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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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6)기획에 성공한 이범기

이범기 씨는 1959년 순정만화 ‘이별의 노래’로 데뷔, ‘장희빈’ ‘강화도령’ 등 대장편 역사만화를 통해 올드팬들의 기억에 아로새겨진다. 이범기씨는 만화방 전성시절 깔끔한 그림체와 소녀 취향의 아기자기한 내용을 담아서 우리 순정만화 시장을 개척한 여성작가가 아닌 남성 작가였다...

2008-07-24 박기준



                                                제5장 해빙기

                     (16) 기획에 성공한 이범기



이범기 씨는 1959년 순정만화 ‘이별의 노래’로 데뷔, ‘장희빈’ ‘강화도령’ 등 대장편 역사만화를 통해 올드팬들의 기억에 아로새겨진다. 이범기씨는 만화방 전성시절 깔끔한 그림체와 소녀 취향의 아기자기한 내용을 담아서 우리 순정만화 시장을 개척한 여성작가가 아닌 남성 작가였다. 일찍이 김정파 씨가 ‘만화세계’지에 잠시 연재한 그림소설 ‘흰구름 가는 곳’이 있었지만 짤막한 중편에 그나마 자주 중단되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 못한 결점을 갖고 있다. 이범기 씨는 초기 작품이었던 ‘모정의 세월’로는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해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고민에 빠졌었다고 한다. 재미난 화젯거리가 없으면 낙오자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윤승한의 역사소설 장희빈
윤승한의 역사소설 <장희빈>(1950년), 표지 그림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렸다.

1960년 당시는 라디오 전성시대였다. 이서구 극본 ‘장희빈’이 한창 인기를 끌어 세간의 화제로 오를 때였다. 이 연속극이 시작되는 시간이면 길을 가던 행인도 걸음을 멈추고 구름떼처럼 라디오 앞에 모여 서서 귀를 세우고 극에 열중했다.
지난 일이지만 우리 형수님도 한때 라디오 연속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빠져 있던 때가 있었다. 약속이 있어 집을 나서야 하는데도 곧 시작될 연속극 때문에 안절부절하며 발을 구르고 있던 형수님. 내가 음악을 듣기 위해 구입한 녹음기를 가리키며 전부 녹음해 둘 테니까 안심하고 다녀오시라고 했더니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춤을 추듯 대문을 빠져나갔었다. 그렇게 연속극을 즐기시던 형수님이 하늘나라에 가신지도 벌써 몇해가 지났다. 아무튼 그 시절 인기연속극의 위력은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 인기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방송국을 찾아간 이범기 씨는 ‘장희빈’의 작가 이서구 씨에게 원작료를 지불하고 사용권을 승낙 받아서 역사 만화 ‘장희빈’ 작품에 착수했다.

여인야화 표지 이미지
<여인야화> 표지 이미지

바람이 잘 불어 주니 연 날리는 건 누워 떡 먹기 아니겠는가? 장희빈은 기획자의 뜻대로 대박이 터졌다. 선전도 잘되어 있겠다, 때도 잘 만났으니 원작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물론 원작료가 들긴 했지만 3, 40편의 대장편으로 만들 예정이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장희빈’을 끝내기가 무섭게 새 연속극 ‘강화도령’과 또 다시 계약, 최고의 판매 기록을 세우며 인기를 유지했다. 한편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다고 했다. 인기가 없어 고민하던 만화가 이강주 씨는 이범기 씨의 이런 인기 비결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방송국의 새 연속극 ‘박서방’이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것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재빨리 만화화해서 출판 윤리위에 제출했다. 혹 다른 작가가 다루지 않았을까 가슴 졸이며 통과하길 기다리고 있던 그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원작자의 사용허가서가 없으면 제목을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는 제목을 ‘맹서방’으로 바꾸어 통과시킨 후 번개같이 출판했으나 반응은 의외로 싸늘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죽 쑨 것이다. 드라마 제목이 바뀌었으니 선전효과도 볼 수 없었고 여자 취향이 아닌 남자 취향의 드라마였기 때문에 애초부터 잘못된 기획이었다.

빨간 카네이션
장은주 작가의 <빨간 카네이션>

이범기 씨의 뒤를 이어 순정만화로 인기를 유지하던 ‘재생’의 송순희, ‘장미의 눈물’의 장은주, ‘꽃 파는 소년’의 민애니, ‘다다의 요리일기’ 이해경, ‘은반위의 요정’의 차성진와 ‘비천무’의 김혜린, ‘노말시티’의 강경옥, ‘풀하우스’의 원수연, ‘남성해방대작전’의 이미라, ‘캥거루를 위하여’의 이강주 등 순정만화 작가들은 게임, 애니메이션, 또는 영화화되는 둥 한참 호황기를 맞고 있다.
이 순정만화는 이웃 일본서 먼저 시작되었고, 그것도 남자만화가들에 의해 개발되었다. 우리와는 달리 그들은 여성만화라고 말한다. 그런데 물 건너오면서 순정만화로 바뀐 것은, 여성이란 말이 붙음으로써 남성 독자들의 외면을 받을 것을 우려해서였을 것이다.
일본의 순정만화 이가라시 유미코의 ‘캔디’는 만화로 시작, 애니메이션, 소설로까지 만들어진 세계적 명작으로 꼽힌다. 나아가서 ‘유리의 성’ ‘올훼스의 창’ ‘베르사이유의 장미’까지 진출하여 일본 순정만화는 국제적인 무대에서도 흔들림 없이 독주하고 있음을 보면 부럽기조차 하다. 그 대열에 나란히 끼여들 수 있는 우리 작가들이 많이 쏟아져 나와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동료들과 함께
<동료들과 함께> 앞줄의 왼쪽으로부터 이범기, 이근철, 김기태,
손의정 / 뒷줄의 왼쪽으로부터 김동화, 김우경, 권혁준

최근의 이범기 씨는 학습만화 전문 작가로 20권짜리 ‘한국의 역사’ 등 꾸준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여자 이상으로 부드럽고 상냥하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칠순을 바라보는 노작가이다.
요즘 TV 방영 인기사극이 재빨리 만화화되어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는데, 이런 아이디어 기획의 선구자라면 바로 이 이범기 씨를 꼽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