 그가 '병신 같다'라고 느낄 때 액자에 자신을 가두는 행위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기 위한 자기기만이다. 이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라는 체념적 사고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고 싶지 않다'라는 나태함의 발로이다. [액자 속에 갇힌 사람의 이미지] 그는 자신을 피해자로 포장하며, 모든 관계에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바란다. 마치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모든 이들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독자들에게 '건방지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로와 공감은 고통을 함께 나누는 데서 비롯되지만, 자신의 고통만을 절대화하고 타인의 진심을 이용하거나 무시한다. 그는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이용당했지만, 동시에 그 여자아이를, 자신을 구원해 줄 '공주'로 이용하려 했다. 그 역시 사랑을 주고받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도구로 관계를 시작한 것이다. 그 상처가 자신의 용기 있는 행동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고 치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 경험을 자신의 염세주의를 더욱 확고히 하는 근거로 삼으며, 세상은 원래 그렇다는 확신에 찬다. 이는 성찰 없는 자기 합리화이며, 더 이상의 관계와 성장을 거부하는 이기적인 선택이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만화 <베르세르크>의 주인공 가츠의 이 말은, 주인공의 회피적 삶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이자 반증이 된다. <베르세르크>의 소녀 '질'의 이야기는 '도망'과 '낙원'이라는 주제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의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고통의 원인이 단순히 세상의 잔인함만이 아님을 보여주는 날카로운 거울 역할을 한다.
질은 아버지에게서 도망쳤지만, 도착한 곳은 가츠의 피로 물든 전장이었다. 가츠는 질에게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라고 단언한다. 질의 친구였던 로시느는 비참함을 피해 사도(괴물)가 되었고, 질에게도 영원한 도피를 권유했다. 그러나 질은 환상 뒤의 추악한 실체를 보고 구원이 도피에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질은 주인공처럼 눈을 감지 않는다. "적어도 울고 소리치고 이를 악물어볼까 해. 그럼 뭔가 바꿀 수 있을지도." 그녀는 자신의 '전장'으로 돌아간다. 이 능동적인 '전장 선택'은 회피를 고수하는 「알고 있습니다」의 주인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주인공의 고통이 세상의 잔혹함뿐 아니라, 그 고통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한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됨을 이 사례는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주인공 가츠 또한 현실이 가혹하고 비참하다는 점에서 질과 공통점을 가진다. 그는 제물의 낙인이라는 저주를 받아 매일 밤 악령에게 쫓기는 신세다. 그러나 가츠는 질처럼 도망치기를 택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는 것을 택한다. "봐라, 내 주변의 어둠을. 여기가 네가 도착한 곳, 여기가 네 낙원이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이 대사는 질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도망자에게 던지는 경고이다.
「알고 있습니다」의 주인공은 바로 이 '질'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그는 '사랑은 유한하다'라는 믿음 아래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한다. 그러나 그가 도망쳐서 도착한 곳은 낙원이 아닌, 자기혐오와 고립이라는 새로운 전장일 뿐이다. 그는 가츠처럼 맞서 싸우지 않고, 끊임없이 외면하고 도피한다. 「알고 있습니다」의 주인공이 겪는 고통은 세상의 잔혹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고통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한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어차피 안 된다는 물고기의 속삭임을 선택하며 자기만의 감옥에 갇히지만, 질은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희미한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현실과 싸우겠다고 결심한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이 말은 삶의 고통을 외면하고 다른 누군가의 품에 안겨 평화를 얻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질은 자신의 '전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성을 되찾는다. 「알고있습니다」의 주인공이 겪는 고통은 세상의 잔혹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고통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한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두 작품의 극명한 대비는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성장과 희망은 결코 도망치는 곳에 있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전장을 직시하고 용기를 내어 맞설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음을 역설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주인공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자신만의 심리적 감옥을 건설했지만, 그곳은 안식처가 아닌 영원한 비극의 공간일 뿐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내면을 솔직하게 그려냈다고 하지만, 그 솔직함은 결국 '자기 연민'이라는 이름의 비겁함과 닮아있다. 우리는 때때로 주인공에게서 우리의 나약한 모습을 발견하고 공감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가 갇힌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위로를 제공하는 대신, 우리 자신에게 묻는다. '너는 주인공처럼 도망치고만 있지 않은가?'라고. 공감의 가면을 벗겨냈을 때,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날카로운 비판과 자기 성찰의 거울이 된다.
알고 있기에 멈춰버린 삶
본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치는 주인공이 반복적으로 발화하는 “알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다. 이 언어는 단순한 진술을 넘어 주인공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핵심적 기제다. 그는 삶의 부조리와 인간관계의 허위, 사랑의 유한성을 이미 꿰뚫어 본 듯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러나 이러한 ‘앎’은 참된 지혜라기보다 상처를 덮기 위해 자신에게 부여한 자기기만의 논리로 드러난다.
그의 ‘앎’은 본질적으로 과거 경험에서 기원한다. 그는 어린 시절의 결핍, 실패한 사랑, 사회적 소외라는 연속된 상처 속에서 세계를 해석한다. 이 경험은 일종의 트라우마적 기억으로 남아, 모든 관계와 사건을 동일한 패턴으로 환원한다. “사람은 결국 떠난다.”, “사랑은 오래가지 않는다”라는 그의 결론은 경험적 사실을 넘어 규범적 명제로 굳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새로운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지식은 원래 인간을 세계로 열어주어야 하지만, 주인공의 지식은 오히려 세계를 닫는다. 이는 카를 야스퍼스가 말한 ‘경계 상황’에서의 도피와도 연결된다. 그는 상처와 실패라는 경계 상황을 직면하는 대신, 과거의 결론에 머물러 삶을 정지시킨다. 결과적으로 그의 ‘앎’은 미래를 가능성의 장(場)이 아니라, 과거의 반복으로 환원하는 장치가 된다.
주인공의 ‘앎’은 또 다른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 그는 세상의 부정적 측면은 집요하게 ‘알지만’, 긍정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고양이 소녀와의 만남은 그 대표적 장면이다. 그녀의 순수한 호의는 치유와 변화를 열어줄 수 있는 사건이지만, 주인공은 이를 불행에 대한 동정, 혹은 일시적 관계로 환원한다.
이 태도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와 대비된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역설적 인식을 통해 진정한 철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했다. 반면 주인공은 “나는 알고 있다”라는 확신 속에서 무지를 은폐한다. 이는 자기 성찰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태도이며, 결국 그가 추구하는 ‘앎’이야말로 무지의 다른 이름임을 드러낸다.
“알고 있습니다”라는 근본적으로 자기기만의 언어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선언을 통해 자신의 나약함을 감춘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기만’의 전형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자기기만은 자유와 책임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거짓을 믿는 행위다. 주인공 역시 “이미 알고 있다”라는 선언 속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변화할 책임을 회피한다. 따라서 그의 ‘앎’은 지혜의 표지가 아니라, 두려움의 가면이다. 그는 지식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그 보호막 속에서 자신을 고립시킨다.
작품 속 ‘앎’의 역설은 오늘날의 상황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정보의 과잉 속에 살지만, 그 정보는 종종 새로운 세계로 열림이 아니라 확증 편향의 재생산으로 기능한다. 개인은 ‘이미 알고 있다’라는 태도 속에서 타인의 경험과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는 주인공의 태도와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결국 문제는 ‘앎’의 내용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것이 가능성을 열 것인가 닫을 것인가가 핵심이다.
“알고 있습니다”라는 역설적으로 무지와 동일하다. 그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아는’ 것에 만족하며, 변화와 성찰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의 ‘앎’은 자유가 아니라 감옥이다. 당신이 안다고 믿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인가, 아니면 자기기만인가?
이 물음은 작품 속 인물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역시 ‘이미 알고 있다’라는 태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사랑과 희망을 믿지 않는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삶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보았으며, 인간은 그 무의미 속에서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창조해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고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의 주인공은 바로 이 부조리한 세계에 던져진 실존주의적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희망과 사랑이라는 기만적인 가치들을 부정하며, 삶의 본질적인 무의미를 온몸으로 직시한다.
주인공의 삶은 카뮈가 말한 시지프의 운명과 유사하다. 무한히 반복되는 고통의 순환 속에서, 그는 희망이라는 덧없는 돌덩이를 밀어 올리려다 좌절한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길은 시지프처럼 운명에 저항하며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바위를 외면하고 자신의 좁은 세계에 갇히는 것이다. 이 순간, 주인공은 실존주의가 말하는 '자기기만'의 덫에 빠진다. 그는 세상의 잔혹함을 탓하며 자신을 피해자로 포장하지만, 그 행위는 결국 자신의 자유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비겁한 선택에 불과하다.
그러나 주인공의 여정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양이 소녀가 던진 작은 화분은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화분은 거창한 '희망'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삶의 작은 이유, 즉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놓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긍정성을 의미한다. 고양이 소녀는 주인공에게 의미를 찾아주려 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과거의 기억들, 작고 소중했던 순간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함으로써 주인공이 스스로 삶의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공의 가치관을 무조건 부정할 수만은 없다. 고양이 소녀는 분명 주인공에게 긍정적 변화의 씨앗을 심어주었지만, 그녀와의 관계 역시 주인공의 신념인 '사랑은 유한하다'를 재확인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녀는 그에게 '내가 꾸며줄게.'라고 말하며 도움을 주려 했고, 주인공은 그녀의 존재를 통해 잠시나마 흑백의 세상에 작은 색깔을 덧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막이 내리자, 그녀는 떠난다. 이것이 단지 만화의 서사적 흐름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는 동시에 주인공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삶의 의미는 외부의 거창한 가치(사랑, 희망)가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는 용기에 있음을 보여준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야말로,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온전히 존재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해답이다.
[참고 문헌]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2014.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유기환 옮김, 현대지성, 2025.
송현철. 『철학적 사유와 인식 사르트르의 자유 개념과 실존적 책임』. 루미너리북스. 2025.
최동혁. 『카를 야스퍼스의 지혜를 통해 배우는 32가지 삶의 법칙』. 루미너리북스. 2025.
임은미. (1995, 9). 청소년 심리 속의 '방어기제'. 중등우리교육,, 106-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