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리타>는 d몬 작가의 신작이다. 동시에, 전작 <데이빗>을 잇는 인간 삼부작 중 중간을 맡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작에서 말하는 돼지가 나왔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말하는 로봇이 나온다. 이때, 돼지와 로봇이라는 소재들은 각각 인간 존재와의 비교를 위해 사용된다. 그런데 <데이빗>의 화두가 ‘말하는 돼지를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였다면, <에리타>의 주제의식은 그보다는 조금 더 복잡하다. 작품의 주인공인 에리타는 몸과 마음이 분리된 상태로, 그녀의 뇌가 용액 안에서 보존처리 중인 반면, 그녀의 육체는 뇌를 대신하는 프로그램을 이식받은 채 ‘성장해감에 따른 정신적 발달’을 재현해내고 있다. 그렇다면 둘 중에서 ‘에리타’라고 부를 만한 건 무엇인가? 인간 지능의 상징인 두뇌? 생물학적으로 에리타라 할 수 있는 육신?
이 작품에서 d몬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간극을 탐구한다. 전작이 돼지와 인간이라는 소재를 통해 계급 사회에 대한 우화를 그려냈다면, 본작은 인간 자체에 대한 실존적 문제 안으로 진입한다. 그러나 이 탐구 실험은, 우리가 아는 어느 실존주의적 사례와 다른 방향성을 지닌 듯 보인다. 다양하게 이야기해볼 수 있겠지만 소재 자체만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작품 안에 나오는 포루딘 용액이라는 화학 물질에 관해서다. 이 화학 물질은 인체의 노화를 막아주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으나, 어떠한 이유로 인해 생체조직에 끔찍한 변형을 일으키는 물질로 변형된 상태다. 그래서 <에리타>에서 포루딘은 두 가지 방향성을 지닌 물질이다.
작품 내에서 에리타의 아버지인 ‘박사’는 안전한 포루딘 용액으로 에리타의 뇌를 보존처리 해두었다. 반면, 에리타가 그의 호위 로봇인 가온과 동행하게 되는 것은 바깥세상이 포루딘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즉 안쪽에서 포루딘은 에리타를 지켜주는 물질이지만, 바깥에서 포루딘은 에리타를 위협하는 물질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포루딘은 좋은 물질일까 나쁜 물질일까. 다소 유치해 보일 수도 있는 이 질문은 하나의 문제에 한 가지 답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에 의해 감싸지는 게 ‘안전’하다면, 무언가에 의해 감싸지는 게 ‘위험’한 이유는 무엇인가?

2.
작중에서 에리타는 뇌사 상태에 빠졌고 육체만이 성장하는 처지에 놓인다. 영혼은 멈췄지만 육체는 살아간다고 볼 수 있는 이 상황에서, 박사는 그녀의 영혼을 포루딘 용액에 완전히 가두어버린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녀의 영혼은 뇌사라는 감금 상태에 놓여있다. 그러나 부차적으로 그 감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포루딘 용액이다. 이때 우리는 포루딘 용액이 에리타를 속박하는 것인지 아니면 보호하고 있는 것인지를 따져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바깥의 오염된 포루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에리타가 포루딘으로 인해 바깥세상을 돌아다니지 못하는 게 오히려 더 안전한 일일 수도 있다. 즉, 오히려 오염된 포루딘이 에리타를 보호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인류를 절멸시킬 만큼 유독한 물질이 어째서 에리타를 보호해주느냐고 묻는다면, 이 문제는 실존주의의 맥락으로 넘어간다. 첫 번째로, 오염되지 않은 포루딘에 의해 보호받는 에리타의 뇌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뇌사로 인해 멈춰버린 에리타의 시간을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건 포루딘이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절멸로 인해 멈춰버린 일상을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건 포루딘이다. 만약 세상이 포루딘으로 오염되지 않았다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에리타는 로봇 가온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야 했을 테다. 그러나 이 평생은 에리타에게 단지 육체만이 살아있을 뿐이라는 점 때문에 온전히 유지되지 못한다. 그녀의 뇌가 기계로 대체되었다 한들, 육체는 언젠가 썩어 문드러질 것이며 그때 에리타의 처지는 누구보다 비참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멈춰버린 시간’이라는 점에서 에리타의 뇌와 육체를 같은 자리에 두어볼 수 있다. 두 사례는 포루딘 용액에 둘러싸여 있고, 그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또한 물리적으로 살아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에서도 두 사례는 유사하다. 먼저, 에리타의 뇌는 뇌사 상태에 빠져 있고, 에리타의 육체에는 뇌가 없다. 지금 에리타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에리타의 뇌를 복사해놓은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그러니 기본적으로는 지금의 에리타를 두고서 ‘살아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 에리타를 지키는 두 명의 인물, 호위로봇 가온과 기계인간 가온은 이 사실을 두고 대립하게 된다. ‘에리타’의 보존을 우선시하라는 박사의 명령은 에리타의 ‘뇌’에 적용되는 것일까, 아니면 ‘육체’에 적용되는 것일까.

3.
보존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존이라는 단어는 살려야 할 것을 최대한 살리는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미 죽은 것을 썩지 않게 유지하는 일’도 보존의 범주에 든다. 호위로봇 가온이 후자를 택한다면, 기계인간 가온은 전자에 무게를 둔다. 호위로봇 가온은 에리타의 뇌만이 진짜 에리타임을 지지한다. 반면 기계인간 가온은 이미 죽어버린 뇌가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육체가 바로 에리타라고 말한다. 이처럼, 죽음을 보존하는 것과 삶을 보존하는 것으로 작품의 주제의식은 갈리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두 로봇의 탄생배경에서도 이러한 차이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먼저, 호위로봇 가온은 기계로 태어나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반대로, 기계인간 가온은 인간이었지만 정신만을 기계로 옮겨온 존재이다. 이들은 각자 태어난 몸과 정신이 다르며, 그래서인지 중요시하는 가치도 다르다. 1) 호위로봇 가온이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것, 죽음이나 감정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에 접근하려 하는 반면. 2) 기계인간 가온은 자신이 벗어던지려 했던 신체의 굴레를 적대시한다. 즉 기계였던 이가 뇌를 지지하고 인간이었던 이가 육체를 지지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된다. 이를테면 죽음을 보존하는 것은 대상을 시간으로부터 빗겨 나가게 하는 것이다. 방부 처리된 미라가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듯이 말이다. 그러니 위에서 말한 두 명의 로봇들은, 어쨌거나 로봇이라는 점에서 시간의 바깥에 자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그들이 바깥세상의 오염된 포루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는 에리타가 바깥세상에서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는 것과 대비되며, 우리는 에리타가 시간에 종속된 존재임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4.
그런데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에리타의 육체에 뇌를 돌려놓는 것임을 생각해본다면, 작품이 말하는 ‘보존’이란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의미 중에 전자에 더 가깝다는 뜻이다. 즉 이 작품의 노선은 삶과 죽음 중에서 삶에 더 무게를 둔다. 살 수 있다면 살아야 하며, 죽은 채로 사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에리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곳에 살아있는 건 에리타 단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발언이 영혼과 육체 중에 육체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삶이라는 하나의 관념이다. 그리고 그 관념은 삶에 대한 의지일 뿐만 아니라 시간에 대한 의지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작품의 주요 갈등은 기지 내의 포루딘 정화 장치가 파괴된 후 에리타에게 남겨진 시간이 지정됨으로써 발생한다. 두 명의 로봇은 오염된 포루딘 안에서도 생존할 수 있고, 음식을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인 에리타는 그렇지 못하다. 육체적으로나 보존의 측면에서나 에리타에게는 시간이 한정되어있다. 그리고 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나가는 에리타의 모습과 대비된다. 이 만화에서 오직 에리타만이 인간의 육체라는 점을 생각해보라. 그녀는 인간의 육체이기에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쉽게 말해 그녀는 필멸자다.
요컨대 시간에 대한 압박을 느끼기에 인간이라 할 수 있다. 두 로봇은 바로 그 인간을 위해 헌신한다. 무한한 시간 동안 황무지를 떠돌다 에리타를 만난 기계인간도, 기지 운영과 에리타의 생존 일수를 계산하는 호위 로봇도, 이들은 모두 에리타를 생각하며 시간의 압박 아래로 들어간다. 만약 에리타가 없었다면 그들에겐 시간관념이라는 게 없었을 것이다. ‘에리타’라는 존재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포루딘 용액으로 보존되는 에리타의 뇌는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반면 인간의 육체를 한 ‘에리타’ 프로그램은 시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시간 안에 던져지는 것이 바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표는 에리타에게 미래를 쥐여주는 일일 테다. 그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 존재의 긍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