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해빙기
(14) 고향 노래로 성공한 박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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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부성 작가와 필자 |
1960년대의 걸작으로 유명한 박부성씨의 ‘산소년’ ‘유람선’ ‘명견 루비’ 등을 모른다면 아마 간첩으로 몰렸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고향의 향수를 일깨워 준 솜사탕 같은 작품으로서 북쪽에 두고 온 고향을 노래해 성공한 작가였다. 자신의 유년시절의 체험을 작품에 잘 활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빛을 보게 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서울 미대 서양화과에 다니던 박부성씨는 만화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애써 작품을 만들어 여러 출판사를 찾아 다녔지만 신통한 반응을 보여 주는 곳이 없었다. 두메산골에 사는 순진한 애들이나 관심을 가질 고리타분한 원고라며 외면했던 것이다. 그 시대에는 대량 판매를 기대할 수 있는 대도시 독자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내용이 아니면 출판사에서 받아주려 하질 않았던 시대였다. 휘날리는 머리에 검은 안경을 끼고 베트맨 같은 망토와 함께 권총을 찬 채 우주선에 몸을 싣고 날아가는 매력 있는 캐릭터 ‘라이파이’ 아니면, 두뇌가 비상한 멋진 소년 탐정이 미소녀와 함께 교묘한 두뇌플레이로 흉악범을 잡아내는 ‘약동이 탐정’ 등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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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소년 타잔 <산소년>의 한장면 |
그런데 박부성씨의 캐릭터는 촌티가 줄줄 흐르는 빡빡머리에 바지저고리 차림, 게다가 고무신을 신고 있고 배경은 온통 시골마을과 산골 풍경이니 그때의 유행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출판사마다 그런 고리타분한 만화는 상품이 되지 않는다며 거절했지만, 앞에서도 거론한 것처럼 우리 출판사에서 이색적인 작품으로 받아 들여 출간을 시켰고 그는 인기작가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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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견루비/ 요술지팡이 |
그는 김경언씨에 이어 작품편수가 많은 작가 중 한사람으로 기록된다. 인기가 좋아져서 공급이 딸리게 되면 수요를 늘려야 했으므로 그는 재질이 있는 문하생들을 모집, 그의 작업실엔 항상 10여명의 젊은이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원고 작업을 하느라 밤낮없이 불이 켜 있는데다 문하생들이 들락거리는 게 수상해 보였던지 어느 날 동네 사람의 신고로 형사가 찾아 왔다. 그리고 그림은 물론 서랍 등 닥치는 대로 뒤져보고는, 주머니에서 위조지폐 하나를 꺼내 보이며 여기서 그려진 것이 아니냐고 죄인 취급하듯 다그쳤던 것이다. 나중에 오해는 풀렸지만 만화가들을 우습게 보는 사회 풍토가 그런 의심도 받게 했노라고 울분을 토하였던 일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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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과 함께한 야유회 사진(1979년) 왼쪽부터 박부성, 유세종, 이종진, 필자, 권웅 |
매년 청소년의 달이면 불량식품, 불량 장난감, 불량 만화 등 유행처럼 떠들어대는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던 것이 우리 직업이었다. 가뜩이나 남편이 만화가로 일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살았던 일류여대 출신인 부인에 의해, 그는 마침내 만화가 생활을 접고 이민을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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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1950) |
그의 고향은 영변으로 소월과 동향이다. 우리나라 대표적 서정시인인 김소월이 유명하게 된 것은 물 좋고 산 좋고 공기도 좋은 영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계절 자연환경이 몹시 아름답다 보니 그걸 노래하고 있는 가운데 유명해져 버린 것이다. 만약 이분이 함경북도 탄광지대인 아오지에서 태어났더라도 과연 유명한 시인이 될 수 있었을까 가끔 의문을 품어 본다. 그 김소월과 마찬가지로 즐겨 고향을 노래하던 작가 박부성씨는 지금 미국 뉴욕에서 화랑을 운영하며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듣고는 있다. 제자로는 애니메이터인 감독 남우전, 주기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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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영의 <검정고무신> |
현재 국산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TV에서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는 이우영의 ‘검정고무신’도 박부성씨의 작품을 윤색한 듯한 인상을 갖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60년대를 무대로 펼쳐지는 복고풍은 항상 불고 있는 것. 옛것을 알아야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도 이런 걸 두고 한 말은 아닐까? 고전(古典:Classics)이란 유행이 한풀 지났다 하더라도 두고두고 다시 소생하여 가치를 유지하는 명작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