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나가이 고(永井豪) 선생 데뷔 50주년과 마징가 Z 탄생 45주년을 기념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단순히 원작 만화와 과거 TV 시리즈의 내용을 리메이크하는 이벤트로만 생각했다. 필자가 기대한 건 과거 만화책과 TV판과 극장판 시리즈를 통해 이미 익숙한 마징가의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너무 잘 아는 이야기를 ‘어떻게’ 또 변주(變奏, arrange)할까? 어차피 무적의 슈퍼로봇이 일당백으로 악당 기계수를 때려잡는 이야기에 덧붙일 새로울 전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나의 최대 관심은 마징가 Z 리부트의 마지막에 그레이트 마징가가 등장할 것인지 여부에만 쏠렸다. 70년대 TV판 마지막 회에서 무적이던 마징가 Z가 새로운 적을 만나 처참하게 파괴되는 순간, 그레이트 마징가를 등장시켜 새 시리즈의 주역으로 교체해버린 건 전설로 일컬어지는 굉장한 기획이다. 같은 내용의 극장판 <마징가 Z 대 암흑대장군>(1974)에서 그레이트가 나타나는 장면은 지금도 탄성을 내지르게 만드는 명 연출. 필자가 개인적으로 마징가보다 그레이트를 더 좋아하게 된 것도 이 기획과 연출에 완전히 넘어갔기 때문이다.
△ 필자는 제멋대로 <마징가 Z VS 암흑대장군>의 현대적 리메이크를 볼 수 있길 기대했다.
1974년 여름방학 특선 토에이 만화축제를 보러온 극장에서 일본 어린이들이 겪은 영화적 체험은 엄청났을 것.
그러나 지난 5월 국내 개봉 전부터 포스터에 떡하니 같이 나오면서 그레이트의 참전은 일찌감치 확정되었고, 이야기의 시점은 마징가와 미케네 제국의 싸움이 끝난 10년 후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리부트가 아니라 후일담에 가까운 내용임을 알게 되었다. 개봉에 맞춰 찰나의 평화라는 의미로 본편 이전의 시간을 다룬 단행본 <마징가 Z 인터벌 피스>(2017)도 나왔다. 기계수와 맞서 싸웠던 소년소녀들은 이제 적이 사라진 시대에서 각자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두 마징가는 과거의 유물로서 박물관에 전시된다. 이런 배경에서 ‘인피니티’라는 마징가를 닮은(마징카이저를 더 닮은) 의문의 유적과 정체 모를 소녀가 발견 되고, 죽은 줄 알았던 헬박사와 기계수 군단이 다시 쳐들어오는 것이 <마징가 Z 인피니티>(2018)의 줄거리다.
처자식이 있는 아재들인 필자의 친구들은 인피니티를 보고 마징가에 에반게리온이 묻은 것 같다는 소감을 전했지만, 결론적으론 여전히 슈퍼로봇물의 그리운 유치찬란함과 전형적인 소년 취향이 남아있는 작품이었다. 제작진이 본격 리메이크나 리부트가 아닌 마징가 시대의 후일담을 택한 건 이 시리즈의 역사를 기념하고 그 유산을 되돌아보는 뜻에서 더 합당한 선택으로 보인다. 특히 결말에 그 정체가 밝혀지는 소녀 ‘리사’ 캐릭터는 이제 중년의 나이로 부모가 되어있을 과거 팬들을 향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애니메이션에서 로봇을 타고 지구를 지키는 만년 10대 주인공과 어린 시절을 지나 사회인으로 성장한 현실의 어른 팬들 사이 간극을 양쪽 모두의 ‘성장’으로 승화한 것. 이렇게 해석하면 거창하지만 실제 작품에선 다소 뜬금없고 “내 아이를 낳아줘!”를 외치는 수준이나, 그것도 나가이 고 원작스러워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 필자가 지난 에반게리온 칼럼에서 인피니티에 그레이트 나오겠냐고 했더니, 레이가 나왔다...
사실 마징가 Z의 리메이크는 이전부터 계속 반복되어 왔다. 나가이 고는 자신의 다른 작품들과 마징가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이어줄 목적으로 <마징사가>(1990)와 (1998)로 스스로 작가주의적인 리메이크를 한 바 있고, 이러한 시도는 애니메이션 <진 마징가 충격! Z편>(2009)과 (<코믹 마스터 J>와 <가면전사 아쿠메츠>의 콤비) 타바타 요시아키(田畑由秋)와 요고 유키(余湖裕輝)의 만화 <진 마징가 ZERO> 시리즈로 이어졌다. 리메이크의 개념을 더 넓게 본다면, <그레이트 마징가> 자체가 마징가 Z의 또 다른 변주였고, 역시 마찬가지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나가이 고 원작의 재구성이고, 오다 코사쿠(桜多吾作)의 만화 또한 마징가의 또 다른 재해석이다. 마징가는 리부트가 필요한 철지난 IP가 아니라 <마징카이저> 등을 통해 끊임없이 확장 중인 세계관이다. (만약 다이나믹 프로의 슈퍼로봇 세계관 전체가 통합되기라도 한다면?) 잘 만든 IP의 세계관은 자가 증식하기 마련이다.
인피니티는 마징가 시리즈의 리부트 대신 후일담을 택하면서도 이야기 내부적으로 세계관을 더 확장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놓았다. 흔히 우리가 패러렐 월드(Parallel World)나 평행우주라고 말하는 ‘다중우주(Multiverse)’ 설정을 핵심 플롯으로 쓴 것이다. 시리즈물의 세계에서 평행우주란 속편과 리메이크와 리부트까지 모두 써먹은 프랜차이즈 최후의 종착역이자 스토리텔링에 있어 궁극의 반칙이다. 잘 만든 IP가 다중우주론과 결합하면, 자가 증식의 한계마저 풀린다. ‘무한(Infinity)’이라는 부제처럼 앞으로 못할 이야기가 없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우주를 열어버린 것. 다른 차원,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넘나들 수 있게 된 설정은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는’ 로봇을 넘어 절대적, 우주적 존재로 향하는 마징가의 존재감과도 잘 어울린다.
△ 인피니티의 다중우주는 마징가 시리즈를 집대성한 걸작으로 평가되는 <진 마징가 ZERO>의 영향이 크다. 정발이 시급하다.
게다가 인피니티는 메카닉 디자인의 일신으로 마징가 자체에 새로운 상품성을 부여했다. 코토부키야 프라모델 시리즈 <프레임 암즈>의 야나세 타카유키(柳瀬敬之)가 리파인한 마징가 디자인은 트랜스포머나 깨진 조각 같다는 평도 일부 있었지만, 반다이 프라모델과 메탈빌드 상품이 출시되자 역동적인 프로모션과 조형으로 원작의 2D 디자인적 한계를 이번에 확실히 3D로 넘어선 느낌이다. 건담의 틈바구니 속, 아저씨들만 사가던 초합금에서 프라모델 신제품이 되었다는 건 로봇 애니메이션 상품으로 생명을 연장한다는 증명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반다이가 인피니티의 양산형 마징가도 상품화해서 건담의 짐(GM)마냥 굴릴 수 있게 해줬으면 한다.
2018년에는 마징가만큼이나 익숙한 우리의 이웃이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와 즐거움을 주었다. 바로 스파이더맨이다. 세 명의 스파이더맨이 각자의 우주에서 팬들을 만났다. 우선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이 문자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어디서든 고통 받는 피터 파커지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새로운 피터 파커는 아이언맨 토니와 관객에게 충격과 슬픔을 안기기에 충분한 캐릭터성을 입증했다. 또 한 명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4 게임 <마블 스파이더맨>(2018)의 피터 파커다. 인섬니악 게임즈의 스파이더맨은 최고의 슈퍼히어로 게임 시리즈로 평가받는 락스테디 스튜디오의 배트맨 아캄 시리즈에 견줄만한 퀄리티로 완성되었다. 거미줄을 쏘며 빌딩숲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상쾌함을 완벽하게 구현한 게임성은 플레이어에게 정말 자신이 스파이더맨이 된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아캄버스(Arkhamverse)’라 불릴 정도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DC 배트맨 게임에 뒤지지 않을 마블 히어로 게임이 생겼다. 필자는 게임을 하면서 계속 혼자 떠드는 피터 파커의 너드(Nerd)함을 새삼 느꼈다.
스파이더맨의 캐릭터 권리를 가진 소니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3부작 이후로 그동안 판권을 제대로 못 써먹는다는 비판을 받았었다. 앤드류 가필드가 나오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실망스러웠고 2편에서 막을 내렸다. 마블에게 스파이더맨 권리를 다시 대여해주면서 소니는 나름대로 배운 게 많았던 모양이다. 2018년은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에 있어 중요한 한 해였다. 소니는 스파이더맨 관련 판권작을 영화와 게임으로 열심히 만들어냈다. <베놈>(2018)의 흥행은 대성공했고, PS4 게임 <마블 스파이더맨>은 올해의 게임 후보에도 오르며 선전했다. 2018년 끝자락, 소니는 애니메이션으로 끝내 작품성까지 성취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는 <스파이더맨2>(2004) 이후에 나온 최고의 작품이다.
△ 2018년은 스파이디의 해였다.
마블의 만화는 슈퍼히어로 세계관 자체가 다중우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퍼히어로물의 본질은 캐릭터로 돈을 버는 상품이다. 캐릭터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과 인기가 시들지 않도록 매번 새로운 캐릭터와 강렬한 스토리 국면을 보여주어야 한다. 다양한 영웅과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갱신하기 위해 서로 다른 영웅을 만나 같이 싸우거나 반목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 시대가 다른 캐릭터들이 만나고 여러 번 죽고 또 되살리는 근거를 궁리하다보니 다중우주가 세계관 전체로 들어왔다. 캐릭터의 생사를 뒤집는 것은 물론, 이 세계의 영웅이 가지 못한 다양한 가능성을 저 세계에서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피티니 워에서 영웅들 절반이 소멸되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이미 세계관에 실현된 양자역학이 존재한다.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말 자체가 마블이 가진 다양한 우주 중에 하나라는 뜻이다.
스파이더맨도 이미 원작 만화에서 다양한 우주를 가지고 있다. 그 우주를 일컬어 ‘스파이더버스(Spider-verse)’라고 부른다. 뉴 유니버스는 스파이더맨 만화의 다중 세계관을 끌어오면서 피터 파커 한 명에게만 집중하던 영화 시리즈의 한계를 허물어버렸다. 백인 청년 피터 파커의 뒤를 이어 흑인 소년 마일즈 모랄레스가 활약하고, 다른 세계의 소녀 스파이더 그웬과 온갖 다중우주의 스파이더들이 한 자리에서 만난다. 정치적 공정성이 백인 남자 영웅을 몰아낸다고? 그건 마블 본연의 가치인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소리다. 뉴 유니버스는 누구보다 피터 파커에 대한 우리 모두의 사랑과 존경이 가득 담긴 작품이다. 필자는 뉴 유니버스에서 피터 파커의 목소리가 토비 맥과이어였다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친절한 이웃 피터 파커를 진심으로 사랑해온 팬들에게 뉴 유니버스는 오랜 사랑의 증명이다.
△ <마블 나우!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4부작 : 파커의 운수, 스파이더버스 전주곡, 스파이더버스, 밤손님
작품의 개연성이나 진정성을 자칫 해칠 수 있어 금기로 인식되곤 했던 ‘제4의 벽’을 아무렇지 않게 넘으면서도 오히려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했던 <레고 무비>(2014)의 콤비 필 로드와 크리스토퍼 밀러가 각본과 제작에 참여한 뉴 유니버스는 다중우주 설정을 갈 때까지 간 프랜차이즈의 반칙 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쾌감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무엇이든 가능한 세계관이지만 결국 주인공은 스스로의 각성을 통해 영웅이 된다. 영웅이 되는 방법은 우연히 얻은 힘의 남용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자신의 뜻으로 정하는 일이다. 피터 파커가 평범한 소년에서 스파이더맨이 되는 과정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비슷한 과정이 마일즈 모랄레스의 경우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보는 일은 흥미롭고 또한 감동적이다. 뉴 유니버스는 평행우주 설정에 먹히지 않고 잘 만든 히어로물 제1편으로서의 미덕이 충분히 담긴 작품이다.
독자와 관객은 언제나 자신을 짓누르는 현실의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우리가 만화와 영화를 찾는 이유는 현실과 다른 선택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다양한 가능성이 동시 진행되는 다중우주는 앞으로도 더 각광받는 소재가 되지 않을까? 마징가와 스파이더맨의 새로운 영상작품이 이러한 설정을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활용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미 이전에 같은 캐릭터들로 평행우주를 선보인 <진 마징가 ZERO>나 <스파이더버스> 같은 만화가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화에서나 가능하다고 봤던 이야기가 이제 영상물에도 얼마든지 구현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만화의 원천적인 가치는 단순히 OSMU의 콘텐츠 수준을 넘어선다.
△ STAN LEE
(1922.12.28.-2018.11.12)
“Excelsior!”
스토리텔링뿐만 아니라 표현 양식에 있어 만화의 예술적 가치는 크다. 인피니티도 그렇지만 특히 뉴 유니버스는 영화가 되려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만화에서 온 애니메이션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좋았다. 만화의 칸과 말풍선의 표현은 물론이고 심지어 캐릭터 움직임의 프레임을 줄여서까지 종이 만화의 느낌을 스크린으로 구현한 것이다. 이건 현대 크리에이터들의 만화에 대한 존경이자 경외감의 표현이다. 우리 모두는 만화에서 시작했다는 선언과도 같다. 만화는 이제 다른 문화와 산업에게 영감을 선사하는 자랑스러운 예술이다. 만화가 이렇게 자리매김하는데 있어 한 위대한 선구자의 일생과 업적을 잊을 수 없다. 올해 세상을 떠난 그를 기리며 늦은 애도로 올 한 해를 마무리한다. 최고의 존경을 담아, 스탠 리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