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화는 누가 보는가?
최근 <미생>의 성공은 만화의 독자층이 성인 일반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비정규직 문제라는 사회적 이슈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만화가 사회적 이슈를 설득력 있고 감각적이며 가독성 높은 이야기로 표현함으로써 성인들에게 만화의 고유한 가치를 어필하고, 이를 통해 성인들의 만화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고양시켰다는 점에서 <미생>은 만화의 독자 확대 잠재력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 할 것이다.
이러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만화의 주된 독자층은 여전히 청소년들이다. 그 이유는 그리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는데, 이를 독자 중심의 접근과 생산자 중심의 접근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독자 중심의 접근은 청소년에 대한 접근성과 가독성의 우위로 대표되는 만화의 특성과 만화에 대한 독자의 인식을 중심으로 한다.
먼저, 청소년에 대한 만화의 접근성을 보자. 청소년을 주요 독자로 하는 만화는 주제, 소재, 등장인물, 내용, 표현에 있어 때로 ‘비교육적’이라는 눈총을 받는 경우(전통적으로 부모가 청소년의 만화 접근을 억제해 온 이유)가 있을 만큼 별다른 제약 없이 넓은 스펙트럼의 작품이 존재한다. 이에 비해, 청소년용 소설은 교훈적인 주제와 다소 진부한 소재를 위주로 하고 등장인물의 성격이 전형적이며 내용도 예상 가능한 범위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표현에 있어서도 유행어나 비속어가 자제되는 등 청소년들에게 현실감을 주지 못한다. 결국 청소년들은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가진 만화에 손을 뻗는 것이다. 접근성의 우위는 상호간 전환 가능성의 비대칭성에서도 나타난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동화 또는 청소년이 읽을 만한 소설은 필요에 따라 쉽게 만화로 제작될 수 있다. 이솝우화나 안데르센 동화, 또는 고전 명작 소설을 만화를 매개로 감상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것이다. 이에 비해 만화를 문자로만 전환하는 경우는 목격하기 어렵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청소년들이 동화나 소설보다 만화에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즉, 청소년들의 주변에는 만화가 넘쳐나는 것이다. 더하여 최근에는 교육만화의 붐이 일면서 그동안 만화에 대해 억제자의 역할을 하던 부모가 오히려 만화로의 접근을 허용하고 나아가 이를 권장하는 현상까지 생김으로써 청소년의 만화에 대한 접근성이 한층 강화되고 있다.
그림과 함께 내용을 파악하는 만화의 가독성 또한 소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어느 정도의 교육수준에 이른 성인들이라면 문자를 통한 언어의 묘미와 유희에 쾌감을 느끼고 문자를 매개로 한 심상의 형성 및 감정의 전달에 익숙하지만, 청소년들은 어휘력과 독해력이 취약하여 다양한 어휘와 문장 구사에 부담을 느끼고 문자에 의한 심상의 형성 및 감정의 전달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명확하고 구체적인 심상을 제공해주는 그림과 간결한 분량의 내레이션 및 대사에 의해 주요 메시지와 감정이 전달되는 만화는 청소년들의 지적, 언어적 발달 수준에 부합하며 청소년 친화적 매체로서 그들의 선호를 얻는 것이다.
다음으로, 만화에 대한 독자의 인식에 있어,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성인들의 선입견은 그들의 만화 구독률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설혹 성인용 만화가 득세하는 경우라도 성인들은 은밀한 독자로 숨어들면서 ‘만화나 읽는 어른’으로 비쳐지는 것을 꺼려한다.
독자 중심의 접근과 함께 청소년이 만화의 주요 소비자일 수밖에 없는 사정은 생산자 중심의 접근에서도 엿보이는데, 생산자 중심의 접근은 청소년용 만화의 제작 효율과 만화 생산자의 제작 전략을 중심으로 한다.
일단 위에서 논의한 독자 중심의 접근, 즉, 만화의 특성과 독자의 인식으로 인해 청소년이 주요 독자층이 된 상황을 전제하자. 이때, 만화 생산자들은 만화 제작의 효율성에서 우위를 보이는 청소년용 만화를 위주로 한 만화 제작 전략을 취함으로써 청소년 독자층의 확대와 성인 독자층의 소외를 가속화한다. 제작의 효율성이란 만화 제작의 상대적 수월성을 의미하는데 청소년용 만화 제작의 상대적 수월성은 다음을 이유로 한다. 즉, 청소년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는 현실에 얽매일 필요 없이 다양한 사건과 관계를 통해 스토리를 전방위적으로 확대시킬 수 있다. 소재 고갈의 목마름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이다. 리얼리티에 있어서도 청소년들은 성인들에 비해 관대하므로 청소년용 만화의 스토리에는 논리적 설득력에 대한 요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따라서 스토리 구성이 성인물에 비해 용이하다. 이러한 특성들은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만화를 기획하고, 스토리 구성의 치밀함에 너무 연연하지 않은 채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만화를 제작할 수 있으며, 일단 시작된 만화를 길게 끌고 갈 수 있는 제작상의 이점, 즉 효율성을 제공한다.
위에서 언급한 제작 효율로 인해 만화 생산자들은 전략적으로 청소년이 주인공이 되는 청소년용 만화 제작을 선호하게 된다.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러한 제작 전략은 청소년에게 남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주요 독자인 청소년의 몰입도를 강화시키고 이는 청소년 독자층의 확대에 기여한다. 그러나 청소년 중심의 만화가 범람하면서 만화를 ‘애들 얘기’로 보는 성인층의 기존 선입견이 정당화되는 계기가 되는데, 이로써 성인 독자층이 소외되며 결국 청소년층이 다시 한 번 만화의 주요 독자층으로 대두되는 순환고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독자 및 생산자 중심의 접근을 통해 우리는 만화의 주요 독자층이 청소년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전통적으로 청소년용 만화의 중심에 있는 ‘소년만화’가 만화계의 큰 지분을 차지했던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대본소를 중심으로 만화의 유통과 구독이 이루어지던 시절부터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명확하게 목격한 바 있는데, 만화계의 축이 웹툰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과연 이러한 전통적 성향이 웹툰계에도 이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소년만화의 모습이 웹툰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지 평가해봄직 하다. 아울러 위에 언급한 독자층 및 생산자층의 사정이 당분간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면 상당한 기간의 미래까지도 만화의 주요 독자층이 청소년일 수밖에 없을 텐데,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만화의 미래가 어떠할지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해 보자.
2. 소년만화란 무엇인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는 주요 등장인물과 내용을 기준으로 소년만화와 소녀만화로 구분할 수 있다. 소년만화와 소녀만화는 이를 수용하는 독자층에 있어 일정한 경계를 형성한다. 즉, 남성 청소년 독자층과 여성 청소년 독자층을 각각 주요 독자층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소년만화와 소녀만화의 구분이 만화의 기획과 전략에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따라서 소년만화와 소녀만화 각각의 정의와 특성들에 대해 논의할 실익이 있는바, 아래에서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소년만화를 중심으로 그 정의, 독자층 및 특성을 제시하되, 필요에 따라 소녀만화와 대비하여 살펴본다.
(1) 소년만화의 정의
먼저 소년만화를 정의해 보자. ‘소년만화’라는 용어는 만화왕국 일본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소년 취향의 만화. 소녀 만화가 사랑을 다룬 멜로가 많다면 소년 만화는 탐정, 모험, 싸움 등의 남성적, 상징적인 내용이 많은 만화” [네이버 지식백과] 소년 만화 [Syounen manga, boy comics, 少年 マンガ] (만화애니메이션사전, 2008. 12. 30.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물론 논자에 따라서는 다른 의미의 소년만화를 거론할 수 있으나, 위 정의가 일견 우리가 생각하는 소년만화의 의미에 부합한다고 보아 이를 바탕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다만 필자는 위 정의에서 ‘소년의 꿈’과 ‘소년의 성장’이라는 요소가 빠진 점을 아쉽게 생각하는바 이러한 요소도 논의의 대상으로 추가하기로 한다.
(2) 소년만화의 독자층
위에서 만화의 주요 독자층으로 청소년을 제시했다. 만화 독자층의 한 범주로서 청소년은 남녀를 통틀어 대략 초등학교 고학년으로부터 고등학생까지를 그 범위로 하며 경우에 따라 초등학교 저학년과 대학생까지를 포함시킬 수 있다. 이러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의 양대 산맥은 소년만화와 소녀만화다. 용어가 암시하듯 소년만화는 주로 남자 청소년에게, 소녀만화는 여자 청소년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서 주제, 등장인물, 소재, 내용에 있어 남성 취향적인 것과 여성 취향적인 것을 각각의 특성으로 한다. 그러나 두 유형의 만화에 있어 그 독자층이 완전한 대칭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언어에 대한 감각과 능력이 남자보다 조기에 발달하고 그 이후에도 우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자의 경우, 청소년 중반기부터 독서의 취향이 만화에서 소설로 자연스럽게 전환되곤 한다. 그러나 여자보다 시각적 자극에 민감하고 언어구사에 대한 감수성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남자의 경우 상당히 늦은 나이의 ‘청소년(?)’인 20대 중반까지도 만화 독자로 남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에서 소녀만화보다는 소년만화의 독자층이 더 넓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소년만화의 특성
위에서 제시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소년만화를 확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정의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그러한 해석은 논자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년만화에 대한 논의에 있어 그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특정 만화를 소년만화로 규정할 수 있는 주요 특성들을 나열해 보는 것이 좋겠다. 이때, 소녀만화의 특성과 비교하는 것은 소년만화의 모습을 좀 더 뚜렷이 부각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첫째, 소년만화의 주인공은 소년이다. 초등학생 정도의 연령에서 중학생 연령까지가 전형적이며 학원물의 경우는 고등학생이 주를 이룬다. 소녀만화의 경우는 사춘기 이후의 여성으로서 소년만화의 주인공보다는 연령대가 높은데, 이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감당할 만한 연령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남녀의 로맨스가 주를 이루는 소녀만화와 달리, 소년만화의 주요 내용은 꿈을 이루기 위한 모험, 대결 또는 경쟁, 그리고 대결이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성장이다. 간간히 이성과의 러브라인이 드러나지만 이는 사건전개의 계기나 중간 중간 스토리의 압박감과 긴장감을 풀어주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 때가 많다. 꿈을 향한 모험, 대결이나 경쟁, 승리를 위한 성장이 소년만화의 주요 내용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래 언급하는 바와 같이, 주요 독자인 소년들 특유의 심리적 특성과 이에 대응하여 이루어지는 만화의 역할과 만화에 대한 소년의 기대를 반영한 결과이다.
소년들에게 펼쳐진 세상은 의문과 경이로움으로 가득하다. 현실을 잘 모르면 모를수록 그러한 의문과 경이로움은 소년의 마음을 세상에 대한 꿈과 환상으로 가득 채운다. 모험에 대한 환상을 오래 전에 잃어버린 ‘늙은’ 어른들과 달리 소년들은 꿈과 환상을 좇아 당장 멀리 떠나고 싶다. 그들은 만화 속 주인공과 꿈을 공유하며 그들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난다. 돌아오면 어른이 되는 그들에게 그 여행은 소년기의 시작이자 끝이다. 한편, 소년에게 어른들은 보호자이자 억압자이다. 보호의 대가는 자유의 박탈이다. 소년은 홀로 설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하여 박탈당한 자유를 되찾고 싶다. 이러한 능력의 증명은 대결이나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승리를 쟁취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때 승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약한 존재로부터 강한 존재로 탈바꿈 하는 ‘성장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성장과정이야말로 소년 독자의 카타르시스를 담보하는 소년만화의 ‘핵’이다. 성장과정이 생략되면 스토리의 설득력이 약화되어 몰입도가 떨어진다.1)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소년만화의 특성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스토리의 저변에 자리하고 있는 ‘우정’이다. 소녀만화가 남녀간의 ‘사랑’이라면 소년만화는 소년들 사이의 ‘우정’이다. 왜 그런가? 소년에 있어 ‘관계’의 상대로서 여자는 적절치 않다. 성애의 상대로서는 금지되어 있고, 놀이의 상대로서는 시시하다. 함께 모험을 즐기기에 같은 소년만한 상대는 없다. 모험의 동료로서, 때론 경쟁자로서, 소년 간에 형성되는 신뢰와 애정 또는 애착은 우정으로 나타난다.
위에서 소년만화의 대표적 특성을 제시했다. 거론될 만한 다른 특성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핵심적 특성만을 제시하는 것은 소년만화를 규정함에 있어 유연성과 탄력성을 제공하고 이로써 좀 더 다양한 만화를 소년만화로 포섭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기 위함이다.
3. 출판만화계의 대표적 소년만화들
전통적인 출판만화(책자 형태로 발표되는 만화)에 있어 위에서 거론한 정의와 특성들에 부합하는 소년만화로는 이상무의 ‘독고탁’ 시리즈가 첫손에 꼽힌다. <비둘기 합창>, <울지 않는 소년>, <달려라! 꼴찌> 등이 대표작이다. 허영만의 ‘이강토’ 시리즈도 자웅을 겨룰 만 하다. 대표작 <태양을 향해 달려라>는 지금 다시 펼쳐도 신선하고 알찬 구성과 기막힌 반전으로 재미와 감동을 만끽할 수 있다. 이들 7~80년대의 우리나라 소년만화들은 불우한 환경 속에서 ‘똘끼’가 충만한 주인공 소년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을 거듭하여 꿈을 이룬다는 전형적 스토리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캐릭터와 스토리 구조는 소년만화의 외면할 수 없는 ‘영원한 클리셰’로서 최근의 소년만화에서도 무난히 목격된다. 당시 소년만화들에서 꿈을 펼치는 공간으로 주로 대두되는 것은 ‘운동장’이다. 즉, 스포츠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포츠야말로 최고가 되려는 ‘꿈’을 향한 진지한 승부가 현실감을 가지고 적나라하게 펼쳐지며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분명한 승패를 보여줌으로써 ‘대결’과 ‘경쟁’을 위한 최적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실력이 ‘성장’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줄 수 있는 곳도 운동장만한 곳이 없다.
90년대로 들어서면 소년만화의 축이 학원물로 옮겨 간다.2) 고등학생들의 학교 내 폭력이 주요 소재인 이들 학원물은 종전 소년만화보다 ‘비교육적’인데, 이런 학원물의 범람은 다음과 같은 사정을 배경으로 한다. 먼저, 당시 해적판으로 떠돌던 일본 학원 폭력물이 은밀히 독자층을 넓힘으로써 학원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다음으로, 군사정권이 물러나면서 사회의 경직성이 완화되고 다소 ‘비교육적’인 만화조차 ‘자유’의 일환으로 수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재학생에 대한 학원 및 과외 전면 자유화나 교복의 재등장과 함께 학교에 갇힌 청소년들에게는 좋든 싫든 바로 그 학교만이 현실적인 유일한 삶의 배경이 되었고, ‘경쟁’에 내몰린 치열하고 답답한 학교 현장에서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폭력은 억압을 해소하는 해방구의 역할을 해준다. 학원물이 청소년 독자에게 어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당시에 연재를 시작한 김태관/임재원의 <짱>이 최근에야 막을 내렸다는 사실, 그리고 최근에도 학원물이 여전한 성세를 구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청소년들의 그러한 사정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
좀 더 최근으로 눈을 돌려보자. 일본만화가 정식으로 수입된 후부터는 이들 일본산 만화들을 외면하고 한국 만화계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그만큼 일본만화들의 영향력과 점유율이 막대한 것이다. 공전의 히트를 친 <드래곤볼>, <슬램덩크>를 위시하여 <나루토>와 <원피스>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지도와 인기를 과시했던,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작품들로서, ‘소년만화’의 범주에 해당하는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즉, 드래곤 볼을 찾아 소원을 이루거나, 멋진 농구선수가 되어 짝사랑 소녀의 관심을 받거나, 최고의 닌자로 인정받고 호카게가 되거나, 온 세상을 다준다는 원피스를 손에 넣으려는 ‘꿈’을 좇아 ‘모험’을 시작한다. 모험 과정에서 때론 라이벌이 되기도 하는 동료들과 ‘우정’을 쌓고, 꿈의 성취를 방해하는 적과 ‘대결’하거나 라이벌 관계의 친구와 ‘경쟁’하면서 ‘성장’을 거듭한다.
최근의 소년만화들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만화적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초능력이나 마법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배경조차 지구를 벗어나는 경우가 흔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예전의 소년만화에 시야가 고정된 (이제는 성인이 된) 독자들에 있어서는 최근의 이러한 경향이 소년만화의 변질, 내지 실종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4. 웹툰에서의 소년만화
(1) 웹툰의 위상
궁극적으로 수천 년 이어져 온 인류의 종이문화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만화계에 있어 출판만화의 지분을 급속도로 잠식하고 있는 것은 컴퓨터 기반 미디어인 웹툰이다. 질 나쁜 종이에 투박하게 그려진 만화로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만화독자 1세대(대략 현재의 40대 중반 이후)들은 매끈한 화면 위 선명한 그림들에 뭔지 모를 거리감과 상실감을 느끼며 웹툰을 만화계의 ‘서자’쯤으로 푸대접하기도 하지만. 항상 ‘대세’는 추종되게 마련이다.
생산자 및 독자 모두에 대한 편의성, 기동성, 거기다 자연친화성(종이와 숲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등 모든 면에서 객관적 우위에 있는 새로운 미디어는 만화독자 1세대의 ‘서글픈 향수’를 뒤로 하고 저 멀리 만화계를 이끌 것이 분명하다.
모든 새로운 발명품은 엇비슷한 행로를 거친다. 촛불의 감성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전구의 출현에 적응하지 못한다. 양쪽의 세가 엇비슷한 과도기를 거치고 나면 이제 세상의 밤은 전구가 밝힌다. 그래도 촛불만이 줄 수 있는 분위기와 효용으로 인해 양초는 살아남을 것이다. 촛불이 살아남는다 해도 촛불문화는 꺼져버렸다. 전구는 촛불문화를 대신할 새로운 문화도 창출한 것이다. 온통 밝아진 세상에서 본격적인 밤문화가 도래했다. 거리는 더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로 넘쳐난다.
웹툰도 그저 기존의 종이만화를 대신하는 것만은 아니다. 웹툰은 만화계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다. 만화 제작에 있어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신속한 만화 제작과 다양한 특수 효과가 가능해지고 배경음악까지 삽입된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까지 목격된다.3) 플랫폼의 개방성으로 인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작가군이 형성되고 일일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작품들이 양산된다. 게다가 작화 실력이 조금 부족한 만화가도 쉽게 데뷔할 수 있으며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득세하기도 한다. 독자층도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특히 만화방 출입에 곤란을 겪어 본의 아니게 만화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 독자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만화를 만끽한다. 이와 함께 독자의 성향도 변화한다. 자투리 시간을 채워줄 가벼운 만화를 선호하며 정해진 시간을 준수하여 다음 화가 업데이트될 것을 요구한다. 댓글을 통한 독자의 반응도 즉각적이다. 심지어 댓글을 통해 작가에게 일정한 스토리 전개를 주문하거나 스토리를 예측하기도 한다. 댓글의 도움을 받아야만 스토리나 표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생산과 소비에 있어 ‘쌍방향성’이 극대화된 것이다. 이제 만화의 기획 및 유통에서 독자 확보에 이르기까지 만화산업은 새로운 시류에 적응해야 한다.
이러한 전대미문의 혁신 앞에서 사람들은 기존의 만화가 새로운 미디어에 안착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새로운 시류에 맞서 과거에 우리의 감성을 살찌우던 여러 장르의 만화는 여전히 촛불을 키우고 있는가? 웹툰에서 소년만화의 존재를 확인해보려는 마음도 이에 비롯된 것이다.
(2) 웹툰에서의 만화 동향
대표적 웹툰 플랫폼인 ‘네이버’4) 에서 눈에 띄는 현상은 기존 출판만화에 비해 가볍고 일상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말초적 쾌감을 자극하는 코믹물이 많다는 것이다.5) 코믹한 상황의 연출도 스토리보다는 순간적 컷이나 대사를 통해 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만화의 대거 등장은 컴퓨터 및 스마트폰의 출현에 따른 만화 소비 행태의 변화에 그 원인을 둘 수 있다. 즉, 종전의 출판만화에 대한 소비가 소설 등의 ‘독서’를 모방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웹툰 소비는 ‘TV 시청’을 모방하는 것이다. 지금 웹툰은 독서처럼 진득하니 긴 호흡으로 감상하지 않고 조금만 시들해도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리는 ‘변덕스러운 독자’로 둘러싸인 치열한 환경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름 진화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전체적 양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만화 장르 역시 건재를 과시한다. 새로운 스타일의 코믹물이 범람하면서도 전통적 스타일의 만화 역시 그 물량이 막강하다는 건 결국 웹툰 플랫폼의 강력한 수용능력 덕분이다. 웹툰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과거 출판이 담당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야말로 무한한 탑재능력을 갖춘 것이다.
결국 웹툰의 만화 동향은 ‘대량성’과 ‘다양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만화계를 풍미했던 거의 모든 유형과 장르의 만화들을 새로운 스타일의 만화들과 함께 웹툰 곳곳에서 동시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웹툰의 엄청난 물량은 만화계의 지평을 넓히고 있으며 만화계는 ‘중흥의 시기’에 들어선 느낌이다.6) 촛불은 횃불이 되어 활활 타고 있다.
(3) 소년만화는 살아있다.
웹툰의 엄청난 물량 속에 다양성이 그 특징으로 대변된다면, 우리는 웹툰의 수풀 속에서 소년만화의 모습도 기대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제목이나 만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만으로도 소년만화임을 짐작케 하는 작품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소년만화는 웹툰에서도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예전보다는 상대적 비중이 줄어들었지만 이는 여성 독자들과 성인 독자들이 대거 새로운 독자층으로 유입되면서 만화 산업의 외연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소년만화의 절대적 물량 자체는 여전한 것으로 평가된다. 웹툰의 소년 실종사건은 루머에 불과했던 것이다!
웹툰에서의 소년만화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일까? 아니면 소년이 성장하듯 다른 모습으로 변했을까? 이제 웹툰에서 살아남은 소년만화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자.
(4) 웹툰 소년만화의 대표적 예와 그 특징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 출판만화에서 소년만화는 초창기 70~80년대로부터 90년대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일정한 변화 양상을 보여 왔다. 따라서 웹툰 소년만화를 종전의 소년만화와 비교하려면 어느 시기를 ‘종전’으로 할 것이지를 결정해야 한다. 현재에 가까운 시점을 기준으로 할수록 웹툰 소년만화의 특이성은 그리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같은 시대에 단지 매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극심한 차이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7) 이에 있어 필자는 80~90년대의 소년만화를 기초로 논의를 진행하려 한다. 그 이유는 위에 제시한 소년만화의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순수한 형태의 소년만화가 주를 이루던 시기가 80년대이고, 이에 대해 일정한 변화 양상이 감지된 시기가 90년대이기 때문에 웹툰에서의 소년만화를 논의함에 있어서도 이 두 시기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능률적이기 때문이다.8)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80년대의 소년만화는 주로 운동장을 배경으로 ‘스포츠’를 통한 ‘대결’과 ‘경쟁’을 내용으로 하며 ‘성장’을 통해 현실 극복의 ‘꿈’을 성취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이에 반해 90년대의 경우는 학교를 배경으로 ‘폭력’을 통한 ‘대결’이 주를 이루며 ‘꿈’에 대한 의미 부여는 빈약하다. 오히려 ‘꿈’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꿈’의 허무함 내지 유치함(?)을 토로함으로써 ‘삶에 달관한’ 듯 보이는 청소년들이 오로지 ‘폭력’을 통한 경쟁에만 탐닉한다.
자, 그럼 웹툰의 소년만화는 어떨까? 대표적 예로 네이버에 연재 중인 SIU의 <신의 탑>, 박태준의 <외모지상주의>, 전선욱의 <프리드로우>를 살펴본다.
<신의 탑>은 거대한 탑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며 최하층에서 가장 높은 층을 향하여 ‘별을 보거나’, ‘여자 친구를 찾겠다는’ 꿈을 성취하기 위해 나아간다. 각 층에서는 주어진 일정한 미션을 수행함으로써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각 미션을 위한 적절한 무기(아이템)나 능력, 또는 팀원 역할이 제시되고 이를 활용하여 등장인물의 능력치를 최대로 올려 미션을 통과한다. 뭔가가 연상되는가? 그렇다. 철저한 ‘게임’의 구조다. 결국 <신의 탑>은 PC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소년들을 위해 게임을 ‘오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외모지상주의>는 전형적인 학원물로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폭력과 로맨스가 주를 이루는데, 못생기고 무능하여 무시당하는 주인공이 ‘완벽한’ 신체를 얻음으로써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곳곳에 외모지상주의에 찌든 세태를 고발하고 이의 극복을 강조한다. 이러한 고발과 극복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잘나고 완벽한 등장인물들은 오히려 외모에 대한 환상과 부러움을 자극한다. 물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와 반대일 것이다. 찌질한 주인공의 인식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장차 ‘외모가 다가 아님’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찌질한 주인공이 ‘남들하고 똑같은 삶’이라는 꿈을 어떻게 실현시킬지 관심이 간다.
<프리드로우>도 전형적 학원물이다. 중학교 시절의 일진 생활을 청산하고 순수한 소녀에 반해 함께 웹투니스트가 되는 꿈을 가지게 된 주인공. 단순하고 순수한 ‘똘끼’ 충만 주인공이 좌충우돌하며 사랑을 쟁취하려 하지만, 무얼 해도 결국 폭력과 연결되어 소녀의 오해를 받는 스토리 라인은 기시감이 들지언정 유쾌하고 재미있다. 컷 구성이나 캐릭터 표정 연출에 발랄함과 재치가 돋보인다.
네이버의 상위 랭커인 위 작품들은 웹툰의 소년만화가 어떠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 특징들은 종전의 소년만화와 비교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종전과 다른 청소년의 놀이문화를 반영한다. 특히 PC 게임의 전형적 요소인 ‘렙업’을 기초로 구성된 <신의 탑>은 이러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소년들이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외모지상주의>, <프리드로우>와 같이 학교가 작품의 무대인 경우가 많다. 이는 90년대 이후의 많은 만화들과 공유되는 특징으로서 학교에 매여 있는 청소년들의 삶에 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셋째, ‘꿈’이 약화되었다. ‘여자 친구를 찾거나’, ‘여자 친구와 함께 하기 위해 웹투니스트가 되거나’, ‘그저 정상인들처럼이라도 살아보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다. 소박한 꿈인가? 최고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이 사라지고, 당장의 문제 해결과 욕구 충족에 연연한다. 넷째, 넓은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모험과 대결이 눈에 띄지 않는다. 광활한 세상에 대한 꿈을 잃어버린 걸까? 그나마 운동장에서 스포츠를 통해 이루어지던 대결과 경쟁마저 사라지고 선생님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학교 구석이나 동네 뒷골목에서 폭력을 통한 대결이 득세한다. 다섯째, 외적인 성장보다 내면의 성장이 강조된다. 주인공들은 거친 성격과 환경에도 불구하고 감성적이다. 매사건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고 감동한다. 여섯째, 우정보다 사랑이 강조된다. 소년들은 이제 조숙해졌다. 성애에 대한 관심에 스스럼이 없다. 세상도 청소년의 사랑에 관대하다.
위에 나열한 특징들은 웹툰 등장 이전인 90년대부터 서서히 등장한 것들이다. 다만 웹툰이 대중화되면서 웹툰으로 두드려져 보일 뿐이다. 소년만화에 있어 주요 특징들이 예전과 달라진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예전과 다른 느낌의 소년만화. 소년만화가 변한 걸까?
5. 결론 - 소년이 변했다.
소년만화의 변화를 앞에 두고 내린 결론. 예전의 그 ‘소년’은 사라졌다. ‘소년’으로 기억되던 모습의 인류는 살아남지 못했다. 혹독한 환경변화로 그들은 절멸하고 ‘신소년’이 등장한 것이다.
신소년들은 꿈을 잉태하지 못한다. 이제 곧 내디딜 세상에 대해 흉흉한 소리들만 들려온다. 세상은 공포로 가득하다. 웬만한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잘 벌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 돈과 빽이 없으면 잘나가기 힘들다고 한다. 자식 교육에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한다. 나이 들어 잘리면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한다.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한다. 좌절하여 스러진 어른들의 모습에서 신소년은 자신의 미래를 읽는다. 미래에 꿈은 없다.
꿈을 거세당한 신소년들에게 열정은 없다. 노력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 운동장에서 땀 흘리려 하지 않는다. 아니 흘릴 시간조차 없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들의 발걸음은 분주하다. 그곳들 외에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남아있지 않다. 목적도 열정도 없이 그저 해야 한다니 하지만 소중한 청춘을 날리는 것 같다. 잠시 짬이 난 그들은 스마트폰과 사랑을 나눈다. 부모 눈을 피해 간 PC방은 은밀한 아지트다. 이곳에 나와 같은 친구들이 모여 있다. 친구와 함께여도 노는 건 혼자서다. 쿠션 좋은 의자에 몸을 길게 늘이고 화면 속 가짜 세상에 몰두한다. 신소년들은 이제 게임을 통해 모험을 한다. 한 번 떠난 모험은 끝없이 계속되고 이제는 돌아와 어른이 되어야 할 소년들은 아직 돌아올 생각이 없다.
음악, 미술, 문학, 영화, 만화 등 인간의 모든 창작 활동은 세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소년만화는 소년의 모습을 드러낸다. 변한 것은 거울이 아니다. 거울 앞에 선 누군가다. 우리에게 조금 낯선 자. ‘새로운 소년’이다. 소년만화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소년의 모습을 비추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 변한 것은 ‘소년’이다. 소년은 변화된 환경에 맞춰 진화해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진화에 저항할 힘이 없다.
미래에도 소년들은 변해갈 것이다. 그에 따라 소년만화도 지금의 모습과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청소년들이 누릴 세상은 점점 더 쪼그라들어 갈까? 예전의 소년만화에 대해 향수를 가진 어른이라면 소년들이 꿈과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기획해보는 게 어떨까? 그런 세상이라면 그대들이 보던 그 소년만화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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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소년만화의 주요 예에 해당하는 <드래곤볼>을 보면 성장을 위한 훈련 과정과 훈련의 성과를 ‘증명’하는 장면이 다수 등장한다. 즉, 첫 번째 대결에서 겨우 승리하거나 아니면 승패가 유보된 후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기발한 훈련과정이 제시되고, 이를 거치고 나면 이전의 대결에서 겨우 승리했던 상대를 다시 만나 이를 가볍게 제압하거나 승패가 유보되었던 상대와의 새로운 대결에서 당당히 승리함으로써 주인공의 성장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2)학원물을 전형적인 소년만화로 보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치밀한 분석이 필요하나, 이 글에 있어서는 일반적 견해에 따라 소년만화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 보고 논의를 진행한다.
3)수요일자 네이버 웹툰, 정은경/하일권의 <고고고>를 보라. 전통적인 만화적 감성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웹툰의 무한한 기술적 잠재력을 시사한다.
4)웹툰 플랫폼으로 네이버 외에 ‘다음’이나 ‘카카오페이지’ 등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독자 점유율이 가장 높은 웹툰 플랫폼으로서 네이버만을 표본으로 거론한다. 글의 목적상 이로써 충분하리라 본다.
5)대표적으로 조석의 <마음의 소리>. 더불어 신태훈/나승훈의 <놓지마 정신줄>, 마인드C의 <윌유메리 미>, 미티의 <야부리맨> 등.
6)이러한 현상의 공과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다음으로 미룬다.
7)물론 매체 특성에 따른 차이를 예상할 수 있지만 이는 주로 기술적이거나 지엽적인 것에 머물 것이다.
8)앞서 언급한 <나루토> 등 최근 소년만화들의 다수는 80~90년대의 소년만화와 유사한 기본 틀을 갖추고 있다. 단지 배경이나 설정이 좀 더 ‘만화적 상상력’에 충실함으로써 차별성을 가질 뿐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소년만화에 대한 또 다른 주제로 논의할 내용으로 여기서는 상론을 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