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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행을 부르는 1화의 기술

수많은 작품이 난무하는 이 시대, 작품의 운명은 1화에서 판가름된다는 말까지 나온다. 어떻게 해야 독자를 사로잡는 매력적인 1화를 만들 수 있을까?

2021-06-22 1화빌런


정주행을 부르는 1화의 기술


웹툰을 처음 시작했을 때, 첫 화의 완성이 너무나 큰 산처럼 느껴졌다. 연재를 시작하면 수백 개의 회차들을 매주 제작해야 할 텐데, 고작 1화부터 이렇게 힘에 부치다니… 하지만 오랜 기간 공들여 준비한 작품이 단 1화로 운명이 결정된다고들 하니 적당히 타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간 운 좋게도 1화의 중요성에 공감해주시는 실력 있는 작가분들을 만나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1화를 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작품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연재 전날까지 부랴부랴 1화를 다듬는 걸 보면 1화에 대한 집착은 쉬이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그럼 어떤 1화가 독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우리 스튜디오에서 늘 고민하고 있는 문제다. 물론 작품별 분위기나 장르에 따라 1화의 구성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모든 웹툰의 1화는 챙겨 보려고 노력하고 연구한 지난날들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1화의 특성들을 어느 정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첫 번째, 1화 안에 나름의 기승전결이 있는 구성을 선호한다. 거기에 반전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좋은 예를 꼽자면 네이버웹툰의 <스터디그룹>(글 신형욱, 그림 유승연)이 있다. 공부를 잘하고 싶지만 공부에 소질이 없는 주인공, 그가 다니는 꼴통 학교에 어느 날 예전 과외 선생님이 담임으로 부임한다. 교육 사명감이 투철한 선생님이 일진 학생들에게 굴욕을 당하는 바로 그 순간! 주인공은 숨겨 둔 무술 실력을 드러내 일진들을 응징한다. 주인공 캐릭터의 설정과 주요 인물들 간의 관계, 메인 스토리의 배경과 주인공의 행동 동기, 그리고 맛깔나는 복선과 반전까지 담아낸 풍성한 1화로 다가왔다.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를 봐도 1화에 담길 만한 서사가 웹툰 한화에 차곡차곡 담긴 느낌이랄까. 군더더기 없는 탄탄한 구성으로 1화에서부터 충분한 몰입감과 완성된 재미를 제공한다면, 믿고 보는 작품이라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다.



△ <스터디 그룹> 1화 中
컷 1의  '괜찮은 신간이 나왔어', '오늘 밤은 아주...'라는 대사와 빨간색 표지의 책은 
컷 2의 '남자애다 보니...'라는 대사와 함께 컷 2의 '엉뚱한 거'가 야한 잡지류의 포르노일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하지만 1화의 말미에서 '엉뚱한 거'는 사실 무술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컷 3)

두 번째, 작품 전반의 스토리와 스타일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1화가 좋다. 마치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처럼, 1화는 이 작품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를 안내하는 이정표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들었던 예시인 <스터디그룹>의 경우,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1화에서 명확하게 보여준다. 청량감 가득한 일진 격퇴물이며, 너무 무겁지만은 않은 코믹 액션, 여기에 사제 간의 로맨스 한 스푼까지? (그런데 이 모든 일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니...!) 1화 말미에는 주변 일진들 사이에 주인공의 무용담이 퍼지는 내용이 등장하며 앞으로 펼쳐질 주인공의 험난한 고생길을 예고하기도 한다. 해당 장르의 팬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1화가 아닐까. 작품에 달린 댓글들을 봤을 때 독자들도 같은 생각인 것 같다. 흔히 연재만화는 매 화마다 다음 화를 보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1화는 그 선봉장으로, 다음 한 화가 아닌 이어지는 모든 화에 독자들을 인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 번째는 0화, 혹은 프롤로그를 활용하는 구성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도저히 위에서 열거한 구성을 만들 수 없을 때를 대비한 차선책 같은 구성이다. 간단히 말하면, 본 공연의 열기를 끌어올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바람잡이를 먼저 내보내는 식이다. 작품 시작 시점을 기준으로 꽤 미래에 일어날 어떤 화려한 장면을 티저 형식으로 미리 보여 준다거나, 스토리의 발단이 되는 핵심 사건 하나만 집중적으로 보여 주는 경우도 있다. 그 외에 세계관의 설명에 힘을 쓴다거나, 초반 몇 회차의 내용을 짧게 축약해 구성한 프롤로그도 적지 않게 봤던 것 같다. 각기 다른 작품의 매력을 자유로운 형식을 통해 짧고 강렬하게 각인시킬 수 있다는 점이 프롤로그 회차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 요즘엔 특히나 원작 소설 혹은 다른 IP를 활용해 웹툰을 제작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1화를 온전히 자유롭게 구성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이때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위에서 말한 내용에 기반하여 자동으로 1화 콘티를 제작해 주는 AI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은 요원한 일인 것 같기에 우리는 오늘도 신작의 1화와 씨름 중이다. 앞으로는 새롭고 파격적인 구성의 1화들이 더 많이 등장하여 독자분들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