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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제 만보 / 원로만화가 순례 ⑯ 황정희

2020-06-23 조관제



독자에게 친절하고 즐거움을 주었던 만화가  황정희








황정희

 

1939년 경기도 안성 생

1958년 월간 '소년소녀'사 편집기자로 입사.

1963년 <경향신문> ‘돈길이’ 연재.

1964년 '효녀 심청' 푸른 고향, 평원의 사자 등 발표

1965년~1969년 <소년조선일보>에 ‘빛나는 별’ '산삼이'‘옹고집’ ‘김선달’ ‘정수동’ 연재.

1966년 월간 <소년 세계>에 '흥부 놀부' ‘어린이 춘향전’ 발표

1967년 월간 <새소년>에 ‘왕바우’ ‘비룡검’ 연재.

1968년~1971년 <소년 두꺼비>에 '김선달' <어께동무>에 ‘삼국시대’ ‘미륵왕자’, <새벗>에 ‘심청전’ 연재.

1971년~1972년 <소년동아일보>에 ‘흥부 놀부’, ‘정수동’ 발표

<어깨동무>에 ‘미륵왕자’를 연재

1974년 <주부생활사> 입사. 월간 <새마을>에 기획작품 시작

1975년 월간 <소년생활>에 ‘고추어사’ 발표

1980년 영자 일간지 <코리아 헤럴드>에 ‘김주사’ 1년 6개월 연재

1984년~1980년 KBS TV, MBC TV에서 방송용 일러스트 작업.

한국만화가협회 5·6대 이사 역임

2012년 8월 7일 별세.

 

 

황정희 선생은 고인이 되신 김원빈 선생님과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죽마고우처럼 붙어 지내셨다.

선생과의 필자와 첫 만남은 1970년 <소년 두꺼비>사의 막내 편집부원으로 근무했을 때 원고를 들고 편집실을 찾았을 때였고, 1980년대 서울문화사에서 발행했던 <빅 점프>에 연재하던 원로만화가 탐방 취재를 위해 만났다.

그 후에도 국내 만화 행사 때마다 뵈었지만 제대로 선생에 관한 자료와 이미지를 챙기지 못한 무심함을 반성한다.

 




△ '소년 조선일보' 연재 작품 <산삼이>, <정수동>



△ '경향신문' 연재 작품 <돈길이>




악당이 없는 황정희 만화

황정희의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예쁘기도 하지만 시류에 타협하는 기교를 부리지 않아 순수하다.

황정희의 만화에는 악당이 없다. 아무리 악당 얼굴로 그리더라도 독자에게는 악당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악당이 되어 버리는 것은, ‘사람은 무조건 사랑스럽게 그려야 한다’는 어린이 만화만 전문으로 그려 온 그의 철학 때문이리라.

 

경기도 안성에서 누이 셋 속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황정희는 귀하게 자랐다.

개화기 때 신동아와 경향신문에서 근무했던 언론인으로, 30년대 대표 만화가로 유명했던 외삼촌 ‘최영수’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어릴 때부터 마당이고 벽이고 여백만 보이면 그림을 그려댔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황정희는 안성을 떠나 화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서울예술고등학교>로 편입을 한다. 서울서 교편을 잡고 있던 큰누이 덕분에 서울 생활이 허락된 것이다.

서울예고에서 황정희는 교지 <거울>에 ‘은숙 양’을 연재하였는데, 그 작품을 본 동급생이었던 여학생의 친구가 만화가 ‘신동우’와 친하다며 황정희에게 소개했다. 신동우는 용산 중학교 학생으로 이미 ‘땃돌이의 모험’이란 작품을 발표한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만화가였다.학생 신분으로 만화잡지 <소년소녀>사에 근무하고 있었던 ‘신동우’는, 황정희의 그림을 보고 바로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다.

 

그 당시에는 만화잡지 붐을 타고 성공한 <만화세계>사는, 관철동에 있는 번듯한 건물에서 박현석, 김정파 같은 당시 인기 만화가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하지만 충무로에 있었던 <소년소녀>사는 6. 25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의 모습 그대로인 폭격 맞은 건물 한 귀퉁이에 편집실이 있었다.

재능과 젊음뿐인 신동우와 황정희는 그런 환경에 개의치 않았다. 가마니를 깔고 신문지로 이불을 대신하며 잠을 잤고, 식사는 대형 빵에다 소시지를 넣은 것으로 대신하는 엄청 고생스러웠던 하루하루를 보내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만화를 그릴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고마웠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황정희를 비롯한 <소년소녀사>에 근무하거나 거래했던 식구들은 신동우를 앞세워 집이 넓었던 신동헌 선생 댁으로 몰려가 스케치 모임을 가졌던 것은 행운이었다. 회원끼리 돌아가면서 모델이 되기도 하고, 단골 다방 마담까지 초청하여 모델로 세워 데생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기본기를 배우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때 신동헌 선생께 배웠던 기본이 남아 황정희는 항상 스케치북을 끼고 다녔다. “만화가는 뭐든지 다 그릴 줄 알아야 해. 거리든 사람이든 스케치하는 것이 생활화되어야지. 요즘 사람들은 스케치가 모자라는데도 그런 개념이 없는 것 같아. 대 선배 신동헌 선생은 언제 어디서나 스케치하고 계시잖아.”

그때 ‘신동헌 학당’의 실습생 중에는 홍대 미대생이었던 이재학, 그리고 방영진, 신능파(넬슨신), 이우헌 등이 수학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1년을 신동헌 선생 댁에서 함께 하며 소재 및 아이디어 발상과 구성에 관한 많은 공부를 했다.

 



만화가 인생의 출발점 <소년소녀>사

<소년소녀>사에 근무할 때 비치되어 있던 자료 중에 일본 만화계의 신이라 불리는 ‘데츠카 오사무’의 만화를 보고 그의 화풍에 매료된 황정희는 데츠카 오사무의 그림을 흉내 낸 ‘돌격나팔’이란 단편을 발표했다.

그러나 만화에 대한 안목이 높아지면서, 남의 화풍을 흉내 내는 것에 대한 회의를 느낀 그는 작품 이미지를 우리 것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을 한다. 그래서 소재에서 화풍까지 우리 고전에서 찾기를 시작했다. 시류에 맞지 않고 어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 정서가 배어있는 ‘황정희식 한국만화’를 그리기에 도전을 한 것이다.

 

월간 <소년소녀>사 조인구 사장은 신념만 있으면 모든 게 통한다는 뚝심으로 만화잡지를 창간한 이다. 자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종이며 인쇄까지도 외상으로 시작했지만, 제작비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1년을 버티다 폐간을 하고 말았다.

<소년소녀>는 폐간이 되어 아쉬웠지만, 좋아한 만화를 마음껏 그릴 수 있어 즐겁게 일했던 직장으로 황정희에게는 만화가 인생의 출발점 같았던 곳이었디. <소년소녀>사를 그만둔 황정희는 소문난 그림 실력으로 <주부생활>, <동아출판사>, <삼성출판사> 등에서 근무를 했지만 규칙에 구속받는 것을 싫어 근무했던 직장마다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미술 공부에 대한 욕구에 목말라하던 황정희는 홍익대 회화과에 응시를 한다. 교과과정 중심으로 보는 시험이었더라면 공부는 뒷전이었던 그로서는 엄두도 못 냈을 일이겠지만, 그 당시 미대 입시는 실기 위주였기 때문에 차석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다.

그러나 장학금은 수석 합격자에게만 혜택을 주는 학칙 때문에 입학금 낼 돈이 없었던 황정희는 ‘윤호중 학장’을 찾아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학칙에도 없는 장학금을 황정희의 사정이 안타깝다고 학장이 마음대로 지원을 해 줄 수는 없는 일, 등록금이 없었던 황정희는 첫 번째 대학 입학 도전에 실패를 한다. 대학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황정희는 이듬해 다시 장학금을 타기 위해 수석 도전을 했지만 3등으로 합격하여 또 포기하고, 등록금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 7년 후에야 입학을 했지만, 어린 동급생들과 다니기가 쑥스러워 포기를 했다.

황정희는 대학 입학만 3번이나 하는 기록을 세웠다.

 

프리랜서로 방황하던 황정희에게 기회가 왔다. 만화잡지 창간 붐이 일어난 것이다. 우후죽순처럼 만화전문 매체가 생기는 덕분에 황정희에게는 고기가 물을 만난 듯 마음 놓고 만화를 그릴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충무로 파’라 분류되는 박광현, 신동우, 김원빈, 이병주와 함께 황정희는 <칠천국> <만화학생> 등 만화 전문 잡지사로 몰려다니며 만화를 그렸다.

그의 실력이 알려지면서 <아리랑> 같은 대중잡지사를 위시하여 <어깨동무> <소년중앙> <소년생활> 등 창간하는 잡지마다 ‘황정희 만화’는 빠지는 곳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돈 벌기 위해 불량만화를 그려대라고?!.

황정희가 만화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만나게 된 선배들이 20명 정도 있었다.

자신의 인기로 인해 선배들에게 우쭐해져 보여 건방지다는 소리 듣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선배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며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다.

 

총각이었던 황정희는 만화를 그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지만. 당시의 잡지사, 출판사들의 부침이 심해 원고료로 사는 많은 만화가들은 생활이 불안정했던 시절에, 단행본 만화 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만화가가 귀했던 시절이라 인쇄 매체에서 이름만 올라가 있으면 단행본 출판사마다 전속 만화가로 모시기 경쟁으로 치열했다. 잡지사의 쥐꼬리만한 원고료로 힘들게 살던 많은 만화가들이 돈이 되는 단행본 만화를 시작했고 황정희에게도 참여를 권했다. 하지만 황정희는 문하생을 시켜 대량생산하는 작품 제작 방식이 싫었고, 만화가가 돈 때문에 출판사에서 요청하는 마음에 없는 작품을 하는 것도 싫어 거절한다.

 

대본소 만화는 그리지 않았지만, <한국아동만화가협회> 일에는 열심이었던 황정희도 신촌 만화출판사 사장의 초청 모임에 참석도 해봤지만, 출판사 사장들이 만화가에게 ‘잘 팔리는 만화’를 그려내라는 노골적인 요구에 분통을 터트렸다.

출판사에서 잘 팔리는 만화라는 의미는, 기술적으로 윤리위원회의 심의를 피하도록 하며, 작품성은 생각 말고 무조건 어린이들이 재미있어하는 내용으로 그려 장사만 잘되게 해 달라는 말이었다.

돈 벌고 싶으면 불량만화를 그려대라는 말이다.

 

단행본 만화는 돈이 되던 시절이라 만화가 중에서는 부자도 나오기도 했지만, 황정희는 싫었다.

매년 5월만 되면 ‘불량만화 소각’ 운동을 하며 만화가를 마녀사냥 하듯 몰아붙이는 사회가 싫었고, 제작비 줄이려고 값싼 종이에 인쇄하는 대본소 만화출판사의 존중이 없는 소홀한 대접이 싫어 잡지와 신문에만 만화 그리기를 고집했다.

대본소용 단행본 만화는 체질에 맞지 않을뿐더러, 남의 손을 빌려 그리는 것이 싫어서 멀리했던 황정희였지만, ‘효녀 심청’ 등 몇 권을 문하생의 도움을 받아 발표하기도 했다.


만화가 중에 특이하게 황정희는 성인 대상 대중잡지에 작품을 하지 않았지만, 대중잡지에서 활동하던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만화 운동에 도전하기도 했다. 대중잡지 <아리랑>에서 신인 만화가 모집을 통하여 대중잡지에서 성인만화 붐이 형성되던 때, 배출된 신진 만화가 중에 마음이 맞았던 이성박, 노석규, 이우헌, 김창수 등과 같이 새 만화 운동을 제안한다. 기성 만화가들이 발표하던 가벼운 유머 작품 패턴에서 벗어나 젊은 만화가답게 독특하고 신선한 만화를 해보자는 열정으로 시도했던 만화문화 운동이었다.

 

이들 신진 만화가들은 이미 ‘만화는 세계 공통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만화로 온 세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그림만으로도 메시지 전달이 가능한 작품을 발표해서 세계인들에게 우리 만화의 위상을 높여보자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변화를 두려워하고 오직 상업적 목적만 생각하는 기존 출판사의 비협조와 발표 지면의 부족으로 그들의 만화 운동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 버렸다.

 

5. 16. 직후에 생긴 불량만화를 자율적으로 정화하자는 취지로 발족한 ‘아동만화심의자율위원회’에서 황정희는 심의위원으로 2년 정도 근무를 했는데, 꼿꼿한 그의 성품을 눈여겨본 ‘박기당’의 추천으로 심사위원장을 맡게 된다.

‘박기당’은 당시 만화 출판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거물이었었다.

 

일본 만화를 훔쳐 작품을 하던 풍조가 만연했던 시절에, 깐깐한 황정희의 심의 기준으로 사업에 지장을 받게 되자 신촌출판사 이영래 사장은 황정희의 친구인 신동우를 불러 심의를 좀 느슨하게 해 달라고 협박과 사정을 했었다고 했다.

‘쇠꼬챙이’처럼 검열을 한다는 소문으로 만화가들 사이에서는 황정희가 출근하는 날에는 심의 받는 걸 피하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심의를 까탈스럽게 꼼꼼하게 본다는 소문 덕에 만화가협회 감사가 되었으나, 회장단과 임원들이 갹출해서 모은 돈으로 운영하는 만화가협회의 집행 예산이라 액수가 작아 감사를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고 했다.

 



만화가에서 방송사의 인기 일러스트레이터로 변신

일간지 4컷 시사만화를 해 보고 싶었던 황정희는 <조선일보>에서 화백 모집 공고를 보고 ‘돌메주’라는 캐릭터로 40~50매 작품으로 투고했는데 선정되지 않았고, 6편의 작품만 <소년조선>에 게재되었다.

황정희가 일간 신문만화에 게재한 것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일간 신문에 연재해 보는 꿈을 버리지 못했던 황정희는 영자신문 <코리아 헤럴드>의 지면에 도전을 한다. 김용환 선생이 연재했던 ‘코주부’ 만화 자리가 비었다는 걸 알고 편집실로 찾아간 것이다.

외국 만화 신디케이트에서 구입한 해외 만화만 게재하고 있었던 <코리아 헤럴드>에서는 예산이 없어 국내 만화가에게 청탁을 못 한다며 난색을 표했다.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우리나라 신문에 우리 만화가 있어야 한다는 설득과 함께, 원고료에는 연연하지 않겠다는 황정희의 끈질긴 의지에 편집팀에서는 네 칸 만화 ‘김주사’ 연재를 시작하게 했다.

 

영자신문에 들어가는 만화이기에 영어가 모자라는 황정희로서는 대사가 없는 팬토마임 만화로 시작했다. 팬터마임으로도 메시지 전달에 한계가 생길 때는 내용 전달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말풍선에 들어가는 대사에 번역이 필요했다.

그 번역료는 황정희가 받는 적은 원고료에서 떼어주며 연재를 했지만, 한국 정서를 담은 황정희의 만화가 외국인들에게는 공감을 못한다는 편집진의 부정적인 평가로 고달팠던 영자신문 연재를 마친다.

외국인을 위한 영자신문 <코리아 헤럴드>에서는 독자들이 관심 가지는 정치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다룰 수 없는 매체로서 소재 선택의 한계가 있었다.

 

출판사 사정이 안 좋고 잡지사에도 원고료 지급이 원활하지 못했던 환경에서 발표할 곳을 찾지 못하던 황정희는 1982년 경에 만화 출판계를 떠난다. 대신 만화가를 초청해서 행사하던 백화점과 호텔, 자선단체 이벤트에 초청받아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일을 시작한다.

능숙했던 황정희의 캐리커처는 대단한 인기여서 몰려오는 손님의 요구대로 그려주자면 감당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기다리는 손님들이 고마워서 황정희는 팔이 아프도록 그리는 중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독일 병정’이라는 별명의 윤재경 피디가 황정희의 활약을 듣고 방송사의 프로그램 진행에 필요한 일러스트 그리는 일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한다. 처음에는 신인 대우의 개런티만 받고 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출연했던 황정희는 프로그램에 필요한 만화적 아이디어까지 더한 재치 있는 일러스트를 그렸는데, 그의 만화 일러스트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새로운 영역에서 관심을 받은 황정희의 인기는 어린이 프로그램 그림퀴즈 코너인 <모두 모두 잘 한다>에서 출연 요청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방송사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 성패를 알 수 없어 조심스럽게 황정희를 신인 작가 개런티로 대접을 했지만, 폭발적인 인기에 따라 기성작가로 대접하며 원고료를 올리니 그의 진가가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황정희에게는 방송사의 일은 만화 그리는 일보다 편했다. 슬쩍 지나가는 화면에 만화 일러스트로 메시지만 전달하면 되기 때문에 만화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만큼의 고민 없이도 그릴 수 있어 부담이 없었다. 출판 만화 원고 그릴 때처럼 정성을 들일 필요 없이 매직으로 굵은 선으로 그린 황정희 특유의 편한 만화체 그림이 프로그램에 맞아떨어지니 일거리가 쏟아져 ‘내 팔자에 자동차도 살 만큼’ 돈을 벌었다.





△ 황정희 작가 카툰




만화는 역시 ‘카툰’이지 

방송사의 일을 하기 전에는 <만화가협회> 일에도 열심히 참여를 했고, 노석규, 이성박, 김원빈, 김창수, 이우헌, 이재학과 같이 다니며 우의를 다졌는데, 너무 바빠진 황정희는 동료들은 물론 출판사까지 인연이 멀어졌다.

발송사의 프로그램 개편에도 황정희는 꾸준한 인기로 살아남았지만, 끊임없는 밤샘 작업으로 수면 부족과 불규칙한 식사는 방송인 황정희를 힘들게 했던 생활이었다.

 

방송사 일에 손을 뗀 황정희는 젊어서부터 관심을 가졌고, 늘그막에 새삼 매력에 빠진 작업이 한 칸 만화 ‘카툰’이었다. 고등학교 적부터 ‘이상한 가게’에서 본 <플레이 보이>는 청소년 황정희에게도 호기심을 부추겼는데, 그 잡지에 실린 사진도 흥미로웠지만, 사진보다 관심을 가진 제임스 서버(James Grover Thurber)의 카툰에 매료된 것이다.



△ 제임스 서브와 그의 작품


만화의 정수는 역시 한 컷 안에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다 들어 있고, 보면서 생각하게 하는 카툰이 좋다는 황정희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때마다 카툰 습작을 틈틈이 했다.

그동안 모아 둔 작품으로 카툰 전시회를 열고 싶어 했지만, 전시경비를 마련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생전에 이루지 못했다.

 

“만화의 매력은 독자에게 친절하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황정희는 늘 ‘돈을 벌기 위한 만화가 아니라 예술로서의 만화’를 고집했지만, 자신의 만화 인생을 초로와 같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말년에는 외로워했다.

그를 좋아했던 후배와 독자가 많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고 훌륭한 예술을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며 살아왔지만, 흘러가면 잊어버리는 세상인심이 야속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막연히 화가를 꿈꾸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만화가가 된 것이 더 좋았다고 생각했던 황정희는, 다시 기회가 된다면 자신의 정서에 맞는 카툰과 접목시킨 동양화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우리 만화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 고집스럽게 한국 전래 만화만 그렸고, 만화를 빼면 잘 한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갈등도 후회도 없는 만화 인생을 보냈다는 황정희 선생은 칠순을 겨우 넘기고 좋아했던 만화 세상과 이별을 하셨다.

 

척박했던 만화계에서 견디며 꿋꿋하게 견뎌 주셔서 지금 같은 좋은 환경의 만화계가 될 수 있도록 자리 지켜주신 원로 선생님들과의 추억을 남기고 싶지만, 사진과 작품 관련 이미지 자료를 모아 두는 일에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황정희 선생을 생전에 만나 취재를 했던 자료를 찾아 정리했고, 부족한 부분은 ‘만화규장각 한국만화사 구술채록연구 10권’에서 보충을 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