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제8장 (02) 에필로그 : 2

지금도 만화를 위한 요란한 행사, 만화를 위한 거대한 사업계획이 수없이 발표되고 시행되고 있지만, 결국 알맹이 없는 만화를 가지고서는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만화에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무한한 자유발상과 함께 그것을 정확히 전달하는 능력, 즉 만화의 구심점은 만화를 창작하는 이들의 머리와 가슴과 손끝에서 서로 공조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다는 게 전문가의 생각이다.

2010-04-11 박기준
한국 각 지역의 신인 육성 상황

지금도 만화를 위한 요란한 행사, 만화를 위한 거대한 사업계획이 수없이 발표되고 시행되고 있지만, 결국 알맹이 없는 만화를 가지고서는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만화에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무한한 자유발상과 함께 그것을 정확히 전달하는 능력, 즉 만화의 구심점은 만화를 창작하는 이들의 머리와 가슴과 손끝에서 서로 공조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다는 게 전문가의 생각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만화의 외형에만 주시해 왔기 때문에 속빈 강정처럼 알맹이도 없는 만화를 양산해 내었고, 그로 인해 실속 없는 요란한 사업을 계획하고 실행해 온 셈이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예전과는 달리 사회에서 바라보는 만화에 대한 시각 및 인식도는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만화계의 실상은 예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캐릭터, 애니메이션, 게임 사업 등 만화 관련 분야의 기반이 되어야 할 출판만화 역시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우선 신인 만화가의 양성부터가 문제다. 과거 만화를 위한 교육이라고 한다면 만화작가의 문하에 들어가 기초부터 배우면서 신인작가의 길로 진출하는 것과, 만화가가 지도하는 중소 규모의 만화학원에서 배워 데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90년 충남 공주 전문대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2년제 및 4년제의 만화창작 관련 학과가 30여 곳이나 생겨났으니 우수한 전문만화가들이 속속 배출되리란 기대에 부풀어 모든 관련 업계에서 관심의 눈길을 빛내었던 게 사실이다. 이제 교육시설 및 교육 방법도 크게 다양화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한데 만화관련학과는 미술과 같은 예체능 계열로 분류되어 있어서 비중이 큰 실기점수를 위해서는 석고작품을 앞에 놓고 연필데생을 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미대지망생과 마찬가지로 석고나 소묘, 수채화로 입학시험을 치러야 하며, 일단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커리큘럼은 카툰, 일러스트, 커머셜광고, 인터넷 응용 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지도한다.
심하게 말하면 진짜 만화가로 거듭나기 위한 교육이라기보다는 단순히 뭔가 가르칠 거리로 도배가 된 과목들을 거치면서 시간 죽이기로 일관하는 게 대학 교육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다. 보통의 인문학과와 미술학과의 커리큘럼이 뒤섞인 이런 교육방침 하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신인만화가가 양성될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만화의 주류는 스토리만화가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만화의 세계에서 요구되는 것은 손끝만의 기술에 의한 얄팍한 재능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읽혀 감명을 줄 수 있는, 내용이 있고 여운이 있는 작품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단순 캐릭터를 넘어 애니메이션에서도, 게임에서도 승부를 걸어볼 수 있는 기대작으로 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화 관련 학과들이 신인만화가의 양성을 목표로 한다는 선전과는 달리 디자인 미술학과의 교육과정과 유사한 커리큘럼으로 만화 교육의 본질을 흐려놓고 있는 데에는 배신감마저 들게 된다.

요코하마 아시아 만화대회에 참가한 한국만화가들이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한 기념촬영
2002년 10월 13일

이는, 만화전문 인력이 전격적으로 기용되어야 함에도 그저 교양적 이론 능력만을 갖추고 있는 타 분야 전공자들이 강의시간을 거의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여겨진다. 최근에는 실력 있는 중견 만화가들이 전임교수로 임명되면서 전문화 교육과정에 많이 근접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는 있으나 아직도 손에 꼽을 정도이며, 전임교수의 절대 다수는 미술계통 등 비만화 전문인들로 채워져 있는 실정이다.
영재를 육성한다는 특수 목적고교에서도 만화와 애니메이션 전공 고등학교가 시립, 사립을 합쳐 모두 10여곳 신설이 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놀라운 것은, 전문대학 못지 않은 최신 시설을 갖춘 모 학교의 경쟁률은 몇 년 전 10대 1이나 되었는데, 합격자 대부분이 미술 전문학원에서 공부한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당락은 실기에서의 수채화 점수가 50로 합격을 좌우했다. 뒤이어 개설한 학교들도 디자인학과와 비슷한 커리큘럼에 비만화 전문인 교사들을 채용하고 있는 것도 기존 대학을 닮아 있으니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출제 때문에 순수 만화만을 전문 지도해 왔던 10여 개의 전국 학원들이 애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주로 2-3명의 만화가들이 지도하고 있는 만화학원들은 교육시설, 자본 등의 열세로 외형적 규모를 갖춘 대학 및 학교의 기세에 눌려 고전하고 있다.
어떤 교육을 어떻게 받았건, 스스로의 실력을 자부할 수 있는 자라면 신인만화가 등용문으로서 동아일보사에서 매년 실시하는 동아 LG국제만화상 제도가 있으니 도전해 보기 바란다. 또 카툰 위주의 대전국제만화상도 있다.
지금까지는 주간, 월간지 등에서 매년 실시하는 신인만화상 제도를 통해 가장 많은 신인작가가 탄생하였지만, 그것도 출판경기가 축소되는 여파에 의해 해마다 20씩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판매 위주가 아닌 대본용 만화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추세로, 이도 만화가 지망생이라면 뚫어 볼 만한 길이다. 월간지나 주간지 같은 신인상 제도는 없지만 만화가의 추천을 받거나, 혹은 원고를 지참하고 직접 출판사를 방문함으로써 신인작가로 데뷔한 만화가도 적지 않으니까 도전해 보기 바란다.
(요코하마, 아시아만화심포지움 주제 발표 자료, 2002년 10월 13일)

만화계의 전망과 작가의 고심


피에로 없는 서커스단은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로, 청중들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어서 장내의 관람 열기를 북돋우는데 기여하고 있다. 따라서 박수만 받을 수 있다면 피에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미친 듯 땅바닥에 뒹굴기도 하고 아픔을 느끼지도 못하는 듯이 기둥에 심한 박치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청중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는 어떤 육체적 괴로움도 감수하는 피에로도 그 이면엔 짙은 고독과 눈물겨운 사연이 많은 것이다. 그리 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요, 또 거만하게 행세할 정도의 위치도 아닌, 그저 자기를 환영해 주는 관중의 굴레에 매여 있을 뿐이다.
바로 이 피에로에 비유되는 직업이 만화가가 아닌가 생각된다.
몇 장의 원고지를 메우기 위해 우리는 피에로처럼 작품을 위해 무한한 투쟁과 도전을 한다. 불과 1, 2분, 또는 20분 동안의 짧은 순간에 팬을 사로잡고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작업을 하는 과정의 고달픔이란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른다.
그 고심 끝에 나온 작품의 반응이 별로 좋지 못할 때는 그 떨떠름한 기분이 몇 달은 가는 것 같다. 반대로 별로 힘들이지 않고 구상해낸 아이디어가 의외로 각광받을 때의 그 흐뭇함이란, 바로 관중의 갈채를 받고 만족해하는 피에로의 심정과 똑같은 것일 게다.
이처럼 희비쌍곡선이 엇갈리는 야릇한 직업을 왜 택했는지, 왜 떠나지 못하는지....
학창시절에는 인기를 얻는 직업이란 매력 때문에 엉겁결에 비전공분야인 만화에 몰두하였고, 아르바이트로 시작되어 직업이 되어 버린지도 50년이 되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힘들어지고 괴로운 작업이라는 것만 느꼈을 뿐이다.
인기 있는 생산품인 경우 원료만 아끼지 않고 계속 사용하면 판매고를 계속 유지할 수 있지만, 만화는 한번 사용한 것을 다시 쓸 수 없기 때문에 늘 창작과 개발을 위해 눈에 불을 밝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개발만 계속되다보니 광맥이 줄어가고, 또 새로운 광맥을 찾아 선후배, 신인 모두가 팬들을 위한 피에로의 작업을 계속해 가야 하는 삶.
그런 우리에게 있어서 비록 우리나라 시장이 좁다고는 하지만, 미국의 디즈니 프로는 한편의 작품을 계약된 백여 군데의 국내외 신문, 잡지에 게재하기 때문에 충분한 노력의 대가를 받는다는 사실쯤은 아예 꿈같은 이야기로 눈감아 버려야 하는 걸까?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 만화도 해외에서처럼 환영받는 고지에 설 수 있게 되리라는 미래의 꿈이 있기에, 이 작업에 미련을 갖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


박기준 제자의 캐릭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