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오피스(OPHIS)’라는 이름의 거대 기업이 일명 ‘J2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토리노의 수의(Shroud of Turin)에 남아있는 혈흔으로부터 DNA를 채취, 공인된 최초의 복제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클론을 탄생시키는 리얼리티 TV쇼를 방영하기로 한 것이다. 재림 예수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전 인류가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트루먼 쇼>다.
오피스는 예수의 복제에 필요한 난자를 제공할 여성을 찾아 전국의 10대 처녀들을 대상으로 공개 오디션까지 벌인다. 그리스도의 인공적 부활을 위해 동정녀를 찾아서 처녀수태를, 그러니까 무염시태(無染始胎 : 원죄 없는 잉태)까지 재현하겠다는 징그러운 계산이다. 그웬 페얼링이라는 평범한 백인 소녀가 ‘성모’로 뽑혀 억만장자가 되는 동시에 J2가 마련한 외딴섬의 첨단보안시설에 갇혀 사는 운명을 택한다. 프로젝트의 허무맹랑한 의도와는 반대로 그웬이 뽑힌 이유 중 하나는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이었다. 가족의 빚도 갚고 여동생들이 대학에 갈 수 있다면 예수건 누구건 아빠 없는 자식의 엄마가 되는 일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구온난화를 막으려는 환경운동가이자 세계적 권위의 유전학자인 사라 엡스타인이 이 프로젝트를 직접 실행하는 과학자로 초빙된다. 이산화탄소를 섭취하는 새로운 조류(藻類)를 개발하려는 자신의 연구를 오피스가 지원한다는 조건이다. 그녀에게는 진짜로 지구를 구하려는 의지가 있기에 프로젝트와 관련한 도덕, 윤리, 종교적 갈등과는 무관하게 순수한 과학자의 역할만 하면 된다. 다만 이 전대미문의 쇼를 기획하고 연출하는 총괄 프로듀서 릭 슬레이트의 빈번한 감시와 개입이 문제다. 그는 예수의 클론이 어린이 성경에 나오는 모습처럼 흰 피부에 파란 눈을 가지도록 만들라고 명령한다. “그리스도는 중동 사람이었고 그런 유전형은 없다”는 과학자의 팩트 주장은 “연구와 실험실 전체가 오피스 소유”라는 PD의 말에 간단히 무시당한다.
데이지 밀턴이 이끄는 ‘뉴 아메리칸 크리스천’, 줄여서 ‘NAC’라 부르는 개신교 근본주의 단체가 이 프로젝트에 반발해 시위를 벌인다. 벨파스트에서 온 전직 IRA 테러리스트 출신 군사 전문가 토머스 매케일이 J2의 보안팀장을 맡아, 기독교인 시위대를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팬다. 유대인 과학자 엡스타인은 매케일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점이 마음에 걸린다. 과거의 상처를 간직한 이 덩치 크고 과묵한 사내 역시, 시위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위험한 종교적 신념을 지닌 자이기 때문이다. 성모와 예수의 경호원인 매케일의 등짝에 가득한 십자가 문신과 얽힌 과거는 이야기를 두 축으로 전개하는 동시에 작품의 주제와 가장 밀접한 질문을 던진다.
토리노 수의의 진위 여부나 탄소 연대 측정법과 진화 등에 관련한 케케묵은 논란을 뒤로 한 채, 성탄절 전야를 맞아 전 세계가 축제 속에 지켜보는 가운데 2019년 12월 25일 0시를 기해 아기 예수가 결국 다시 태어난다. 아기에겐 지저스 크라이스트 대신에 ‘크리스’라는 이름이 주어진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엡스타인 박사만이 알고 있던 변수가 발생하니, 여자 쌍둥이가 같이 태어난 것이다! 슬레이트는 조용히 이 ‘문제’를 해결하러, 빗속의 다리로 차를 몰아간다.
△ <펑크록 지저스> 션 머피 지음, 홍지로 옮김, 시공사 2019
약물 치료를 통해 제정신으로 돌아온 조커가 배트맨의 위협으로부터 고담을 수호한다는(!) 설정(무엇보다 여기엔 끝내주는 디자인의 새 배트모빌이 나온다)의 《배트맨: 화이트 나이트》(2017). 성인독자의 취향과 작가주의, 단일 작품의 완결성을 더욱 강조한 방향으로 기존 코믹스의 세계관을 재해석하는 ‘DC 블랙 라벨’의 제1작이 된 이 작품을 쓰고 그린 작가는 1980년생의 션 머피(Sean Gordon Murphy)다. 그가 2012년 버티고(VERTIGO) 라인으로 발표한 그래픽 노블 《펑크 록 지저스 Punk Rock Jesus》는 예수 복제의 과학적 가능성(이자 금기)을 지금 현실에서 오로지 미디어 권력의 엔터테인먼트 목적으로 실행한다는 파격으로 시작한다.
사실 이런 설정 자체는 참신하지 않다. 이미 제임스 보사이너가 2003년에 쓴 《크라이스트 클론》이란 3부작 크리스천 SF 소설에서 토리노의 수의에 남은 세포를 연구해 예수를 복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심지어 이 소설은 예수가 외계인이었다는 가설로 시작한다). ‘이렇게 복제한 예수가 원본과 똑같은 예수인가?’의 문제보다는 ‘이 시대에 재림한 예수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가 좀 더 궁금한 이야기다. 계시록 때문에 재림은 곧 심판을 기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수가 지금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면 어떤 일을 행하고 또 겪을 것인가에 대한 상상 역시 새롭지 않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메시아> 같은 예수 재림 서사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속 ‘대심문관’ 챕터를 만날 수밖에 없다. 세계를 심판하러 오셔야 할 예수가 도리어 세계에게 (또다시) 심판을 당한다. 교회는 결코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신성을 물려받은 교회는 예수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해야만 한다. 모든 재림 예수 이야기는 이 챕터의 표절이고 변용이자 덧붙인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펑크 록 지저스》만의 새로움과 재미는 미디어와 대중의 감시 속에 사생활을 박탈당한 채로 길러진 예수가 각성하여 14살이 되자, 기독교와 미국의 기득권을 부정하는 펑크 밴드의 리더가 되는 전개에 있다. 미디어에 의해 탄생한 클론 예수가 직접 미디어의 힘으로 세계를 심판하는 것이다. 뉴욕의 상습 침수 지역으로 극빈층의 게토가 된 ‘로워 맨해튼’ 출신의 인디 밴드 ‘플랙 재킷츠(방탄복)’는 크리스를 새 리드 싱어로 받아들이면서 엄청난 인기와 논란을 불러온다. 새 앨범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는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리라(왜냐면 하늘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같이 대놓고 신을 부정하는 노래로 가득하다. 잠시 재림 예수를 받아들이고 지지하던 NAC는 곧장 크리스를 ‘적그리스도’로 규정하여 ‘성전’을 불사한다. NAC는 “기독교판 알 카에다”가 되고, 매케일이 크리스를 보호하는 일은 갈수록 힘들어진다. 밴드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공동 성지인 예루살렘에서 콘서트 개최를 강행하면서 위험은 최고조에 도달한다.
△ 이야기의 두 축, 토머스 매케일과 재림 예수 크리스
10년 전에 처음(그리고 지금껏 유일한) 장편 영화를 연출했던 나는 작품을 잘 봐준 유럽인들 덕분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초청된 적이 있다. 영화제 기간 동안 나는 토리노 대성당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묻은 성의를 직접 눈으로 보는 일을 고민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토리노의 수의를 못 봤다. 안 봤다. 당시 수의를 전시하지 않는 기간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관람을 포기할 정도로 신앙을 접었는지, 지금 와선 정확히 기억도 나질 않지만 아마도 전자와 후자가 융합된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못 본 것과 안 본 것은 결국 같다. 한 개인의 신앙에서는 뭔가를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일 만큼, 안 보는 일 또한 중요하다.
총 6개 이슈의 미니시리즈로 기획된 《펑크 록 지저스》는 박력 넘치는 초중반 전개에 비해 결말은 다소 쉽고 이른 느낌이다. 사실 작가의 애착은 소년 메시아보다는 파괴된 사나이 매케일을 향해 있고, 두 캐릭터의 무게 차이가 크다. 양쪽 모두 좀 더 할 이야기가 있음직한데 단권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내게 마치 형제 같은 동의를 이끌어내는 지점은 끝 장면에서 바로 이어진 작가의 고백, “2003년에 나는 기도하기를 그만두었다.”로 시작하는 후기에 있다.
작가 숀 머피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IRA 투쟁의 역사를 잔뜩 연구하다가 그만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의문에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그는 다분히 의도적인 경험을 한다. 위기의 순간에서 그가 지난 세월 동안 해온, 기적을 갈구하는 기도 대신 선택한 일. 그것은 이성에 기초한 스스로의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늙은 전직 경찰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소년을 고문하는 영화를 만듦으로써 내가 한 일도 비슷한 선택이었노라 말하고 싶어진다.
이 만화책은 한 신앙인이 신이 없는 세계와 삶을 스스로 선택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림부터가 그렇다. 스크린 톤 사용을 최대한 억제하고, 거침없으면서도 섬세한 날카로운 펜 끝으로, 머리가 총에 맞아 터질 때 검은 잉크를 훅 불어서 단번에 그린 이 모든 것은 곧 그의 신념이다. 독자인 나는 충분히 설득되었고, 이 신념을 지지한다. 이 만화의 영화화를 보고 싶다. 작가는 모름지기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고백까지 엔터테인먼트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펑크 록 지저스》는 코로나로 닥친 거리두기 생활 중에 내가 본 만화들 중 가장 끝내주는 작품이다.
△ 펑크 록 지저스 전 이슈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