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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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0)인기작가는 사장보다 높다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더니 일감을 찾아 선배 화실을 들락거리던 후배가 대스타가 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인기를 누리던 모 만화가는 울상을 하고 있기도 한다. 그 시절, 만화가가 출판사 사장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의 인기도는 세 가지로 평가되는데...

2008-06-12 박기준



                                      제5장 해빙기
  
            (10) 인기작가는 사장보다 높다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더니 일감을 찾아 선배 화실을 발바닥이 닳도록 들락거리던 별 볼일 없던 후배가 대스타가 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인기를 누리던 모 만화가는 요즘 평가절하되는 바람에 울상을 하고 있기도 한다.

그 시절, 만화가가 길을 걷다 출판사 사장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의 인기도는 세 가지로 평가된다. 즉 출판사 사장 쪽에서 반갑게 다가와 저녁 대접을 하겠다고 하면 A급이다. 바쁘다고 사양하더라도 저녁코스를 비싼 데서 대접한 후 다시 고급 술집으로 모신다. 물론 그의 작품을 받아내기 위한 속셈이 깔려 있는 것이다. B급 만화가에게는 차나 한잔하자며 접근하지만, 만화가 쪽에서 사양하면 굳이 잡지 않고 보내 준다. C급 만화가가 출판사 사장을 만나면 만화가 쪽에서 차를 대접하고 싶어 하지만, 사장 쪽에서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바쁘다는 핑계로 꽁무니를 빼 버린다. 사실 어떤 업종에 있어서나 이처럼 자신의 손득을 따져가며 사람 대접을 달리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1960년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봄은 약동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의 입사경쟁에 밀리면서 먹고 살 일자리를 찾아 다녀야 하는 이들에게 있어선 혹독한 계절인지도 모른다. 홍길동이란 20대 신인만화가도 원고뭉치를 끼고 인기 만화책을 많이 발행한다는 A출판사의 문을 두드렸다. 산전수전 다 겪어 노련한 40대의 만화판매 전문가 출신 오사장은 편집자들을 거쳐 온 작가를 직접 대면하는 게 관례였다. 커다란 사장용 책상 위에 두발을 얹은 채로 원고를 이리저리 넘기더니 입을 열었다.
“홍군. 원고가 이렇고 저렇고 하니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하겠네. 내 말 잘 참고해서 다시 손좀 봐 오게. 알았지?”
그 신인만화가는 마치 자신을 어린애처럼 깔보면서 말하는 사장의 태도에 무안하기도 하고 불쾌하였지만 꾹 참고 돌아가서 작품을 다시 고쳐왔고, 출간되자 좋은 성적으로 판매되었다. 다음 작품을 가져갔을 때는 오사장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정중히 그를 맞았다고 한다.
“홍길동씨, 요즘 이렇고 저렇고 하니 이렇게 저렇게 하면 인기가 더 오를 거요.”
대하는 태도가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원고료도 직접 전해 주면서 다음에 더 좋은 원고를 가져 와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 해 가을 홍작가의 인기가 부쩍 상승하였다. 몇 일에 원고가 들어올 거라는 편집부의 보고를 들은 오사장은 백화점에서 산 큰 과일바구니를 안고 직접 원고를 받기 위해 홍작가의 집으로 향했다.
“홍선생님, 조금만 더 이렇게 저렇게 하시면 최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최고의 판매 부수를 올렸는데도 더 높은 원고료를 요구할 것 같아 일부러 낮추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추석 선물이라며 백화점 티켓까지 건네는 파격적인 대접에는 작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한다.
그해 겨울 홍작가의 연락이 없자 초조해진 그는 혹시 몸이 아픈게 아닌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세요. 거기 홍화백님 댁인가요? 네? 네? 뭐라구요? 홍화백님이 B출판사와 계약을 하셨다구요? 나도 다음달부터는 원고료를 올려 주려고 했는데....”
그러나 때는 늦었다. 전속계약금도 듬뿍 받았고 훨씬 많은 원고료를 받기로 하고 이미 도장까지 찍었다는 것이니... 사람 팔자 시간 문제라더니, 오사장은 팔부 능선을 넘지 못하고 아깝게도 알을 낳는 황금오리를 라이벌사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홍작가처럼 그 시대 두각을 나타냈던 인기 작가들 중 특색 있는 몇 분을 소개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