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커버스토리> 정치 만화와 정치와 만화

그 단순하지 않은 삶들이 수백, 수천만 단위로 얽혀 돌아가는 세상은 지극히 난해한 것이다. 그 난해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몇 천 년 간 노력해왔고, 또 몇 천 년 간 이해하는 척 해왔다. 세상의 법칙을 이해하고, 더 나은 법칙을 만들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고, 강제하고, 다스리고, 저항하고, 투쟁하고, 뒷담화를 까면서 역사는 진행되어 온 것이다.

2018-07-20 굽시니스트


삶은 단순하지 않다.
그 단순하지 않은 삶들이 수백, 수천만 단위로 얽혀 돌아가는 세상은 지극히 난해한 것이다. 그 난해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몇 천 년 간 노력해왔고, 또 몇 천 년 간 이해하는 척 해왔다. 세상의 법칙을 이해하고, 더 나은 법칙을 만들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고, 강제하고, 다스리고, 저항하고, 투쟁하고, 뒷담화를 까면서 역사는 진행되어 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복잡하게 엉켜있는 세상을 대략적으로 스케치하고 간략한 인상을 뽑아내 데포르메하여 정치의 언어가 만들어진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 신자유주의와 리버럴, 무슨무슨 이즘, 무슨무슨 운동 등등. 이런 정치 언어들은 거대하고 복잡한 세상을 한입에 담길만한 크기로 깍둑썰어 내놓은 토막들이다. 이들을 재료로 양념과 기름을 더해 살짝 볶은 결과물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대해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맛’은 논리적 무오성으로 이뤄진 진리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맛은 그냥 느낌일 뿐이다. 저 정치 덩어리들이 제 아무리 스스로 철저한 논리와 팩트, 인과와 법칙을 역설한다 해도, 응 아냐. 사회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60억 인류사회라는 이 초복잡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없다. 스스로 세상을 완벽하게 과학적으로 이해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그 이해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물론 정치를 논함에 있어 논리와 실증은 가장 중요한 토대지만, 이는 대체로 반대 정파의 비과학성, 비논리성을 공격할 때 주로 쓰이지 않던가. 모두가 서로를 향해 비과학적, 비논리적이라고 공격하고 있는 이 정치판에서, 모두의 주장에 어느 정도 논리적, 과학적 진실이 담겨있다면 결국 모두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이제 서로 똑똑한 척 그만하고, 정치를 향한 우리의 열정이 기본적으로 느낌적 인상론을 에너지로 삼아 타오른다는 걸 인정하자.

그렇다. 여기가 바로 만화가 대단히 유용한 정치 언어가 될 수 있는 지점이다. 정치의 프레임들은 제각각의 논리적 텍스트들을 갑옷삼아 두르고 있지만, 정치 프레임의 본질이 느낌적 이미지로 세상을 재단한 것이라 할 때, 개개인에게 그 이미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입식할 수 있는 수단은 이미지 언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텍스트 언어도 충분히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무슨 유신,5공 시대도 아니고, 이미지 충만한 감성팔이 글은 중학생들에게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요즘 세상이 아닌가. 최대한 탈 감성, 탈 이미지화하여 논리와 팩트의 포장지를 두르고 최대한 그 쿨함을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정치 텍스트 언어의 근황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만화는, 당연히 그 근본적인 정체성부터가 이미지 언어다. 만화가 느낌적 이미지로 사람을 홀리려는 것에 대해 불평한다는 것은, 소금에서 짠 맛이 난다고 불평하는 것과 마찬가지. 극사실주의 화풍의 만화도, 혹은 동그라미와 찍찍 그은 직선 몇 개로 만들어진 졸라맨 만화도, 모든 만화는 본질적으로 이미지 언어다. 물론 같은 이미지 언어인 회화와 비교할 경우, 만화는 훨씬 구체적이고 명확한 이야기를 한다. 만화는 뜻하고자 하는 바를 말풍선에 글씨로 써놓거나, 명백한 캐리커쳐, 데포르메를 통해 누가 봐도 누굴 욕하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게 해준다.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는 만화 이미지 언어는 그러한 인지를 더욱 쉽게 만들어준다. 만화 캐릭터의 얼굴위에 그어진 여러 개의 붉은 사선은 고양이에게 할퀸 자국이 아니라 얼굴이 벌개질 정도의 부끄러움을 뜻하는 것이고, 사람 머리에서 버섯 모양으로 뿜어져 나오는 작은 수증기 뭉치는 그 캐릭터의 분노를 보여준다.
△ 만화의 도상화(참고자료 만화의 도상기호(변미옥))
이런 만화 이미지 언어들은 작가와 독자가 사전에 이미 학습하여 공유하고 있는 것들이고, 화살표, 이모티콘과 같이 기호화된 것이다. 이는 옛 인류가 사물의 모양을 본 따 간략하게 기호화한 상형문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만화를 읽는다는 것은 이미지를 기호화한 상형문자인 한자로 작성된 문서를 읽는 것과 같은 범주에 드는 인지 행위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만화 이미지 언어가 그렇게 문자 레벨로까지 추상화되는 일은 없겠지만, 기호라는 것이 최소한의 학습을 필요로 하는 언어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 언어는 거의 모든 인류가 어린 시절부터 학습하고 익숙하게 접해온 것이다. 그렇게 기호로 이루어진 지면에, 작가가 하고 싶은 말까지도 텍스트로 자유롭게 적어 넣을 수 있으니, 만화가는 표현과 의도의 명확성 확보 측면에서 곤란을 겪을 일이 없다(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만화가 자신도 모르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처럼 인간의 감성 영역에 느낌적 이미지 언어로 다가갈 수 있고, 인간의 논리 영역에 기호와 텍스트 언어로 접근할 수 있으며, 그 투 트랙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면도날처럼 명확하게 뽑아내는 예술 장르. 만화는 필연적으로 그 가능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 가능한 영역인 정치적 주의 주장-느낌적 인상론을 논리의 포장지로 감싼 그것-과 엮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 빵 만드는 과정의 이집트 벽화
태고의 인류가 돌 벽에 끄적거리던 자국이 추상적 텍스트와 구상적 회화로 분화하기 전, 고대 이집트의 거대한 벽들은 그런 정치적 만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디까지가 글이고 어디까지가 그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태고의 원시적 글-그림 융합체인 이 만화는 파라오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 적들을 저주하며 그들 사회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있다. 내세에 대한 설명툰과 빵, 맥주 만들기에 대한 일상툰은 그 사회가 종교, 정치, 삶의 일상을 모두 하나로 뭉뚱그려 이해하고 살아가던 사회임을 알려준다. 이집트 뿐 아니라 중근동 오리엔트, 그리스, 인도, 중국 등의 고대 문명들은 모두 그들 사회의 이념적 근간을 이루는 정치, 종교 체제에 대한 프로파간다 만화를 제작해 왔다.

문자 문명이 완숙기에 접어들어 지식인 계층이 그런 만화들에 대해 예전과 같은 존중을 잃은 이후에도, 중세 유럽의 교회나 조선의 유학자들은 무지한 문맹 백성들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화를 계속 활용한다. 시골 백성들을 위해 제작된 그런 자료들에는 십일조를 내지 않아 지옥불 가마솥에 들어가 있는 불신자, 절개를 지키기 위해 벼랑에서 뛰어내리는 과부 열녀의 그림이 알아보기 쉬운 일상툰 그림체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에 그림에 대한 설명 텍스트가 있어서 마을 신부님이나 훈장님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으니, 이를 실감나게 잘 읽어주는 사람은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 <시왕도-제4오관대왕 중 검수지옥>(부분), 19세기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물론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그런 고색창연한 그림과 글을 정치 만화라 일컫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정치 만화는 고사하고, 그것들이 ‘만화’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릴 것이다. 하지만 이후 유럽이 맞이하게 된 계몽주의 시대에 제작된 정치 만화들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전 시대에 제작된 종교 프로파간다의 얼개와 개념이 계몽주의 시대의 새로운 스타일로 계승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렇게 계몽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정치 만화들은 학계에서도 오늘날 ‘만화’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대표작인 윌리엄 호가스의 판화 연작은 18세기, 조지 2세 치세-이른바 아우구스 시대 영국 사회의 도덕적 방종에 대해 해학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 과장된 묘사와 해학, 캐리커쳐는 그 작품들을 현대 만화의 직계 조상으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 식으로 세상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리며 비웃는 만화는 당연히 그 기저에 정치적인 시각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 <선거를 위한 여흥(An Election Entertainment)>, 1754, Sir John Soane`s Museum
영국 로코코 회화를 대표하는 화단의 거두가 품었던 당대 정치에 대한 시각은 그의 풍자화 연작 시리즈 중 하나인 ‘선거의 풍경’에 잘 나타나 있다. ‘선거의 풍경’은 18세기 중엽 옥스퍼드 지역구에서 토리당과 휘그당이 겨룬 선거전을 전·중·후에 걸쳐 묘사한 연작이다. 각종 폭력과 협박, 금품 살포, 이권 거래로 얼룩진 선거에 대해 냉소적이며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이 작품에서 우리는 이 정치만화가 이른바 ‘모두 까기’를 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가스는 토리와 휘그 양 당의 후보들과 당원들, 지지자들이 벌이는 선거 대소동의 추태를 양 측에 동일한 분량씩 할애해 그리고 있다 (느낌상 당시 여당인 휘그당을 약간 더 까고 있는 듯 한 기분이 들지만). 국가와 국민의 안위는 아랑곳 않고, 정파의 이익을 위해 추잡한 싸움만 이어가는 여당과 야당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까는 정치 만화. 뭔가 익숙하지 않은가?

정치 만화는 그 태초에서부터 이미 대중 일반의 정치혐오 모두까기 정서를 지닌 체 태어났던 것이다. 호가스가 그린 판화 연작들의 주제가 당대 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풍자였음을 기억하자. 그에게 있어서 ‘정치’란 그런 잡다한 도덕적 타락의 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도덕적 타락에 대해 손가락질 하고 있는 호가스가 서있는 위치는, 교양 있고 선량한 소시민 일반 독자들의 관람석이다. 그렇다. 정치 만화를 그리기 가장 좋은 곳, 가장 안전한 곳. 다수의 도덕적인 애국 시민들과 함께 손가락을 들어 돈과 권력만을 추구하는 정치꾼들을 싸잡아 비판할 수 있는 위치. 사람들은 ‘그렇지, 정치는 까야 제 맛이지’ 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을 눌러 작가를 준엄한 정론직필로 인정해준다. 이처럼 대중 일반의 정치혐오를 대변하는 정치 만화는 예나 지금이나 그 방면의 가장 안전한 왕도라 할 수 있다. 물론 당대의 영국 정치가 정치혐오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 없는 개판이긴 했다. 선거를 통해 얻은 지위에 따라오는 엽관 놀음은 당연한 상식이었고, 소수의 유산 계층만이 가졌던 투표권은 공개적인 경매를 통해 팔려나갔다. 왕후장상 귀족들은 탐욕과 향락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젠트리, 부르주아들은 의회 의석에 앉아 그들이 찾아먹을 수 있는 이권의 마지막 한 닢까지도 모조리 털어먹고 있으며 하층민들은 술에 찌들어 비굴한 굴종을 배설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사회, 그런 정치판에서 무슨 대단한 정치적 주의 주장을 편 들어주는 만화를 그릴 기분이 들겠는가. 정치혐오가 시대정신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호가스의 그런 정치혐오 만화가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으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리라.

그렇게 정치에 얽힌 모든 것들이 멸시받던 18세기였지만 결국 정치의 시대는 계속 진행되고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을 맞이하게 된다. 만화가들은 그 정치 격변에 열광하며 그 조류에 적극 참여하는 정치 식자층의 일원이 되어 각종 정치 만화들을 쏟아낸다. 그 단계에서 정치 만화가들은 정말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치 이념에 대한 신념과 그 적들에 대한 순수한 분노를 날것 그대로 지면에 옮긴다. 미국 독립혁명의 대의를 부르짖는 팜플렛들이 13개주 전역에 살포되었고, 그 팜플렛들에는 영국의 만행을 고발하고 아메리카인들의 단결을 역설하는 만화들이 박혀있었다. 프랑스의 선동적인 만화가들은 왕후장상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 누리는 부귀영화를 적나라한 필치로 까발렸다. 이런 정치 만화들은 명확한 방향성과 공격 대상을 가지고 체제 전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신념을 불살라 그려진 만화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그 표현 스타일 또한 호가스 풍의 고상하고 해학적인 모양새가 아니라, 온갖 오물과 피비린내가 난무하는 고어한 것이 되었다. 물론 후대의 예술성 평가에 있어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호가스의 작품들에 비해, 혁명기의 찌라시 정치 만화들은 예술성에 있어서는 평가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찌라시 정치 만화들은 예술이 아닌 정치 영역에 세워진 금자탑들이다. 정치 만화들이 거친 필치로 부르짖은 시대정신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았고, 동지들의 열정을 한데 모았고, 적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향한 증오의 에너지를 눈으로 확인케 하였다. 또한 혁명의 혼란기, 여러 정파들이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찍어낸 찌라시들을 통해 정치 만화들은 그 게임의 당당한 일원으로 참가한다. 정치적 주의 주장의 설파, 정치 싸움에 있어서의 선전 선동, 정치인들에 대한 공격과 방어 등등 정치 만화로서의 정체성에 가장 맞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여기서 예술성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다행히도 나폴레옹 전쟁기의 아수라장을 지나, 7월 왕정, 제 2 제정, 빅토리아 시대에 접어든 유럽의 정치 만화는 그 예술성 부분에 있어서의 준수한 퀄리티를 회복한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풍자화를 대표하는 오노레 도미에의 통렬한 정권 비판 만평들은 그의 사회 고발 회화 작품들과 함께 그 정치성 뿐 아니라 예술성에 있어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강렬한 필치로 왕과 황제를 통렬하게 공격한 그의 만평들은 20세기 운동권 민중미술의 직계 조상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도미에와는 달리 영국의 존 테니얼은 그리 열정적으로 정치적 반항성을 불태우진 않았다. 테니얼은 호가스의 품위있는 펜선 판화와 함께 그 고상한 ‘모두 까기’ 중립주의 전통까지도 계승한 것이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무난한 포지션에서 무난하지만 재치와 예술성 넘치는 정치 만화들이 그려졌다. 테니얼의 정치 만평은 캐리커쳐와 심볼, 은유, 무엇보다도 재미에 있어서 정치 만화에 하나의 기준을 세웠다 평가할만하다.

유럽의 고전 시대 이후, 황색 저널리즘과 함께 정치 만화의 전성기가 신대륙에서 화려하게 만개한다. 레귤러 캐릭터와 컷, 말풍선 등 현대 만화 문법의 기초를 정립한 미국 만화는 곧 태평양을 건너 중국과 일본, 한반도에까지 그 포맷을 전파한다. 문명개화와 근대 국민 국가 건설에 나선 동양인들에게 정치 만화는 꽤 쓸모 있는 것이었다. 동양에서의 정치 만화도 서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정파성을 띈 공격 무기로 활용되거나, 정치혐오 정서에 영합하는 모양새를 가졌지만, 그보다는 대중 일반에 대한 문명개화의 도구로서 더욱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동서양 공히 민족주의와 전쟁의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애국심을 고취하고 외국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는 정치 만화가 흥하게 된다. 청·일, 러·일 전쟁의 전선 상황과 국제 정세를 묘사하는 만화들이 일본국민들의 애국심을 풀무질했고, 1차 세계 대전을 맞이하게 된 유럽에서는 정치 만화들이 전쟁의 프로파간다로 복무하며 국민 총동원의 나팔을 불어댄다. 공산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들이 찍어낸 붉은 만화들은 그들의 프로파간다 포스터와 더불어 세상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격동의 시대가 이어지며 나치의 괴이한 사상이 담긴 정치 만화가 독일인들의 양심을 비틀며 괴물을 만들어낸다. 그 광기가 불러온 2차 세계대전으로 돌입한 세계는 정치 만화 뿐 아니라 회화, 일러스트, 사진, 영화, 등의 시각 예술 전 영역에 걸친 프로파간다의 태풍을 맞이한다.
그런데 만화 산업이 가장 크게 흥기하던 신대륙에서는 그런 프로파간다의 태풍이 조금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이미 미국에서는 정치나 사회 풍자 영역과 상관없는 상업주의 만화가 흥하고 있었다. 고양이 펠릭스와 슈퍼맨 등의 활약은 현대 극화의 모든 필수 요소들을 갖춘 진짜 만화책들로 만들어졌다. 단행본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간 그 만화들에 대해 주류 사회는 질 낮은 하위문화라는 딱지를 붙여줬다. 그러건 말건 만화 속 주인공들은 계속 환상적인 모험을 벌이며 독자들이 비루한 세상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만화 속에서도 더 이상 현실 세상을 외면할 수는 없게 되었다. 태풍이 결국 신대륙에도 상륙했고, 미증유의 대 전쟁은 슈퍼맨과 배트맨, 도널드 덕에게도 전쟁에 복무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슈퍼맨이 히틀러의 멱살을 잡고 구피가 일본군에게 어뢰를 날리며 배트맨이 전쟁 채권 매입을 독려한다. 1941년에 탄생한 캡틴 아메리카는 아예 처음부터 나치를 두들겨 패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다. 그렇다. 피카소조차도 정치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 만화에 그런 대업이 맡겨진 것은 차라리 영광이라 하겠다. 그리고 사실 사회 전체가 전쟁을 향한 열기로 가득 차있는 세상에서 만화만 동떨어진 채 환상을 꿈꾸고 있는 것도 좀 어색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대중에의 영합을 최우선으로 삼은 상업 만화가 자연스럽게 대세에 탑승한 모양새라 할 수 있겠다. 무슨 펜타곤의 높으신 분이 DC코믹스 편집부에 전화를 걸어서 슈퍼맨이 히틀러 콧수염을 뽑는 만화를 그리라고 지시한다던가 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물론 담당 부서에서 만화계의 협조를 얻기 위한 민관 협력 라인 정도는 구축했겠지만.
이처럼 나랏일에 충실하게 협조하던 미국 만화가 냉전기를 거치고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제법 반항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되었으니. 엑스멘의 뮤턴트들이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시작했고, 현실의 흑인 무장 단체인 블랙팬서당과 동명의 흑인 히어로가 등장해 KKK단원들 두들겨 팼다. 6,70년대 미국 만화에 팽배한 이 체제 저항적인 기류는 그 시대 대중 일반의 정서 속에 피어나기 시작한 새로운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상업 만화는 독자 대중의 정서에 영합하기 마련이고, 이처럼 정치적인 내용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대중이 원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취해온 것이다. 물론 만화를 그리는 작가 또한 그 시대에 속한 개인으로서 시대정신의 세례에서 비껴난 존재가 아니다. 작가 개인으로서도 작품에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반영하는 것은 꽤나 뿌듯한 자기실현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6, 70년대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날 상업 만화에 정치적 입장이 담기는 경우, 대개는 그 정치적 입장의 반대편에서 제기하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거리낌 없이 즐길 수 있는 일반 보편적인 정서 영역이 존재하고 상업 만화는 되도록 그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 정치적 입장은 그 보편 정서 영역을 벗어나 사람들의 호오가 갈리는 부분이기에, 대중 전체를 고객으로 삼은 상업 만화는 그 수요의 이탈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수요 이탈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의 정치적 신념을 지면에 담는 작가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스스로의 정치적 신념을 지면에 토로하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자기실현일 것이다. 그들이 지면에 담은 정치적 메시지가 시대정신의 메인 스트림이라는 믿음 또한 확고한 것이리라. 하지만 ‘정치적’ 입장이라는 것은 각자의 그런 믿음이 다른 방향으로 갈리기 때문에 ‘정치적’ 입장이라 하는 것이다. 정치적 신념을 밝히고 사안에 대한 호오를 정하고 편을 분명히 한다면 더 이상은 일반 보편 정서의 온실에 머무를 수 없다. 개개인의 정치적 정체성은 그 살아온 삶과 스스로의 자아 규정 과정이 쌓아올린 것이기에, 그러한 정치적 지향에 대한 부정은 그 개인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여겨질 만큼 민감한 문제다. 때문에 대개의 독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과 다른 성향을 지닌 작가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만화라면, 근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쭈욱 이어져 내려온 저 정치 만화들이 있지 않는가. 각자의 진영을 위해 복무하며 그 정치적 신념 공유자들의 지지를 동력삼아 정치 그 자체를 주제로 그려지는 만화들. 정치 이야기는 그런 정치 만화가들에게 맡겨놓고, 대중 일반을 대상으로 한 상업 만화는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비정치적인 이야기만 하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그렇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삶, 정치, 종교를 모두 뭉뚱그려 표현했던 태초의 만화가 오늘날에는 비정치적인 상업 만화와 정치 쟁론장의 정치 만화로 분화된 듯이 보인다. 이는 20세기, 이념과 정치의 시대가 저물고, 비정치적이며 균일한 거대 일반 대중 사회의 도래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그 일반 대중에게 통용되는 비정치적인 일반 보편 정서가 있고, 이에 기반한 만화가 상업적으로 대량 소비될 수 있었다. 그렇게 상업 만화는 천년만년 안락하게 일반 보편 정서의 온실에서 번창하리라 여겨졌다. 그런데 세상은 또 한 번 변화의 몸부림으로 요동치고 있다. 균일한 거대 군집체라 여겨졌던 대중 사회는 어느새 수많은 서로 다른 기호 공유 집단으로 분화되어 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정서와 윤리 감각을 지닌 채 일반 보편 정서의 온실 벽을 찢고 제각각의 방향으로 향한다. 세상은 더 이상 누가 일반 대중이고 무엇이 일반 보편 정서인지 규정할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일반 보편 정서의 선을 정확히 그을 수 없다면, 무엇이 일반 보편 정서를 넘어선 정치적 주의 주장인지도 규정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작가도 더 이상 일반 보편 정서라는 환상을 쫓지 않는다. 독자들 또한 이제 슬슬 자신들이 무오하며 순결한 일반 대중이 아니라 결국은 정치적 신념을 지닌 정치적 개인이며, 이 진영전의 참가자임을 깨달아가고 있다.

개인의 삶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얽힘 전체를 ‘정치’라 일컬을 수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개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만화는 정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 만화 또한 무슨 국회의원들과 국제 정세 이야기만 다루는 장르가 아니라 이 사회의 다양한 삶의 얽힘 들을 정치라는 이름으로 다루는 장르가 될 것이다.

세상과 삶 전체를 저 돌 벽에 몽땅 다 옮겨 그리려 했던 고대 이집트의 만화가는 오늘날 이 만화 우주의 지면을 다시금 세상으로 채워나가려 하고 있다. 그 작업은 앞으로의 만화와 정치를 어떻게 관계 지어 나갈 것인가. 재능과 관점을 지닌 만화가들이 그 첫 파도를 타 넘어가고 있다.
필진이미지

굽시니스트

시사IN 전속 시사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