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적인 성장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던 2021년이 지났다. 2021년은 연초부터 ‘대박’ 소식들이 줄줄이 들려왔다. 네이버웹툰은 왓패드를 약 6,600억원에 인수했고, 카카오엔터는 1조원 가까운 돈을 들여 북미의 래디쉬와 타파스를 인수했다. 그 사이에 카카오는 망가의 나라 일본에서 뿌리 깊은 기업인 카도카와의 최대 주주가 됐다. 한편, 일본의 픽코마는 일본 내 콘텐츠 기업 최대 투자액인 6천억원을 사모펀드에게서 받았다. 총 네 건의 투자 건수만 더해도 2조원이 넘는다. 한국 만화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찾아보기 힘든 규모의 투자다.
그 외에도 투자를 업으로 하는 전문 투자자들의 웹툰 제작사에 투자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정확한 규모가 나오지 않아 자세하게 알기는 어려우나, 금융투자자들이 웹툰 제작사들의 성장성을 높게 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럼, 웹툰 플랫폼을 포함한 기업들은 승승장구하고 있기만 한 걸까?
정보의 불균형, 소통의 일방은 불만을 낳는다
웹툰 플랫폼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리스크는 작가와의 갈등이다. 특히 중간에 에이전시나 제작사를 끼고 있는 경우, 플랫폼이 직접 컨트롤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들이 있다. 우리는 지난 10월 국정감사장에서 이 문제를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플랫폼과 중간 CP사, 그리고 작가 간의 갈등이 일어나는 가장 큰 원인은 정보 불균형이다. 정보가 불균형하고, 그것을 해소하기보다 이용하고자 하는 욕망은 불신을 낳고, 갈등을 키운다. 일부 나쁜 버릇을 ‘관행’으로 포장하는 습관이나, 잘 알지 못하는 신인급 작가에게 합당하지 못한 대우를 하는 경우, 그건 업계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국정감사장에서 토로한 작가들의 불만은 단순히 ‘수수료가 과도하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떼어가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불만이 우선이었다. 그러니까, 단순히 ‘내가 왜 이것밖에 못 버느냐’는 불만이 아니라 ‘왜 이렇게 나왔는지를 확인하게 해 달라’는 말이다.
작가와 플랫폼이 계약하는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자기 작품으로 연재계약을 하는 작가 외에도 스튜디오에 고용되어 일하는, 업무상 저작물을 만드는 작가나 일정 기간이나 프로젝트 단위로 계약하는 프리랜서 방식의 협업이 늘고 있다. 계약상 자기 작품으로 연재하는 작가는 사업 파트너에 가깝지만, 이 개념이 점차 해체되면서 생기는 갈등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작가들이 쌓아온 불신의 벽을 해소할 만큼 적극적인 소통에 나서지 않는다면 플랫폼은 여전히 불신의 대상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플랫폼을 상대하는 작가와 수많은 작가를 상대하는 플랫폼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정보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 한쪽으로 이미 기울어진 무게추를 움직이려면 일단 이것이 ‘기울어져 있음’을 인식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물론 사업적 계산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보다 적극적인 소통을 위한 태도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관행을 덮어주기보다, 드러내고 도려낼 수 있도록 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훈풍이 거품이 되지 않도록
웹툰 산업은 기본적으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다. 가장 많은 인기를 얻는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 간의 편차가 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웹툰 산업에 지금 부는 훈풍은 1위 작품에 쏠리는 관심에 비례한다. 매년 더 높은 수익을 올리는 작품이 나오고, 압도적인 성장률을 보여주는 웹툰계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관심이 일상이 되는 시기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대부분 승자독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상위를 차지한 소수의 플레이어가 많은 수익을 거두고, 다수의 플레이어가 나머지를 두고 경쟁하는 시장이다. 다만, 새로운 플레이어가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그들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최상위 플랫폼에 바로 진입하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로 만드는 것보단 다양한 만화가-웹툰 작가로서의 삶의 방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작가를 구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어려운 웹툰 업계에서,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기 위한 투자가 공모전밖에 없다는 건 조금 안타까운 일이다. 일부 교육기관이 이 일을 맡아서 하고 있지만, 늘어나는 수요와 현업과의 괴리를 좁히기엔 한계가 있다. 대중에게 작품을 공개하고, 대중을 작품으로 만나는 경험을 할 공간, 즉 보다 다양한 플랫폼과 만화를 향유하는 방식이 등장할 필요가 있다. 밀물처럼 밀려들어 온 웹툰에 대한 관심이 거품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창작과 제작의 경계
기본적으로, 만화는 ‘창작’의 영역에서 만들어진다고 여겨져 왔다. 작가명이 있고, 그 작가와 협업한 어시스턴트들이 있더라도 그건 개인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웹툰의 시대가 오면서 제작의 영역으로 많은 부분이 넘어가고 있다.
독자를 분석하고, 캐릭터와 그들이 살아갈 세계를 기획하는 방식으로 ‘제작’되는 작품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건 산업화의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지금은 과도기의 상황에서 급격하게 늘어나는 이런 기획작품들이 크게 보이지만, 보다 자연스럽게 시장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가는 법을 찾아야 한다.
제작이 기반인 영화에서도,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마블의 MCU를 ‘시네마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던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이 떠오른다. 이제 시네마의 시대가 갔지만, 자신은 장인정신으로 꿋꿋하게 <아이리시 맨>을 만들었다던 그의 말처럼, 창작자의 시선을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 더욱 주목받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 2021 선댄스 영화제 포스터
미국의 영화제 중에 마니아를 형성한 선댄스 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이 있다. 선댄스 영화제는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를 위한, 말하자면 소규모 자본이 투자된 젊은 감독을 위한 영화제로 각광받았다. 1985년 시작한 이 영화제에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새로운 시도를 만날 수 있는 영화제로 영화 마니아들에게 사랑받아왔다. 2020년에는 <미나리>가 최고상인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는 오늘의 우리만화,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부천만화대상 등 다양한 상들이 있지만 특정 장르나 독립시장을 위한 상은 아직 없다. 선댄스 영화제와 같은 움직임이 영화의 저변을 넓히고, 창작의 지평을 확장시켰던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우리나라 만화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필요하다. 다만, 일회성 지원사업이 아니라 꾸준히,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작가 아닌’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창작과 제작’이 명확히 구분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창작자가 제작자가 되기도 하고, 제작자가 창작을 하기도 하는 만화의 가능성을 보다 확장하고, 그를 확인하는 장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한다면 한국 웹툰계에 최근 문제로 지적되는 다양성 문제도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 웹툰계는 급속도로 성장해 왔다. 그동안 성장통이라고 할 만한 사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가파른 성장세를 만난 지금, 현재를 통해 미래에 필요한 것들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앞으로는 웹툰계가 더 나은 생태계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