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해빙기
(18) 전쟁만화로 우뚝 선 이근철
1935년 경북 김천 출생인 이근철씨는 일찍이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대동아 전쟁기의 힘든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해방이 되자 다시 부모를 따라 귀국한 그는 청소년기에 그림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살게 된다.
1960년 초, 고학생의 몸으로 홍익대 미대를 다니던 그는, 우연히 박기당 씨의 ‘가나다라 왕국’이란 만화를 보게 되면서 만화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틈틈이 그린 작품들을 들고 그는 만화전문 출판사인 광문당을 찾아가 전속작가로 써줄 것을 요청했지만, 출판사 측에서는 좀더 유명 작가의 지도를 받아 보는 것이 좋겠다며 당시 ‘밀림의 북소리’시리즈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서봉재 선생을 소개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인기만화가가 되겠다는 각오 하에 학업도 중퇴한 그는 서봉재 씨의 문하생으로 돌어가 열심히 일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갔다. ‘밀림의 북소리’는 원작인 일본의 ‘밀림의 왕자’를 재구성한 각색 작품으로 대장편으로 발간되고 있었다. 여기서의 어시스던트 일이 끝나면 영화관이나 외국서적 전문점을 찾아 다니며 아이디어와 자료수집에 열중하였다.
그 시절 인기 있던 영화들은 흑백 서부영화 시리즈를 비롯하여 ‘젋은 사자들’, ‘지상에서 영원으로’, ‘사막의 여우 롬멜’ 그리고 칼라시대로 접어들면서 ‘나바론’, ‘패튼 전차군단’등 2차대전 전쟁물이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배반자’ ‘007’ 시리즈 첩보물 또한 대단한 흥행을 거두고 있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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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철 작가만의 독특한 캐릭터 |
1963년 3월, 이근철씨도 ‘캉킬캉’이라는 서부만화로 무난히 데뷔에 성공하였다. 이어서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히틀러의 나치군과 싸우던 연합군 또는 첩보전을 다룬 ‘조국을 등진 소년’시리즈, ‘카르타’등으로 인기의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우리 만화의 캐릭터들은 동글동글한 모습을 지닌 동양적인 외모 일색이었는데, 그는 서구적인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 특색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높은 코, 쌍꺼풀 진 눈에 긴 속눈썹을 가진 주인공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인상을 쓰는 모습에서는 독특한 매력이 발산하였는데, 이를 트레이드마크처럼 삽입하였다.
그는 육해공군의 군모, 군복, 계급장, 장화, 권총, 단,총 기관총 등은 물론 장갑차와 탱크, 전투기, 잠수함, 거포, 함정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묘사로 최선을 다하였다. 명동 외국서적 전문점을 통해서 구입한 일본 세계 육해공군 전쟁사 사진자료집 등을 참고로 하여 장면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또한 숲속으로 숨어 들어갈 때 ‘사사삭’하고 잠입함을 알리는 소리,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크’‘으잉’등의 의성어와 의태어도 그가 즐겨 사용하는 묘사법으로, 그의 만화를 보노라면 마치 미국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근철씨의 묘사의 특징은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정확한 데생에 굵은 펜선으로 강약을 조절하여 의상과 기관총 등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점이었다.
그 시절 이근철씨의 만화를 즐겨보던 어린이들 때문에 골목마다 전쟁놀이가 유행했을 정도다.
만화 내용 또한 생소했던 구미역사 중의 실화를 주재료로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던 것도 성공의 요인이 되었다. 세계전쟁사를 통해 우리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이 제2차세계대전인데, 이를 강력한 나치 독일에 대항, 약해 보이는 연합군이 도전하는 대립법으로 다룬 것은 성서에 등장한 ‘다윗과 골리앗’대립법보다 몇 십 배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시나리오 전문용어로 대립으로 상극 만들기에 성공한 것이라 하겠다.
대립법이란 인물 또는 자연 등을 대립으로 맞부딪치게 하여 작가가 호소하고 싶은 것을 감정이나 이성, 또는 사건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주인공의 의도가 반대에 부딪치게 되면 강렬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인물끼리의 대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은 선과 악이 싸우는 방법이다. 선한 일을 하려는 자에 대립해 이를 방해하고자 하는 악한 인물, 이것이 종래 희곡의 기본인 것처럼 여겨져 오고 있었다. 그러나 대상이 악인 대신 전쟁이라든가 사회 명폐로 변해가고 있어서, 작가들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 대상을 찾아 계속 연구하지 않고선 사활의 존폐를 알 수 없는 실정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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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철의 만화들 : (왼)국제도시 / (오른) 바다의 사자들 |
히틀러의 나치군의 대립법으로 사용했던 방법도 세월이 흐르면서 구태의연한 식상한 소재가 되어버렸다. 그 후로 라이벌 관계에 있는 미국과 소련의 사상 대립을 다룬 007류 등이 한창 인기를 끌다가 이어서 제3제국, 테러 등도 다루어졌다.
만화의 스토리도 상대에 따라서는 더 흥미를 일으킬 수도 흥미를 잃게 할 수도 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미국 TV용 ‘컴배트(combet, 전투)’란 흑백 연속 드라마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라는 전승 붐에 힘입어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적이 있다. 한데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도 마땅한 소재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방송국 측에서 다시 이 영화를 컬러로 재구성하여 제작하게 되었는데, 독일 정부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중단된 사례가 있었다. 패전 후 연합군 측에 사죄도 하고 배상도 하고, 평화국가로서 거듭나려 애쓰고 있었던 독일의 입장에서는, 비록 드라마일망정 다시 나치를 들먹이며 여론에 올리는 일은 독일국민을 괴롭히는 일이니 자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무성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결국 방송국은 씁쓸하게 기획을 접고 말았다. 그 시절 나치를 대립법으로 이용하면 흥행의 절반은 성공 할 수 있다는 데서 아쉬움이 남긴 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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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로부대 시리즈(권웅) / 얼룩 외인부대(왕현) |
전쟁만화를 많이 발표한 국내작가중에는 60년도 ‘얼룩유격대 시리즈’,‘얼룩 외인부대 시리즈’,‘얼룩 공수부대 시리즈’등 전쟁 명랑물로 인기를 끈 왕현씨가 있으나 많은 작품을 내지는 못하고 만화계를 떠났다. 만화가 허영만도 열렬한 애독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65년도에 ‘켈로부대 시리즈’등 한국군과 공산군과의 전투를 내용으로 삼아 작품을 만든 권웅 씨가 있었고, 의인화 만화 ‘동물전쟁’시리즈로 화제를 모았던 최경씨와 ‘진돗개 시리즈’의 차형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같은 전쟁을 소재로 삼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작품으로 소화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최근에는 외계인과의 전쟁, 괴물과의 전쟁으로 변화해 오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떤 상대가 대립법으로 묘사되어질지 자못 궁금해진다. 그의 제자로 조선일보의 ‘Mr. 삐삐를 연재했던 안중규가 있다.
이근철씨는 만화가들 중에서도 손의성, 하고명, 백산 등과 오래 전부터 교분이 두터웠는데, 이들이 소위 ‘백구두 멋쟁이 4총사’라 하여 그 화려한 외모로 만화계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분들이다. 요즘은 식당업을 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는데, 그의 백구두도 신발장 안에 고요히 잠들어 있어야 하는 것인지, 그의 건강과 함께 재활약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