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협상> 꼰대들에게 도전하는 신세대 일진만화
사실 언론과 학계에서 ‘일진만화의 범람이다.’라는 말에 2020년 연재주제를 일진만화로 잡았지만 소재는 이미 고갈 났다. 앞으로 학계가 일진장르의 논의를 진행하지 않는 이상, 일진 장르는 큰 움직임이 없을 것이다. 약 1년 동안 필자가 연재를 하면서 느낀바 일진장르를 규정하자면 “일진과 찐따, 인싸와 아싸라는 계급화 된 학교생활을 다루는 작품”이라 정리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정의에 속하는 장르를 살펴보니 박태준 작가와 그 지인 작가들의 작품이 전부였다. 물론 이들의 작품이 네이버 웹툰 최상위권에 있는 것은 맞지만 범람이라 할 정도로 작품 수의 과반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배경 속에 <왕따협상>은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네이버 웹툰 2020 지상최대공모전 최우수상, 다음 웹툰 천하제일 웹툰공모전 우승작. <왕따협상>이라는 수상은 업계가 본 작품에 바라는 기대치였다. 헐리웃 시나리오 컨설턴트 시드 필드(Syd Field)는 ‘10분 법칙’을 주장했다. 시나리오 상 15페이지, 영화 상영시간 10분 안에 관객들의 흥미를 끌어야 한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시작하자마자 터트리고 부수고 하는 이유는 관객들의 주목시키기 위함이다. 만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화에서 독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공모전에서 1화에 독자들의 기대치를 올려놓지 않으면 독자는 굳이 다음 화를 찾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줄거리이자 <왕따협상> 1화를 요약해보자. ‘찐따’인 주인공 주민성은 늘 ‘일진’인 유환웅의 폭력에 시달렸다. 어느 날 우연히 유환웅과 그의 여자친구 김윤정의 키스1)를 목격하고 그 장면을 몰래 찍는다. 주민성은 김윤정에게 몰카를 들이밀고 협상을 시도한다. 협상내용은 자기와 함께 학폭 가해자인 유환웅을 왕따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김윤정 역시 유환웅에게 폭행당하고 있었고 그가 무서워서 헤어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김윤정은 주민성의 협상을 받아들여 둘은 유환웅을 몰아내기로 작전을 꽤한다.
언더독의 반란이 기대되는 이야기다. 독특한 점은 폭력이 아닌 지략으로 판세를 엎겠다는 주인공의 의지다. 확실히 그간 폭력으로 해결되는 계급투쟁에 독자들은 지쳐있었다. 명불허전이지만 <싸움독학>도 <인생존망>도 1화 댓글을 읽어보면 또 일진만화냐며 독자들은 실망감을 표했다. 그 특이점이 통한 걸까? ‘그럼에도’ 시장이 일진장르 <왕따협상>을 우수작으로 뽑은 점이 궁금했다.
작가는 “일진은 참교육당하고 왕따는 성공한다? 그거 너무 꼰대 같은 생각 아니야?” 도발적인 대사로 독자들에게 공표한다. 일진장르라는 외피를 덮고 있지만 내 만화는 다르다는 자신감. 주인공이 갑자기 얼짱이 되고, 유튜브로 싸우는 법을 배우고, 혹은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라던가, 과거를 숨긴 일진이었다던가. 그런 것들을 고리타분한 꼰대로 만들고 자신은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겠다고 말 한다.

1화는 독자들의 흥미를 당기기에 군더더기 없을 정도로 좋다. 학교라는 배경. ‘사람을 만드는 교육을 한다지만 사실 이곳은 그저 고삐 풀린 양아치들의 놀이터다.’ 상식을 엎어 독자가 궁금해 하도록 만든다. 금품을 갈취하는 일진, 폭행당하는 주인공,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이 하필 ‘여신’이라고 불리는 예쁜 여학생 앞에서 벌어져 주인공을 수치스럽게 만든다. 방과 후 주인공은 발가벗겨져 일진들 앞에 춤을 추라고 강요당한다. 저항하는 주인공. 그 이유로 일진에게 또 폭행당하고 주인공 주변엔 폭행으로 얼룩진 피가 낭자한다. ‘찐따’의 삶이 원래 그렇다며 자조하는 주인공에게 악마가 준 기회가 찾아온다. 작품은 독자들에게 묻는다. 키스 영상을 유포해 가해자 유환웅을 몰락시키느냐 아니면 순순히 영상을 지우느냐. 정답이 궁금한 독자는 2화를 누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답은 1번도 2번도 아닌 ‘왕따 협상을 한다.’였다. 학교폭력 피해자와 가해자의 여자 친구가 동맹을 맺고 지략으로 가해자를 몰락시키는 이야기가 기대된다. 물리적 폭력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기존의 만화와는 확연히 다른 행보였다.
하지만 8화에서 가해자 유환웅은 퇴장한다. 주인공 주민성의 어머니가 우울장애를 겪고 있는 퇴역군인이라는 설정으로 등장하더니 아들을 폭행한 유환웅과 그의 잔당을 초인적인 격투실력으로 쓰러뜨린다. 그리고 유환웅은 전학을 간다. 지략싸움이 돋보이는 정치만화를 기대했지만 여타 다른 만화와 만찬가지로 똑같이 폭력으로 해결을 한 것이다. 동의가 안 되는 결말이었다. 그런데 독자들의 반응은 ‘할아브’2)에 버금가는 ‘빅맘’이라며 먼치킨 캐릭터의 등장에 환호했다.

상업만화가 재미있으면 그만이겠지만 기획할 때는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한다. 작가가 잘하는 장르와 주제, 내가 연재하는 곳의 독자성향, 현재 유행하는 장르 등이 따져야한다. 그리고 만화의 장점은 언제든 그 기획의도를 바꿀 수 있단 점이다. 이전에 다루었던 <랜덤채팅의 그녀!>, <일진이 사나워>처럼 만화는 투자비용이 다른 대중매체보다 적기 때문에 언제든 아니라면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초인적인 어머니의 등장은 원래 기획이 된 것인지, 아니면 기획의도를 바꾼 것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우울장애를 앓고 있고 아들에게 편집증적인 집착을 보이는 암시가 있었지만 장르를 뒤엎을 정도의 인물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혹은 이것저것 다 집어넣은 걸 수도 있다. 하이콘셉트(High Concept)전략처럼 중요한 것은 콘셉트가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영화를 예로 들어 소시민 형사가 화이트칼라 범죄자를 때려잡고, 조폭이 사학비리 단체와 주먹싸움을 하고, 사기꾼이 검사의 도움을 받아 부패정치인을 몰락시키고, 세법 변호사가 군부독재 정권과 법정싸움을 하고, 하층민 가족이 한강에 숨어사는 거대 괴물과 싸우는 등 언더독 서사의 하이콘셉트는 한국 영화계의 주된 이야기다. 영화가 초반부 웃기고 후반부는 울리는 일정한 리듬으로 하이콘셉트 영화를 선보였다면 만화의 경우는 다르다.
만화는 언제든 전환이 자유롭다. 낮은 제작비용이라는 점, (연재처에 따라) 연재 횟수가 자유로운 점, 매회 달리는 독자들의 댓글로 피드백이 가능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영화처럼 ‘웃기고 울리는 패턴’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하이콘셉트만 처음에 유지하고 이후에는 여러 가지 장르를 섞어 매인캐릭터를 상황에 맞춰 이야기를 변용하는 상황극이 된다. <왕따협상> 역시 하이콘셉트 전략으로 본다면 8화에서 ‘왕따협상’의 목적이 사라진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중요한 건 독자들을 끌어오는 것뿐이다. “찐따가 우연히 일진의 성관계 영상을 입수했다면?” 이 하이콘셉트 하나로 독자들을 모으고 이후부터는 독자들이 좋아할만 한 것을 버무리기만 하면 된다. 남성향 만화는 폭력으로 갈등을 만들고 여성향 만화는 이간질로 갈등을 만든다.
일진장르가 좋다, 나쁘다를 논하기 것의 무의미할 정도로 일진 장르는 청소년들이 주인공인 시장이다. 어른들의 시선에는 불량하고 유치할 수 있겠지만 청소년들의 시선에는 장르의 컨벤션이 그들이 숨 쉬는 현실의 공간이다. 학교라는 집단은 육체로 이분되는 계급사회고 그 안에서 약자에게 강하는 일방적인 폭력과 이간질과 뒷담화로 ‘진짜’ 친구를 찾을 수 없는 사막 같은 곳이다. 교사를 포함한 어른들은 이러한 불온을 알면서 방관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구책을 마련하거나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 일진장르는 그들의 고단한 삶을 공감해주고 판타지로나마 전복시켜주는 해소의 장이다. 그래서 일진 장르는 10대들이 공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버무려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판타지적 사회를 만들고 그 안에서 주인공들의 소동극을 반복한다.
<왕따협상>은 시장이해가 잘 된 작품이다. 1화만 놓고 본다면 자신의 만화가 누구를 대상으로 하며 그들이 뭘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행보는 상당히 기대된다. 디씨 인사이드 카연갤 출신의 신인작가가 그리는 새로운 세대의 일진 장르는 어떤 모습일까. 박태준 작가가 <싸움독학>, <인생존망>으로 노련하게 일진 장르의 비판을 선회했다면 ‘과거의 작품은 꼰대 같다.’고 말한 신인작가 역시 선배들의 작품을 보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냈을 것이다. 무사히 1루에 안착을 하고 2루로 나아가려는 지금, 이후의 행보는 선배들과 얼마나 다를지 기대된다.
1) ‘고작 키스장면으로’ 싶은 부분의 원본은 성관계 장면이었다. 수위조절문제로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필자의 의견입니다.)
2) 웹툰 <하이브>의 ‘개장수’라는 등장인물로 초인적인 전투능력으로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최강자로 군림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