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교토 세이카 대학교(京都精華大學校)를 다녀와서
다소 때늦은 감은 있어도 국립공주 전문대학에 만화예술학과가 신설되었다는 뉴스는 한참동안 내 가슴을 새로운 감회에 젖게 만들었다. 다른 분야에 비해 억울할 만큼 암담한 현실 속에서 냉대 받던 우리 만화가 이제 버젓이 학문의 한 분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후배를 길러야 하는 만화인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뒤 켕기는 아쉬움을 이로써 훌훌 벗어 던져도 좋을 때가 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만화가로서 성공한 사람들의 작품을 앞에 놓고, 모범답안지를 베끼는 듯한 수업으로 신데렐라의 꿈을 낚던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 왔던가! 게다가 튼튼치 못한 기초공사로 도중에 바벨탑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던 숫자까지도 모두 합해 본다면....!
이제 우리 후배들은 그런 갈등을 겪지 않고 진짜 의미에서의 ‘예술’ 만화를 배우겠구나 하는 뿌듯함에 때마침 계획된 나의 일본 여행을 더욱 의미 깊게 했다.
1년 내내 동물데생만 하는 실기교육
발 닿는 곳마다 이름난 사찰들이 있어 역사 깊은 관광도시임을 느끼게 하는 교토. 내가 교토세이카미술대 만화학과를 찾은 것은 1990년 4월5일 정오 무렵이었다.
만개한 벚꽃 속에서 정문까지 나와 환히 웃으며 나를 반겨준 이는 요시토미 야스오(吉富康夫)씨. 제1회 일본 만화가협회의 대상을 수상한 만화가이자 만화평론가로 정평이 나 있으며 교토정화대학교에 만화학과가 설립되었을 때부터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 학교가 탄생한지는 17년이니 벌써 15기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학과 창설 당시에는 정원 미달이었으나 언제부턴가 40명 정원의 12배나 되는 수험생들이 몰려올 정도로 확실한 안정기에 있다고 했다.

대학 첫방문때
정문 간판 단과대학으로, 초급대로 시작되었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1990. 4. 6)
“학교에서는 지금 만화도장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방에 대한 예의부터 길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을 배우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통용되는 매너부터 익히게 합니다. 그리고 입학 전에 갖고 있던 지식은 모두 버리게 합니다. 철저하게 그림에만 매달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하는 야스오 교수의 설명은 강의실을 한 바퀴 돌아보는 동안 이해가 갔다.
벽에 붙은 1학년 시간표를 보니 ‘동물’이라는 단어 투성이다. 그들은 입학과 동시에 만화가만 되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동경과 환상을 깨는 대신, 지겨울 만큼 연일 동물 데생으로 이어지는 완벽한 실기 교육에 임해야 한다.
여름방학 과제물로 받는 것이 ‘동물데생 100장’이라니 하다 못해 쓰레기장 앞에서 굼실대는 쥐새끼라도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없다. 복도 벽에는 그네들이 그렸을 그림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었다.
동물, 새 등의 연필소묘, 그리고 채색 작품 등으로, 진급을 가리기 위한 제작물로 출품된 것들인데 여기서 합격되어야 월반이 가능하다고 한다.
2학년 때는 거리에 나가 인물 사생과 기타 과장된 선묘가 위주인 기초과정을 배우며, 누드데생, 연필크로키, 펜크로키 등으로 다시 진급 제작물을 출품하여 심사에 통과해야 한다.
3학년 때는 건물, 자연풍경에 대한 공부로 거리 구도와 입체투시도 제작 등에서 심사에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4학년에 들어가서야 독창적인 창작 작품에 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쿄토세이카학생들의 카툰 작품
카툰, 일러스트, 애니메이션의 3개 분야 중 전공을 선택, 각 과정별로 교수와 팀을 형성하여 졸업작품을 제작, 교토시립미술관에 전시하게 된다.
이론수업은 일반미술 외에 과이론 수업과 전공이론 수업이 있고, 각종 연구회, 초청강의 등이 있다.2년제 대학원 과정도 벌써 한참 전부터 개설되어 운영되고 있다.
“우리는 4년 공부를 마치고 졸업하면 곧 만화가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갖게 하지 않습니다. 만화정신과 재능을 단련해서 진짜 의미에서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인재를 길러 내려는 것입니다. 만화뿐만 아니라 삽화도, 유화도 그릴 수 있는 다양한 인재로 말입니다.”
이와 같은 야스오 교수 및 강사진의 열의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각과 24, 5명, 4개 학년을 합쳐서 약 100명 가량의 학생들이 끊임없이 분투 노력하고 있다. 수업은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오후 1시에서 6시까지 받는데 밤늦도록 자유제작에 임하고 있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2주 간격으로 제출하게 되는 작품들을 놓고 비평회까지 행한다고 한다.
한일 만화학과의 교류를 희망해
야스오 교수는 우리나라에 만화학과가 설립되는 데 있어서 커리큘럼의 실예를 제공하는 등, 음으로 양으로 크게 힘이 되어 준 사람이다. 이에 대한 치하에도 그는 어디까지나 같은 길을 가는 동지의 입장임을 강조한다.
“미미하게나마 그간 한일 교류를 위해 힘써온 것은 사실입니다. 어쨌든 이를 계기로 앞으로는 학생들의 교류나 자매학과의 제휴도 생각해 볼 과제로 놔두고 싶습니다.”
얼마 뒤면 교토 국제만화전을 개최할 예정이라며, 이 전람회에서 세계 40여 개국의 주요 만화가의 원화도 함께 전시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 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것만도 300여점인데, 한국 작가의 작품으로는 ‘고바우영감’의 김성환 씨 작품이 5점이나 보관되어 있단다.
자료실에 비치된 졸업생들의 작품집을 보니 그림 그 자체가 빈틈없을 뿐 아니라 아이디어 역시 깊이 생각한 끝에 얻어진 것으로, 제작자의 웃음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역력히 엿보였다.
만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각자 모색해 보게 하면서 수업을 쌓아가게 하는 자세, 내게 이 대학은 분명코 만화의 내일을 밝히는 요람으로 비춰졌다.
다만 한가지, 우리와 다름없이 그네들도 골치를 앓고 있는 문제가 있다는데, 그것은 요즘 학생들이 활자를 읽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또 토론하거나 생각하는 것조차 싫어하는 학생들이 많아지는 추세여서 문학서적, 신문 등을 강요하다시피 하여 세상사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교수의 설명에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 대한 한가지 대책으로 그들은 시청각교육을 도입하고 있다. VTR과 슬라이드 등을 사용한 수업으로, 세계만화사에 많은 흥미를 갖게 해 주고 있다.
이 문제는 다른 많은 문제들과 함께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넘지 않으면 안될 관문이라 여겨진다.
한국만화가로서 최초로 방문했던 나는 그후 요시도미 교수와 교분을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곳 교토에 새로 건립된 국제문화회관 센터와 명승지 등을 안내 받으며 술자리도 함께 하는 등 다른 교수들과도 우의를 다졌다.
특히 우리 두 사람은 국내외 만화와 국제관계 등 여러 면에서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완전히 의기투합해서 장시간에 걸쳐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곳 대학 만화예술학과에 한국 유학생은 한 명도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일본화(日本畵)학과에는 여학생이 한 명 있단다.
나는 양국 전문가의 교류 및 국제만화 정보 교환, 그리고 학생들의 인적 자원 교류와 함께 유학생들도 보내 우의를 돈독히 하기로 약속했다.

교토 세이카대학 방문시 미술학부 만화학과의 교수들과
좌측 미야자키, 다마다 교수
우측 요시도미야스오 주임교수 (1990년 4월 5일)
만화가 양성을 위한 지름길이라고 하면, 인기 작가의 문하에서 배출되거나 만화 전문학원에서 전문가들의 적극적인 지도하에 탄생되는 것이 정례화되어 있었는데, 과연 일본의 대학에서는 어떤 식으로 지도하고 있을까, 의문이 많았었다. 그 궁금했던 일본 정화대학 교육에 대한 의문점이 많이 풀려서 가벼운 마음으로 귀국한 나는, 귀국 즉시 당시 최고의 인기잡지 ‘주간만화’지에 이상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기행문을 사진과 함께 실었고, 상당 기간 동안 대학에 대한 독자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으니 그 정화대학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풍자만화과에서 스토리만화과, 애니메이션과, 만화프로듀서과가 증설되어 만화학부로 운영되고 있다.
지금은 한국 유학생들도 많이 생겼으며 최초의 만화학 박사도 탄생했다. 우리 한국의 정인경 씨로 현재 세이카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리고 정화대학 졸업자들 중 국내 대학 만화 관련학과에 교수로 활동하는 자가 십여명에 달하고 있다. 또 규슈에 소재한 규슈공업예술대학교 화상설계과 출신자들도 우리 대학 애니메이션과와 게임학과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나는 방학이 되면 뜻이 맞는 만화가, 애니미에터들과 관련학과 교수들과 학생들을 선발, 4박5일 코스로 잡아 저렴한 가격에 일본 구석구석을 견학하고 있다. 아톰박물관을 비롯, 만다라께(만화 애니메이션 대형 전문 백화점), 세이카대학교 전 수업과정, 도에이 영화촬영소,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부리 미술관, 도에이 만화학원의 수업과정과 유명만화가의 작업실 방문 등 연례행사처럼 진행하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일본 만화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많이 보고 배우고 연구하는 길 밖에 없다. 늦었으니 속도를 내야하고 자기 안의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 변화와 모색, 그렇게 우리 만화의 구태로부터의 일탈이 시작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