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만화상, 최근의 흐름에 관하여
미국은 만화의 발상지는 아니지만, 신문과 잡지라는 대중 출판 매체를 통해 만화를 널리 유통시키고 그에 맞춰서 문법과 미학을 가다듬었으며 나아가 거대 문화산업으로 발돋움시킨 것에 있어서는 충분히 일종의 종주국을 자처할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에서 한 해 가장 우수한 만화에 상을 부여한다면 만화라는 양식 전체를 빛내준 어떤 강력한 권위를 상상하기 쉬운데, 과연 어떨지 최근 몇년간의 흐름을 짚어보고자 한다.
아이스너상 (Will Eisner Comic Industry Awards)
흔히 미국의 만화상이라고 하면 ‘만화계의 오스카’라는 별명으로도 종종 불리는 ‘아이스너상’을 떠올리기 쉽다. 절묘하게도 그 비유는 거의 정확한데, 영화의 아카데미상 같은 세계적 인지도와 흥행력을 지녀서라기보다는 선정 방식 자체가 은근히 닮았기 때문이다.
윌 아이스너 만화산업상은 미국만화에서 문예적 깊이와 그것의 시각적 표현연출을 크게 진일보시켰던 원로만화가의 이름을 따온 행사로, 1985년에 제정되었던 ‘커비상’이 내부 분쟁으로 3년 만에 단명한 뒤 후속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시상식 가운데 하나다. 선정은 두 단계로 이뤄지는데, 첫 라운드에서는 5~6명의 업계 분야별 전문가 심사위원단이 각 출판사의 후보 제출을 토대로 각 시상 분야의 후보작을 추린다. 다음 라운드에서 후보 명단이 만화 업계 종사자에게 보내지고, 투표에 의하여 최종 수상작들이 선정되는 식이다. 또한 만화 명예의 전당을 두어, 몇몇 작가들에게 일종의 공로상을 수여한다. 업계 전체를 대표한다는 취지가 중요한데, 덕분에 1차 심사위원단이 그만큼 다양성을 지니도록 정해져 있어서, 만화전문점주 대표, 도서관 사서 대표, 만화 연구가 등이 포함된다. 같은 이유로 수상 분야 자체가 엄청나게 세분화되어 있어서, 2023년 기준으로 무려 32개 분야가 존재한다. 그야말로 출간 형태별로, 큰 장르별로, 작업 분야별로 세밀하게 나뉘어져 있어서, ‘최우수 실화 배경 작품’ 이나 ‘최우수 표지 그림 아티스트’, ‘최우수 식자 작업’ 같은 분야가 있다. 심지어 2017년부터는 디지털 만화와 웹만화마저도 개별 분야로 되어있다. 전자는 디지털 유통을 전제로 만들어진 전통적 방식의 만화에 가깝고, 후자는 한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세로 스크롤 방식 만화에 집중해서 말이다. 미국 바깥에서 창작된 만화의 경우 미국에서 출판된 판본을 기준으로 하되, 해외분야와 아시아분야가 나누어져 있다(후자는 2009년까지는 일본으로 명시되었다가 변경).
‘아이스너상’은 이토록 ‘오스카상’과 닮아서, 기본적으로 미국 현지 지역의 산업, 그것도 주류 만화산업을 핵심으로 하되 보다 강력한 산업적 권위를 위해 지난 20여 년 사이에 점차 다양성을 보충해 온 식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오스카상처럼, 아직 갈 길이 멀다. 전통적인 미국 만화산업에서는 슈퍼히어로물을 주력으로 하는 대형 출판사, '코믹북' 형식의 출판물을 직접판매라는 방식으로 만화전문점을 통해 유통하는 판매망, 분업화된 프로덕션이 오랫동안 큰 지분을 차지해 왔고, 덕분에 산업계 인력의 구성 또한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이 여전한 현실이다. 2014년에야 비로소 유색인종 여성 작가가 연구 부문에서 첫 ‘아이스너상’을 수상했을 정도다. 의미심장하게도 그 수상작은 쉬나 하워드의 <흑인 만화 백과사전>으로, 그간 만화계에서 부각되지 않고 지나쳤던 흑인 작가, 편집자 등 만화 인력들을 재발굴한 연구였다. 2016년, 그러니까 한창 미국사회에서 미투 운동 등으로 여성인권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는 와중에는, 남성 편중이라는 고정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다양한 여성 작가 작품들이 후보작에 올랐다. 그리고 그 해 마침내, 말레이지아 출신이자 싱가폴에서 활동하는 소니 류의 <찰리 찬 혹 치에의 작품>이 여러 부문에서 수상을 하여 인종, 국적의 편협성에 대해서도 진일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전통적인 주류 미국만화에 대한 강한 선호도가 여전해서, 일본만화로 대표되는 아시아 만화 문법 일반, 그러니까 '망가'가 현재 미국 청소년들에게 완전히 주류화된지 오래인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하위 분야로만 욱여넣는 경직성을 발휘하고 있다.
아이스너의 이런 속성 덕분에, 업계의 주류 취향을 잘 맞추어 낸 하나의 히트 장편 시리즈가 여러 해 동안 계속 해당 분야를 석권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2010년대 내내 그런 트렌드의 대표주자는 좀비 호러물 <워킹데드(The Walking Dead)>였는데, 지난 2~3년간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무언가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Something Is Killing the Children)>이며 2021, 22, 23년 연속으로 제임스 타이니언 4세에게 ‘글작가상’을 안겨주었다. 글과 그림을 함께 하는 작가 분야에서는 이례적으로 2021년에 일본 만화가 이토 준지가 수상했는데, 전통적으로는 역시 계속 미국권 작가의 몫이다. 짧은 작품은 ‘싱글 이슈상’과 ‘단편상’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역시 슈퍼히어로물, 후자는 그나마 일상이나 기타 다양한 소재의 작품이 끼어들 수 있었다. 2022년 ‘단편상’과 모음집 수상작인 <갱년기 만화>가 대표적이다.
아직 다분히 폐쇄적 분위기가 이렇듯 존재하지만, 한국만화계에서 아이스너에서 주목할 만한 부문은 역시 ‘웹만화 분야’, 그리고 ‘아시아 작품 미국판 분야’다. 웹만화는 한국식 웹툰 플랫폼을 개척했던 타파스 등의 어깨 위에, 네이버 웹툰을 통해서 한국에서 가다듬은 연재 플랫폼 방식이 이제는 미국권에서도 정착한 상태다. 그리고 그것에 연동된 세로 스크롤의 연출 문법부터 작가 발굴과 수익 모델 등도 현지에서 온전히 가동되고 있다. 이런 기반이 있기에 한국 작품인 <나빌레라>가 2022년 후보작으로 오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아이스너 특유의 히트 연재작 계속 몰아주기 성향으로 현재 총애를 받고있는 작품은 레이첼 스미스의 미국 네이버웹툰 연재작인 <로어 올림푸스>로, 2년 연속 웹툰 부문 수상작을 지키고 있다. 한편 아시아 작품 미국판의 경우, 아무래도 일본 작가, 그중 미국 주류 산업계 중견들의 사랑을 받는 한 줌의 작가들이 일방적 우세를 지키고 있어서, 2021, 22년은 이토 준지가, 23년은 무려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매우 오래된 초기 연재만화인 <사막의 백성>이 차지했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할 때, 아이스너상을 수상한다는 것의 함의는 무엇일지도 뚜렸해진다. 만화계의 오스카상이라고 하니 영화에서 오스카상을 탄 것 마냥, 세계 최고의 만화로 인정받았다는 식으로 설레일 만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독자들의 인기투표도 아니고, 심오한 예술성으로 충격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역사적 함의를 새겨 낸 것에 주는 평가도 아니다. 물론 아이스너 수상작이라고 딱지를 새로 붙이면 프로모션에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만, 영화의 오스카나 연극의 토니 마냥 그간 검증된 뚜렸한 판매량 증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보다는 미국 주류 만화산업 인력들에게 오늘날 미국 주류 만화판에서 받아들여질만한 좋은 작품으로 인식되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미국의 만화전문점, 일반 서점, 도서관에서 내놓고 취급할 만한 주류적 우수함 말이다. 당연히 그 정도도 큰 성취이기에 과소포장할 이유는 없지만, 오롯이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나 사회적 중요함 같은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면 다른 척도가 더 정확할 것이다. 고려하는 장르의 폭이 훨씬 포괄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미국도서관협회 추천목록이든 전문 비평지 코믹스저널의 연말 베스트든 말이다. 혹은, 옛 커비상의 유지를 이어가고자 했던 다른 하나의 유명한 만화상, 하비 어워드도 좋겠다.
하비상 (Harvey Awards)
1988년에 하비상을 출범시킨 것은, 주류 슈퍼히어로 장르만화와 형식도 소재도 거리가 먼, 흔히 문예만화, 독립만화, 대안만화라는 온갖 어지러운 호칭으로 불리는 종류의 만화들을 전문으로 해온 판타그래픽스 출판사의 개리 그로스다. 반골 기질로 시대를 대표했던 「매드」 잡지의 풍자 카투니스트이자 편집자였던 하비 커츠먼의 이름을 따온 것에서 이미 알 수 있듯, 하비상은 두루뭉술한 우수함보다는 뚜렷한 함의를 지닌 개성적 작품에 무게중심을 놓곤 한다.
선정 방식으로만 보자면 아이스너와 크게 다를 바 없어서, 소수 전문가로 이뤄진 후보 선정위원회가 1차로 목록을 추스르고 업계 종사자 다수에게 설문을 보내서 투표를 모아낸다. 하지만 만화산업계 전체를 대변하기 위해 모든 작업 공정을 세분화하는 접근법과 정반대로, 오히려 실제 나온 작품에만 주목한다. 그렇기에 수상 부문이 아이스너와는 달리 ‘올해의 책’, ‘디지털 책’, ‘어린이/청소년 책’, ‘망가’, ‘국제 출판물’, ‘만화 원작 미디어 이식 작품’, 총 7개밖에 안 되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특별상 명목으로 ‘명예의 전당’, ‘유머상’, 그리고 미국/캐나다에 출간되지 않은 타 지역의 주목할 만화가 더해진다.
물론 딱히 하비상이 비주류적 취향의 작품에 몰입하는 것은 아니고, 더 폭넓게 온갖 출간물들을 펼쳐놓고 오롯이 책이라는 단위로 평가할 따름이다. 즉 단행본 단위의 출간으로 이어지지 않은 단편이나 코믹북 이슈 단위의 연재물 등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디지털 북' 분야는 단행본이라는 범주가 애매한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에 그런 제한이 없지만, 적당한 분량이 있는 일관된 이야기로서의 속성이 아무래도 요구된다. 책으로서의 완성도와 완결성을 갖춘 작품들이 당연히 부각될 수밖에 없기에, 실제로 그간 올해의 책 수상작들은 흔히 ‘그래픽노블’이라는 애매한 용어로 이해되는 작품들이 많았다. 2021년은 트룽 러 응웬의 <마법의 물고기(The Magic Fish)>, 22년은 피쳇쇼트와 테펭키의 <착한 아시아인(The Good Asian)>, 23년은 케이트 비튼의 <오리들: 석유 모래 속에서의 2년(Ducks: Two Years in the Oil Sands)>이 차지했는데, 그중 둘은 연재 없이 바로 단행본으로 작업 된 것이었다. 작품 내용들 또한 2세대 베트남계 미국인 청소년의 사회 적응 LGBT 성장담, 아시아계 이민들이 중심에 있는 차이나타운 느와르, 여성 석유 노동자의 성차별과 계급충돌 넘치는 일터 체험담 등이다. 즉 장르적 쾌감보다는 무게감 있는 복잡 섬세한 내용, 주류적으로 세련된 그림 스타일보다는 더 작가의 개성적 터치가 이야기 속에 부각되는 스타일을 노리는 편인 것이다.
이런 성향이다 보니 국제 출판물 부문에서 2020년에는 김금숙 작가의 <풀>, 21년에는 마영신 작가의 <엄마들> 등 한국작가의 미국 출판본이 연달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다. 두 작품 모두 하비상에서 선호하는 깊숙하고 섬세한 내용과 그것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하는 개성적 그림이 갖추어졌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인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풍부한 작품들이, 그것을 잘 모르는 미국 주류 독자들이 재미없어 할 수 있다는 점보다는 구체적인 복잡 미묘함으로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점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상인 것이다. 22년에는 <스위트 파프리카>, 23년에는 <블랙새드: 모두 몰락한다 제1부>가 수상했는데, 특히 후자의 경우 의인화된 표범 탐정이 주인공인 오랜 느와르 프랜차이즈의 신작이다. 오락성 높은 주류 장르라고 할지라도, 동물 의인화 속에 인종차별 갈등을 넣어놓은 묵직한 접근이 일품이다.
성향이 이렇듯 다른 아이스너와 하비지만, 간혹 양쪽을 석권하는 작품이 등장하기도 해서, <로어 올림푸스>는 하비상도 디지털북 부문에서 21, 22, 23년까지 3년 연속 수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아이스너상’이라도 웹만화 분야에서만큼은 전통적인 미국 주류만화의 자장 안에 머물 방도가 없다는 (애초에 없으므로) 것의 증명일 수도 있고, 이 작품이 실제로 아이스너가 요구하는 주류적 안정감과 하비에서 요구하는 섬세하고 개성적인 접근을 겸비하고 있다는 이유일 수도 있다. 그리스 신들을 모티브로 오늘날의 현세와 판타지를 오가는 군상극이자 로맨스와 미스터리가 교차하고, 독특한 그림과 웹으로도 책으로도 안정적 연출에 힘입어 실제로 평단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인기도 독차지하는 이례적인 경우다. 날 선 개성과 대중성의 겸비가 유리하게 작용한 또 다른 경우가 바로 아시아 스타일 만화 전반을 아우르는 "망가" 부문인데, 이것 또한 3년 동안 한 작품이 계속 유지되었다. 바로 <체인소맨>으로, 호쾌한 호러 연출과 블랙코미디로 욕망과 행복, 힘과 복종의 본질을 집요하게 건드리는 펑크 락 같은 작품이다. 그야말로 하비상스러운 느낌인 셈이다.
‘하비상’을 수상한다는 것은 미국의 만화 전문가들에게 작품으로서 완성도를 인정받는 것이다. 미국 주류로서의 상성을 따지는 듯한 결과가 항상 나오는 ‘아이스너상’과 달리 그냥 작품이 주목할 만하면 선정된다는 점에서, 마치 영화로 치자면 ‘오스카’와 대비되는 ‘칸느’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보면 대략 적절할 수 있다. 단점으로는 아무래도 더 적극적인 유통으로 인한 판매량의 심대한 증가에는 영향이 덜 할 수도 있다는 점인데, 작품성에 대한 생각이 중심이 된다면 매우 큰 명예가 될 수 있다.
이그나츠상 (Ignatz Awards)
아이스너도 하비도 기본적으로는 대형 출판사들이 중심이 되고, 후보작들 역시 대형 출판사에서나 할 수 있는 깔끔한 제작, 전국적 유통 및 마케팅을 배경으로 하게 된다. 그렇다면 소규모로 제작된 독립출판사 만화, 혹은 스튜디오 없이 작가가 독립적으로 프랜차이즈를 만들어 출판사와 협업하는 경우는 어떨까.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이그나츠상’으로, 고전 만화 <크레이지캣(krazy Kat)>에 등장하며 고양이에게 벽돌을 던지는 생쥐 캐릭터 이름을 따왔다. ‘이그나츠상’은 1997년에 만들어졌으며, 전문가 후보 선정위원회가 추려낸 후보작 가운데에서 매년 개최되는 ‘소규모 출판사 박람회(Small Press Expo)’의 방문객 투표로 선정된다. 선정위원회의 멤버는 다른 멤버들이 누구인지 모르게 하는 것도 특이한 지점인데, 오히려 더 고밀도로 서로 연결된 좁은 판인 경우에 취하는 방식이다.
‘이그나츠상’은 그 속성상, 대안만화의 트렌드를 짚어보기에 좋은 편이다. 이그나츠에는 작가 부문, 단행본 부문, 코믹북 부문 등이 있는데, 최근 특히 주목받은 작품으로는 2021년의 <스톤 프루트(Stone Fruit)>, 22년의 <꿈에서 난 힘: 내 이야기는 팔레스타인이다(Power Born of Dreams: My Story is Palestine)>, 23년의 <오리들: 석유 모래 속에서의 2년(Ducks: Two Years in the Oil Sands)>이 있다. 특히 <오리들>의 경우는 이그나츠와 하비상을 함께 받은 경우인데, 그만큼 이그나츠의 작가 개성 중심 성향이 하비와 일부 겹칠 수도 있다는 시사점을 준다. <스톤 프루트> 역시 여성 동성 부부의 육아 성장담임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미국의 소형 출판을 작품 선정 대상으로 하는 만큼, 이미 존재하는 한국 작품의 미국 출간본이 노릴 만한 구석은 많지 않다. 그쪽 입장에서 한국이라는 해외의 작품을 수입하는 것은 아무래도 국제 라인업을 생각할 만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큰 출판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 작가 단위에서라면, 애초에 현지에서 소형 출간을 하고 ‘이그나츠상’을 목표로 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타 상
당연하게도 그 밖에도 더 전문화된 만화상이 미국에 존재하고, 유명세는 덜하지만 권위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오로지 잉크 작업, 그러니까 만화의 작화에서 선화를 담당하는 것의 전문적 완성도를 인정해주는 것으로 ‘잉크웰상’이라는 것이 있다. 이 안에도 올해의 잉커 외에 최고의 적응자, 즉 가장 다양한 스타일의 밑그림 위에 선화를 그린 사람 등 세부 부문이 나누어질 정도다. 2023년 올해의 잉커 수상자는 마블코믹스에서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주력으로 하는 월든 웡인데, 아무래도 직종상 분업화가 뚜렸한 스튜디오형 대형 출판사에 기용된 사람이 돋보이기가 쉽다.
또다른 전문 만화상이라면 저널리즘상인 퓰리쳐상의 ‘그림을 통한 보도 및 논평’ 부문이 있는데, 1922년부터 2021년까지는 시사만화상이라고 칭해졌던 상이다. 아이스너나 하비 같은 산업계의 시상 분야에는 빠져있는데, 사실은 만화가 세상을 날카롭게 드러내고 풍자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현대 만화 개념에 가장 근원적인 시작점이었다는 측면에서 결코 중요성이 덜하지 않다. 이 상은 어떤 단일 작품에 주거나 작가의 1년 활동 전체에 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특정 시사 주제에 대해서 그 시기에 집요하게 파고든 어떤 자세를 중심으로 평가한다. 2022년에는 「비즈니스 인사이더」지의 특별팀이 위구르족 탄압을 그린 서사형 논픽션 웹만화 <나는 중국 수용소를 탈출했다>가 수상했고, 23년에는 「뉴욕타임즈」에서 만화 스타일로 심층 기사와 데이터 시각화 자료를 결합시킨 <제프 베조스의 부를 상상하는 9가지 방법((9 ways to imagine Jeff Bezos' wealth)>이, 2024년에는 「뉴요커」에서 그려낸 <라이커 수용소 도서관 노동자의 일기(The Diary of a Rikers Island Library Worker)>가 수상했다. 즉 시사만화라면 대뜸 과장된 은유를 쓴 한 칸짜리 그림을 상상하기 쉬운데, 그보다 만화언어의 힘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시사 사안을 설명하거나 공감시키는 것으로 외연을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만화라는 시각언어의 탁월한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북돋아 주는 트렌드로 해석할 수도 있기에, 한국에서도 배워볼 만한 지점이다.
종합하자면, 최근 수년간 미국 만화상의 흐름은 슬금슬금 다양성을 확장하고 싶은데 빠르게 변화하지는 못하는 ‘아이스너상’이 여전히 중심에 있는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작품적 완성도와 국제적 시야를 부각시키려는 ‘하비상’의 행보가 이뤄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독립만화의 ‘이그나츠상’이 하비와 차별점이 적어지는 중이며, 저널리즘 같은 만화산업계 바깥에서도 만화라는 시각언어에 대한 적극적 포섭을 노리는 모양새다. 한국 만화계의 입장에서는, 디지털의 지분 확대와 한국식 웹툰 문법의 안착을 교두보 삼아서 미국 진출을 생각하기에 괜찮은 조건이며, 동시에 대중성을 다소 덜 고려하더라도 작품으로서의 깊이와 완성도가 빼어나다면 그 또한 미국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진 상태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