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이 책은 단지 그뿐이란 말인가? 주변의 실제 사람들보다 더 많이 신경 쓰고 정을 주었던 등장인물들, 우리가 그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차마 고백하지 못한 채, (...) 우리가 열망하고 울음을 터뜨린 그 인물을 우리는 다시는 보지 못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 우리는 제발 책이 계속되기를 원하고,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모든 인물에 관한 또 다른 사실이나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자 하며, 갑자기 사라져버린 그들이 우리에게 불어넣은 이 애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들에 우리의 삶을 활용하고, 헛되이 사랑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자 한다.”
프루스트는 <독서에 관하여>에서 절절하고도 애틋하게 독서의 경험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책을 읽는 한 우리는 책과 어떤 관계 속에 있게 된다. 아마도 그 관계의 이름은 우정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차마 고백조차 못한 채’ 작가의 잔인한 맺음말과 함께 그 관계를 끝낼 것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책을 펼치는 한 그들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가 그렇게 ‘오해’한다. 그들과 우정을 나누고 있다고. 또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그렇다고 해서 이 우정이 헛되고 망상된 거짓에 불과한 것일까? 여태까지 이해한다고 믿었던 우리의 대화는 차갑고 무딘 혼잣말일 뿐이었을까?
‘O friend, there is no friend(친구여, 친구가 없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는 이 경구는 니체와 데리다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우정의 윤리와 정치학을 사유하기 위한 의도로 전유되지만, 아감벤에 따르면(문헌학을 전공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그들은 고의적으로 / 전략적으로 그리스어 원전을 오독했다. 원전의 의미는 “친구가 많은 자는 친구가 없다"는 뜻이다.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고의적으로 오독한 이유는 우정을 긍정하는 동시에 문제시 삼기 위해서다. 친구를 불러 세우며 부정하는 발화 속에서만 우정의 모호한 윤곽이 드러날 수 있다. 결국 잘못 인용된 문장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우정, 대화의 본질이 오해 속에서만 포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유대감을 느끼고 행간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유일한 우정이 아니라면 무엇을 우정으로 부를 수 있을까. 아마도 명백히 오독으로만 가능할 우정들은 무형적이고, 드러날 수 없고, 부인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정은 그런 형태로만 존재해야 할지 모른다. 오로지 ‘그럴 수 있었던‘ 가능성 사이에서 존재하는 이 공동체는, 우리에게 있어 영원한 향수와 애도의 대상으로 향유된다.
내게 있어 모든 작가들은 우정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그럴 수 있었던‘ 공동체를 엮어보는 자들이다. 나는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적인 공동체와 우정의 연대가 얼마나 자기배려 없이 불가능한 일인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파괴와 관계를 망가뜨리는 일을 지양하고) 여전히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은, 그들 없이 내가 살 수 없고 심지어는 드러날 수조차 없다는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구들 속에서 나를 드러내고자 하고, 친구들의 취향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고, 그들을 부정하는 몸짓 속에서 그들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역설을 인정 해야만 한다. 그런 우정만이 우리를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앞으로 다룰 두 편의 만화는 모두 책과의 우정에 대해 진지하고도 비판적이며 동시에 따듯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첫 번째 책은 타카노 후미코의 <노란 책>이다.
노란 책 · 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 (타카노 후미코 작)
“사촌동생이 울어서 혁명을 할 수 없어요”
타카노 후미코는 1957년에 니가타에서 태어났다. 1979년에 단편 <절대안전 면도칼>을 발표하며 데뷔한 타카노 후미코는, 오토모 카츠히로, 사베아 노마와 함께 일본 만화계 뉴웨이브의 기수로 주목받았다. 또한 37년 동안 단 7편의 작품집만을 발표한 특이한 성향의 만화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에게 ‘테즈카 오사무 문화상’ 대상을 안긴 <노란 책-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는, 예리한 감수성을 가진 타이 미치코라는 소녀의 독서 경험에 대해 다룬 단편 <노란 책-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외에도 총 3편의 다른 단편들을 담고 있다.
이 단편의 내용은 단순하다. 여고생 타이 미치코는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소설 <티보 가의 사람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그러는 동안 미치코는 <티보 가의 사람들>의 주인공인 ‘자크’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그를 기다리기도 하고, 그와 함께 ‘혁명’에 가담하기도 한다.
할머니에게 버스 자리를 양보한 어느날 밤, 미치코의 망상 혹은 현실 속에서 그녀는 자크의 동료가 되어 힘껏 자기 목소리를 낸다. “난 오늘 버스에서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어요.” 미치코가 발언을 시작하자 보이지 않는 군중이 미치코를 연호하며 응원한다. “행복이란...무엇일까요? (...) 우리는 저항해야합니다! 저항을 하는 데 단결하는 것입니다! 거부하는 데 단결하는 것입니다!” 함성이 점점 뜨거워지고 미치코는 흥분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녀를 가로막는 것은 다름 아닌 생활 그 자체다. 엄마의 등장과 함께 미치코는 ‘책을 덮어야만’ 한다. 혁명은 끝났다. “자크, 들리나요? 사촌동생이 울어서 혁명을 할 수 없어요.”, “엄마가 자꾸 깨서 혁명을 할 수가 없어요.”, ‘자크’와 미치코의 소란스러운 밤은 계속된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미치코가 <티보가의 사람들>을 찾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졸업을 하게 되는 날, 미치코는 <티보가의 사람들>을 도서관에 반납한다. ‘자크’는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자크’가 보고 싶어지면 그 곳에 찾아가면 된다. “언제라도 들러줘, 메종 라피트에.”
‘자크’는 미치코에게 어떤 존재일까? 바꿔 말해, 미치코는 ‘자크’에게 어떤 존재일까? 책을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책 속의 인물에게 더할 수 없는 친밀감을 느꼈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그들은 내가 존재하는지,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때로 책을 미워하기도 하고, 그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먼저 떠나는 쪽은 우리가 아닐까? 펼치기만 하면 그들은 제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과거이자 미래는 항상 책 속에 보존되어 있다.
“있다마다요!”
작가 요시타케 신스케는 1973년 가나가와 현에서 태어나 쓰쿠바대학 대학원 예술연구과 종합조형코스를 졸업했다. 첫 그림책 <이게 정말 사과일까>로 ‘MOE그림책방’ 대상과 ‘산케이아동출판문화상’ 미술상을 받았다. 또한 2017년에는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번에 출간된 그림 에세이 <있으려나 서점>은 작가의 책에 관한 모든 상상이 담긴 그야말로 ‘책’에 관한 ‘책’이다.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책들은 아쉽게도 실존하지 않는다. 이 책을 ‘책에 대한 안내서’라고 상상하고 집어든다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다만 당신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책과 관련된 모든 책을 파는 서점인 ‘있으려나 서점’에 등장하는 여러 진귀하고 독특한, 사랑스러운 책들을 상상하면서 웃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주인아저씨에게 “혹시, ○○에 대한 책, 있나요?”하고 물으면 대개는 “있다마다요!”라고 대답하고 찾아서 꺼내다 줍니다. 오늘도 ‘있으려나 서점’에는 손님들이 다양한 책을 찾으러 옵니다.
이 책은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나름대로 총 일곱 장으로 분류되어 있다. ‘있으려나 서점’이 총 일곱 개의 책장을 가지고 있는 탓이다. ‘조금 희귀한 책’에 분류된 책으로는 책을 읽어주면 자라는 ‘작가의 나무 키우는 법’과, 책이 가로로 잘라져 있어 혼자서는 결코 읽을 수 없는 ‘둘이서 읽는 책’과 같은 책들이 보관되어 있다. ‘책과 관련된 도구’도 흥미로운 한 장을 차지한다. ‘독서보조로봇’은 책을 읽어줄 뿐만 아니라 독서를 ‘격려’해주기도 하며, 책을 읽고 난 뒤 감상까지 나눌 수 있는 아주 편리하고 사랑스러운 기능을 지녔다.
또한 ‘책과 관련된 일’에 대한 책으로는 ‘책 이별 플래너’, ‘책 제목과 적절한 진열법’, ‘독서이력 수사관’ 등 제목만 들어도 흥미진진한 책들이 즐비하게 꽂혀있다. 마지막으로 ‘책 그 자체에 대해’라는 이름의 장에서는 ‘책이 네모난 이유’, ‘책 만드는 법’등이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기발한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책을 만드는 법은 이런 식이다.
“종이, 글자, 사진, 그림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책의 기본이 되는 ’책기둥‘을 만듭니다. 책기둥을 돌려가며 얇게 깎아, 접습니다(여기가 가장 어려운 공정입니다.) 한쪽에 풀칠을 하고, 반대쪽을 가지런히 맞춰 자르고, 표지를 붙이면 완성입니다.”
책이 이렇게 만들어질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있으려나 서점’에서는 현실에서 가능한 문제를 취급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책과 관련된 이벤트’, ‘책과 관련된 명소’, ‘도서관, 서점에 대해’ 등 여러 흥미로운 항목들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존 버거가 영화를 일컬어 ‘꿈공장’이라고 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작가 요시타케 신스케는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마치 꿈처럼 사유하게 만든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책에 대한 끝없는 상상력 속에서 우리는 차라리 길을 잃기를 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