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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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1)맑디맑은 동심의 세계로 승부한 신동우

단행본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의 하나로 신동우 씨가 있다. 그는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었고 의사였던 큰형를 따라 가족이 월남,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2008-06-19 박기준



                                           제5장 해빙기

         (11) 맑디맑은 동심의 세계로 승부한 신동우

단행본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의 하나로 신동우 씨가 있다. 그는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었고 의사였던 큰형를 따라 가족이 월남,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대학신문
(좌) 서울대학교 신입생 신동우가 <대학신문>에 연재한 네칸만화(1956년)
(우) 서울대학교 만화십년사, <대학신문>에 개재(1956년)

신동헌 씨는 서울대 건축학과 예과 재학시 아르바이트로 공원에서 캐리커처 일을 하던 중 김용환 선생과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만화계에 입문하게 되어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1947년에 ‘스티브의 모험’ ‘감옥의 천사’ 등 단행본은 물론 만화뉴스 등 신문잡지에 기고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따라서 형의 만화 그리는 작업을 곁에서 지켜보던 신동우 씨가 만화에 흥미를 갖게 되고 흉내내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1950년 6.25사변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최북단 회령에서 피난 온지 5년만에 다시 최남단 부산으로 피난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
당시 부산은 피난민들로 대만원이었다. 언덕 위는 물론 산꼭대기까지 판자집들이 벌집처럼 들어섰고, 일자리 없는 난민들은 한두끼 거르기를 밥먹듯 해야 했다. 그 부산에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노상 대본소를 하기도 했던 신동우 씨 형제는 휴전이 되자 국제시장 내의 출판사에 원고를 납품하면서 다소 숨을 돌리게 되었다. 덕분에 신동우 씨도 1953년의 중학시절에 딱지만화 ‘땃돌이의 모험’을 피난지에서 첫작품으로 선보이게 된다.

삼총사
‘삼총사’(1958년)

휴전협정과 함께 상경한 다음에는 신동헌 형은 신문과 성인잡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신동우 씨는 아동잡지와 단행본 쪽에 관심을 가졌다. 용산중학 시절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신동우 씨는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에 입학, 형 못지 않은 만화가로 맹활약하고 있었다. ‘진격 만리’ ‘거북선이’ ‘삼총사’ 등 단행본은 물론 아동잡지 연재물로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만큼 바쁜 시기를 보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서울대학 신문에 네컷만화 ‘부엉이’를 연재, 대학 내에서도 그를 모르는 학생이 없었다.
특히 신동우 씨는 형과 함께 활동한 덕분에 정보가 빨랐고 안면도 넓어서 다른 어느 작가보다 한걸음 앞서 나갈 수가 있었다. 그 시절, 신동우 씨 주변의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 자리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신동우 씨는 고교 동기인 박현석(바람돌이) 송영방(동양화가) 김기옥(스토리작가), 후배 백산 등을 만화계에 소개하여 활동케 해 준 은인이기도 했지만, 강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서울 미대 친구 김근배(멍청이) 후배 한성학(꾀돌이) 오룡(야로씨) 윤석환(물대포) 등 도움을 받은 작가들이 많았는데 이는 그의 너그러움을 잘 대변해 주는 일이다.
용산중학교는 만화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교로 꼽힐 정도로 김원빈 씨도 그의 동창이였다. 서울 미대 출신까지 합쳐 가장 많은 만화가들을 배출한 학교인데, 이는 신동우 씨의 영향이 컸다 하겠다. 이들은 신동헌 씨의 관리하에 있는 대한만화가 협회(회장 김용환)에 가입함으로써 활동에 가속이 붙었다.
신동우 씨는 아동만화가로는 가장 많이 알려진 작가일 뿐만 아니라 만화가들 사이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김경언 씨와도 친척이었던 그의 파워는 대단한 것이어서 신씨 사단으로 불리울 정도였다. 어려서 유복한 생활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찌든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는 작가로서, 그의 작품 속에서도 과도한 폭력이라든가 충격을 주는 끔찍한 표현이 없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인기보다는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그리는데 주력했다. 고전설화, 역사만화, ‘모던 강감찬’을 비롯해서 그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천진난만한 눈을 갖고 있다.

색동회상 수상때의 모습
색동회상 수상때의 모습(1991년)

신동헌씨는 1991년 아동문학가 단체인 색동회(‘반달’의 작가 윤극영이 이끌었던 단체)의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안중근’ ‘아리랑결사대’ ‘빵점이’ ‘날쌘돌이’ ‘홍길동’ 등의 작품을 낸 그는 한편으론 속필작가로도 유명했다. 작업에 들어갔다 하면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50쪽짜리 단행본을 완성해 낸다. 다른 사람 같으면 50쪽 짜리 작품이면 극화 분야는 별개로 하고 보통 3주에서 한달 정도는 걸려야 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연필로 줄만 쳐 놓으면 스케치도 하지 않은 채 직접 펜으로 번개검법 아닌 번개 터치로 그려내는 것이다. 문하생 하나가 줄치고 먹칠하고 지우개질 하고 화이트를 보면 작업 끝이다.

(좌) 안중근 근입대전 발행 (우) 빵점이
(좌) ‘안중근’(1959년) 근입대전 발행
(우) ‘빵점이’(1963년)

그는 충무로 3가 인현시장 골목에 자그마한 작업실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가 작업에 들어갈 때는 출구에 마치 포스터 같은 종이가 나붙어 있고, 붓으로 쓰여진 큼지막한 글씨가 있다. “지금 작업 중. 출입금지. 요즘 재미가 어떠냐고요? 네, 그저 그렇습니다. 차 한잔 하고 싶다고요? 원고 끝나고 다음에 합시다. 자 그럼 안녕!” 그가 개발한 기발한 시간 빼앗기지 않기 작전이다. 그러나 그가 단시간에 원고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면 원고 그리는 작업을 싫어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한 권의 원고를 끝냈다 하면 두세 달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취미생활로 일관한다. 라서 경쟁작가들은 그의 빠른 속도를 부러워 할 일만은 아니란 걸 차차로 알게 되었다. 싫증날 정도로 빨리 몰아서 하는 작업보다는, 시간을 갖고 꾸준히 하는 쪽이 훨씬 더 작업 능률면에서 이익이라는 것을. 누가 더 책상 앞에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앉아 있느냐에 성패가 달렸다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홍길동
신동우의 대표작 ‘홍길동’, 만화영화화 되어서도 대 성공을 거두었다.

신동우 씨는 그 후 더 빠르게 작업하는 법을 개발했는데 캐릭터의 표정을 희로애락에 따라 명확하고 다양하게 앞모습 옆모습 뒷모습 등을 그려서 고무 도장을 새기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원고지에 적절히 찍은 다음 몸뚱이만 그리고 배경을 채우는 방법을 연구하였지만 이것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신동우 씨의 전성기는 1954년부터 60년에 걸쳐 ‘소년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장편 ‘홍길동’을 그리고 있었을 때라 할 수 있다. 그는 TV에도 출연하여 주가를 높였다. 단행본계에서 후배들과의 경쟁에 밀리게 되자 형과 함께 최초의 애니메이션 ‘홍길동’을 함께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계속하지는 못하고 중단, 그 후 20여년간 만화 창작 일선에서 떠나 있으면서 각종 학습만화, 포스터나 교육용 홍보삽화, 정부의 대민 홍보전단 등에 전념하던 그는 1994년 58세의 나이로 타계함으로써 만화계에 큰 아쉬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