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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의 판타지여, 자네 이리 변했는가!

멀지 않은 과거, 터무니없이 로맨틱하다는 말은 순정만화의 또 다른 정의였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모든 여자들의 꿈이자 목표라고 여겼던 때도 있었다. 젊고 잘생긴 남자가 관심을 보인다면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과 로코(로맨틱 코미디)를 찍는다는 신조어를 쓰는 시대가 요즘이다…

2015-10-27 김상희
국내 판타지 순정만화의 시대별 변화상

멀지 않은 과거, 터무니없이 로맨틱하다는 말은 순정만화의 또 다른 정의였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모든 여자들의 꿈이자 목표라고 여겼던 때도 있었다. 젊고 잘생긴 남자가 관심을 보인다면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과 로코(로맨틱 코미디)를 찍는다는 신조어를 쓰는 시대가 요즘이다. 순정만화는 허황된 백일몽과 환상 속의 로맨스만을 뜻하는 오명이자 악명이었다. 여기에다가 판타지라는 외투를 두르면 순정만화의 편견은 흠잡을 데 없이 완성된다.

억울하다. 순정만화가 철없는 여자들의 실현 불가능한 꿈을 자극하는 것에만 몰두한다는 말은 부당하다. 그 말은 곧 소년만화가 학교폭력으로부터 청소년을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불온서적이며 성인만화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으로 등치시키는 것과 같다. 
대한민국 소녀와 여성들이 보았던 순정만화는 백마 탄 왕자님만을 오매불망 바라보게 만들지 않았다.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를 읽으며 프랑스혁명을 공부했고 이정애의 <루이스씨에게도 봄은 오는가>로 말러의 교향곡을 찾아 듣게 했다. 강경옥의 <별빛속에>를 통해 평행우주를 알게 됐고 김진의 <바람의 나라>로 삼국유사를 들춰보게 만들었다.

교양지식을 쌓은 것만은 아니다. 밀레니엄을 앞둔 십대들에게 이강주의 <캥거루를 위하여>와 이빈의 < Girls >
는 또 다른 일기장이었다. 나예리의 <네 멋대로 해라>와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 유시진의 <쿨핫>은 빙산 속에 용암을 품은 당시 중2병 환자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천계영을 만나서 폭발했다. 이후 코미디가 강화된 <궁>, 스토리의 응집력이 뛰어난 <파한집>, 판타지 미스터리를 표방한 <밤을 걷는 선비>처럼 장르적 특징과 작가의 개성이 한층 부각됐다. 그리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 만화잡지 시대에서 웹툰의 시대가 열렸고 순정만화는 피할 수 없는 변화를 맞아야 했다.

한승원, 이영란, 하시현으로 연결된 로우틴(low-teen) 학생을 위한 멜로드라마는 마루의 <나의 빛나는 세계>로 이어졌다. 강모림, 김나경, 심혜진의 정통 코믹 순정만화는 난다의 <어쿠스틱 라이프>, 루나의 <루나파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진경, 이애림 등의 여성적 내면을 깊숙이 다룬 이른바 여성만화는 앙꼬의 <삼십 살>, 완자의 <모두에게 완자가>로 그 잠재적 특징을 드러냈다.

더 놀라운 것은 웹툰의 대부분이 판타지 로맨스를 표방하고 있고 최근의 네이버와 다음 웹툰 공모전의 참가작을 살펴보면 이런 현상은 명확하게 나타난다. 독자층의 변화, 온라인 플랫폼의 특징, 게임 등의 영향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판타지 로맨스가 가진 무한한 이야기의 확장성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헬조선의 7포 세대에게 판타지 로맨스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는 강력한 상상의 세계이다. 사회적 규범과 도덕, 인종과 성 혹은 젠더, 더 나아가 태양계와 은하계, 시공간마저 넘나들 수 있는 무제한의 무대이다. 그 안에서 나와 이웃, 사랑과 헌신, 평화와 박애를 포용력 있는 드라마로 다룰 수 있는 것도 순정만화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경쟁과 정복의 시선이 아닌 관심과 애정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순정만화에서 일개 로맨스가 인간과 우주에 대한 통찰력으로 번지는 일이 어색하지 않다. 신일숙과 김혜린의 대하 역사드라마, 강경옥, 권교정의 SF만화, 천계영의 학원만화, 만물상과 쵸밥의 웹툰을 관통하는 하나의 맥이 존재한다. 우리는 순정만화를 통해 나와 이웃, 인간과 세계를 배웠고 또 그런 만화를 원하고 있다. 순정만화는 사랑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한 공주와 왕자는 어디서 왔나!
우리가 알고 있는 판타지 기반의 문학, 영화, 만화 작품은 대부분 역사와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작금의 순정만화를 대표하는 박소희의 <궁>, 조주희, 한승희의 <밤을 걷는 선비>와 같은 만화도 조선시대의 설정이나 배경을 둔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상의 조선 왕조시대 속에서 난데없는 왕세자비가 되어야 하는 평범한 여고생의 판타지를 실현한 궁. 조선시대의 뱀파이어라는 동서양의 판타지 하이브리드를 실험한 <밤을 걷는 선비>. 두 만화에서 조선시대란 전통과 법도라는 구세대적 세계관을 상징한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성장과 좌절의 걸림돌과 도약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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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역사와 신화적 고증을 픽션에 연결한 팩션(faction)의 열풍은 근래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1980년대의 대표적 순정만화 중에서 역사와 판타지를 바탕에 두지 않는 작품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다. 이런 현상에는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준 막대한 영향과 당시 검열제도로부터의 피신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리핀 멤피스의 지적인 카리스마가 더 빛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혁명과 유사한 시대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흔들리는 죽음의 신 에일레스의 불완전한 모습도 인간의 감정을 가진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특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과 신화적 요소는 기존의 순정만화를 더욱 더 고전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렇게 대하 역사극과 같은 순정만화의 수작(秀作)들이 80년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건 70년대에 독점적 대본소 만화 시장의 횡포와 사전검열, 일본 순정만화 해적판의 보급으로 새로운 순정만화에 대한 수요가 널리 확산됐기 때문이다. 박인하 평론가의 <누가 캔디를 모함했나>에 따르면 60~70년대 형성된 엄희자, 민애니의 소녀만화가 인기를 끌었지만 엄격한 사전검열과 왜곡된 만화 대본 시장으로 인해 공백기를 거쳐야 했다. 소년만화, 명랑만화, 성인만화로 구분 지을 수 있는 비순정만화는 인기를 끈 반면 순정만화는 권선징악을 강조한 진부한 내용에서 발전하지 못했다. 사전검열로 보수적인 도덕관을 권장하고 효심어린 이야기만을 유도하는 고리타분한 내용을 반복한 까닭에 독자의 관심를 얻지 못했다. 또한 독자층의 수요가 아닌 대본소 수익에 따른 공급조절로 발행 종수를 제한하면서 순정만화의 입지는 좁아졌다. 그 자리에 일본 해적판 만화가 등장했고 독자들은 새로운 순정만화를 찾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80년대에 이르러 순정만화의 붐을 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방대한 서양 역사와 신화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군상이 만드는 흥미진진한 드라마가 펼쳐진 것이다. 여주인공의 활동 또한 계모와의 갈등, 식모살이의 서러움 등 가정과 가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더 넓은 무대로 확대됐다. 왕족과 평민을 오가며 온갖 모험을 겪고 사랑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바탕으로 내면적으로 성숙해진다. 캐릭터 묘사도 일본만화의 영향으로 실제 인간 신체 비율에 가깝게 그리기 시작하면서 리얼리티를 살리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80년대 순정만화는 역사와 신화라는 배경 설정을 통해서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60~70년대의 천편일률적인 이야기와 그림으로 점철된 소녀만화가 80년대에 이르러 대하 역사드라마를 통해서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구성, 다양한 인물 묘사의 시도에 성공했고 그로 인해 순정만화의 부흥기가 도래한 것이다. 
<굿바이 미스터 블랙>, <불새의 늪>, <엘 세뇨르>의 성공으로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아류가 아닌 한국순정만화 시대를 새롭게 연 황미나. 지적이면서도 고뇌하는 인물로 성인 독자층에게 사랑받은 <북해의 별>, <테르미도르>, <비천무>의 김혜린. SF라는 장르에서 섬세한 내면의 결을 표현하는 <별빛속에>, <라비헴폴리스>의 강경옥. <아르미안의 네딸들>, <리니지>를 통해 고전적 인물을 살아 숨 쉬게 하는 능력을 발휘한 신일숙. 모두 각자의 장기를 역사와 신화, SF라는 배경과 소재를 통해서 한국의 순정만화라는 의미를 재정의했다. 독점 대본소 시장의 폭력에 가까운 갑질 횡포와 사전검열에 의한 질적 저하로 작가와 독자의 끊겼던 다리가 다시 이어진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작가의 개성적인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이후 90년대의 순정만화 잡지 시대를 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배경에는 판타지 순정만화의 자유롭고 고전적인 스타일이 한몫한 것이다.


고전적 판타지로 고뇌하는 인간 영웅을 그리다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리니지>, <파라오의 연인>
순정만화 팬들에게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개성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그린 여자주인공들의 드라마틱한 일대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신화와 역사를 절묘하게 조합한 작가의 구성력이 받치고 있다. 서양사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그리스 신화와 역사, 그 주변인 페르시아와의 전쟁사가 운명을 개척하려는 네 여인의 삶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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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비롯해 이후 <리니지>, <파라오의 연인>처럼 비범한 운명을 가진 인물은 작가의 주요 테마로 다뤄졌다. 왕실의 적통, 신과 요정의 혼혈 등 고귀하고 범상치 않은 혈통의 주인공을 내세우고 그 태생으로 인한 고난을 겪는다. 이런 특징은 당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순정만화 속 주인공이 뛰어난 지식과 가까이할 수 없는 품위, 따뜻한 인품을 상징하는 요소로 쓰였다면 신일숙의 만화 속 주인공들에게 혈통은 곧 벗어나고픈 굴레이자 피할 수 없는 운명과의 싸움을 의미한다.

오이디푸스를 비롯한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문학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인간은 신과 운명의 손바닥에서 추풍낙엽처럼 흔들리다 추락하는 보잘것없는 존재다. 이런 고전 문학적인 인간의 해석을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특히 레 마누와 레 샤르휘나의 상반된 인생역정에서 잘 나타난다. 오로지 아르미안의 부국강병만이 인생 목표였던 레 마누에게 인간적이고 여성적인 삶이란 사치에 불과했다. 탐욕스런 인간들 사이의 암투로 가득한 레 마누의 인생은 네 자매의 장녀, 한 나라의 여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강한 아르미안의 재건이라는 사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친아들마저 포기한 레 마누에게서 신이 점지한 운명 속에서 비극적 생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리스 비극 문학 속 인간들을 엿볼 수 있다. 

레 샤르휘나 또한 좀 더 확장된 스케일의 고난을 겪는다. 유한한 인간인 레마누와 달리 레샤르휘나는 산신 쿠울레의 아들, 플레니스의 딸이다. 즉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이유로 운명의 상대를 비롯한 모든 모험이 신과 인간의 경계에서 일어난다. 직접 신과 대화하고 죽음과 싸우며 요정과 우정을 나눈다. 신과 대적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음에도 소중한 친구들의 희생 끝에 불새의 깃털을 가지고 다시 아르미안으로 돌아온 레 샤르휘나. 그녀에게 불새의 깃털은 강력한 운명 속에서 얻은 사랑과 우정, 헌신과 희생이라는 인간의 고결한 가치를  상징한다.

이처럼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운명은 서양 고전문학 속 인간의 고뇌와 욕망을 만화 속에서 그대로 재현한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태생적 운명으로 비롯되는 레 샤르휘나의 모험.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끝없이 투쟁하는 레 마누의 생애. 이러한 영웅 서사시를 로맨스 중심의 순정만화에서 그려냈다는 점이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가치이다. 레 마누가 마지막까지 모성에 대한 고뇌로 인간적인 영웅의 면모를 드러냈다면 레 샤르휘나는 에일레스와의 섹스를 로맨스의 완성이 아니라 귀향이라는 임무를 방해하는 유혹으로 여기며 임무완성을 위해 미루는 전통적 영웅으로 그렸다. 즉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주체적 여성을 그렸다는 평가에서 나아가 남자 중심의 영웅 이야기를 여성으로 완벽하게 대치해서 완성했다고 보아야 한다.

후속작인 <리니지>에서는 본격적인 남성 캐릭터의 대립을 보여주며 영웅 이야기에 더욱 더 몰두한다. 주인공 데포로쥬와 반왕 켄 라우헬의 극명한 대립은 캐릭터의 성격뿐만 아니라 이야기 전체를 이끈다. 왕족과 농도의 태생적 차이, 빼앗긴 왕좌와 가족을 되찾아야 하는 의무와 폭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는 욕망, 동료들의 희생으로 한 단계씩 정의를 바로잡는 서글픈 영웅과 자신만의 슬픔과 고독과 홀로 싸워야하는 인간적인 악인. <리니지>의 두 남자 주인공은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레 마누와 레 샤르휘나의 갈등선을 어깨에 짊어지고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발버둥치는 인물의 여정으로 고전 문학의 비극적 특징을 강조했다면 <리니지>는 정의와 질서, 권력과 욕망을 상징하는 왕좌를 가지고 치열하게 싸우는 두 인간을 대립시킨다. 유한한 인간의 무한한 꿈과 욕망을 이루려는 모습을 정통 영웅서사시의 구성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선한 데포로쥬의 모험보다는 악한 켄 라우헬의 인간적인 고뇌에 독자들이 더 공감했고 그로 인해 데포로쥬가 어떻게 왕관을 되찾느냐보다 켄 라우헬이 어떻게 몰락하느냐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절친이자 선한 마법사인 조우가 흑마술을 쓰고 실명에 이르는 걸 봐야 하는 데포로쥬의 비극보다 이복형제인 마팅겔을 이용한다는 양심에 괴로워하고 흔들리는 가드리아의 마음을 잡지 못하는 켄 라우헬의 애절함에 더 공감했다. 이런 탓에 두 캐릭터의 인기 경쟁이 누구의 손을 들었는지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전문학의 판타지 모험담 요소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인간에 대한 통찰을 놓치지 않는 <리니지>는 고전적 판타지 순정만화의 대표작으로 평가해야 된다는 점이다.

<리니지>의 완간 이후 발표한 장편 <파라오의 연인>은 판타지보다 미스터리에 방점을 찍은 드라마이다. 비현실적인 미모와 순수함을 가진 신비의 소년 페닉시오와 그를 숭배하고 이용하려는 인간들의 욕망이 뒤엉킨 이야기를 펼친다.
<파라오의 연인>에서는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들을 선보였던 이전 만화와는 달리 신비로운 미소년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푸는 데 노력한다. 4천 년 전 석관에서 깨어난 페닉시오와 그가 애타게 찾는 헤라크티의 정체. 아름다운 이 두 사람을 둘러싼 인간들의 탐욕과 질시로 벌어지는 살인과 음모. 파라오의 영면을 깨운 저주라는 고전 판타지 소재를 차용해서 미스터리를 한층 부각시키고 속된 인간들의 세상과 순수한 페닉시오와 헤라크티의 영원한 사랑을 대비시킨다.
<파라오의 연인>은 <아르미안의 네 딸들>과 <리니지>보다 스토리의 구성이 촘촘하다. 그것은 이전의 만화가 인간을 강조하는 드라마인데 비해 <파라오의 연인>은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형식 속에서 지고지순한 사랑을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공주대 장은영 박사의 <순정만화의 환상서사 특성연구>에 따르면 순정만화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은 현실을 초월한 사랑으로 상정하고 순수와 이상을 실현하는 낭만적 성향을 판타지를 통해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파라오의 연인>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낭만적 이상을 환생이라는 판타지적 요소를 입혀서 스릴러 드라마로 독자들을 몰입시킨다.

위와 같은 만화들을 살펴보면 남녀 사이의 로맨스를 바탕에 두되 다양한 인간상을 그린다. 정의와 사랑을 지키려는 선한 인간과 욕망을 이루려는 악한 인간의 대립을 서구의 역사와 신화를 배경으로 총동원한 작가의 개성과 노력이 드러난다. 신과 요정, 기사와 공주와 같은 판타지 세계의 요소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 자연의 섭리와 운명의 굴레와 같은 철학적 주제까지 포용해서 만화화하는 데 성공했다. 고전적 판타지의 주제와 구성을 충성스럽게 지키는 작가의 노력이 빛나는 순간이다.


순정만화 잡지 시대와 십대 독자들의 상관관계
90년대에 접어들자 순정만화의 인기는 전례 없이 뜨거웠다. 순정만화를 볼 수 있는 창구도 변화했고 작가 수도 늘었으며 독자층 또한 확대됐다. 대본소용의 얄팍한 책자에서 순정만화 전문잡지가 폭발적으로 창간됐으며 정식 단행본도 속속 발매됐다. 어둡고 구석진 대본소에서 대하 역사극과 같은 장기 연재만화 일색에서 잡지와 단행본을 통한 단편과 중편, 다양한 소재의 순정만화를 만날 수 있었다. 황미나, 신일숙, 김혜린, 김진 등 당시 인기 작가 9명이 만든 동호회 ‘나인’의 회지 <아홉 번째 신화>는 장편 역사극에서 벗어나 새로운 순정만화를 창작하려는 열망을 드러냈다. 

이런 분위기는 1988년, 첫 순정만화 잡지 <르네상스> 창간으로 이어졌고 몰래 빌려서 보는 만화가 아닌 당당하게 사서 보는 만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르네상스>의 인기에 많은 순정만화 잡지가 창간되고 폐간됐다. 1988년부터 2010년까지 발매됐던 순정만화 잡지는 총 20여 종이 넘었고 1999년부터 2000년에 발간한 잡지는 10여 종이 넘는다. 비록 지금까지 순정만화 잡지가 종이출판해서 남아 있는 건 극소수가 됐지만 당시의 순정만화의 열풍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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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적인 창작환경이 조성되자 신인 순정작가들이 데뷔하기 시작했다. 도제식 훈련으로 만화를 그리고 발표할 수 있었던 기존의 창작환경이 달라진 것이다. ‘나인’을 시작으로 ‘PAC’, ‘ACA’와 같은 동호회에 실력 있는 아마추어 작가들이 등장했고 잡지사들은 공모전과 더불어 동호회를 통해서 예비 작가들을 발굴했다. 문하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만화를 그리던 작가들이 데뷔하자 그에 따라 만화들도 좀 더 풍성하고 다양해졌다. 이런 분위기는 독자층의 변화도 가져왔다. 다양한 순정만화가 발표되고 대여점으로 싼 값에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자 독자층의 연령이 낮아졌다. 성인 여성이 이해할 만한 긴 호흡의 역사 판타지 드라마에서 중고등학교 배경의 십대 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학원물이 인기를 끌었다. 이십대를 아우르는 성인층뿐만 아니라 십대 여학생의 감성과 심리를 자극하는 만화들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진지한 멜로드라마 중심이었던 순정만화가 학교와 사회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판타지 순정만화도 여러 면에서 변했다. 고전적이고 강인한 주인공의 드라마를 내세웠던 경향에서 현실적이면서도 독특한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인기를 끌었다. 이정애의 <열왕대전기>, 이강주의 <캥거루를 위하여>, 유시진의 <마니>와 <신명기>, 권교정의 <헬무트>와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이시영의 < Feel so Good >
등이 그렇다. 원수연의 <아름다운 사냥>이나 김영희의 <마스카>, 서문다미의 <루어>처럼 정통 판타지 로맨스의 명맥을 잇는 작품도 있었지만 작가의 개성과 독자와 한층 더 밀착된 내용의 만화들이 큰 사랑을 얻었다. 이 시기의 판타지 순정만화는 사춘기 여학생의 자의식을 따라 내면의 성숙을 이루는 이야기에 판타지 요소를 가미한 만화가 인기를 끌었다. 이성간의 로맨스보다 나와 타인과의 거리를 의식하고 사람과의 관계 형성과 사회적 자아를 구축하는 과정을 판타지적 설정을 통해서 흥미롭게 그렸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려는 십대들의 변화를 외계인과 신화, 판타지적 요소를 빌려서 갈등과 화해한다. 우리 주변의 일상과 현실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환상을 통해서 성숙해가는 과정이 당시 주 독자층인 십대의 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환상 속에서 교감하는 사춘기 관찰자들
유시진의 <마니>와 <월흔>
유시진의 첫 장편 연재작인 <아웃사이드>와 <마니> 그리고 <월흔>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를 우리 주변의 현실 속에 집어넣어 그리고 있다. 재혼가족으로 만난 희우와 수인, 다인 형제와의 갈등과 화해를 시작으로 십대 청소년과 초능력과 판타지 설정을 결합하는 <아웃사이드>. 용왕의 딸 마니와 그녀의 곁을 지키는 해루가 인간 세상 속에 살면서 각성하게 되는 <마니>. <월흔> 또한 쌍둥이 남매 이든과 기림을 통해서 주변과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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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와 <월흔>의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은 두 종류다. 서두 이야기의 평범한 학생과 그 학생 곁에서 마주치는 또 다른 학생. 평범한 학생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서글픈 이야기를 펼친다. 또 다른 학생은 평범한 친구와 소통하면서 더 깊숙한 내면을 파고든다. 평범한 학생의 고민이 극대화되는 순간 또 다른 학생의 초능력으로 숨겨왔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나게 된다. 
두 만화는 현실세계를 견디는 인물들과 환상세계를 부유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작가는 현실적인 인물들의 고민을 드라마틱하게 그리지도 않는다. 또한 독특한 능력을 가진 인물들을 영웅처럼 표현하지 않는다. 그저 십대 동급생 사이에서 나눌 만한 대화와 교감의 과정만이 새로운 차원을 오가는 환영처럼 드러날 뿐이다. 환영 속에서 나눈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의 교감으로 독자는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고 공감을 얻는다. 

<마니>의 진희와 민형, 서산, <월흔>의 명진과 규호는 나름의 고민을 안고 사는 십대 학생들이다. 진희는 죽은 남동생의 잔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부모에게 방치되어 겉돌기만 한다. 민형과 서산은 소꿉친구였지만 탈선을 일삼는 민형은 서산을 멀리하면서도 그리워한다. 착하고 귀여운 명진은 주영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외모 때문에 불안하기만 하다. 뭐든지 만능인 천명에게 깊은 열등감을 갖고 있는 규호는 집안 사정으로 대학진학을 미뤄야 하는 천명을 비웃지만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다. 마니와 기림, 진희와 민형, 서산, 명진, 규호는 모두 사춘기를 겪고 있는 십대다. 외모도 어디서나 볼 법한 학생의 모습이다. 평범해서 볼품없지도 비범해서 특출하지도 않게 그려진다. 두 친구는 대화와 교감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한다. 내면에 숨겨진 욕망과 고민을 마주할 때 발견하는 환영과 꿈만이 이 만화들의 판타지적 요소이다. 작가는 과다한 환상 세계를 그리는 대신 변화무쌍한 사춘기의 십대가 어른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린다. 이런 점은 강경옥의 <별빛속에>나 서문다미의 <루어>처럼 평범한 대한민국 학생이 우주와 이세계(異世界)를 질주하며 정체성을 확립하는 영웅담 순정만화와 다르다. 만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웃과 주변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주인공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펼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만화 속 등장인물들에게 환영과 꿈은 현실의 고민과 갈등을 풀고 화해하는 장이자 성숙한 깨달음을 얻는 곳인 것이다.

만화애니메이션연구 학술지 24호의 <유시진 만화의 환상성 변이연구>에 따르면 현실세계와 환상세계가 만나는 지점 즉, 2차 세계를 “현실과 연결 되어 있고 완전한 가상의 세계가 아니지만, 현실의 질서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세계로 병립하기 때문에…이처럼 현실세계를 기반으로 하여 2차 세계를 펼치는 형식을 통해 유시진은 친숙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고, 낯설게 진행하여 미스터리에서와 같은 몰입을 이끌어내어 내면의 갈등으로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켜 깊이 있게 전개해나가는 독특한 스타일을 이루었다”라고 주장한다. 
80년대 판타지 순정만화가 드라마틱한 영웅담에서 시작됐다면 90년대에는 단순한 꿈과 환영 속에서 나와 주변 이웃들 사이의 고민과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하는 긍정적 희망을 포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억압적인 학교와 사회,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으로 상징되는 십대 문화를 판타지적 요소를 통해서 화해를 염원하는 작가의 주제의식과 연결된다.


편견과 고립을 피해 도깨비와 혼령 속에서 찾은 안식
말리의 <도깨비 신부>
<마니>와 <월흔>에서의 판타지가 현실세계와 환상세계의 관찰자적 시선을 위한 도구였다면 <도깨비 신부>에서는 좀 더 주인공의 삶에 밀착해서 비현실적인 공포와 고통의 원인이면서도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하는 정서적 안식처 역할을 한다. 주인공 선비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친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지만 친아버지와 새엄마, 이복자매 모두 환영하지 않는다. 선비는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서울에서 고립감과 향수병을 견뎌야 했다. 무당이었던 외할머니와 함께 자라온 선비는 따뜻한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 자랐지만 신기를 가진 무당인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자 동시에 멸시의 대상이기도 했다. 선비는 자신에게도 집안의 내력인 영기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외할머니의 죽음으로 서울에서 악령들과 그 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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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의 <도깨비 신부>는 도깨비와 무당이라는 한국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도깨비와 귀신, 신묘한 무당이라는 판타지 뒤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성인식을 치르는 십대 선비의 외로움이 자리한다. 귀신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선비의 능력에 친아버지와 가족들, 학교와 주변 사람들과 고립된다. 있는 그대로의 선비를 받아주는 것은 오직 외할머니와 도깨비 광수, 그리고 신령들뿐이다. 용신굿을 하는 옥분(외할머니)이 용왕과 대화하고, 장군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둘의 사이가 단순히 신과 신녀라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신을 받들 수밖에 없는 능력을 가진 자의 동반자이자 유일한 친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내력 때문에 선비를 가장 외롭게 하고 고통 속으로 몰고 가는 것은 공포스러운 도깨비나 귀신이 아니라 선비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경멸하고 고립시키려 하는 사람들의 편견과 관습적 태도다. 즉 성인으로 성장해야 할 선비를 보듬어주고 받아들이는 것은 도깨비라는 판타지적인 존재이다. 이기적인 기성세대와 차갑기만 현실사회는 선비를 옭아매려고 하고 오직 도깨비와 신령들만이 선비를 지켜줄 뿐이다.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작가는 “<도깨비 신부>는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리자면 성장만화다. 신선비라는 소녀가 아픔을 겪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성장하는….”이라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선비의 성장은 <별빛속에>의 신혜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레 샤르휘나, <루어>의 하루와 미루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선비가 겪어내는 고난과 아픔은 모험을 통해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영웅담이 아니다. 가족 사이에서 고립되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괴로움에 가출하는 선비의 현실은 사실적이고 냉혹하다. 게다가 무당의 능력을 지닌 탓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 차가운 현실 속에서 자립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선비를 보면서 독자는 혼란스런 사춘기를 견뎌온 시절을 떠올리고 자연스럽게 응원하게 된다. 강력한 무당의 능력을 가진 도깨비 신부, 선비에게 신령과 귀신이 존재한 영적 세계는 부조리한 기성세대와 사회 속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마련하도록 안식처가 된다. 독자도 선비의 드라마틱한 성장과정에 몰입하면서도 도깨비와 혼령이라는 판타지 세계에서 편안해하는 주인공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디지털 만화시대와 다변화된 판타지 순정만화
2000년대에 접어들자 출판만화는 위기를 맞게 된다. 포화상태의 대여점 시장, 국내 창작만화보다 일본 수입만화에의 과몰입, 고속 인터넷의 보급과 게임, 영화의 강세로 출판만화의 구매는 줄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신인작가의 활동무대는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다양한 창작만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이렇듯 오프라인 출판만화의 생태계는 피할 수 없는 온라인으로의 진출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만화를 보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료만화의 결제로 독자를 이끌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온라인 만화 사이트라는 시스템도 출판만화를 스캔해서 서비스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마저도 불법복제로 온라인에 버젓이 유통되어 출판만화의 판매수익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인기 작가를 제외하고는 신인작가들이 활동할 무대가 마땅치 않았고 게임과 영화 등 다양한 영상매체들이 급성장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만화는 일본 수입 만화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중문화 매체들과 맞서야 했다. 그런 가운데 인터넷과 게임에 익숙해진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만화와 그런 환경을 이해하는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짧고 임팩트 있는 내용에 귀엽고 아기자기한 그림의 단편형식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에세이툰이 큰 인기를 얻자 온라인 만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또한 강풀의 <순정만화>가 발표되면서 온라인의 장편만화의 성공을 발판삼아 이후 대형 포털사이트에 웹툰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지금은 출판사가 아닌 대형 포털사이트나 웹툰 전문 사이트에서 정식 연재를 하는 웹툰 작가들의 만화가 TV 드라마와 영화화되면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또한 SNS의 발달로 다양한 만화를 홍보하고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웹툰 작가층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꽃보다 남자>로 만화원작 드라마화 작업이 성공하자 순정만화는 TV드라마와 영화의 스토리를 제공하는 소스로 쓰이기 시작했다. <궁>, <탐나는 도다>, <밤을 걷는 선비> 등 TV드라마의 주요 시청자층인 20~30대 여성층의 눈을 사로잡을 이야기를 순정만화에서 찾은 것이다. 이처럼 출판만화의 몰락에서 웹툰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한국 만화계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판타지 순정만화를 향유하고 있다.  박인하 평론가는 웹툰에서는 고도의 완성미를 갖춘 스토리와 미적으로 독자를 사로잡을 만한 그림을 갖춰야 했던 순정만화가 불리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긴 호흡으로 세밀하게 이야기의 구성으로 짜야 하는 순정만화의 특성상 주 1~2회 연재 방식의 웹툰에서는 소화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페이지 구성과 칸의 흐름도 스크롤 다운에 맞춰서 바꿔야 하기 때문에 화려하고 독특한 칸 편집도 장애가 되기 십상이었다. 컬러작업의 수고로움은 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일본 수입만화의 영향으로 다양한 소재의 훌륭한 작품성에 대한 안목을 만족시킬 새로운 만화가 요원한 상태였다. 이런 점에서 멜로드라마를 강화한 히로인의 일대기나 현실적인 일상의 정서적 감동을 주는 기존의 판타지 순정만화와는 구별될 만한 것이 필요했다. 이미 순정만화의 범주에 속할 만한 명랑 코믹만화, 여성주의 만화와 더불어 BL만화가 꾸준히 발간되어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이와 어울릴 새로운 판타지 순정만화가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정만화에서 기대했던 애틋한 로맨스나 멋진 남자주인공, 재미있는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멋진 남자주인공은 한류스타 아이돌, 치명적인 로맨스는 갈등의 극과 극을 치달리며 시선을 사로잡는 일일 연속극, 재미있고 스펙터클한 판타지 드라마는 장편 영화나 수준 높은 해외 드라마에서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순정만화의 재미를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게 되자 판타지 순정만화도 이전과 달라져야 했다. 
먼저 게임과의 연계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네이버와 다음 웹툰 공모전에서 볼 수 있듯이 판타지 게임 형태의 참가작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점은 판타지 문학과 영화에 기반을 둔 게임 스토리와 설정에 익숙한 독자층을 의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녀의 로맨스뿐만 아니라 작가의 개성과 장르적 특징이 부각되고 있다.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처럼 개와 고양이 등 동물 얼굴을 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애절한 멜로드라마는 TV 드라마와 연극으로도 제작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흡혈귀>, <수퍼 시크릿>처럼 인간과 흡혈귀, 늑대인간, 마녀 등이 공존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리기도 한다. 중세 유럽의 마녀재판을 배경으로 정통 미스터리를 표방하는 <창백한 말>과 동식물의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컷 형식의 <아띠아띠>도 저마다의 개성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평범한 2년차 직딩 이루다가 반복되는 하루의 루프를 깨고 진상 상사의 목숨을 구해야 하는 골드키위새의 <죽어도 좋아♡>도 독특한 소재로 눈길을 끌고 있다.

독자가 아닌 인터넷 사용자로 바뀐 고속시대에서 아름다운 그림과 여운이 남는 스토리의 판타지 순정만화의 변신도 다변화됐다. 게임과 영화, TV 드라마와의 연계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스토리와 그림. 코믹,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와 같은 장르적 특징이 부각된 차별화 전략. 웹툰을 즐기지 않는 사용자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독특한 구성과 표현법. 이런 점들은 판타지 순정만화뿐만 아니라 모든 웹툰이 염두에 두어야 할 특징이기도 하다. 
김보통의 <아만자>, 젤리빈의 <묘진전>과 같은 수작과도 경쟁해야 한다. 이 만화들은 모두 판타지라는 설정을 작가의 개성과 주제에 부합하는 명작으로 평가받는 극만화로 분류할 수 있다. 판타지를 그리지만 모험드라마, 정통 액션이라는 형식을 완성시킨 이런 만화 사이에서 로맨스의 정서와 인간애의 감동을 전달할 방식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판타지라는 소재 설정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고 웹툰에 없는 장르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파편화된 지금, 판타지 순정만화의 구분과 분류가 무의미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정만화의 이상인 지고지순한 사랑과 희생, 나와 타인을 포용하는 따뜻한 인간애라는 순수함을 판타지 속에서 이루려는 만화의 가치를 평가 절하할 수 없다. 오히려 하루 수백 편이 쏟아지는 웹툰 속에서 고지식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순정만화의 이러한 가치를 사용자의 클릭을 위해 미루는 만화들을 경계해야 한다. 비록 그 시절의 소녀와 판타지 순정만화는 남지 않았더라도 그 가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와 만화를 응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식 메르헨에서 신선한 바람이 분다
만물상의 <양말 도깨비>
어찌 보면 만물상의 <양말 도깨비>는 세련되고 빠른 속도로 읽혀야 하는 요즘 웹툰과 비교하면 구식에 가까운 이야기를 그린다. 봄꽃마을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던 박수진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함박눈마을의 빅풋은행에서 일하게 된다. 고향을 떠나 낯선 마을에서 생활하는 수진은 점점 친구들을 사귀며 적응한다. 그러다 양말을 먹는 양말 도깨비 믕과 함께 살면서 옆집 남자이자 은행 청소부인 라라와 가까워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백하기에 이른다.
<양말 도깨비>의 이야기와 그림이 색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요즘 웹툰에서 보기 힘든 아날로그적 정서 때문이다. 형광톤으로 채워진 화려한 그림과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는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한눈에 빨리 넘길 수 있는 속도감 있는 연출과 상반되는 여유로운 느낌이 산재하다. 따뜻한 색조로 펼쳐지는 그림과 개구리 머리의 카~트린과 고양이 귀를 한 라라. 게다가 키가 큰 빅풋까지, 판타지 동화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예쁜 드레스차림의 단발머리 소녀 수진과 하얗고 부드러운 느낌일 듯한 양말 도깨비 믕으로 완성되는 <양말 도깨비>의 이미지들은 동화 속 판타지의 정서를 충실하게 전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문계주, 하시현의 순수하고 잔잔한 동화풍 순정만화의 흐름과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판타지 드라마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리처드가 믕이를 이용해서 고래를 해방시키려는 이유와 봄꽃마을 출신이지만 고향을 버리고 아내와 헤어지게 된 김태중의 숨겨진 이야기로 반전의 재미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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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 도깨비>는 자극이 난무하는 수많은 웹툰 속에서도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인물들을 그림책 같은 느린 호흡의 연출로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매끄럽게 잘 빠진 선이 아닌 투박하지만 따뜻한 기운을 주는 색감의 선들이 수진과 믕이, 라라의 일상을 환상적으로 표현한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뿐만 아니라 그 캐릭터가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이미지 디자인의 감각이 동화적 정서를 배가시킨다. 최근 웹툰의 경향과 색다른 결을 보여준 <양말 도깨비>를 통해서 독자는 환상 속의 동화마을을 향한 아련한 향수를 느끼고 아기자기한 캐릭터로 재미를 얻고 있다. 오래된 동화책을 꺼내보는 듯한 감동을 주는 <양말 도깨비>의 판타지는 구식 스타일에서 신선한 감각을 일깨우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환상적인 사랑법
쵸밥의 <아띠아띠>
쵸밥의 <아띠아띠>는 인간이 아닌 모든 존재가 나누는 귀여우면서도 애틋한 사랑이야기다. 펭귄과 병아리의 간지러운 밀당하기, 새침한 잉꼬에게 접근하는 느긋한 독수리, 나이 많은 늑대 아저씨에게 무조건 직진하는 고양이. 동물만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들꽃조차도 연애의 온도를 높이고 있다.

그림14.jpg<아띠아띠>의 모든 연인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의 연애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고민, 기쁨과 행복을 그리고 있다. 독자들은 아름다운 선남선녀들의 로맨스가 아닌 펭귄과 병아리, 친칠라와 흑표범의 사랑에 감동을 얻는 것이다. 왜냐하면 펭귄과 친칠라의 연애는 서투르지만 가슴 설레는 인간들의 모습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인화 기법은 <야옹이와 흰둥이>처럼 불완전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면서 정서적 감동을 남기고 싶을 때 효과적으로 쓰이곤 한다.
<아띠아띠>는 차가운 인간 사회 속에서 심장마저 돌처럼 굳어버린 현대인들을 향해 마법의 주문을 건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고 말하는 잉꼬에게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되묻는 독수리의 따뜻한 말에 어느 누가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좋아한다고 허공에 소리치는 흰 들꽃에게 보라색 꽃이 저도요라고 화답하고 동시에 대박을 외치는 모습에선 두 마음이 하나로 이어졌다는 행운이 부럽기까지 하다. 

이처럼 <아띠아띠>는 기존의 에세이툰이나 감성툰이라는 그 어떤 웹툰보다 로맨스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감동적인 경구와 고운 컬러의 일러스트가 아니라 짧지만 임팩트 있는 대사와 분위기의 전환으로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갖췄다. 또한 단순하고 안정적인 컬러톤의 연인들을 내세워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동물과 식물, 길가의 돌덩이들이 인간들의 로망인 낭만적인 사랑을 진심으로 하는 것으로도 판타지 순정만화의 맥을 잇고 있다고 봐야 한다. 

기존의 판타지 순정만화가 웹툰에서 크게 빛을 보지 못한 것에 비교할 때 <아띠아띠>는 웹툰 사이트뿐만 아니라 SNS에서도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최근 카드뉴스라는 새로운 방식이 환영받는 것처럼 <아띠아띠>도 긴 스크롤 다운이 아닌 컷 방식의 이미지를 기승전결 구조로 그리고 있다. 네댓 컷의 깔끔한 이미지는 SNS를 통해서 확산되기 쉽고 간결한 내용이면서도 반전의 재미를 주고 있다. 이러한 인터넷 환경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아띠아띠>를 통해서 웹툰의 새로운 편집 방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띠아띠>가 보여주는 로맨스의 울림과 순정만화의 표현 방식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면서도 새로운 것이다. 화려한 캐릭터의 모험담이나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로 교감하는 것을 넘어서 독자의 뇌리에 강하게 남을 수 있도록 새로운 로맨스로 감동과 반전을 전한다. 초고속 인터넷시대에 맞춰서 웹사이트와 SNS 등 다양한 출구를 통해서 감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식물들이 나누는 인간의 어설픈 연애를 통해서 사랑과 순수함이라는 순정만화의 이상을 고수하고 있다. 그것이 <아띠아띠>가 디지털 시대의 판타지 순정만화라는 증거이다. 





참고문헌
박인하, 누가 캔디를 모함했나, 살림, 2000
박인하, 김낙호, 한국현대만화사, 두보북스, 2012
장은영, 순정만화의 환상서사 특성 연구, 공주대 박사논문, 2013
장은영, 김미림, 유시진 만화의 환상성 변이 연구,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24호 게재, 2011

필진이미지

김상희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