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빈金原斌
1935년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 남.
독립운동가인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냄.
1946년 서울로 귀국
1953년 고교생 신분으로 '태백산맥의 비밀'(평화출판사 발행) 전5권 발표.
1955년 소년시보에 네 칸 만화 '막동이'와 그림 이야기 연재.
1958년 '주먹대장' 128쪽 단행본 발표.
SF만화 ‘제3제국’ 발표.
군 복무후 박기당, 김기율, 유세종, 고우영과 함께 오성문고 설립.
1964년 대본소용 ‘주먹대장’ 전8권 발표. (오성문고 발행)
1965년 소년 조선일보에 SF만화 ‘별소년’ 발표.
1966년 ‘검은 댕기’ ‘아기포졸’ 등 시대물 발표.
1968년 육영재단에서 발행한 원간 ‘어깨동무’에 근무
1973년 어깨동무 퇴사 후 세 번째 ‘주먹대장’을 8년간 연재
1985년 보물섬에 ‘초록동’, 소년중앙에 ‘번개동자’ 연재.
1992년 월간 아이큐 점프에 ‘주먹대장’ 네 번째 연재.
2012년 12월 30일.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남.
2013「주먹대장」복간 (한국만화 걸작선19)
수상 경력
1996년 제2회 한국만화가협회상 수상.
2001년 황금 펜촉상 수상
2004년 대한민국 만화대상 공로상 수상
온 산들이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산을 바라보다 문득, 사람보다 산을 더 좋아했던 김원빈 선생이 생각이 났다.
본래 이 칼럼은 생존하는 원로만화가를 만나 만화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꼭지이다. 하지만, 인터뷰하기를 싫어했던 선생님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많았던 필자가 들었던 단편적인 이야기나마 남기고 싶어 옮긴다.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난 김원빈은, 독립운동가였던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광복과 함께 이념이 다른 동지의 저격으로 부친을 여윈 그의 가족은 모친과 세 동생을 데리고 천진을 거쳐 일본 사세보佐世保로, 부산으로 전전하다가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김원빈은, 습작을 통해 그림 실력을 쌓으면서 차츰 만화에도 흥미를 갖기 시작해 만화 그리기에 몰두한다.
그림의 기초는 모방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좋은 그림을 보면 똑같이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그렸다. 비록 만화가 아니더라도 점에서 색깔까지도 따라 그렸다
그 시절에는 누구를 찾아가 사사私師를 받아야 할지를 몰라서 답답했다. 좋아하는 김용환 선생을 찾아뵙고 싶었지만 계신 곳도 모르니 만날 기회도 없어 화가들 그림을 모방하며 독학을 했다.
용산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림 잘 그렸던 김원빈은, 반 친구의 권유로 서너 살 위인 순수회화를 그리던 '김윤명'을 만난다. 김윤명은 만화가이면서 출판업을 겸하고 있는 '김윤항'에게 김원빈을 소개시켜 주었다.
'박광현'은 <푸른 망토>라는 작품으로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전후의 사회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정신적으로 불안해하던 어린이들에게 읽을거리가 변변히 없었던 시절,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쉽게 볼 수 있었던 만화는 배출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만화는 '떼기 만화' 또는 '징크판 만화' 등으로 불렀던 조악한 출판을 하던 시절이었다.
윤기 나는 까만 먹물을 찍은 펜 선으로 꼼꼼히 곱게 그린 환상적인 복장과 실감 나게 반짝이 장식 표현을 그린 아라비아의 왕자와 공주가 등장하는 김윤항의 '아리아 공주' 원고는 김원빈에게 아직도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게 만든다.
김원빈이 이렇게 만화에 대한 열정이 싹트는 상황에서 6. 25전쟁이 발발, 김원빈 가족은 대전으로 피난을 갔으나, 1951년 가을, 2차 서울 수복 때 만화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가 없어 위해 혼자 상경을 한다.
부산으로 피난 가서 출판업을 계속하던 김윤명 사장이 찾아와 용산고등학교에 복학한 김원빈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집안이 좋아 재력도 탄탄했던 김 사장은 부산에서 여학생을 위한 사인지, 요즘으로 말하자면 팬시용품을 제작하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출판업자다운 욕심으로 책다운 책을 만들 결심을 한 것이다.
만화가가 몇 없었던 시절이라 학교 다니는 김원빈을 찾아온 김 사장은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원고 청탁도 하고 원고도 받아 갔다. 대학을 다니던 신동헌도 출판업자가 학교로 찾아와 쉬는 시간에 원고 청탁했던 시절이다.
1953년 김윤명 사장의 <평화출판사>에서 ‘태백산맥’이 출간되었다. 비록 원고료 대신 책으로 받았지만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나왔다는 기분만으로도 좋았다.
종로구 통인동에 있던 연립주택에서 신세를 지고 있을 때 김원빈의 그림을 보고 격려해 줬던 고교 교사는 <소년 시보>라는 타블로이드 판 격월간지에 소개, 네 칸 만화 ‘막동이’와 전설을 꾸민 그림 이야기 등을 연재했다.
같은 지면에 시대 만화로 연재를 하고 있었던 ‘철방구리’ ‘천둥 대감’으로 유명한 ‘이재화’와는 <소년시보> 지면으로만 알다가 모임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김원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재화는 10년 지기처럼 반가워했다.
그림 솜씨가 뛰어난 김원빈에게 이번에는 교과서의 기타과목을 출판하는 <명지출판사(대표: 김성재)>에서 삽화와 컷, 그리고 표지까지 그려 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김원빈은 본인의 작품을 제작하는 사이에 단행본 표지를 그렸다. 단행본 표지 그리기는 만화 그리기처럼 골치 아프지도 않고 원고료도 많았다.
그러나 원고료가 많은 표지를 그리는데 시간을 빼앗기느라 자신의 작품을 많이 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아쉬워했다.
단행본 한 권 분량이 16쪽~32쪽이었던 시절, 김원빈은 만화를 그리기보다는 표지 전문작가로 바빴다.
김원빈은 작은 인쇄소가 밀집해 있는 을지로 3가, 조만식 선생이 만든 조선민주당사가 있던 골목에다 방을 얻어 아지트로 삼는다.
박광현, 이병주, 이재화 같은 만화계 선후배들은 친구 좋아하는 김원빈의 아지트에 오다가다 들러 원고 청탁이나 기타 만화 관련 정보를 교환했다.
누구나 가난했던 시절이라 모두 원고료만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원고료가 나오는 날은 명절 기분이 되고 잔칫날이 되어 원고료 받은 사람은 그날 원고료를 ‘작살’내는 날이 되었다.
그러나 부산에서 온 출판사 사장은 ‘책이 안 팔려서’ 청탁했던 다섯 작가 원고료 중에서 두 작가의 원고료만 준비해 온다. 그러면 합리적인 원고료 분배 방법으로 나이가 연장자인 작가와 ‘잘나가는 작가’부터 지불을 했다. 제때 나오지 않는 원고료였지만 가난한 만화가들에게는 술값 정도만 되면 생활비가 되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김원빈도 순정만화를 그린 적도 있지만, 순수창작이 아니라서 언급을 피했다.
김윤명 사장의 원고 청탁을 받고 작품을 구상하던 중, 그 당시에서는 보기 힘든 가로로 편집된 그림책에 나오는 옛날이야기 중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주먹대장’이란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발표하자마자 당시 어린이 독자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주먹대장>은 거대한 오른팔과 엄청난 괴력을 가진 어린이가 주인공이다.
비정상적으로 큰 오른팔 때문에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또래들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하지만, 건강하고 정직한 심성으로 의연하게 행동하며, 자신의 가진 놀라운 괴력으로 못된 어른을 혼내 주며 모험을 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1958년에 유명한 ‘주먹대장’을 발표를 한 것을 두고. ‘뽀빠이’니 ‘아톰’의 모작이니 하는 뒷담화를 하는 이도 있다는데, 그 당시에는 ‘뽀빠이’니 ‘아톰’같은 작품이 있는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작품 구상은 되었지만, 주인공 이름을 ‘주먹대장’으로 할 것인가 ‘주먹장군’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으로 친한 동료 신동우와 박광현에게 의논을 한다.
모두 ‘대장’이라는 이름이 좋다고 했지만, 주먹이라는 단어가 ‘어깨’ ‘깡패’라는 부정적 이미지라 걱정을 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이미 고인이 된 동료 만화가 신동우와 박광현 이야기를 할 땐 눈물을 글썽거렸다.
‘주먹대장’의 인기를 타고 SF만화 ‘제3제국’을 발표하면서도 김원빈은 계속 만화 표지를 그렸다.
1959년 교회를 통해 들어 온 미국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샘플로 보고 그려 ‘재미’를 본 부산의 김윤명 사장의 요청을 받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려주기 위해 수채화 터치가 좋은 ‘황정희’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간다.
이미 그때는 만화출판이 활성화되기 시작해서 부산에서 손의성, 이상렬, 오명천, 정훈, 전상균 등 ‘부산파’들이 다른 출판사에서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원빈이 군 복무 후 서울로 돌아오니 세상은 많이 변해있었다.
입대 전에 살았던 아지트는 없어져서, 충무로 4가 명보극장 근방의 인쇄소가 많던 근방에 살던 조선일보 신문 삽화가 이병주의 집 2층에 방을 얻어 새 아지트로 삼았다.
마땅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는 김원빈에게 <제일사>라는 출판사 사장이 도움을 요청했다. 작품을 출간해야 하는데 일손이 모자라 쩔쩔매는 인기작가 ‘박기당’의 작업을 도와주라는 부탁을 받고 얼마 동안 그의 작품 데생을 해 줬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김원빈은 박기당의 제자였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신촌대통령과 맞선 만화가들의 출판사 <오성문고> 새로 이병주의 살림집에 터를 잡은 김원빈의 아지트에는 유세종, 신동우, 손의성, 그리고 일러스트와 사진을 하는 하모 등과 같은 악당들의 출입으로 에피소드가 끊이지 않았다.
작업에 열중하는 도중에 난데없이 책상 밑에서 손만 쑥 내밀고 ‘물 달라’고 하는 술에 취해 잠자던 친구가 있었는가 하면, 신동우는 일을 하다가 지루해 지면 ‘학생 김 아무아무개 신위’ 라고 쓴 지방을 붙여 놓고 제사를 지내는 장난도 했다.
20대 젊은이들의 치기이며 순수였다.
동네 대포집 아주머니도 ‘악당들’에겐 외상도 선선히 잘 주었고, 돈도 없고 갈 곳이 없었던 일행은 동네 다방 구석 자리에 ‘죽치고 앉아’ 자신들의 장래를 심각하게 걱정도 했다.
어스름해지는 저녁이 되면 술 사줄 ‘봉’이 오지 않나 기다렸고, 거래하는 부산의 출판사 사장이 지불 할 원고료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지금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여유이고 낭만이었다.
이런 시절에 인쇄소를 하던 ‘신촌 대통령’ 이 모 사장이 만화출판에 대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매일 충무로에 있었던 이병주의 화실로 출근을 하다시피 찾아와 작가들이 모이면 술을 ‘쾅쾅’내며 포섭해서 일감을 얻었다. 이렇게 작가들을 포섭한 이 모 사장은 자금력과 영업력이 생기자 작가 위에 군림하며 횡포를 부렸다.
작가들마다 뜻은 있었지만, 빈곤이 폭군을 낳고 추종자를 만들었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박기당의 데생을 해 주다가 자신의 하는 짓에 회의를 느낀 김원빈은 다시 ‘주먹대장’을 구상, 대본소용 단행본으로는 고급스러운 64쪽 짜리를 10권 발표해서 단숨에 인기 만화가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신촌 이모 사장의 횡포에 맞서 작가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원빈은 박기당, 김기율, 유세종, 고우영과 함께 ‘오성문고’라는 출판사를 차려 ‘만화계의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사건으로 이 모 사장에게 밉게 보인 김원빈은 두고두고 고통을 받는다.
1968년 생계를 위해 육영재단에서 발행하던 <어깨동무>에 입사, 1년 정도 근무를 하면서 아라비안나이트를 우리 정서에 맞춰 그린 그림 이야기와 삽화를 그렸다.
그러나 자유로운 김원빈에게 직장생활은 어울리지 못하고 <어깨동무>를 나온다.
돈이 필요한 그는 ‘김소암’이란 필명으로 ‘손오공’, 일간스포츠에 ‘주식투자’ 등 그리고 싶지 않은 그림을 그렸다.
1965년에는 <소년조선일보>에 SF만화 ‘별소년’을, 1973년 <어깨동무>에서 청탁을 받고 주먹대장을 근 10년 정도 기록적인 연재를 한다.
그 후 <보물섬>에서 ‘초록동’, <소년중앙>에 ‘번개동자’를 발표했다.
특유의 섬세하고 꼼꼼한 그림체에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봐도 손색없을 정도의 훌륭한 완성도를 자랑하던 김원빈이었지만, 피곤한 심신을 추스리기 위해 등산에 심취한다. 원고료만 받으면 가까운 인수봉에서부터 전국 유명한 산을 찾아다녔다.
산은 김원빈에게 힘든 산행 뒤 정상에서 맞보게 하는 희열로 성취욕을 느끼게 해 주었고 그리움과 허전함을 채워줬다.
혼자 다닌 30년 간의 산행으로 터득한 것은, 자신과 통하는 게 있어 마음 놓고 의지할 수 있는 산이야말로 사람보다 좋은 애인 같았다. 김원빈은 그냥 좋기만 한 산 때문에 <아이큐 점프>에 연재하면서 애를 먹이기도 했다.
하지만 특유의 완벽을 추구하는 작업 방식 때문에 작업 속도가 매우 느려 많은 분량의 원고를 제작하지는 못했으며, 이 때문에 마감을 자주 어겨 편집자들을 애먹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장의 그림을 그리더라도 모든 힘을 쏟아부어 꼼꼼하게 작업하는 덕에 그의 만화는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남은 것이다.
그림연습은 ‘파지를 많이 내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김원빈의 철학이다.
작가란 청탁을 받고 작품을 시작했으면 작품 속에 빠져 다른 것은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원고료가 적으니까 대충 그리고, 마감이 바쁘니까 후다닥 해치워서는 안 된다. 어떤 표현이든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연출을 생각하고, 자신이 작품 속의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스스로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표현하는 데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 매듭을 풀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이 병이라는 고백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아껴주는데 작가로서의 본분을 못하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바람에 충족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기를 바랐던 김원빈은, 자신을 인정해 주는 이웃들로 인해 살맛이 나서 항상 감사하며 살았다.
나이 어린 후배들에게도 존댓말을 했고, 취중에도 함부로 누구를 비판하지도 않았으며, 어린이의 선한 눈망울을 좋아하셨고 동요를 부르며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던 노예술가老藝術家 김원빈 선생님!
외롭게 자신의 작품 완성을 위해 전력을 다하셨으며, 늘그막엔 친한 몇몇 친구들 외에는 소통하지 못하고 외롭게 병마와 싸우다 2012년 12월 30일 심근경색으로 향년 77세로, 좋은 친구들과 즐기던 술을 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 김원빈 선생님의 주먹대장 복간본 출판 기념회에서 가족을 대표해서 조카 남은경 선생의 감사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