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소설 창작 수업에서 들었는데, 세상에는 두 가지 작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남의 사연을 자기 이야기처럼 쓰는 작가, 다른 하나는 자기 사연을 남의 이야기처럼 쓰는 작가란다. 이 구분은 또 가지를 친다. 자신이 겪은 일을 자기 이야기 그대로 쓰는 작가와, 남의 일을 남의 이야기로서 쓰는 작가로. 이 갈래에서 전자는 1인칭의 주관적이고 자기 고백적인 사소설(私小說)을, 후자는 철저하게 객관적인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쓴 하드보일드 문체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의 소재/테마와 저자간의 거리가 얼마나 가깝고 먼지에 따라 정해지겠다.
누구나 적어도 습작 시절에는 자기 자신을 이야기의 소재, 질료로 삼는다. 문학적인 자기 고백이나 라이트 노벨 같은 상상이라도 결국 현재 자신의 욕망과 한계에서 비롯한다. 한 개인의 일기나 망상이 어쨌든 하나의 훌륭한 작품으로 변모하려면, 자신을 멀찍이서 떨어져 보는 객관의 과정이 필요하다. 앞에서 나눈 작가의 구분은 이 객관의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의 구분이기도 하다. 아무리 사소설이라고 해도 문장 낱낱이 진실이 아니라 결국 픽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가 아닌 독자의 입장에서, 이 과정은 사실 내 알 바가 아니다. 독자는 작가와 작품을 같은 존재로 여기기 쉽다. 작품이 위대하다고 해서 이걸 쓴 작가 역시 훌륭할 가능성은 필자가 알기론 경험상 매우 낮다. 대단한 작품을 쓴 작가일수록 개인의 삶은 개차반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필자 역시 좋은 작품을 만나면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다. 독자로서 나는 작품을 읽는 도중 여러 번 작가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다.
독자는 늘 작가와 작품 사이 거리를 떨어트려놓는 일에서 작가보다 더 어려움을 겪는다. 작품의 화자는 꼭 작가 자신처럼 보인다. 독자는 사적인 자리에서 작가를 만나면 슬그머니 묻고 싶다. “실제로 겪은 일인가요?” 사소설로 명성을 쌓은 작가일수록 작품에서 도망치기 힘들다. 나에게는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소설이 그랬다. 하물며 작가 스스로 자살 직전 인생의 최후 보고처럼 남겨놓은 <인간 실격>(1948)에서, 주인공 ‘요조’는 오로지 작가 자신으로만 보였다.
△ 다자이 오사무 (1909~1948)
지난 2018년은 다자이 오사무 사망 70주기였다. 그의 작품들은 이미 세계문학과 여러 선집의 형태로 온갖 책이 나와 있지만, 특히 내가 관심을 가졌던 건 ‘김승옥 기획’으로 “‘진짜’ 다자이를 만난다.”라는 거창한 문구와 함께 3권쯤 나왔다가 그쳐버린 다자이 오사무 컬렉션이었다. 김승옥이 기획했다는 흔적은 책의 띠지에 적힌 강렬한 소개 문장이 전부이긴 했지만, 다자이의 책에 김승옥의 이름이 더해지니 문학도 코스프레를 평생 해온 필자는 무척 솔깃했다.
<무진기행>(1964)의 작가 김승옥의 작품들은 인간의 나약하고 비겁한 내면과 자기 환멸을 그린다는 점에서 내게 다자이 오사무의 것과 겹쳐 보이는 지점이 많았다. 지독하게 예민하고 곧잘 자기혐오에 빠져들지만 타인을 연민하는 인간으로서 작품을 통해 삶을 긍정하려 애썼다는 점에서 같다고 느꼈다. 비록 한 작가는 스스로 삶을 종결지었고, 다른 작가는 절필하여 종교에 귀의한 끝에 병으로 언어마저 잃고 말았지만. 이들의 작품을 읽다가 덜컥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경험을 하면 할수록, 다자이 오사무와 김승옥은 내게 가까이 두어 읽고 싶으면서도 또 어딘가 처박아 숨겨두거나 영원히 처분하고 싶은 책의 작가들이었다.
△ 다자이 오사무 컬렉션 (열림원, 2014)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다자이 오사무는 천재 소설가였다. 그는 가짜 제국주의자였고 가짜 일본공산당이었으며 가짜 군인이었다.
그는 처와 연애와 창녀를 진짜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자살했다. - 김승옥”
그런데 김승옥이 소설가이기 전에 먼저 만화가였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소설가로 데뷔한 이래 시나리오 작가는 물론 영화감독으로서도 다능했던 김승옥은 그의 처음 창작 커리어를 만화로 시작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부터 61년 5.16 군사 정변 발생 전까지 1년여 기간 동안 서울경제신문의 시사만화 <파고다 영감>을 필명으로 연재했던 것이다. 훗날 그의 단편 <차나 한 잔>(1964)에서 이 시절의 경험을 소재로 쓴 걸로 보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필자는 이 소설을 먼저 읽고 나서 김승옥이 만화를 그린 적이 있던가? 하고 찾아본 다음 놀랐더랬다. 신문 연재가 잘린 만화가가 먹고 살 걱정에 신경성 복통을 앓으며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내용의 이 단편은 개인적으로 <무진기행>보다 좋아하는 소설이다. 골방에 드러누워 자위하는 인간의 자아 성찰보다 먹고사는 일을 고민하며 종횡하는 인간의 고뇌가 더 엄중한 테마라고 생각했다.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왜 하나면, <인간 실격>에서 요조 또한 연재만화를 그려 돈을 버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혹시 다자이 오사무도 만화를 연재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역시 그림을 곧잘 그렸다. 그가 남겨놓은 자필 노트의 낙서 흔적을 보면 카툰 느낌의 여러 터치와 특히 인간의 얼굴을 반복적인 선으로 휘갈긴 기괴한 캐리커처가 돋보인다.
아무튼 김승옥과 다자이 오사무를 여기서 한 번 더 겹쳐보는 이유. 두 소설의 주인공이 자기보다 그나마도 타인을 더 연민하는 지점이 이 만화 소재 에피소드에서 비슷하게 느껴졌다. <차나 한 잔>의 주인공은 자신을 늘 속 깊게 지지하는 아내를 꼭 껴안으며, 언젠가 자신도 옆집의 주정부리는 아저씨마냥 삶에 지쳐 아내에게 손찌검이나 하지 않을까 두려운 공포를 느낀다. <인간 실격>의 요조는 만화를 그리며 기생하던 시즈코와 시게코 모녀의 방에서 도망치며 이 두 사람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들의 삶을 망치지 않으려 비겁하게 몰래 달아난 덕분에, 이 모녀는 <인간 실격>에서 요조가 건드려 파괴되지 않은 유일한 여자(들)로 남는다.
△ 다자이 오사무의 자필 노트 낙서들
(출처: 히로사키 대학 부속 도서관 홈페이지)
현대 공포만화의 대가 이토 준지(伊藤潤二)가 <인간 실격>을 만화로 그린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이미 여러 작가의 손으로 만화로 옮겨진 적 있는 원작의 선정이 신선하거나 이토 준지의 선택이 특별히 의외로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이토 준지가 만화로 옮기는 만큼, 그의 손에서 <인간 실격>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질지 기대했다. 이토 준지는 이미 <프랑켄슈타인>을 메리 셀리의 원작에 충실하게 그려낸 적 있고, 우익 논란이 있었던 전작 <우국의 라스푸틴>도 원작이 따로 존재하는 작품이었다. 그는 그가 그려낼 수 있는 공포에 있어 더 무서운 소재나 테마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원작이 있는 작품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토 준지는 자기 것만 꺼낼 수 있는 작가가 아니라 각색도 가능한 장인이다. 오리지널보다 각색이 더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능력은 작가의 수준을 한 차원 더 우러러보게 한다.
70주기의 의미가 있는 작년 말에 이 작품이 정발된 건 의미 있고 기쁜 일이었다. 덕분에 책장 구석에 숨겨두었던 원작 소설도 다시 꺼내 읽었다. 연이은 빠른 출간으로 완결 3권까지 확인한 지금, 이토 준지 버전의 <인간실격>을 읽은 소감은 원작에 대한 최고로 무서운 재해석을 보았다는 거다. 여기엔 원작자 다자이 오사무에 관한 이토 준지만의 재해석도 포함된다. 이 만화가의 비전을 빌려 다자이를 읽는 경험은 한 마디로 무섭다. 이 독해(讀解)는 독(毒)하다!
만화는 1948년 6월 13일, 다자이 오사무가 그의 삶에서 마침내 성공하고 마는 죽음의 실행으로 시작한다. 연인과 정사(情死)하려는 남자가 입수 직전 본능적으로 “덥석” 붙잡은 지푸라기가 “뿌직” 끊어지는 장면은 냉소나 비정을 넘어선 이토 준지만의 사실성이다. 이번에야말로 죽는 건가? 시커먼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가라앉는 다자이. 이토 준지는 여기서 컷을 곧장 저 유명한 “수치스러운 생애를 보내왔습니다.”로 이어버린다. 원작에서 다자이가 화자(요조)와의 거리두기를 위해 액자 구성을 취하면서 ‘기묘한 얼굴을 한 남자의 사진 석장’에 대한 캐리커처로 시작했던 서문을 아무렇지 않게 날려버린 것이다. 이러면 당연히 이어진 고백의 주인공은 다자이 자신으로 보인다. 주마등. 요조와 다자이를 동일시하는 독자인 나는 여기서 덫에 걸린다. 그런데 이토 준지는 원작의 액자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교묘하고 정교하게 구축했다. 화자가 도플갱어를 만나는 3권의 반전 아닌 반전은 내게 영화적인 충격을 주었다.
△ 이토 준지의 <인간실격>을 그대로 옮긴 영화를 보고 싶다.
감독으로 츠카모토 신야(塚本晋也)를 추천한다!
인간이란 존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타인 앞에서 자신을 연기해야만 살 수 있는 나. 이어지는 요조의 이야기는 소설의 내용을 충실히 따르면서 원작의 빈틈을 무시무시한 해석으로 채운다. 다자이의 1인칭 관념이 이토 준지의 3인칭 객관을 거치자, 요조의 공포는 원작 소설보다 만화에서 더욱 구체적이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문호의 작품과 마주하기 위해 30권이 넘는 참고 문헌으로 철저하게 준비한 이 만화가의 사실성은 다자이의 공포와 부끄러움에 분명한 형체를 부여한다. 무엇보다도, 여자에게 기생하고 착취하는 남자의 나약함과 비겁함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신성한 문학 원작을 훼손한 것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보강했다. 덕분에 우리는 요조를 좀 더 제대로 이해할 기회를 얻는다. 이런 남자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자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는지 보라. 위대한 영화가 그러듯 만화도 독자에게 문학을 직접 체험시킨다.
일본 만화의 시네마틱. 우리가 자본의 문제에서 만화를 지속하기 위해 스크롤 웹툰을 택한 대신 잃어버린, 손으로 넘기는 종이 매체만의 회화적인 힘이 아직 일본의 페이지 만화에는 남아있다. 웹툰은 주로 서사의 방법론으로 영화를 가져오지만, 페이지 만화는 보다 연출적인 목적에서 영화를 갖고 온다. 컷을 넘어 펼친 페이지로 보여주는 만화의 장면은 시네마틱하다. 일본 만화가 인터넷으로 옮겨가면서도 고루하게 보일만치 페이지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다. 일본은 두루마리의 전통을 포기하는 순간 자신들이 자랑하는 망가가 아니라는 걸 안다.
이토 준지의 <인간실격>은 매 권마다 책의 겉표지를 벗기면 각권의 본문에서 가장 강렬하고 무서운 펼침 페이지 장면이 속표지로 되어있다. 극장 스크린에서 어마어마한 장면을 목격할 때 나도 모르게 “으어어” 신음 소리를 내곤 하는데, 이번 만화책을 보면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그대로 영화로 옮긴 다음 연출의 공로는 이토 준지에게 돌려야 할 정도로, 각색만큼 연출이 무시무시하다. <인간실격>은 감히 말하건대, 정통 만화가로서 이토 준지의 정점이다.
△ 이토 준지 만화 <인간실격> (오경화 역, 미우, 2018)
지금껏 이토 준지가 다른 공포만화가들과 격을 달리해온 것은 그림과 연출의 집요하고 기괴한 박력뿐만 아니라, 기교 없이 단순한 스토리텔링 같으면서도 불현듯 거대한 공포를 전달하는 이야기 자체의 힘이었다. 우리가 공포/환상소설의 전설적 이름을 빌려 ‘러브크래프트’적이라고 흔히 표현하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피할 길 없는 미지의 ‘우주적 공포(Cosmicism)’를 이토 준지는 능수능란하게 다루어왔다. 이 능력은 앞선 세대에서 어마어마한 공포물을 그려온 거장 우메즈 카즈오(楳図かずお)의 후예로서 이토 준지를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 우주적 규모의 공포란 꼭 전 지구적 사건이 발생하는 서사의 스케일로서 스펙터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른 행성이나 은하계, 우주 자체의 광대한 이미지를 보고 또 상상하다가 그 규정되지 않는 정체와 한계 없이 팽창하는 가공할 크기에 압도당한다. 이 거대한 우주에 비교하면 태양계와 지구는커녕 한낱 인간, 특히 나라는 한 개인의 존재는 너무나 하찮을 만큼 작다. 탄생과 죽음이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인다. 우주 공간의 암흑 물질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신과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음 이후에는 나 자신을 영원히 인지할 수 없는 길고 긴 어둠뿐일 것이다. 꿈 없이 계속되는 잠. 인간은 누구나 이 어둠을 언젠가 끝내 맞이한다. 이걸 생각하면 기분 나쁘고 무섭다. 이 공포는 유기체의 본능이다.
인간의 존재 자체에 이미 삶과 죽음의 공포가 도사린다. 개인의 마음속 어둠이 곧 우주의 규명되지 않은 암흑물질과도 같다. 죽음이 주는 충격, 호러와 미스터리에 끌리는 이유, 설명되지 않는 모든 것들은 내 안의 어둠을 건드리기에 무섭다. 한 인간은 하나의 알 수 없는 우주다. 마침내 나 자신을 알게 된들, 미지의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 남는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 서로의 우주를 침범한다. 서로 다른 우주가 만나 함께 조화를 이루거나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나와 타인과의 직접적인 관계성을 통해 이루어지던 소우주는 요즘에 와서 인터넷과 SNS으로 구경하는 걸로 대신하는 이상한 초(超)간접 다중우주로 변해간다. 특정 매체의 작은 창으로, 누군가의 주장에 따라 보고나서 어떠한 무엇으로 쉽게 단정한다. 그리곤 끝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의 노력 없이 막연한 두려움은 혐오와 증오로 번진다.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스스로 부끄러운 줄은 전혀 모르는 ‘나’들이 득세한다. 이건 충분히 우주적 공포다!
인간이 반드시 먼저 스스로 예민하게 인식해야할 ‘부끄러움’의 가치. 요조의 고백은 그래서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다.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는 건 무척 어려운 일. 우주적 공포의 장인이 재해석한 인간 ‘실격’의 공포를 느껴봐야 할 이유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과연 ‘합격’일까?
△ 이 문장이 영원한 어둠 직전의 결론이 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