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해빙기
(17) SF에 승부를 건 김산호
50대 전후인 분이라면 대부분 김산호 씨의 ‘라이파이’ 만화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958년 치열했던 전쟁의 여파 속에서 살아야 했던 세대들은 굶주림도 심했거니와 하루하루가 고달팠다. 그나마 사람들을 달래줄 거리라곤 라디오 정도가 고작이었으며 흑백 TV조차 없던 시대였다. 더불어 우리의 외로움을 잊게 해 주고 희망과 꿈을 줄 수 있는 오락거리는 오직 영화나 소설, 그리고 만화가 전부였다. 그 시절 김용환, 김성환 씨 만화의 인기는 물론 최상권, 김종래, 박기당 씨의 극화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기물이었다.
당시 김산호씨는 미술학도였기 때문에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극화도 아니고 간단한 그림체도 아닌 중간체의 독특한 그림체였다. 그 개성적인 그림 실력에 스토리만 잘 만들어내면 성공을 거두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김산호씨는 ‘만화세계’지에 연재 서부만화 ‘황혼에 빛난 별’로 데뷔하였다. 이어서 독립을 소재로 다룬 단행본 ‘조국과 사랑’ 판타지 만화 ‘유리의 천사’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작품을 출간하고도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어 고심하던 그는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 발굴에 성공한다. ‘라이파이’라는 공상과학에 뿌리를 둔 판타지 만화였다.
물론 공상과학 만화로서는 그보다 먼저 ‘헨델박사’를 펴낸 최상권 선배의 작품이 있었지만 쪽수도 얼마 되지 않았으며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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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대로 수퍼맨, 스파이더맨, 원더우먼, 엑스맨 |
그는 쥴 베르느의 ‘달나라 여행’ ‘해저 2만리’ 허버트 웰스의 삼차원 세계를 다룬 ‘타임머신’ ‘외계인의 우주전쟁’ 등 명작 소설로부터 힌트를 얻었다. 그리고 미국의 영웅주의 만화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 멋진 캐릭터를 연상하면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갔다.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 있는 날렵한 가면의 주인공 라이파이는 무선조종 레이저포, 최첨단 통신장비와 병기로 무장한 정의의 사나이다. 이에 악의 무리를 이끌고 대적하는 라이벌 녹의 여왕 또한 가면을 쓰고 병기로 중무장한 채 날아다니면서 흥미진진한 결전을 펼친다. 그야말로 스릴 넘치는 입체적인 미래 전쟁이 거기 실려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라이파이’는 발간 즉시 독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고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책을 발간한 부엉이문고의 오사장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주문이 쇄도하여 물건을 댈 수가 없다면서 자못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1961년 한창 인기작가로 군림하고 있던 그에게 5.16혁명의 여파에 의한 브레이크가 걸렸다. 당시의 검열관이 라이파이에 나오는 제3제국이란 어느 나라를 말하는 거냐고 트집을 걸어 왔다. 정보부에서 사상논리까지도 오락만화에 적용시키는 데에는 정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960년대의 이 열악하기 짝 없는 환경에서 벗어나서 만화의 본바닥에서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는 이듬해 출국을 결심한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찰튼 코믹스의 전속작가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한국작가의 미국 진출이 최초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의 주된 소재는 한국의 임진왜란과 이순신 등에서 SF만화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최근 미국의 만화계 소식에 의하면 ‘짐리’라는 ‘엑스맨 시리즈’ 작가가 850만부라는 베스트셀러 작품을 연거푸 출간하여 화제라고 한다. 그는 한국계 이민 2세로 4세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는데, 부모는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진로를 바꿔 최고의 만화가가 된 것이라 한다.
‘슈퍼맨’과 ‘배트맨’, ‘헐크’를 합성시킨 것 같은 캐릭터에 자기만의 독특한 아이디어를 부여해서 돌풍처럼 만화계를 휩쓸고 있는 그는 빅애플사의 사장도 겸하고 있다. 짐리씨의 대성공은 김산호씨 같은 선배들의 굴하지 않는 도전열에 고무되어 스스로 신장하려는 무한대의 야망으로 키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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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출간된 김산호 작가의 만화 왼쪽부터 순서대로 <샤이안 키드(Cheyenne Kid)>, 권법만화인 <하우스 오브 양(House of Yang)>, 괴담을 모은 <고스틀리 테일즈(Ghostly Tales)> |
김산호 씨는 이따금 고국에 들러서 나를 비롯한 동료 만화가들과 볼링도 하며 그의 미국에서의 작가 활동과 미국이라는 나라의 만화 환경에 대해 말해 주기도 헸다.
2차대전 당시 미국에선 나치와 히틀러를 쳐부수는 슈퍼 히어로 장르가 크게 융성했다. 그것이 만화 슈퍼맨과 같은 유행작품을 양산하게 되었고, 이어서 영화 ‘우주전쟁’ ‘ET 혹성탈출’ 같은 대작을 내게 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 이웃 일본에서도 ‘아톰’을 선두로 ‘철인 28호’ ‘마징거Z 은하철도’ ‘에반게리온’ 등 SF만화의 행군이 이어지고 있다. 그의 제자로 ‘빨간자전거’의 김동하, ‘장길산’의 백성민 등이 있다.
1994년, 김산호 씨는 ‘대한제국사’를 발간하기 위해 귀국했다. 발간 작업에 임하기 앞서 그는 많은 역사서들을 섭렵하였고, 중국과 일본 등 역사현장도 신발 밑창이 닳아버릴 만큼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학창시절부터 갈고 닦은 동서양의 회화기법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그는 작품의 수준면에서도 따라갈 자가 없을 만큼 완벽을 기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인물 회화 전시회도 적극적으로 갖는 등 그의 활발한 활동은 후학들에게 크나큰 교훈과 함께 의욕을 심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