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해빙기
(13) 완벽주의 김원빈
|
김원빈 작가 |
김원빈 씨가 탄생시킨 ‘주먹대장’은 1958년 첫선을 보인 이래 지금까지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53년 ‘태백산의 비밀’이라는 16쪽 단행본으로 데뷔한 이래, 작가의 연륜에 비해 발표 작품 수는 많지 않다. 그것은 그의 완벽주의 탓일 것이다. 소재를 선택, 해석, 설득, 연출에 들어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놓고도 막상 작업에 들어가게 되면 탐탁치 못하게 생각되어 다시 망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새롭게 모색해 보는 것이지만 시간이 경과하면 또 고민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동료 작가들은 습작에 가까운 다량의 작품을 마구 쏟아내고 있는데, 그는 철저하게 준비된 작품에도 정작 손을 대지 못하고 고민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 행사장에서 팬들의 사인 공세를 받을 때면 작가들은 즉석에서 사인을 해 준다. 그러나 김원빈씨는 사인을 거절한다. 그는 아무렇게나 쓱쓱 그려 줄 수는 없다고 한다. 정성스레 스케치해야 하고 펜터치하고 먹칠을 해서 완벽하게 그려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거절하는 게 떳떳하다고 했다.
가끔 단체에서 커다란 켄트지를 내놓고 작가들에게 사인을 요구할 때가 있다. 이때도 제일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충분히 시간을 소비하며 뜸을 들여서 사인을 끝내곤 한다. 고지식할 정도로 철저한 그의 완벽주의는 연재 청탁을 맡고도 마감을 어겨버리는 작가로 만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마감시간이 지나 편집에서 제판, 인쇄소로 넘어가는 시기에 원고를 들고 나타나 편집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로 유명했다.
|
순서대로 <주먹대장>, <별소년>, <척척동자 아기> |
주간지나 월간지들을 펼쳐보면, 만화 칸 속에 들어가는 말 풍선 속에 인쇄활자 대신 펜으로 직접 쓴 것이 가끔 눈에 띄는데, 이것은 작가가 마감을 넘기는 바람에 활자화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러므로 신인이나 인기가 별로인 작가가 원고 마감을 어기게 되면 빼버리는 게 상례다. 하지만 독자에게 인기가 있는 작가의 연재물일 경우는 어떻게든 넣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럴 때 편집자들의 고민이 커지곤 한다.
김원빈씨 외에도 일간스포츠에 연재하던 고우영 씨 역시 직접 쓰는 글씨로 유명했다. 그 역시 단골 지각생이었다. 독자들 중에는 활자보다 직접 쓴 글씨 쪽이 더 보기 좋고 정감이 있다고들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내막을 알고 보면 마감을 어긴 단골지각생이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잡지사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제때 원고를 넘길 수가 없었던 김원빈씨의 고충은 오죽했겠는가마는....어느 잡지의 편집 마감일 다음날이었다. 원고를 넘기지 못해 죄인이 된 심정으로 원고와 씨름 중인 김원빈씨의 귀에 대문을 밀치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락방 창문으로 내다보니 담당 기자가 씩씩거리며 원고를 받기 위해 마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독촉 전화조차 받지 않으니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렇게 찾아 온 것이다. 그렇잖아도 작업 차질로 인한 중압감을 견디기가 힘들었던 씨는 그만 뒷담을 넘어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그 기자는 기가 찼을 게다. 이렇게 필자와 기자가 숨바꼭질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 최후의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왔다. 번번이 신용을 어긴 김원빈씨의 원고는 두 번 다시 받지 않기로 결정됐다는 통보였다.
|
김원빈 작가의 잡지<소년세계>의 표지. 김원빈 작가는 그림은 물론 채색 전문가로도 유명했다. |
작가가 작품을 만들지 못하면 죽은 사람과 같다. 김원빈씨는 이 일로 결국 새 결심을 하게 됐다. 청탁코자 자기 집으로 찾아 왔었던 잡지사를 이번에는 그가 직접 방문했다. 물론 편집부 식구들은 전부 외면했다. 그러자 그는 학생처럼 등에 메고 온 봇짐을 내리면서, 내가 여기서 오늘 원고를 만들어 드리고 가겠노라며 짐 속에서 원고지와 연필, 제도잉크와 펜, 붓, 자 등을 꺼내들고 빈 책상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편집자들이 출근하자 밤을 새워 완성한 원고를 제출하여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원고료는 지금 지불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만화책 표지는 만화의 얼굴이다. 김원빈씨는 1960년 부엉이 문고의 요청으로 많은 작가들의 표지를 깔끔하고 보고 싶게 그려주기도 했고 ‘소년세계’등 잡지 표지등도 많이 그린 실력파로 소문이 자자했다. 어느 유명한 소설가의 명언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자기가 정말로 만족할 만한 작품을 만들려면 일생을 걸려서도 한 작품도 만들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그의 연재물 ‘주먹대장’은 이어져 갔고, 최장수 연재물로서 오늘까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