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려한 그림과 문장에서 나타나는 짜릿한 혐관의 서사 - <울어봐 빌어도 좋고>
"내 뺨을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 식의 신데렐라 혐관 서사가 진부하다는 평에도 꾸준히 사랑받는 것은, 아마 관계의 격차에서 오는 짜릿함 때문일 것이다.
위아래가 분명해야 할 관계가 제대로 성립하지 않을 때 생기는 긴장감은 언제나 독자를 매료한다. 복종과 지배가 당연해야 할 관계가 어딘가에서 어긋나고, 그 원인을 서로 알면서도 끝내 다가서지 못해 미워할 수밖에 없는 관계.
이런 배덕의 관계를 우리는 순애보다 더 짜릿하게 느낀다. 그 짜릿함의 핵심은 진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관계를 완전히 끊어 내지 않는 줄타기에 있다.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관심을 끌려고 짓궂게 구는 초등학생처럼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혐오를 바라는 관계. 그것이 평화롭고 환상적인 배경 속 선남선녀의 이야기라면 흥미는 더욱 당길 수밖에 없다.
<울어봐, 빌어도 좋고>는 구조만 보면 여느 현대 신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전형성을 띤다. 일찍 부모를 여읜 어리고 예쁜 소녀가 거두어져 홀로 씩씩하게 자라고, 의사 집안의 소꿉친구를 서브 남주로 둔 채 요즘 유행하는 '북부대공'형 공작의 눈에 들어 삼각관계를 이루며, 여러 여자의 질투를 받는다.

이때 신데렐라인 레일라를 울리며 즐거워하는 것은 오롯이 공작 마티어스의 몫이다. 밝은 세계에 먹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듯, 레일라와 같은 화사한 밝음 앞에서 그는 온전히 어둠일 수 있고, 자신에게 솔직한 어둠을 드러낸다. 그것이야말로 마티어스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희귀한 것이다.
모두가 자신을 똑같이 대할 때, 마티어스에게는 자신을 다르게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마티어스의 신랄함과 레일라의 청초함이 이루는 대비는 우리가 보아 온 여느 드라마 속 관계와 다르지 않지만, 이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그림체, 둘째는 소설 같은 내레이션이다.
수채화 같은 그림체는 모네나 르누아르를 떠올리게 할 만큼 완성도가 높아, 매 컷을 한 장의 일러스트라 해도 믿을 정도다. 작화는 아르비스를 유럽의 목가적 이상향으로 그려 내는데, 인물뿐 아니라 풍경과 건물 배경이 특히 일품이다. 마티어스가 타는 자동차와 장교 시절의 복장으로 미루어 보면 작품의 시대 배경은 대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쯤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인물을 있는 그대로 배경 위에 세우기보다, 인물을 상징하는 색과 식물, 동물을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레일라를 장미를 배경으로 그리거나, 마티어스의 목소리가 물새 깃털을 닮았다며 물새를 그리거나, 마티어스의 주변을 푸른 장미와 넝쿨로 채우는 식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상징은 새다.
새를 사랑해 숲을 누비는 레일라와 그 새를 사냥하는 마티어스의 대비는, 두 사람의 관계를 처음부터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구도로 드러낸다. 덕분에 독자는 각 인물이 지닌 색깔과 상징을 분명하게 읽어 낼 수 있다.
또한 웹소설 원작 웹툰은 대개 서술자를 지우고 주인공의 시점에 초점을 맞춰 대화와 행동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반면, 이 작품은 서술자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생각을 표현하는 말풍선 대신 내레이션을 쓰고, 초점 인물이 바뀔 때마다 이 방식을 이어 가는 모습은 웹툰보다 그래픽노블에 가깝다. 특히 마티어스와 레일라의 내면은 그림보다 문장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기에, 작품은 이 방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서술자의 내레이션과 초점 인물의 내레이션을 구분해 보는 것도 이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 중 하나다.

"푸른 새벽빛 속에서 눈을 뜬 것 같았는데 어느새 오후의 햇살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36화)
"그의 눈이 내 오랜 기억의 색과 닮았다는 걸. 당신은 내 슬픔의 빛깔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구나…” (36화)
"귀를 찌르는 어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카일은 그 악몽 같은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렸지만 그 박명조차 지나치게 눈이 부셨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눈을 감았다. 차라리 세상이 암흑이었으면 했다. 지금은 오직 그 바람뿐이었다.” (57화)

처음 두 문장이 레일라라는 초점 인물의 내레이션이라면, 뒤의 문장은 카일에 대한 서술자의 내레이션이다. 초점 인물의 내레이션과 달리 서술자의 내레이션에는 장식이 조금 더 달려 있다. 서술자의 내레이션은 인물의 내면과 행동을 보충하는 동시에 사건을 요약하는 데에도 쓰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술자의 내레이션은 마티어스의 내면을 드러내는 거의 유일한 통로다. 흥미로운 점은 마티어스 자신의 목소리로 드러나는 내면이 갈수록 점점 사라진다는 것이다. 16화 정도에 등장했을 뿐, 레일라에게 관심을 갖게 된 뒤로는 서술자가 대신 전하는 내면은 마티어스의 레일라에 대한 생각뿐이다. 생각 말풍선은 아예 쓰이지 않는다. 바로 이 비밀스러움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다른 인물들의 속내가 모두 드러나는 와중에도 마티어스의 진짜 속내만은 모호하게 남는다.
레일라를 괴롭혀 울리고 자신에게 빌게 만들고 싶은 마음 밑에는, 단순히 뜻대로 되지 않는 무언가를 꺾어 버리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긴장이 자리한다. 타인에게도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 마티어스는 뒤로 갈수록 정보가 지워진 채 말과 행동만 남고, 끝내 독자도, 마티어스 자신도 그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 그림체와 감정적인 내레이션이 겹치면서 마티어스의 부덕한 모습은 낭만적인 욕망처럼 비친다. 낭만주의의 격정이 지닌 솔직함처럼, 무언가를 차지하려 자신의 지위를 휘두르는 마티어스의 모습은 그의 신사다움과 정면으로 어긋나기에 끊임없이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점점 더 집착하고 피폐해지는 과정에서, 레일라가 굴복하면서도 그를 경멸할수록 마티어스는 그만큼 더 경멸받을 만한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그편이 무관심보다는 나을 테니까. 혐오도 관심이라면, 혐관은 결코 정상적인 관계라 할 수 없을지언정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에게는 가장 걸맞은 정서일 것이다.
다만 그 그림과 문장의 아름다움이 이 작품의 가장 위험한 지점이다. 수채화의 빛과 공들인 문장은 지위를 앞세운 강압마저 애틋한 낭만의 서사시처럼 보이게 만들고, 독자는 레일라가 겪는 굴욕보다 마티어스의 결핍에 먼저 마음을 내주게 된다. 아름답게 그려진 집착을 즐기되 그 아름다움이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함께 볼 때, 이 작품은 비로소 제대로 읽힌다. ‘혐관’의 공식이 익숙하다 해도, 매 컷을 한 폭의 그림처럼 넘기며 끝내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 한 남자의 침묵을 따라가 볼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