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와처』와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저항
:"0과 1 사이, 수채화가 포착하는 예측 불가능한 세계

근래 매일 목도하는 이미지의 홍수는 어떻게 생성되는 것이며 어떤 영향을 우리에게 미치고 있을까? 무한 스크롤의 인터페이스에서 프롬프트 몇 줄로 그럴듯한 이미지가 무제한으로 생성되는 AI의 시대에 우리의 일상엔 생성형 이미지의 찌꺼기가 가득하다. 이 이미지의 찌꺼기는 일종의 미학적 퇴화처럼 점차 실재와 가상의 이미지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이에 대한 미학적 판단도 점차 무감각하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무한히 이미지가 생성되다 못해 실재와 구별되지 않는 시대에 변영근의 <버드와처>는 묵묵히 이 흐름을 역행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버드와처>는 단순히 새를 관찰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속도와 효율, 그리고 데이터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흐름에 역행하여 실재 세계를 '제대로 보는 법', '기다리는 법'을 재고하고, 이를 '향유하는 법'을 잊어버린 우리에게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에 가깝다. 또한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구현할 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고요하고도 완고한 실험이다.
이 고독한 관찰자의 모습에서 19세기 파리의 군중 속을 배회하던 보들레르의 산책자flâneur의 모습을 우리는 상기할 수 있다. 보들레르가 말하는 산책자는 도시의 스펙타클 속에서 '보는 자'이면서도 동시에 '보이는 자'다. 하지만 <버드와처>의 주인공은 철저히 비가시적이고 호명되지 않는 유령처럼 도시를 배회한다. 그는 새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소리를 죽이며, 때론 자신의 존재를 지운다. 이 비가시적인 산책은 어쩌면 현대 사회에 흔히 발견되는 현대인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이에 이 글은 단순히 근대적 산책자를 환기하여 이를 작품에 대입하기보다, <버드와처>라는 작품에서 변용되는 산책자의 의미를 들여다봄으로써 변영근의 작품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관찰', '시간', '물질성'이다. 이는 근대의 산책자와 비교하여 그의 관찰이 갖는 독창성을 밝히기 위한 참조점이자, 생성형 AI와의 대조는 이 작품이 갖는 동시대적 의미와 '시간'과 '물질성'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극도로 절제된 서사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채화라는 매체의 통제 불가능한 물질성을 통해 탐조 행위를 시작한다. 이 글은 이 행위가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예술로 변환하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는 결국 동시대의 '창작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작가가 작품을 통해 내놓은 섬세하고도 강렬한 대답의 일종일 것이다.
도시의 산책자에서 숲의 관찰자로
발터 벤야민에 의해 더욱 철학적 깊이를 얻은 보들레르의 산책자는 근대성의 산물이다. 그는 산업 자본주의가 낳은 도시의 풍경에서 익명의 군중 속을 목적 없이 떠돌며 찰나의 순간들, '충격 경험Schockerlebnis‘을 수집하는 것을 산책자로 바라봤다. 그의 산책은 목적성 없는 배회였지만, 그 시선은 근대화된 도시의 표면 아래 숨겨진 소외와 욕망의 편린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버드와처>는 이러한 관찰자의 개념적 연유는 두고 있지만,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의 무대는 인공적인 조명으로 가득 찬 도시 너머의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광 아래의 숲이며, 그의 관찰 대상은 소비를 부추기는 상품과 군중이 아닌 예측 불가능한 자연과 새다. 이 공간의 전환은 관찰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근대의 관찰자가 인파에 몸을 숨김으로써 도시적 익명성을 확보했다면, <버드와처>는 광활한 자연 속에 호명조차 되지 않은 채 홀로 고독을 마주한다.
도시의 소음과 자극의 홍수 대신 숲의 침묵과 미세한 감각의 파동은 이 작품의 주 배경이 된다. 그는 세계 전체를 훑는 대신, 작은 생명체의 깃털 하나, 눈빛, 짧은 움직임 속에 담긴 생명이 만드는 드라마에 온전히 몰입하도록 한다. <버드와처>의 쌍안경은 단순히 멀리 있는 것을 당겨보는 도구를 넘어, 번잡한 세계로부터 하나의 대상을 분리하고, 그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한 프레임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전환은 단순히 공간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일종의 시대정신의 변화를 반영한다.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의 고유한 아우라Aura—그것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유일무이함에서 비롯되는 권위—가 붕괴하는 것을 목도해야 했던 그때와는 달리 <버드와처>는 디지털 복제가 무한히 가능한 시대에 단 한 번뿐인, 복제 불가능한 자연의 아우라를 찾고 포착한다. 그의 기록에 남겨진 새의 모습은 사진의 모사처럼 완벽한 재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새가 날아가 버린 후, 기억과 잔상에 의존해 포착된 불완전한 기록일 것이다.
바로 이 불완전함 속에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주인공이 눈으로 포착한 순간이 담겨 있다. 이에 주인공이 그린 새의 모습은 유일무이한 흔적이자, 사라져 버린 아우라에 대한 애도의 기록처럼 느껴진다. 변영근이 그리는 새는 도감이나 실제의 새를 모사하는 것이 아닌, 어느 가을날 오후 햇빛 아래, 미세한 바람이 불어오던 순간, 누군가의 시야에 포착된 새에 가깝다. 이 구체성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에 상실된 실재성을 고찰하게 한다. 이처럼 작가는 산책자라는 고전적 관찰자의 유형을 현대적 맥락으로 환기하여, 관찰 너머의 포착이라는 행위가 디지털 시대에 어떤 새로운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비선형적 서사 속에서 유영하기
<버드와처>의 특징 중 하나는 '사건의 부재'에 있다. <버드와처>는 도시와 숲의 풍경, 새, 그리고 이를 관찰하는 관찰자로 구성된다. 전통적인 서사 구조가 갈등의 발생과 해결이라는 도식에 주로 근거한다면, <버드와처>의 서사는 흐른다기보다 축적되고, 전진하기보다 천천히 침잠한다. 무명의 주인공은 새를 찾아 숲으로 가고, 기다리며, 관찰하고, 기록한다. 때로는 새를 포착하기도 하고 포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이야기의 거의 전부다. 극적인 반전이나 인물 간의 첨예한 갈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 빈자리를 시간의 흐름, 빛의 변화, 계절의 미묘한 움직임, 그리고 관찰자의 내면에 쌓이는 감각의 퇴적물로 채운다. <버드와처>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행위라기보다, 주인공과 함께 시간의 흐름을 견디고 감각하는 것에 가깝다. 작은 감각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이루는 것, 이것이 변영근의 서사적 핵심이다. 그의 작품에서 서사는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동심원처럼 천천히 확장된다.
주인공은 이름도, 구체적인 서사적 배경도 알 수 없는 투명한 존재다. 관찰자이자 주인공인 ‘그‘는 독자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대상이라기보다, 독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자 '렌즈'로 기능한다. 그렇기에 그의 관찰은 독자로 하여금 외부 세계로 더 집중하고 그 풍경과 탐조 행위를 각자의 시점에서 동일시하게 한다. 그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나뭇잎의 미세한 떨림을 보고, 그의 귀를 통해 바람 소리와 새의 지저귐을 듣는다. 이처럼 서사를 비워냄으로써 작가는 역설적으로 독자의 감각을 극대화하고, 작품 속 감각의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작중 그의 스케치 수첩에는 공백으로 보이거나 자세히 보이지 않는 컷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책의 맨 뒤에 나온 등장 조류 리스트를 보면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숲에 머물렀는지, 얼마나 많은 공백의 순간을 견디며 여러 새를 관찰했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기록은 표면적으로는 사뭇 도감에 가까운 관찰의 형식을 띠지만, 실은 존재론적 질문에 다다른다. 맨 뒷면에 새 이름을 확인하기 전까지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는 단순히 이름이 호명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분류 체계로는 환원될 수 없는 우연성의 영역에서 숨 쉰다. 이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려는 충동에 저항하며, 알 수 없는 것을 그대로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거나, 수용자가 스스로 생각하는 기억과 지식의 영역으로 향하게 한다.
이러한 '사건 없는 서사'는 본질적으로 기다림과 그 자체의 수행성으로 연결된다. <버드와처>에서 탐조 행위는 일종의 기다림이자 수행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반드시 얻어내기 위한 초조한 대기가 아니라, 우연한 만남의 가능성 자체를 끌어안는 능동적인 시간이다. 이 작품은 이 기다림의 질감을 표현하는 데 탁월하다. 작가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거의 변화가 없는 숲의 풍경을 보여주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빛과 그림자를 묘사한다.
독자는 이 느린 페이지의 흐름 속에서 주인공의 기다림을 함께 체험하게 된다. 이는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의 속도에 모든 것이 맞춰진 동시대의 만화와 웹툰의 선형적인 시간성과 대비된다. 작가는 독자에게 빨리 감기를 허락하기보다, 작품이 가진 고유한 시간의 흐름에 같이 몸을 맡기기를 권한다. 이 느림의 수행이야말로 그의 작품이 가진 가장 급진적인 힘이다. 빠르게 회전하고 끝없이 생성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버드와처>는 이러한 현대의 소비문화 관성에 느리지만 정면으로 맞선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숲에서 보내는 시간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날지도 모른다. 새는 나타나지 않고, 날씨는 흐리고, 그저 바람 소리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영근은 이 시간을 결코 생략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간이야말로 작품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탐조의 본질은 새를 발견하는 순간이 아니라, 발견을 위해 기꺼이 바치는 모든 시간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탐조 행위 자체가 자연과 교류하는 시간의 퇴적으로 보이게 한다. <버드와처>는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음을, 기다림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경험이자 서사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버드와처>에서 그렇기에 중요히 다뤄야 할 것은 이를 다루는 관찰자의 태도다. 주인공은 새를 관찰하지만, 새와 인위적인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먹이를 주거나, 만지거나, 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본다. 이 거리 두기는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주인공이 행하는 탐조 행위의 윤리적 태도를 반영한다. 이는 일종 타자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타자를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환원하지 않으며, 그 자체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보장하는 태도에 가깝다.
현대 사회의 관찰은 종종 폭력적이다. 현대인은 자연을 경험하기 위해 침입하고, 기록하기 위해 훼손하며, 공유하기 위해 전시한다. 소셜 미디어 시대의 자연 사진은 종종 새를 스트레스 상황에 몰아넣는다. 더 좋은 사진을 위해 둥지에 접근하고, 플래시를 터뜨리며, 새의 영역을 침범한다. 반면 <버드와처>는 새와의 거리를 유지한다. 쌍안경은 이 거리를 물질적으로 구현하는 도구다. 그것은 새에게 다가가지 않으면서도 새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변영근의 <버드와처>가 담지한 미덕은 관찰과 반복하는 수행에 있다. 주인공은 자신이 보는 것이 새의 전부가 아니라, 새의 일부일 뿐임을 드러낸다. 그가 그린 그림은 새의 완벽한 재현이 아니라, 자신이 본 새의 단편적 기록이자 찰나의 순간이다. 주인공의 관찰의 불완전함은 역설적으로 탐조 행위 자체를 더욱 깊이 있는 고찰로 만든다. 이 과정은 철저하게 수행적이면서도 정량적 계측을 거부하는 아날로그에 가깝다.
아날로그와 물성 - 0과 1 사이 너머로
이와 같은 수행은 본질적으로 우연적이면서 정량적 환원을 거부한다. 디지털은 본질적으로 이산적인Discrete 성격을 갖는다. 모든 정보는 0과 1로 환원되고,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반면 아날로그는 연속적인 포착과 비가시적인 영역에 주로 천착한다. 변영근의 수채화는 바로 이 무한의 영역을 탐구한다.
종이 위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감이 만드는 형태는 예측 불가능하다. 종이의 흡수력, 물의 표면장력, 중력, 공기의 흐름 등 수많은 물리적 변수가 이미지에 개입한다. 이 복잡한 과정의 결과는 어떤 알고리즘으로도 완벽하게 시뮬레이션할 수 없는 물질적 질감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AI가 수채화 효과를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실제 수채화의 물리적 과정과 질감을 온전히 재현할 수는 없다.
디지털 이미지를 확대하면 픽셀이라는 최소 단위에 도달한다. 각 픽셀은 하나의 색값을 가지며, 그 이상의 정보는 없다. 하지만 수채화를 현미경으로 보면 그 안에는 무수히 다양한 우주가 펼쳐진다. 종이 사이로 스며든 안료, 물이 증발하며 남긴 흔적, 붓이 그은 미세한 획은 작품의 일부로 자리한다.
작가에게 수채화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도구를 넘어, 그의 미학 자체를 구현하는 기반이다. 디지털 드로잉이 픽셀이라는 균질하고 이산적인 단위로 이루어져 완벽한 통제와 무한한 수정과 재생산을 전제한다면, 수채화는 물과 종이, 안료라는 물질적인 상호작용에 기반하며, 그 자체의 통제 불가능성을 내포한다.
작가는 물의 양, 종이의 성질, 안료의 농도, 대기의 습도, 그리고 마르는 시간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물은 작가의 의도를 따르다가도 어느 순간 제멋대로 번져나가고, 색들은 서로 섞이며 예측하지 못한 채로 새로운 색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이 우연성을 억제하려 하기보다, 그것을 창작 과정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끌어안는다.
물의 번짐은 숲의 울창함을, 물이 마르며 남긴 얼룩은 나무껍질의 질감을, 여러 색이 겹치며 드러나는 투명한 층위는 시간의 축적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작업은 완벽한 계획에 따른 실행이 아니라, 물질과의 대화이자 협상에 가깝다. 디지털 이미지는 궁극적으로 결국 '픽셀'이 규합하는 밀도에서 질적 계량이 가능하지만, <버드와처>가 포착하는 수채화적 풍경은 종이 사이로 스며든 안료 입자들과 물이 증발하며 남긴 우연적인 흔적으로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수채화가 가진 매력이자 이 작품에서 이뤄지는 수행을 더욱 값지게 만든다.
수채화의 물질성은 한편으로 무한한 이미지 생성에 대한 저항으로 읽힌다. 디지털 매체에서 픽셀은 작가의 명령 또는 프롬프트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클릭 한 번으로 색이 바뀌고, 레이어가 추가되며, 우연적 실수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러나 수채화의 물과 안료는 작가에게 단순히 순종하지 않는다. 종이는 물을 흡수하는 속도가 제각각이고, 안료는 중력에 따라 흘러내리며, 물은 작가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번진다. 이 저항하는 물질과의 씨름이야말로 아날로그 창작의 본질이다. 작가는 물질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으며, 물질 또한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 그사이의 긴장과 타협 속에서 예술 작품이 탄생한다.
이러한 아날로그 작업의 또 다른 핵심은 '비가역성'이다. Ctrl+Z가 없는 세계에서 모든 붓질은 최종적이다. 한번 그어진 선은 되돌릴 수 없으며, 실수는 그대로 작품의 일부가 된다. 이 실수의 흔적이야말로 작품에 생명력과 진정성을 부여한다. 완벽하게 매끈한 디지털 이미지와 달리, 그의 그림에는 작가의 망설임과 숨결, 고뇌의 순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독자는 그의 작품을 볼 때 단순히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남긴 물성을 함께 느끼게 된다.
수채화는 또한 지속하는 시간을 품고 있다. 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시간, 한 층의 색이 완전히 굳은 뒤에 다음 층을 올리기까지의 물리적인 시간. 이 시간은 결코 단축될 수 없다. 작가가 아무리 조급해도, 물은 자신의 속도로 증발하고, 물감은 자신의 시간에 따라 종이에 정착한다. 변영근의 작품이 주는 특유의 고요함과 깊이는 바로 이 기다림의 시간이 이미지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 아닐까.
이 시간성은 단순히 물리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수채화를 생성되는 그 순간은 이 작품을 향유하는 이들이 공유할 수 있는 사유의 시간이기도 하다. 물이 마르는 동안 작가는 다음 붓질을 계획하거나 지금까지의 작업을 돌아보기도 하며 비가시적인 영역을 상상한다. 이는 디지털 작업의 즉물성과 근본적으로 다른 창작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급하게 서두를 수 없는 이 물리적 제약은 오히려 작가를 깊은 사유로 이끈다. 수채화를 그리는 시간은 단순히 이미지를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성찰하는 시간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의 아날로그적 실천은 생성형 AI가 창작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한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여 통계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이미지를 놀라운 속도로 생성한다. 텍스트 프롬프트 몇 줄만 입력하면 몇 초 만에 정교한 이미지가 생성되고, 심지어 자동 채색, 배경 생성, 심지어 캐릭터 디자인까지 AI를 활용한 효율성 증대가 현실화하고 있다.
그러나 AI가 해결하는 것은 효율의 문제일 뿐, 의미의 문제는 아니다. AI는 "새를 그려줘"라는 명령을 수행하지만, 왜 새를 그려야 하는지, 그 새가 작가에게 어떤 개인적 경험과 연결되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AI가 그리는 새가 모든 새의 교집합이자 통계적 일반성을 지닌 '이데아의 그림자'를 추구한다면, 변영근이 그리는 새는 특정 시공간에서 작가의 주관적 시선과 감정이 투영된 단 하나의 존재이다.
AI의 이미지가 맥락을 알 수 없는 결과물이라면, 이 작품의 그림은 기다림과 관찰이라는 구체적인 맥락과 시간을 품고 있다. AI가 기존 패턴의 재조합을 통해 예측할 수 있는 결과물을 내놓는다면, 변영근의 수채화는 물과 종이라는 물질의 예측 불가능성을 끌어안으며 세상에 없던 이미지를 탄생시킨다. AI의 작동 원리가 과거 데이터의 재귀적 참조와 조합이라면, 변영근의 작업은 지금 여기에서의 일회적 현상과의 우연적 조우다. 이 차이는 단순히 기술적 차이만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이에 가깝다.
여기서 우리는 AI 시대의 근본적인 역설과 마주한다.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전례 없는 생성의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창작 행위로부터 저항을 제거함으로써 의미 생성의 가능성을 축소했다. 변영근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역설의 반대편이다. 물질의 저항, 시간의 제약, 실수의 비가역성이야말로 창작에 의미를 부여하는 필수적 조건이라는 것을 말이다. AI가 무한한 이미지를 순식간에 생성할 수 있는 시대에, 작가는 하나의 이미지를 완성하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고, 물이 마르기를 견디며, 실수를 받아들인다. 이 비효율성이야말로 그의 작품이 가진 가장 급진적인 가치다.
더 나아가, AI 시대의 창작은 '선택의 역설'을 낳는다. 무한한 선택지가 주어질 때 우리는 오히려 선택할 수 없게 된다. AI가 생성한 수십 개의 이미지 중 어떤 것이 적절하고, 올바른 것인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 변영근의 작업은 이러한 선택의 피로와 무가치함으로부터 자유롭다. 그가 그린 새는 유일하다. 그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옵션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순간 그 장소에서 물질과 시간이 함께 만들어낸 우연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결과물이다. 역설적으로, 선택지가 제한되고 결과가 물질적으로 존재할 때 그 미덕은 더욱 빛난다.
AI와 변영근의 작업을 가르는 또 다른 결정적 차이는 '의외성의 존재 가능성'이다. AI는 프롬프트가 충분히 정교하다면, 항상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놓는다. 반면 변영근의 작업에는 항상 실패이자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이미지의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번질 수 있고, 색이 섞이며 탁해질 수 있으며, 새가 나타나지 않아 빈 페이지로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실패의 가능성이야말로 성취의 의미를 부여한다. 실패할 수 없는 것에는 진정한 성취도 없다.
가장 느린 미래로의 진격
여기서 우리는 역설과 마주한다. 변영근의 작업은 표면적으로 동시대를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시대에 아날로그를, 속도가 미덕인 시대에 느림을 효율이 중요한 시대에 비효율을 선택한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작업이야말로 가장 동시대적인 예술적 실천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것, 또는 잃어버리고 있는 것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버드와처>의 작업 방식은 아날로그의 반격이자 핸드메이드의 귀환처럼 보인다. 디지털 시대의 창작은 점점 더 인간과 분리된다. 마우스 클릭, 터치스크린, 텍스트 프롬프트 입력하는 창작 행위에서 사람의 역할은 최소화되고, 창작자는 단순한 입력 장치로 전락하기도 한다. 반면 수채화를 그리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노동집약적이다. 손목의 각도, 붓을 쥔 손가락의 압력, 팔의 움직임, 심지어 숨을 쉬는 것까지 모든 것이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AI 시대의 창작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기계의 일방적 관계다. 인간이 명령하고 기계가 실행한다. 거기에는 대화나 협상은 중요하지 않다. 반면 변영근의 수채화 작업은 인간과 물질의 쌍방향적 관계다. 물질은 화학과 물리 법칙에 따라 반응하고, 작가는 그 반응을 살피고 다음 행동을 조정한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아날로그적인 수행을 통해 시간의 재발견을 촉구한다. 우리는 실시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는 즉각적으로 전달되고, 소통은 지연 없이 이루어지며, 이미지는 순식간에 생성된다. 그러나 이 즉각성은 우리로부터 기다림이라는 인간적 경험을 빼앗아 간다. 변영근의 작업은 기다림을 복원한다. 물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새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풍경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이 기다림은 수동적 정체가 아니라, 능동적 수용이다. 기다림 속에서 작가는 세계와 더 깊이 연결되고, 자기 내면과 만나며, 창작의 의미를 숙고한다.
이 과정에서 <버드와처>는 아날로그 작업의 취약성을 받아들인다. 이에 실수는 때론 작품의 일부가 되고, 우연은 창작의 동력이 되며, 불완전함은 진정성의 표지가 된다. 이렇게 탄생한 이미지는 유일무이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디지털 복제 시대에 모든 이미지는 원본 없는 복사본이다. 첫 번째 파일과 백만 번째 파일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반면 변영근의 수채화는 복제할 수 없으면서도 그 자체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아무리 정교한 스캔이나 사진으로도 종이의 질감, 안료의 광택, 물이 남긴 미세한 흔적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다. 각각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포착이다. AI가 무한히 복제할 수 있는 이미지를 생성하는 시대에, 변영근은 복제 불가능한 유일성을 창조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변영근의 아날로그 실천은 단순한 향수나 복고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느린 진격이자 저항이다. 기술이 모든 것을 표준화하고, 자동화하고, 최적화하려는 흐름에 맞서, 그는 인간적인 것, 물질적인 것, 우연적인 것의 가치를 지킨다. 역설적으로, 가장 느리고 가장 비효율적인 그의 작업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예술적 실천이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주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침묵이 만드는 동시대적 산책
<버드와처>의 마지막으로 두드러진 특징은 극도로 절제된 텍스트다. 대화는 없고, 설명적 내레이션도 없다. 작품은 대부분 이미지와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 대로 수행이 가득 찬 침묵이다. 작가는 침묵을 통해 독자에게 능동적인 역할을 요청한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작품은 독자를 일방향적으로 만들지만, 침묵하는 것은 독자를 능동적 해석자로 만든다.
이와 같은 침묵은 독자에게 다른 만화적 경험을 요구한다. 텍스트 중심의 만화를 읽을 때 우리는 주로 언어적 사고를 사용한다. 그러나 <버드와처>를 읽을 때 우리는 시각적, 감각적, 직관적 사고를 동원해야 한다. 그림의 분위기, 색의 변화, 구도의 리듬을 통해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이는 더 느리고, 더 어렵지만, 더 풍부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또한 이는 현대 사회의 노이즈에 대한 대항으로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끊임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뉴스, 광고, 알림,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우리의 주의를 요구한다. 이 소음 속에서 침묵은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변영근은 자기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침묵의 공간을 선사한다. 이 침묵 속에서 독자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작품 속 세상의 미세한 소리에 귀 기울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버드와처>는 여러 계절의 변화를 세심하게 추적한다. 새가 머무는 숲도 계절의 질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순환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품의 핵심을 관통한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작품 내의 서사적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음을 독자에게 전달해서다.
계절의 순환은 또한 시간에 대한 다른 이해 방식을 제시한다. 현대적 시간 개념은 선형적이고 직선적이다. 이와 같은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일방향으로 흐른다. 그러나 작품 내의 자연의 시간은 순환적이다. 그렇기에 <버드와처>가 경험하는 시간은 이러한 순환적 시간이다. 그는 비슷한 장소를 반복해서 방문하며, 그 반복 속에서 미묘한 차이를 발견한다. 비슷 장소에서 반복된 탐조 행위는 이미지 내의 침묵의 빈틈을 독자가 같이 채우도록 한다.
작가는 시간의 다층적 구조를 시각화한다. <버드와처>의 한 장 안에는 여러 시간 층이 공존한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그의 수채화는 여러 층의 시간의 레이어를 겹쳐 올려 깊이를 만든다. 각각의 층은 다른 시간에 그려졌지만, 종국에는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는 여러 갈래의 시간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변영근의 <버드와처>는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19세기 산책자를 침묵과 함께 소환한다. 하지만, 이 산책자는 단순한 복고적 귀환이 아니라 창조적 재해석이자, 현대 사회의 관찰자이자 아날로그적인 자아로 다시 태어난다. 보들레르의 포착은 산업혁명 시대 파리의 관찰자였다면, 변영근의 <버드와처>는 도시의 군중 대신 숲의 새를, 아케이드 대신 나뭇가지를, 가스등 대신 햇빛을 관찰한다.
수채화의 유려함은 이러한 관찰의 본질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통제할 수 없는 물의 흐름, 예측할 수 없는 색의 번짐, 종이와 붓이 만드는 우연한 만남은 예측 불가능한 불확정적인 세계와 공명한다. 생성형 AI가 프롬프트에서 결과물로 직진한다면, 수채화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산책하면서 0,1 세계에 포섭되지 않은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렇기에 <버드와처>의 진정한 성취는 효율성과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비효율과 느림의 미학적 가치를 복원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대안의 제시이자 새로운 만화의 생존법이다. AI가 제공할 수 없는 것, 디지털이 담을 수 없는 것, 0과 1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의 소중함을 이 작품은 일깨운다.
물감이 종이에 스며들듯, <버드와처>는 우리의 마음에 천천히 스며든다. 그것은 즉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지속적인 여운이다. AI가 제공하는 즉각적인 만족과 달리, 이 작품은 기다림을 요구한다. 물이 마르기를, 색이 침전하기를, 의미가 드러나기를 말이다.
어쩌면 권태와 특별하지 않은 일상에서 우리는 새를 관찰하는 <버드와처>의 주인공처럼, AI가 쏟아내는 완벽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불완전하고 우연적인 인간적 표현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할지도 모른다. 보들레르의 산책자가 목적 없는 산책을 통해 근대성의 본질을 포착했듯, <버드와처>는 목적성 없는 관찰을 통해 동시대 삶의 본질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포착한다.
변영근의 <버드와처>는 새들 속으로 들어가 보편적인 고독을 발견한다. 그 고독은 우울하지만 아름답고, 느리지만 풍요롭다. 생성형 AI가 만들어내는 매끄러운 표면 아래, 수채화의 거친 질감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변영근의 수채화적 산책은 아마도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목적 없이 걷고, 우연히 발견하고, 불완전하게 그리는 것. 이것이 <버드와처>가 우리 시대에 보여주는 창작의 마지막 보루이자,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