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해빙기
(12) 아이디어 왕 김경언
신동헌 씨와 처남 매부 지간인 동향친구 김경언 씨는 뛰어난 아이디어와 속필작가로 신동우 씨와도 쌍벽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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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순서대로 (경향신문에 ‘두꺼비’를 연재한 김경언에서 안의섭으로 캐릭터 변화과정) 김경언의 <두꺼비1>(1955.4.1) ▶ 안의섭의 <두꺼비2>(1955.7.5) ▶ 안의섭의 <두꺼비3>(1964.8.5) |
일찍이 경향신문사의 ‘두꺼비’ 사건으로 신문에 환멸을 느낀 그는 1959년 고급 단행본 ‘우락돌이 부락돌이’, ‘칠성이 시리즈’ 등 명랑만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잡지에서 단행본으로 작가들이 몰리다 보니 공급이 수요를 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고, 단행본의 발행 부수가 폭주하다 보니 서점에서는 만화 취급을 거부했다. 자연히 궁여지책으로 출판사에서는 쪽수를 줄여서 서점용이 아닌 대본용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판매부수도 크게 줄었으므로 인기작가들은 여러 명의 보조를 두고 다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인기를 얻지 못한 어중간한 작가들은 인기작가의 어시스던트로 들어가기 위해 애썼다. 그때 문하에는 권영섭, 이재학, 신문수, 이우헌, 이화춘 등이 있었다.
이때 만화 대본점은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여 전국에 5천점 이상으로 늘어가고 있었다.
김경언 씨는 다작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청량리 경동시장에 위치한 동양여관을 그는 화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스토리만 끝내 주면 스케치맨, 펜터치맨, 배경맨, 먹칠과 지우개질 맨, 수정맨 등 서열을 정해 능력에 따라 지불하고 있었다. 이를 본 다른 인기작가들도 뒤따라 양산 경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50쪽짜리 단행본 만화를 이틀에 한편 이상 그려내는 김경언 씨의 스피드를 어느 작가가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양산하는 가운데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니 그것은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작을 하려니 늘 시간에 쫓기기 마련이다. 그는 외출하거나 차를 탈 때도 항상 스토리노트를 갖고 다니면서 작업, 문하생들의 작업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용두동 양옥에 살던 그는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 때야말로 가장 아이디어가 잘 떠오른다고 했다. 그래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하면 두세 시간은 나오지 않고 있어서 가족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훗날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의 부인은 마당에 별도의 화장실을 만들어 가족들이 사용하도록 했고, 그가 사용하는 화장실에는 노트와 메모지, 볼펜 등을 두어 마치 응접실처럼 잘 꾸며 놓았다고 한다. 그밖에 그는 간단한 방식으로 표현, 컷을 메울 수 있는 그림법을 고안하여 사용, 작업 시간을 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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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우락돌이 부락돌이>, <의사까불이>, <왕> |
책을 너무 자주 발행하게 되니 때로는 이름을 ‘경인’으로 바꾸어 내기까지 했다. 약 5백타이틀의 다작을 하였을 만큼 만화가 중 가장 많이 그린 사람이며 인기도 최고였으니 부를 누리는 건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묘하게 꼬이기도 한다. 건설업을 크게 하던 절친한 친구의 사업에 전부를 투자하였던 그는 친구가 부도를 내고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한순간에 허망한 꿈이 되고 말았다.
그는 5.16군사정변 이후 검열이 심한 국내 창작여건과 만화를 폄하하는 문화 환경 등에 염증을 느끼고 아들이 있는 미국 로스앤젤리스로 이민을 떠났다. 그 후 뭔가 할 수 있는 새 일거리를 찾고 있던 그는, 간판에 만화를 넣어 제작하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환영하며 함께 일하자는 낭보를 받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혈압 상승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으로 지내다가 1996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우리 만화사에 한 장을 열었던 분이었고 만화방 시대의 최고 인기작가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