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표상 : <삼별초>
아! 삼별초
학창 시절 배웠던 고려 시대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삼별초가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삼별초가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제주에 살아서기도 했지만, 고려의 격변기에 치열하게 몽골군에 항쟁하다 나중에는 함께 싸우던 동료들과 적이 되어야 했던 상황에서 비운의 운명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삼별초를 다루는 콘텐츠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형민우의 <삼별초>는 그런 이유에서 관심이 갔던 작품이다. 과연 작가는 삼별초라는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그려냈을까 궁금했다.
삼별초하면 익숙한 인물이 김통정이다. 최후의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에 들어온 그는 전설 속에서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지렁이의 아들로, 온몸에 비늘이 나 있고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태어난 신이한 영웅으로 등장한다. 그러니 제주를 배경으로 하는 삼별초의 이야기라면 당연히 김통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몽골군과 고려군의 연합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모습을 그려낼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여몽 연합군과 삼별초의 전쟁이 끝나고 나서부터였다. 삼별초를 상징하는 인물인 김통정은 이미 장렬한 최후를 맞은 뒤 성문 밖에 목이 걸린 채로 등장한다.
그러면 도대체 이 만화는 누구의 이야기란 말인가. 작가는 삼별초에 속했던 부대인 신의군에 주목했다.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이 되었는데 그중 신의군은 몽골군에 끌려갔다가 탈출해서 돌아온 이들로 조직된 군대이다. 그러니 몽골군에 대한 증오는 어느 누구보다 강했을 것이고, 태생적으로 몽골군에게 끝까지 저항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제주에 남은 삼별초의 마지막 잔당인 신의군들이 여몽 연합군을 괴롭힌다는 작가의 상상이 수긍이 가기도 한다.
인간 군상
여몽 연합군과 삼별초가 대립하던 시기는 정치 세력의 교체기였다. 여러모로 혼란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타난다. 만화에서는 이들을 표상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몽골군의 총책임자인 흔도, 고려인의 피가 흐르지만 원나라 장수가 된 홍다구, 원나라 황제 칸의 친위대인 보르츄이, 삼별초의 신의군으로 활약하는 바라이, 몽골군에 협력하는 고려군의 수장 김방경 등 고려와 원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각자 처한 상황이 각양각색인 인물들이다.
만화는 그중에서도 보르츄이와 바라이 두 남자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보르츄이는 명성있는 부족장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부족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서 몽골군의 선봉에 섰다. 보르츄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최고 전사들로 조직되는 칸의 친위대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런 그가 제주도까지 쫓아온 인물이 바라이다.
고려 사람인 바라이는 어린 시절 보르츄이 부족에게 잡혀갔다. 바라이는 어린 나이임에도 생존을 위해 감옥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살아남는다. 보르츄이의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보르츄이에게 소년을 가르쳐보라고 맡긴다. 전쟁 중 화살받이에 그쳤을 바라이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다. 바라이라는 이름도 보르츄이가 지어준 이름이다. 그 후 이들이 어떤 삶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스토리가 전개되지 않았다. 다만, 보르츄이는 어떤 이유에선지 바라이에게 집착을 하고 있고, 바라이는 몽골군에서 벗어나 삼별초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그들은 변방의 섬, 제주까지 흘러와 최후의 격전을 준비한다. 보르츄이와 바라이의 관계는 <신과 함께-인과 연>에서 고려군 장수의 아들 밀언(강림)과 거란족 출신으로 전장에서 살아남아 양자로 들어온 해원맥의 관계와 비슷하다. 바라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바라이는 몽골군을 탈출하고 삼별초에 합류해 몽골군에게 배운 전투 기술로 몽골군을 괴롭힌다. 태생은 고려인이면서 몽골군에 의해 길러진 그의 선택은 자신의 뿌리인 고려였다.
그런데 바라이와 반대되는 지점에 있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바로 홍다구이다. 사실 삼별초와 관련된 역사 기록을 읽을 때마다 가장 관심이 갔던 인물은 홍다구였다. 역사 속 홍다구는 고려인이었던 아버지가 원나라에 귀순한 뒤 원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자신은 고려인이 아니라 원나라의 장수라는 생각이 강했을 것이다. 만화에서도 홍다구는 철저하게 스스로 몽골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고려와 연관시키는 것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보인다. 고려 정벌의 최전선에서 자신의 공로에 집착하며 잔인한 명령도 서슴지 않는다. 원나라에서 태어나 칸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었음에도 진정한 장수로 인정받지 못하는 혈통에 대한 콤플렉스가 그를 더욱 악독한 인간으로 만들었으리라. 홍다구를 보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조력한 이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잡는데 앞장섰던 장면과 겹쳐진다. 홍다구의 선택은 바라이와 달리 자신이 성장한 원나라였다.
그리고 또 한 명 비운의 운명을 맞는 사내가 있다. 고려군 장수 김방경이다. 김방경은 고려가 몽골군에 저항할 때는 삼별초와 함께 싸웠으나, 고려가 항복한 뒤에는 삼별초를 토벌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전장을 함께 누비던 동료를 적으로 대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한다. 그의 선택은 고려라는 국가였다. 자신이 속한 국가의 현실에 따르는 인물이다. 그런데 제주에서 전하는 삼별초의 전설을 보면 몽골군에 관한 이야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삼별초를 토벌하러 온 김방경이 김통정을 잡은 것이 부각된다. 물론 장수들을 지휘하여 성안에 진입한 것은 김방경이지만 당시 정치적 위상에서 보았을 때 고려군은 몽골군의 명령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오히려 김방경은 삼별초의 장수 6명만 처단하고 일반 백성들은 건들지 않았는데, 홍다구는 김통정을 마지막까지 따른 70명의 장수를 모두 죽였다. 그런데 왜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전설에는 김방경만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탐욕과 혼돈의 시대의 제주 사람들
당시 제주는 고려군의 주둔 → 삼별초 주둔→여몽 연합군 주둔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제주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전쟁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만화에서 몽골군 장수 홍다구는 바라이의 병사에 의해 피해를 보자 강력한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마을 주민들을 다섯 명씩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전형적인 점령군의 모습이다.
“섬 전체 부대에 알려! 마을마다 주민을! 본보기로 삼는다! 아이, 어른 구분 없이! 다섯씩 머릴 잘라 마을 입구에 걸어라!! 그러다 보면! 놈들이 분명 뭔가 반응할 것이다!”(189-188쪽)
점령군으로 제주에 주둔하는 몽골군에게 제주 사람들은 전투에 이용할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제주의 4‧3 때 중산간 마을 사람들의 터전을 앗아간 초토화 작전, 제주도 곳곳에서 자행된 집단 학살의 역사가 시간을 거슬러 그대로 펼쳐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외부 세력에 의해 제주 공동체가 흔들리는 안타까운 현실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 역사는 아름답게만 보이는 제주의 또 다른 모습이다. 여몽연합군과 삼별초는 제주 사람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주에 들어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제주 사람들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만화에서는 고려 관리의 횡포에 견디지 못한 제주 사람들이 그들을 물리친 김통정과 삼별초를 환영하며 살아있는 신처럼 여겼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꼭 그렇게만 평가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전한다. 제주 마을신의 내력을 전하는 본풀이를 보면 <성산본향당 본풀이>에서는 김통정이 삼별초를 토벌하러 온 군대를 물리치고 성산에 신이 되어 좌정했다고 하지만, <광정당 본풀이>에서는 세 형제가 김통정을 죽이고 광정당, 광양당, 서낭당에 신으로 좌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긍정적인 이야기와 부정적인 이야기가 함께 전하는 것을 보면 한쪽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제주에는 삼별초가 외세에 마지막까지 저항한 것을 기리는 항몽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애월해안도로의 한 공원에는 삼별초를 대표하는 김통정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거기에 당시 희생된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다. 제주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당시 스러져 간 제주 사람들의 의미도 함께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만화 속 보르츄이와 바라이의 대결은 이제 시작이다. 운명의 굴레 속에서 앞으로 두 장수가 제주를 배경으로 어떤 이야기를 펼칠지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