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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족의 품으로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은 혈연이 아닌 신뢰·유대·책임의 실천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새로이 구성하며, 해체된 시대에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철학적 길을 제시한다.

2025-11-10 이성호

다시, 가족의 품으로

1. 가족의 위기

20257월 송도의 한 아파트에서 총성이 울렸다는 신고가 접수된다. 가족과의 불화로 사제 총기로 아버지가 아들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2011년에는 고교생이 학업을 이유로 자신을 폭행하고 가스라이팅하던 어머니를 죽였다. 이러한 존·비속 살인뿐만 아니라 가족 간 폭행이나 사기, 고소까지 늘어나는 시대에서 가족은 사회적인 의미를 잃고 있다. 과학적으로도 마찬가지다. 2025년 미국의 한 부부는 31년 전에 냉동된 배아로 시험관 임신에 성공했고, 2021년 중국에서는 유전자 편집 기술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아기를 만들어냈다. 현시대는, 과학적 의미로도 가족의 정의를 말하기 힘든 시대다.

가족은 현대 사회의 급변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다. 가족의 사전적 정의는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 친족 집단이지만 사람들이 이 정의에서 원하는 건 곧 가족이라는 구성단위의 안정감이다. 가족의 단위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농경 사회의 대가족에서 산업 사회의 핵가족으로 바뀌었고 더 나아가 현대의 1인 가구라는 독립된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가족의 크기와 별개로 가족이라는 안정감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본질적 특성으로 다뤄진다. 그러나 작금의 사회에서는 이 가족의 본질이 여전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의 가족은 서로를 위하지 않으면 곧 배신이며, 가족이라는 이름을 빌미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바라게 되었다. 자녀는 부모가 최신 핸드폰, 더 비싼 옷을 사주길 바라고 부모는 자녀에게 더 높은 대학, 더 좋은 부양을 바란다. 부모의 유산을 받기 위해 형제를 속이고, 가족의 명의로 대출을 빌린다. 가족의 정의는 현대 사회에서 분명할 정도로 변하고 있다.

이에 더해 동성애, 반려동물, 인공지능 등 새로운 가족 범위에 대한 등장으로 가족의 정의에는 위기가 찾아왔다. 가장 단순해야 할 가족 관계는 가장 복잡해졌다. 가족을 신뢰할 수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누구도 믿지 못한다. 사회 불신의 시작은 믿음의 붕괴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믿음은 정성이 아닌 정량으로 평가되며, 숫자만이 남은 세계는 서로를 비교하고 이기는 것만이 정답이 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필요하다.

어떤 철학적 근간이 없더라도 누구나 가족의 근간이 사랑이란 것을 안다. 새로운 가족에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랑이 등장해야 한다. 바디우(A. Badiou)에게 사랑은 영원이다. 더 나아가 영원을 상대방에게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 아닌 지속될 때 사랑이다. 사랑은 항상성이며 내가 나임을 포기하고 타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기존에 가족과의 사랑을 동일성으로 보는 입장과 사뭇 다르다. 사랑은 영원한 차이다. 영원한 차이는 서로에 대한 간섭과 방해라는 모험에 도전하는 것이다. 비록 추후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관성이 생기게 되지만, 그 이전까지의 삶을 바탕으로 타자를 존중하는 아이를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바디우는 사랑의 지점으로써 가족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고먕 작가의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이하 가는 길’)은 가족을 만드는 방향으로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찾으러 나간다. 작품 세계인 미래 시대에서 우주인들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소수 민족으로 취급받는다. 우주인은 유성 생식하지 않고 파이롭이라는 방식으로 자가 분열로 번식하기에 결혼과 출산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가족 개념이 희박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족 윤리는 이 세계에서 통하지 않는다. 가족이 없는 세계는 불신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가족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가족을 가져야 한다. 이 관계를 가르쳐주는 곳은 작품에 등장하는 보육원이다. 약자인 인간을 보호하는 보육원에는 아이들을 후원해 주는 후원자들이 존재한다. 이때 후원을 거부하는 로디나는 모리에게 가족의 가치를 알려주는 첫 번째 인물이다. 엄마와 잠시 떨어져 보육원에 온 로디나는 100일이 지나면 찾아온다는 엄마를 믿고 보육원에서 어떤 후원도 받지 않는다. 이 속에는 가족이 그 어떤 관계보다 끈끈하다는 우월성이 담겨 있다. 모리와 친해진 로디나는 모리가 후원받자, 처음에는 실망하지만, 엄마가 자신을 찾아온 뒤에는 모리가 후원자와 잘 지내길 바란다. 이 이유는 자신과 달리 모리가 가족이 없기 때문이다.

작품의 핵심은 이미 존재하는 가족과 잘 지내는 것이 아닌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있다. 가족은 일대일 관계인 부부로부터 시작한다. 부부가 아이를 낳고 이 아이가 독립하여 또 다른 사람을 만나 가족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계 형성의 과정이다. 이러한 정상 가족은 산업 사회 이후 성()의 통제를 기반으로 한 인구 조절이라는 목표 아래 혼인출산 양육의 형식으로 발생한다. 가족의 개념이 무의미한 상황에서 이러한 사회적, 과학적 제도들은 힘을 잃는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해체된다. 이때 새로운 가족에 대한 요구의 시작은 돌봄이다.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의존적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존재는 피투된 존재며, 버틀러가 신체는 신체 일부이자 바깥의 관계에서 경험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존재는 그 자체로 외부에 취약하고, 의존적이다. 우리 몸에 새겨진 타자성은 필연적이다. 이 필연적인 상황에서 새로운 아이들을 위한 도움 또한 필연적이다.

짐승들과 함께 자라다 구출되어 보육원에 도착한 아이는 동일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정글북의 주안공 모글리에서 이름을 따와 모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짐승과 자랐기 때문에 인간의 말을 모르는 네댓 살가량의 모리는 말 대신 몸짓이나 소리 지르는 것을 통해 남들과 의사소통한다. 보육원에서 남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것 같던 모리는 자신을 챙겨주는 로디나와 함께하며 가족의 첫 번째 조건을 배운다. 이 첫 번째 조건은 신뢰다.

자녀가 부모에게 거짓말을 해도 부모는 믿어주는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믿는 것이 가족의 첫 번째 조건이다. 로디나는 엄마가 보육원에 자신을 맡긴 뒤 꼭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기다리던 로디나에게 끝내 엄마가 찾아오면서 모리는 가족의 첫 번째 조건을 깨닫는다. 로디나는 비록 떠났고, 모리에게 진짜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의 믿음을 모리는 배웠다. 모리는 로디나를 통해서 가장 소중한 관계가 무엇인지 배웠고, 자신의 후원자가 자신의 가족, 엄마라고 믿었다.

그래서 모리는 가족을 만나러 간다.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 주인공 미라는 남동생 형철이 데리고 온 20살 연상의 애인, 그 애인의 전남편의 자식, 그 전남편의 자식이 데리고 온 남자 친구와도 가족이 되는, 혈연, 혼인, 입양 모두와 상관없는 사람들과 가족이 되는 어리둥절한 영화다. 그러나 그 어리둥절한 우연 속에 가족의 본질이 담겨 있다. 우리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것. 가족이라는 신뢰의 이름에서 타인보다 더 가깝게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족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닌 내가 가족으로서 그래야만 하는 윤리적 태도가 곧 나를 가족으로 만든다. 로디나에게 찾아온 것이 엄마였기에, 모리에게 가족이란 엄마밖에 없다. 모리는 그래서 엄마를 찾아 나선다. 아빠였다면 아빠였을 것이고, 삼촌이었으면 삼촌이었을 것이다. 로디나와 엄마의 모습을 본 순간 모리는 상상 속 엄마를 찾아 나선다. 비로소 가족의 탄생이었다.


2. 가족의 탄생

모리의 모험은 가족의 경계가 일반적인 혈연 가족에서 후원자라는 알지 못하는 관계로 확장되는 특별한 순간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필요한 일이다. 가족이 없는 외로운 상태에서 벗어나는 데 있어서 누군가가 손 내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족이 될 사람을 향해 먼저 손 내미는 것은 용기 이상의 믿음이 필요하다. 사실 쉬운 믿음만큼 위태로운 것은 없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믿는다. 믿음이 쉽다는 것은 믿어야 할 만큼 절박하거나, 혹은 믿어도 되는 환경이었거나 둘 중 하나의 상황이다. 믿어도 되는 환경에서의 신뢰는 절박함과 다르다. 경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어떤 절대적 믿음을 경험했다면, 적어도 경험주의적으로 믿음의 존재 사실이 되며, 그것은 본인의 방향성이 되기 충분하다.

그러므로 모리는 믿는다. 모리의 믿음은 로디나와 엄마의 관계에서부터 나온다. 누군가 먼저 믿어줌으로써 우리는 타인을 믿게 된다. 그 믿음의 시작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외부 환경이다. 우리가 믿음을 배신당하더라도 다시 믿을 힘을 주는 것은 믿었을 때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무조건적인 믿음을 주는 것은 바로 가족이어야 한다. 이 기초적인 관계에서 우리의 관계는 뻗어나갈 수 있다. 이 무조건적 믿음을 확인하여 모리는 가족이 되는 능력을 하나 깨우친다. 후원 물품에 담긴 애정을 모리는 느낀다. 글씨에 담긴 애정, 꽃향기에 담긴 마음에서 모리는 신뢰를 느낀다. 불확실한 신뢰지만 모리에게는 충분하다. 모리는 이제 가족을 향해 나아간다.

불특정 된 가족이라는 존재는 어색해 보인다. 그런데 불특정한 관계였던 라이더와 모리는 가족이 된다. 우연히 모리를 만난 라이더는 여러 번의 위기에서 모리를 구하며 자신과 모리 사이에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어떤 관계적 감정이 생긴 것을 알게 된다. 모리의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라이더는 모리와 수많은 경험을 함께한다. 폐허를 지나고, 박쥐 동굴을 넘어, 고래 요람으로 간다. 고래 요람을 지나며 모리의 눈 속에 비치는 고래는 관계를 통해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가족의 의미를 시각화한다. 라이더와 모리의 관계는 함께 남기는 흔적을 통해 가족으로 변한다.

모든 순간은 우연이다. 모리가 라이더를 만나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 또한 순전히 우연이다. 모리가 구출되어 안전한 샬롬의 보육원에 들어간 것과 거기서 로디나를 만나 가족에 대해 배운 것, 가족을 만나러 탈출할 때 우연히 샬롬이 분열에 들어가고 후원자가 준 망토로 인해 감시를 피해서 나갈 수 있던 것까지 모든 것이 우연이다. 가족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선택해서 부모를 만날 수 없고, 선택해서 자식을 만날 수 없다. 이 우연 속에서 우리의 선택이 남아있을 뿐이다. 여행에서 그린 모리의 그림은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가족들의 서사가 담긴 프레임이다. 거기에 라이더와 라이더가 만든 인공지능인 에이어도 함께 있는 것은 모리의 내면에 그들이 가족으로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한다. , 라이더가 모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모리가 라이더를 가족으로 선택한 것이다. 모리는 그래서 작품에서 우연 속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우연 속에서 선택한 존재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상에 던져진 존재, 피투彼投된 존재라고 말함과 동시에, 세상에 몸을 던져 기투企投할 때 그 불안 속에 몸을 맡길 때 더욱 자유롭다고 설명한다. 태어나자마자 짐승과 함께 산 모리는 피투로 태어난 것이지만, 이후에 가족을 만들어가는 삶은 곧 기투다. 가족의 개념이 불투명한 세계에서 어린아이가 가족을 만든다는 것은 위험천만할 수밖에 없지만 모리는 너무나 당당하게 엄마를 보러 간다. 선택에 대한 불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네댓 살이 가족의 의미를 알고 남에게 투영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 모리는 먼저 타인에게 신뢰로 기투할 줄 안다는 점에서 그 누구보다 가족을 만들 준비가 되어있는 어린애다. 우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모리가 배운 신뢰다. 우연 속 기투로 시작한 라이더와 모리의 관계는 시간을 공유하며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기쁨과 슬픔, 불안과 위기까지 함께 헤쳐나가며 둘의 유대감은 깊어지는데, 이것이 가족의 두 번째 조건이다. 유대감을 쌓는 경험을 함께할 것. 함께하는 동안 모리와 라이더는 서로에 대해 하나씩 알게 되는데, 서로를 향한 정보가 많아질수록 서로를 잘 이해하고 서로를 위해 행동한다. 모리는 짐승 무리에서 구출 당시 구출대의 모습으로 인해 집중조명에 트라우마가 생기는데, 라이더와 에이어는 이러한 사실들에서 모리를 배려하지만, 이러한 정보를 모르는 타인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족이 서로의 약한 부분을 보듬어 줄 수 있는 것은 함께 한 시간에서 온다.

가족 간에 필요한 감정인 유대감은 단지 믿음과 함께한 시간으로 생기지 않는다. 유대감은 서로의 경험이 넓어지는 과정에서 생긴다. 라이더는 미리아에게 큰 보상을 받음에도 모리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모리 곁을 떠나지 않는데, 이 유대감에서 생긴 것이 바로 책임감이다. 라이더에게는 모리를 떠날 기회가 생겼다. 돈을 챙겨서 이전과 같이 살면 그만이었지만 라이더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함께 했던 과거로 인해 라이더는 더 모리와 미래를 함께하고자 한다. 짧은 시간이어도 더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추억을 함께한다면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도 가족의 경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후 추억의 공유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라이더와 미리아는 서로를 부러워하는데, 어떠한 방식으로든 추억이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틀림없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매번 쉽진 않다. 라이더와 달리 미리아가 상상 속 엄마의 모습과 다르자 모리는 미리아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라이더는 예상에 없던 만남이었지만 엄마로 인식했던 미리아는 기대했던 만남이기 때문이다. 기대를 채우기 쉽진 않아서 미리아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친해지기 쉽지 않았지만, 이것 또한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해결될 문제다. 구출 당시의 집중조명에 대한 모리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미리아의 와 라이더, 에이어는 연극을 보여주는데, 이후 모리는 미리아를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 이처럼 가족의 약한 부분을 노출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약한 부분을 극복할 수 있게 함께 추억으로 덮어주는 것이 가족의 두 번째 조건이다.

미리아가 처음 모리를 본 것은 보육원에서의 모리가 담긴 샬람의 영상 편지를 통해서였다. 작은 동그라미 같은 아이는 누가 봐도 사랑스러웠고, 미리아는 모리를 후원하며 직접 망토를 만들고, 지구의 글자를 배워 편지를 보낸다. 키다리 아저씨 소설처럼 후원자와 피 후원자가 가족이 되는 것은 낯선 소재는 아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후원자와 피 후원자가 부부로 결혼하지만 가는 길에서 엄마와 아빠로 구성되는 것은 양육자인 미리아와 라이더에 가깝다. 그에 따라 미리아는 모리를 후원하면서 모리를 자신의 집단인 에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와 관련하여 모리를 데리고 온 라이더 또한 함께 패에 소속시키고자 한다.

패에 라이더와 모리가 함께 하며 새로운 가족이 탄생한다. 모리가 들어오면서 집안은 더 활발해진다. 어린아이답게 밀가루를 터뜨리고 사방에 낙서하고, 온몸에 먼지를 묻히고 다니는 모습과 뒤치다꺼리를 위해 씻기고 닦고, 가르치는 모습은 가족과 다르지 않다. 패의 일원들도 모리와 함께하며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을 쌓아간다. 모리가 배고프자마자 일원들이 순식간에 요리를 잔뜩 만들어 먹이는 모습은 오랜만에 간 할머니 댁에서 할머니가 손자에게 차려준 음식들과 진배없다. 배부르다고 해도 할머니의 눈에 우리가 말라 보이는 것처럼 아이가 배고프다면 반드시 배부르게 해주어야 한다.

패라는 집단은 가족이라기보단 가문에 가깝다. 패의 일원들은 미리아로부터 파생되어 미리아를 따르는 종사자들이다. ‘가는 길의 세계 자체가 유성 생식을 전제로 하지 않다 보니 작중 인물 대부분은 개별 생활을 하고, 단체 생활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한다. 패는 미리아로부터 나와 하나의 집단을 결성한 경우이다. 부모 자식 간의 개념이 아닌 분열을 하더라도 개인 간의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계약 관계가 기본이 된다.

존 로크는 사회가 개인과 정부 사이의 관계가 암묵적 계약에 의한 것이라는 사회계약론을 가족 관계에도 적용했다. 이 계약은 상대방이 암묵적 조건을 어기면 본인도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 이것이 법으로 정해지면 가정 폭력, 불륜 등의 중대한 사항이 생길 경우 결혼 관계는 파기되는 것과 같다. 이는 부부가 서로 혈연이 아니기에 부부 사이에서 이혼은 충분히 가능하나, 혈연일 경우 이러한 계약 관계를 파기하기 어렵다. 자식과 부모에서 자식은 독립할 힘이 없기에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후 관계를 끊는 것도 법적으로 어렵다.

이 부모 자식 간은 그래서 천륜이라고 부른다. 자식은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자식을 낳은 부모에게는 미래의 노동력 이외의 자식을 기를 의무를 부여해야 했고, 의무이기에, 어떨 때는 천륜, 어떨 때는 모성애나 부성애, 어떨 때는 법으로 정해두기까지 사회는 부모가 자식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내보내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이름들로 부모 자식을 묶을 수 없다. 청소년기에는 학원을 전전해 부모와 대화할 시간을 잃고, 성인이 되어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부양하길 바라는 마음을 가진 시대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선은 알 수 없게 되었고, ‘가는 길과 같이 가족끼리 서로 위하는 마음만 존재하는 것은 동화같이 보인다.

가족의 위기에 대해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유대감이 해결책이란 말은 아득해 보인다. 추상적인 말처럼 보이지만 헤겔을 빌린다면 이 유대감은 추상적이지 않다. 헤겔에게 사랑은 각자의 역할에 맞추어 공동체적 감정을 가지는 것이다. 나의 본질을 타인을 위한 마음으로 투영하는 것이다. 자신의 권리는 그다음이다. 비록 헤겔의 논리는 핵가족 구성을 근간으로 하여 가사 노동, 임금노동을 구분 지어 각자의 역할을 중시하긴 방향이긴 하지만, 핵심은 가족의 유대감이 사랑이라는 자발성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있다. 나머지 자녀의 자아실현과 같이 자유와 관련된 것은 더 큰 범위의 민주적 공동체에 달려있다. 이러한 복잡한 가족의 역할에 자격이 필요할지 묻는다면, 자격은 필요하다.


3. 가족의 자격

그것이 작품에서 나오는 가족의 마지막 조건이다.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해 책임지고 노력할 것. 가족이 되는 마지막 조건. 노력이 자격이라는 말은 이상하지만, 이 노력이라는 자격은 꼭 필요하다. 가족의 자격은 가족이 위기에 빠졌을 때 드러난다. 미리아가 모리와 라이더를 패에 넣기 위해 최상위 존재인 심판자에게 허락받으러 가면서 문제가 생긴다. 심판자에게 가는 도중 모리를 구출했던 샬람의 일원들에 의해 모리의 트라우마가 재발하고 만다. 트라우마로 인한 모리의 공격성으로 심판자는 그 불안정의 원인을 패로 판단하여 모리와 패를 격리한다. 심판자의 조건은 모리를 안정되고 적합하게 키울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양육자다. 모리를 패의 일원으로 들이는 것은 보류되었고 심판자 측은 모리를 심판자의 관리 아래 적합한 인간 부부에게 맡기고자 한다. 심판자의 구역에서 모리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 식사를 거부하고 영양 로프와 안정제로만 연명한다.

라이더를 포함한 패의 일원이 모두 모리와 종족이 다른 우주인이기에 가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패 일원의 능력이 너무 강력하여 모리가 쉽게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점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다. 이 부모의 자격을 찾기 위해서 미리아 일행은 인간의 정보를 알아내고자 한다.

양육자의 자격을 다루는 것은 복잡한 일이다. 법적으로 출산을 통한 양육자는 큰 제한이 없지만 입양을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경우 최소 1명이 만 25세 이상의 나이, 경제적 조건, 정신적 건강, 범죄 전과 등의 여러 조건을 본다. 또한 후견인이나 위탁가정 등의 지정도 법원이 판단한다. 부모가 심각한 학대를 저지를 경우 친권상실과 같이 부모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도 가능하다. 부모의 자격이라는 것이 이렇게 법으로 명확하게 정해지는 것은 아니겠으며, 일반인들을 모아 죄수와 교도관을 정하면 정말로 그런 관계가 된다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고려했을 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자격이 준비된 사람만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부모에게 자격이란 필요한지 물었을 때 분명 자격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물론 그 자격이 무엇인지 대답은 다 제각각이다. 경제적 능력부터 정신적 안정, 교육 수준까지 입양과 마찬가지로 부모가 갖추어야 할 수많은 자격이 언급될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를 키운다는 부모의 자격이 그만큼 중요한 문제다.

자격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레비나스(E. Levinas)는 가족을 법적·제도적 자격으로 구성되는 단위가 아니라, 타자를 향한 무조건적 책임의 윤리로 구성된 관계로 본다. 그에게 부모는 자격이 있어서 되는 존재가 아니라, 같은 가족의 고통에 응답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부모가 된다. 그는 이를 분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타자를 나의 소유로 삼거나 동일화하지 않기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오히려 더 윤리적으로 타자를 만나는 태도를 뜻한다. 모리를 납치한 우주인은 모리를 소유물로 생각했지만 정작 모리가 자기 몸에 오줌을 누자, 모리를 버린다. 그런 것을 우리가 부모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가족의 자격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온전히 인정하고 책임질 때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라이더가 지명수배를 각오하고 납치범에게서 모리를 구하고 시티에 도착하기까지 모리에게 자신이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보여 주면서도 자기 얼굴에 낙서하게 놔두고 모리가 하고 싶은 것을 온전히 놔두는 분리를 보여 준다. 이것은 분명히 가족의 자격이다. 또한 패의 인물들은 이미 자아실현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존재하기에 모리의 양육에 크게 봉사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누군가를 키우고 기른다는 양육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키운다는 것은 성장시키는 것이다. 이때 성장은 신체적 성장과 정신적 성장을 함께 의미한다. 어려운 점은 자녀의 성장에 있어서 어디까지 자유를 두고 어디까지 제한을 둬야 하는지 그 경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놔두다가 아이가 비윤리적인 길에 빠질 수도 있고, 혹은 너무 억압하여 위축되고 자존감이 낮아질 수도 있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리가 벽에 낙서하길 원하더라도, 혼내줄 존재는 필요하다. 혼나는 것이 모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가족은 가족이 원하지 않는 짓을 해야 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인지, 타인을 위한 일인지는 알 수 없다. 가족이더라도 타인의 마음을 아는 것엔 한계가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본인의 마음뿐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타인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타인이 우리의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우리가 타인에게 무언가 되어줄 수는 있다. 자식이 올바르게 크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혹은 자식이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바란다면 그것 또한 부모의 마음이다. 중요한 것은 부모로서의 각오다. 이 각오와 헷갈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곧 가족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자녀를 의대에 보내고 싶은 것은 태도가 아니라 욕망이다. 태도는 내가 자녀가 더 바람직한 교육을 통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내 실천의 과정이다. 그 노력의 책임은 자녀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루소(J.-J. Rousseau)가 말한 것처럼 양육이란 아이의 본성을 억압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이 스스로 자라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좋은 양육자는 자신의 욕망을 아이에게 투사하지 않고, 아이의 리듬과 욕망을 존중하며 기다릴 줄 아는 조력자다. 미리아와 라이더는 모리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기보다, 모리가 스스로 가족을 선택하고 사랑을 배워가도록 곁에서 함께한다. 그들은 모리를 완성된 인격체로 만들려 하지 않고, 모리의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존중하며 지켜본다.

샬람이 인간을 보호하는 이유가 성체가 만드는 모든 일들을 유체가 고스란히 이어받아야 하는 운명에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도 샬람은 누군가의 가족이 되기 충분한 책임을 진 인물이다. 그러므로 보육원이라는 가족이 형성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그것은 소임이다. 소임은 책임질 수 있는 자에게 부여된다. 책임은 지는것이다. 자기 몸 위에 올라가 무게를 느끼는 것이 책임이다. 생명을 육아할 책임을 떠맡았다면, 그것은 그 생명만큼 무거운 일이다. 라이더와 미리아는 그 책임의 무게만큼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의 정보를 얻기 위해 샬람의 놀이터로 떠난다.

정신을 잃을 수도 있는 샬람의 놀이터에서 활약한 것은 라이더가 만든 인공지능인 에이어다. 에이어는 샬람에 놀이터에 있는 수많은 정보 중 인간의 정보만을 흡수하여 미리아 일행에게 전달하고 전원이 꺼지고 만다. 에이어는 라이더와 모리가 처음 만날 때부터 모리의 보육자로서 가장 큰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글씨를 알려 주는 것부터 패에서 지낼 때까지 모든 교육을 책임진 에이어는 어떻게 보면 가장 부모에 적합한 인물이다. 생물이 아닌 피조물인 인공지능이 가족이 된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보이는 것처럼 앞선 생각만은 아니다. 이미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와의 대화를 통해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에이어는 상대에 대한 위로를 넘어서서 상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실천함으로써 인공지능을 넘어선 인격체로서 가족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책임은 부모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녀 또한 책임을 질 수 있다. 모리는 패에 돌아가기 위해 모리가 자신의 얼굴을 때려가며 엄마라는 글자를 쓰는 장면은, 글자가 완성되는 순간 손의 떨림과 종이 위 눌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의지의 물질화로 남는다. 이는 추상적 감정이 구체적 형태로 전환되는 상징적 순간이다. 심판자가 이 그림을 보고 결정을 번복하는 것은, 제도적 권위가 개인의 실천적 증거 앞에서 무너지는 역전의 장면이기도 하다.

가족의 사랑은 강제가 아닌 자발성에서 완성된다. 누군가 지워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짐을 듦으로써 사랑은 완성된다. 서로를 위해 서로가 서로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주는 것. 모리가 낙서하다 혼나고 삐질 수는 있어도 떼를 쓰지는 않고, 자기 가족을 그려 보여 주는 시간, 일어나자마자 라이더의 품에 가서 안기는 시간, 번개가 무서우면 미리아의 품에서 잠드는 그 시간은 물리적 울타리이자 감정의 온실로써 가족의 역할을 압축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사랑이다.

 

4. 가족이 되는 길

가족의 핵심은 상대가 나의 어떤 존재인지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에게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지 매일의 실천으로 증명하는 데 있다. 믿어주는 일, 시간을 함께하는 일, 타인을 위해 기꺼이 힘을 쓰는 일이 세 가지는 어떤 대가도 전제하지 않는 헌신이다. 가족은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형성되는 결단이며, 그 결단이 반복될 때 비로소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생긴다. 이는 역할 분담을 넘어선 책임의 공유이자, 상대가 누구인가 보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선택되는가에 관한 문제다. 결국 가족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변형되는 행위의 연속이다.

샬람의 놀이터에서 인간의 정보를 얻은 미리아 일행은 부모가 수행해야 할 수많은 역할을 알게 되었지만, 스스로는 그 역할을 온전히 재현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마라는 존재는 단순한 명칭을 넘어 상징이자 비유이며, 때로는 애칭이 될 수 있다. 아빠·삼촌·이모·형제·자매 등 모든 가족 구성원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은 종족의 경계를 넘어 확장될 수 있고, 우주인·인공지능·반려동물도 가족이 될 수 있다. 패의 구성원들이 모리를 위해 각자의 역할을 적어 심판자에게 제출하는 장면에서, 종이에 적힌 글자들은 계약 문서이자 연대 서약이 된다. 글자는 역할을 규정함과 동시에 그 역할을 실천할 의지를 활자화된 약속으로 고정한다. 특히 대부분이 첫 칸에 엄마를 쓴 것은, 그 상징적 무게와 책임을 함께 짊어지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부모의 자격은 정해진 규격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에 가깝다. 교육, 생계, 가사, 돌봄 등 모든 역할을 한두 명이 완벽히 수행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더 많은 함께하는 가족이 필요하다. 미리아가 모리를 혼자 키우지 않고 패와 함께 양육하겠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역할 놀이가 아니라, 제도적 정의를 넘어선 상호 의존과 인정의 관계를 드러낸다. 서로가 가족으로서 의지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실질적 가족이다.

혈연이 없다는 이유로 가짜라 불릴지라도, 미리아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헌신은 이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녀는 모리뿐 아니라 가족으로 인정한 라이더까지 지키기 위해 심판자 앞에서 거짓을 감수한다. 이는 가족이 되기 위한 단순한 명칭 이상의 헌신이며, 소방관이 화재를 진압하지 않으면 소방관이라 할 수 없듯, 의사가 생명을 구하지 않으면 의사라 부를 수 없듯, 가족도 삶 속에서 서로를 가족처럼 대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가족은 이렇게 반복되는 헌신을 통해 관계의 윤리를 내면화한다. 타인을 책임지고, 시간을 함께 나누며, 불편을 감수하는 일들이 쌓이면 가족이라는 언어는 선언이 아니라 실존이 된다. 결국 가족이란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로 남기를 선택하는가의 실천적 증거다.

가족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얼굴에 밀가루를 묻힌 모리를 씻겨주고, 배고프면 모두가 나서서 음식을 만들고, 어질러진 방을 웃음과 함께 치우는 일이러한 일상의 연속이야말로 가족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감각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의 사랑이다.

현실에서 가족이 되는 길은 작품 속보다 훨씬 험난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울타리는 해체되고, 법과 제도의 틀은 느슨해졌다. 해외에서는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간통죄가 폐지되었다. 심지어 혈연마저 단절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런 변화 속에서 가족의 연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그 어떤 관계보다 굳은 의지와 선택을 요구한다. 이미 맺어진 관계도 새롭게 갱신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받을 권리보다 줄 의무를 선택하는 태도이며, 그 선택을 통해 우리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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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만화평론가/고등학교 교사
2020 제24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웹툰 평론 공모전 성인 부문 최우수상
2021 제2회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영화평론 공모전 대학원부 장려상
2022 제9회 21세기인문가치포럼 논문공모전 대학원부 장려상
2022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대상
2025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