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선수를 주인공으로 한 축구 만화가 일본에서 발간되었다는 사실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기량과 훌륭한 인격을 높이 산 일본 <코우단샤(講談社)>의 소년 만화 잡지 『주간 소년매거진(週刊少年マガジン)』이 2002년 5월 말 월드컵 특별기획으로 실었던 「홍명보 이야기(洪明甫物語)」[*주1]가 바로 그것입니다. 「닥터 노구치(Dr.NOGUCHI)」와 「검사 용마(龍馬へ)」의 작가 무츠 토시유키(むつ利之)가 집필한 작품으로, 94년 월드컵 당시 명승부로 꼽혔던 한국 대 독일 전을 그렸습니다. ([*주1] 「홍명보 이야기」는 <학산문화사> 의 격주간 소년지 『찬스』 2002년 11호(5월 21일)•12호(6월 4일)를 통해 전•후편으로 나뉘어 소개되고 곧 이어 「HERO! 홍명보 이야기」라는 제목을 단 얇은 단행본으로 나왔습니다. 출간일은 6월 11일. 이미지 참조) 3:0으로 끌려가던 독일전의 하프타임, 포기하지 않았던 그. 시간이 흐른 2002년에도 ‘아시아의 리베로’는 여전하더군요. 홍 선수가 스페인의 골문에 마지막 승부차기 골을 작렬시키던 순간, 시청 광장을 꽉 메웠던 붉은 물결. 거대한 함성. 그 순간을 생각하면 목이 메고 가슴이 뜨거워진 이는 아마도 저만은 아니겠죠. 『찬스』(학산문화사)의 「HERO! 홍명보 이야기」 | | 이제 축구는 그 자체로 감동과 환희를 주는, 단순한 신체활동 이상의 존재로 국경과 세대를 넘나들며 공유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 그러한 ‘축구를 다룬 만화(이하 축구만화)의 매력’에 대해 자문을 구하던 제게 한 분이 이런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축구 만화의 매력이라니, 축구를 다뤘다는 것 이외에 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야, 촌철살인의 지적입니다. 축구 만화가 즐겁게 느껴지는 진짜 이유는, 공기가 든 가죽 주머니 하나로 온갖 드라마를 자아내는 인기 스포츠인 축구를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축구 만화의 전개를 그대로 빼서 농구 만화에 넣어도 그다지 부자연스럽지 않으니까요. 아마 축구만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가운데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축구 만화의 패턴’[*주2]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보신 분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내용을 얼핏 볼작시면 ― ① 일단 주인공은 전학생이고, ② 그 학교의 축구부는 어떤 사건으로 없어졌거나 기껏해야 예선에서 허덕이는 약체 팀인데다, ③ 감독이나 코치는 거의 국가대표선수 출신인데다 부상당해 은퇴했거나 ④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식입니다. 거기에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강적을 물리치면 또 다른 특성을 가진 강자가 나타난다는, 에스컬레이터식 스토리 플롯이죠. ( [*주2] 축구만화의 법칙 하나. 주인공은 90 이상 미남 스트라이커이다. 둘. 배경은 90 이상 고등학교 축구부다. 셋. 그 고등학교는 축구부가 어떤 사건으로 없어졌거나 예선 탈락하는 약체팀 중 하나다. 넷. 주인공은 대부분 그 학교로 전학 온 학생이다. 다섯. 주인공으로 인해 팀은 연습시합에서 우승후보를 이긴다. 여섯. 예쁜 여자 매니저와의 스캔들은 빠지지 않는다. 일곱. 감독은 거의 대표선수 출신이며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 여덟. 상대편 중 꼭 수중전에 강한 팀이 있다. 아홉. 상대편 중 꼭 폭력축구를 구사하는 팀이 있다. 열. 주인공 필살기의 대부분은 골키퍼도 쓰러뜨리는 초강력 슛이다.) 맞습니다. 그 패턴이라는 것의 정체는 ‘식상함’이 아니라, 바로 ‘검증된 인기 비결’입니다. 실제로 전통적인 축구 만화를 비롯해 스포츠 만화 대다수에서 나타나는 패턴이고,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인기를 확보할 수 있는 매력 포인트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틀을 지켜나가며 작가 나름의 역량에 따라 여러 장치를 가미하는 식의 축구 만화들이 출간되고, 지금도 인기를 끌고 있지요. 간단한 예를 들자면 라이벌은 정치, 사회, 경제적인 모든 측면에서 낮은 위치로 설정된 주인공보다 우월한 상위 계층이 많습니다. 배경도 다르죠. 요컨대 축구의 기본기에서 패스, 슛, 드리블까지 빠지는 것 없는 왕자님 스타일의 라이벌에 비해, 천재성을 타고나지 못한 주인공에겐 남을 능가하는 노력과 꾸준한 수련만이 있을 뿐입니다. 「휘슬!」 (히구치 다이스케(樋口大輔), 24권 완결, 대원씨아이) | | 그 대표적인 노력형 주인공의 전례라면, 히구치 다이스케(樋口大輔)가 그린 「휘슬!」 (24권 완결, 대원씨아이)의 주인공 ‘카자마츠리 쇼우’입니다. 그는 단신(短身)이라 포스트 플레이를 할 수 없고, 주력이 그렇게 빠른 편도 아니라 윙에도 적합지 않습니다. 드리블이나 개인기도 라이벌로 나오는 미즈노에게 비교할 바 안 됩니다. 결국 실력차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언제나 연습에 몰두합니다. 팀 연습이 끝나고도,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밤까지 연습하고 수련한 끝에 자신의 작은 키를 이용한 개인기를 쓸 수 있게 됩니다. 마침내 대표팀으로 차출되기까지 하고, 자신이 원하던 승부를 맞이하게 되지요. 물론 다른 이들보다 습득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점은 그의 장점이었습니다만, 그는 발전했어도 결코 만화에서 끝까지 최고가 아니었습니다. 쇼우가 가진 최고의 강점은 벽에 부딪쳐도 언제나 포기하지 않는 그 마음가짐이었죠. 작가가 말했던가요. “독자들은 약자가 패배를 극복하고, 끊임없는 수련과 성장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이들을 그린 드라마에 열광한다”고. “그래서 「휘슬!」은 성장하는 이들을 그린 만화”라고. 그것이 축구만화의 황금 패턴, 정도(正道)이자 매력이었습니다. 축구만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이자 매력이 성장과 극복의 과정이라는 것을 부정할 분은 없을 겁니다. 「축구왕 슛돌이」 한국판 DVD 표지 | | 물론 축구만화의 매력에는 다른 요소들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민 애니메이션 「축구왕 슛돌이(燃える! トッブストライカ!)」를 기억하시는지요? 스토리는 몰라도 슛돌이의 필살기 ‘독수리 슛’과 쥴리앙의 ‘도깨비 슛’, 시저의 ‘총알 슛’ 등의 마구(魔毬)를 기억하시는 분은 참으로 많으실 겁니다. 「쥐라기 월드컵(Dragon League)」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은 리얼리즘 대신 재미를 택한 작품들이지요. 현실적인 축구의 기술과는 지극히 거리가 멀지만, 각 화마다 선보이던 온갖 마구들은 독자들의 눈길을 휘어잡는 요소로 등장하며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눈요기가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부족한 현실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독자의 머리를 강타하는 환상, 그것은 축구만화가 가진 또 다른 무기입니다. 아무리 리얼리티를 강조해도 축구만화를 ‘만화’답게 만드는 재미의 요소는 분명 존재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마구를 비롯한 화려한 기술들입니다.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움직임들, 고급 기술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등장인물을 통해 독자는 자신을 투영합니다. 윤재호의 「엔젤컵」 (5권 완결, 대원씨아이) | | 그 독립된 세상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에, 우리가 곧잘 접하지 못하는 ‘독특한’ 모습의 만화 역시 존재합니다. 격투게임 「철권」의 캐릭터들이 등장해 100kg짜리 철구를 이용하는 배틀을 축구 형식으로 그린 박철호의 「파이트볼」(20권 완결, 「신 파이트볼」은 14권 완결, 대원씨아이) 등은 나름대로의 재미를 선사합니다. 윤재호의 「엔젤컵」(5권 완결, 대원씨아이) 역시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성 축구’라는 참신한 소재와 매력적인 아가씨들이 등장하는 작품이지요. 분명 ‘축구 만화의 매력’이라면 축구를 통해 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일 겁니다. 독특한 소재와 개성적인 캐릭터도, 화려한 기술과 마구도 모두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축구만화에 그 이상으로 열광하게 되는 이유라면, 역시 모두가 좋아하는 축구가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겠죠. 얼마 남지 않은 독일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광화문에서 뵙겠습니다. top "축구라는 스포츠는 상대의 공을 빼앗아 모두 함께 그 공을 이어나가다가 슛을 하는 것입니다. 축구라는 스포츠는 손 이외의 부분이라면 어디를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패스 하나라도, 발의 여러 가지 부위로 하는 것이 가능하기에 그 각도와 강약을 조절하면 매우 여러 종류의 패스가 나옵니다. 게다가 양쪽 발과 머리를 다 사용하니까, 수없이 다양한 종류의 패스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해지지 않습니까" from 「휘슬」 1권, 히구치 다이스케(樋口大輔) 2006년 4월 vol. 39호 ver01 * 이 글은 만화 중심의 대중문화 언론 『만』(http://mahn.co.kr/)과의 공동 기획입니다. 글 달빛이야기 백인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