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멈출 순 없다〉 : 이토록 다정하고 폭력적인 불량만화
자룡 작가, 골왕 작가의 〈이대로 멈출 순 없다(이하 이대멈)〉는 2019년 6월부터 다음 웹툰에서 연재 중인 작품이다. 〈이대멈〉은 정문여자상업고등학교(이하 정문여상)를 배경으로 ‘학교폭력물’, ‘일진물’ 장르 문법을 따라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일상처럼 벌어지는 힘겨루기와 패싸움, 흡연, 음주, 그리고 절도까지! 비행과 일탈이 줄줄이 나오고, 학교 분위기는 학원물보다 느와르에 가깝다. 작품에 달린 댓글의 내용대로 “여기가 학교인가요, 구룡성채인가요?”라는 감상이 절로 나오는 작품이다. 학교에서 감상한다면 어쩐지 선생님께 압수를 당할 것만 같은 만화. 그러나 〈이대멈〉은 ‘불량만화’인 동시에 그 어떤 작품보다 섬세하게 청소년들의 폭발적인 삶을 들여다보는 다정한 만화다.
정문여상에서는 ‘주먹’이 곧 질서다. 매 에피소드마다 “두둥”, “우당탕”, “빠악” 등과 같은 효과음이 그치지 않는다. ‘소연’은 정문여상에서의 싸움판을 보고 기겁하여 “무슨 여자애들이 저렇게 싸워??? (10화)”라고 외치는데, 〈이대멈〉이 그려내는 세계란 바로 그런 곳이다. ‘여자애들’이 ‘저렇게’ ‘싸우는’ 세계. 정문여상 학생들은 항상 욕설을 내뱉고, 학교 안에서까지 담배를 피우며, 심지어 선도부원의 오토바이를 훔쳐 불을 지르기도 한다. 이 모든 폭력이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무법지대에서 학생들이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없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가오’를 살리기 위해…… 그런 것들은 명분에 가깝다. 정문여상 학생들은 그저 서로 눈만 마주쳐도 주먹을 들어올린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 <이대로 멈출 순 없다> 6화
△ <합법해적 파르페> 24화
〈이대멈〉만의 미학은 바로 이처럼 이유도 없고 검열도 없는 폭력에서 비롯된다. 정문여상 학생들의 싸움은 네이버 웹툰 〈합법해적 파르페〉에 등장하는 쿠크새의 행동과 비슷하다. 정의를 위한 것도 아니고, 피할 수 없는 숙명도 아니다. 그저 뜨겁게 싸워보고 싶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혈기왕성한 이 청소년들의 자존심과 기세는 어떤 규범에도 꺾이지 않는다. 강압적 질서에 대한 반항심,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픈 욕망, 분노를 터뜨리고픈 충동……. 여러 가지 감정들이 교차하겠지만, 정문여상 학생들이 싸움을 통해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바로 해방감일 것이다.
정문여상 학생들은 “그냥 맞고 싶어서 안달 난 놈 (10화)”처럼 굴고, 패싸움에서 ‘발리고’ 난 후에도 오히려 즐거워 보이는 표정을 짓는다. 학생들에게, 특히 여학생들에게 결코 허용되지 않는 비행을 마구 저지르면서. 작품 내에서 정문여상 학생들의 폭력성은 거세당하거나 교정당하지 않는데, 이는 단순히 무책임한 교사들의 방임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제지하지 않는 것은 정문여상이 ‘여자애들은 그렇게 싸우며 크기 마련’이라고 여겨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성 청소년들이 인내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세계. 그런 곳에서 정문여상 학생들은 욕망을 자유롭고 거칠게 발산해내며 해방감을 만끽한다.
그러니 정문여상이라는 공간을 폭력적인 낙원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폭력과 낙원이라는 단어를 함께 붙여놓는 것은 조금 요상하긴 하지만, 정문여상에 ‘싸움’은 있어도 ‘괴롭힘’은 없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만하다. 학교 폭력을 소재로 하는 작품은 대개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집단따돌림과 일방적 구타를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대멈〉에서는 한 사람을 향한 착취나 폭력이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정문여상 학생들 역시 여럿이서 한 사람을 ‘다구리’ 치기도 하고, 기 싸움으로 상대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서로 치고 박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싸움의 연쇄일 뿐, 개인에 대한 따돌림과는 다른 형태를 보인다.
△ <이대로 멈출 순 없다> 2화
△ <이대로 멈출 순 없다> 28화
정문여상에는 ‘무소속’인 학생이 없다. 매일 싸움판이 벌어지는 이 무법지대는 아이러니하게도 힘이 약하거나 기세가 약하더라도 생존 가능한 공간이다. 곧 같은 반, 같은 동아리, 같은 전공의 아군들이 달려와 상대에게 주먹질을 해줄 테니까. 급식실에서 ‘민주’가 ‘예슬’의 멱살을 잡았을 땐 같은 댄스동아리에 속한 학생들이 우르르 나서고, 선도부원들이 ‘유미’를 모욕했을 때에는 3반 학생들이 함께 분노하며 복수를 계획한다. 그들은 다양한 소속과 친분을 이유로 편을 들며 “우리”라는 단어를 자주 말한다. 이전에 친구들에게 배신당했던 ‘소연’은 이런 “유치한 편 가르기 (8화)”를 통해 점차 다른 학생들을 아군으로 느끼게 된다. 목적지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던 ‘성진’이 마침내 마작부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처럼. 정문여상 바깥에서 버려지고 배제되어왔던 여성 청소년들은 정문여상에서 비로소 “우리”가 된다.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고 배제되지 않는, 섬세하고 이상한 폭력의 세계. 청소년들의 비행을 묘사하면서도 이처럼 다정한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 〈이대멈〉이 ‘불량 만화’로서 지닌 윤리이자 품위다. 〈이대멈〉은 학생들의 일탈을 동경할만한 행위로 표현하지도 않고,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구구절절 설명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문제학생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거리를 두지도 않는다. 좌절, 충동, 슬픔, 해방…… 청소년들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그 모든 감정들을 독자에게 전달할 뿐이다. 가출 청소년, 청소년 성매매, 부실 급식, 조선족 차별…… 정문여상 바깥에 존재하는 현실의 문제들까지 조심스럽게 담아내면서.
아무리 그래도 지나치게 폭력적인 만화 아닌가? 이런 건 비도덕적이지 않나? 작품과 리뷰에 대하여 이와 같은 우려를 표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문여상 학생들이라면 그런 질문을 들었을 때, 망설임 없이 또 주먹을 갈길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윤리고 나발이고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잔인한 ‘형님’들의 세계와 의리로 가장된 착취를 그려내는 작품들이 많아도 너무 많은 시대에, 이토록 다정하고 엉망진창인 불량 만화가 있다니. 치열하게 제멋대로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다보면…… 정말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그러니 그들의 비행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꾸짖기보다는, 한 번쯤 모른 척 즐겁게 바라봐주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