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는 돈 벌 욕심에 가장자리를 조금씩 잘라내 만화책 크기를 줄이고, 휴지와 신문용지를 절반씩 섞은 저급한 선화지에 만화를 찍어냈다. 이른바 ‘똥종이’ 위에 인쇄된 만화책은 점점 엉망이 되어갔지만 만화가게를 찾은 어린 독자들은 군말 없이 그 위에 침을 발라가며 만화책을 탐독했다. 그리고 그 독자들이 1980년대 초반 찾아온 만화의 황금기를 이끌 작가와 팬으로 성장했다.
커피전문점에 앉아 4000~5000원 짜리 커피를 마시며 만화를 뒤적이는 지금의 독자들은 상상도 못할 시대, ‘근사함’이란 단어는 사치였던 시대, 만화사에서 ‘암흑기’라고도 불리는 시대. 그것이 1960년대와 70년대다.
일제 강점기와 6.25 동란을 거쳐 4.19와 5.16과 함께 시작된 1960년대~70년대는 모든 것이 근사하지 않았다. 1960년대 초, 중반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구두끈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나라였다. 변변한 끈 하나 없어, 어린이들은 미군 야전잠바에서 꺼낸 끈으로 팽이를 쳤다. 투명테이프 1~2cm를 쓰려면 들쑥날쑥 짖어지는 바람에 한 바퀴를 돌려야 겨우 소량을 얻을 수 있었다. 만화도 별다를 바 없었다. 지금으로선 생각지도 못할 독특한 만화 제작방식, 영업 및 소비 체제가 형성됐다. 더욱이 1966년 합동출판사의 설립으로 독점 출판 체제가 구축되면서 상당수 만화가는 막강한 출판사의 하청업자로 전락했다.
흔히, 중세를 ‘암흑기’라고 한다. 14세기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가 기독교 신앙이 지배하던 중세를 그리스-로마, 르네상스 시대와 구분해 지칭한 표현이다. 그러나 중세가 ‘암흑기’라는 한 단어로 정리해버릴 만큼 무가치한 시대였던가? 중세에는 신에 대한 연구와 찬미만 있었는가? 중세 대학에서는 자유로운 학문의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수도원의 도서관에선 수도사들이 진지하게 자료를 연구, 정리했다. 당시 성경책 한 권을 만들려면 200~300마리의 어린 양가죽이 필요했고, 필경사는 몇 년이나 양피지에 글귀를 써내려갔다. 신에 대한 경외심이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동안, 각 도시에선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길드를 조직해 독점적 이윤과 판로를 갖고자 했다. 보기에 따라선 상당히 흥미로운 시대다. 중세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르네상스를 위한 인프라를 열심히 닦고 있던 셈이다.
1960년대~70년대가 ‘만화사의 암흑기’라고 명명된다 하더라도, 그 시기는 너무도 매력적인 시대였다. 전 국민의 마음에는 반일 정서가 강하게 깔려 있었고, 청년들은 좌절을 곱씹고 반항심을 키우면서 언젠 올지 모르는 한 줄기 희망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 문화가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면서 외국 문화에 대한 동경, 자유에 대한 갈망, 지적 갈증은 더욱 커졌다. 그 뒤에는 묘한 흥분감이 자리했다. 신과 교황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이단으로 몰리는 중세와 마찬가지로, 문화의 어느 분야도 정부 검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영화 쪽은 정진우 같은 다혈질 감독이 검열에 반발해 휘발유통을 들고 문화공보부 건물로 뛰어 들어가기도 했지만 ‘온순한’ 만화가들은 꿈틀해보지도 못하고 자기검열을 통해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 시절, 만화는 영화, 라디오와 함께 ‘무언가’를 간절히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 최고의 매체였다. 아이들에게 만화는 최고의 인기였다. 당연히 만화에 대한 수요가 폭발했다. 만화가로서 자격 미달인 사람까지도 원고 작업을 해서 물량을 만들어내야 할 정도였다. 전쟁만화, SF만화, 서부극만화, 역사만화, 스포츠만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아주 다양한 만화가 제작됐다. 만화는 ‘비즈니스맨’들에겐 현금이 트럭으로 왔다갔다하는 대박 사업이었다. 엉성하고 거칠기는 하지만 암흑기라고 하기엔 너무도 활발하고, 올망졸망한 구석이 있는 시대였다. 또한 만화가게, 즉 대본소도 이 시기를 통해 형성됐다. 만화가게는 만화의 주요 유통 채널로 만화 제작의 패턴까지 좌지우지할 정도로 성장했고,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암흑기에 만화의 대량 제작 및 유통의 뿌리가 싹텄다. 중세가 르네상스를 위해 길을 닦은 것처럼, 암흑기는 1980년대 초반 도래할 ‘황금기’의 자원 공급처 역할을 했다.
1960년대~70년대는 치열한 시대정신이 싹트고 갈등을 빚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영희 교수는 저서 <전환 시대의 논리>를 통해 1964년 9월 태권도 교관단과 의료단 파병으로 시작한 베트남 전쟁을 비판했다. 이상과 현실이 모순을 빚어내는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 속에서 만화는 좌절과 울분을 배출하고 꿈과 희망을 공급하는 역할을 해냈다.
지금까지 만화를 시대정신과 연결지어 바라본 글은 거의 없었다. 만화인에게조차 ‘만화는 만화일 뿐’이다. 그러나 만화 역시 시대의 주요한 산물임에 틀림없다. 시대정신 속에서라면 만화도 그 당시 발생한 사회사건, 유행한 영화, 라디오, 가요 등과 한 핏줄이 된다. 만화가들은 자신도 모른 채 헤모글로빈이 되어 시대정신을 나르고 있던 것이다.
박기정의 만화 <도전자>과 신성일 주연의 맨발의 청춘은 무척이나 닮은꼴이다. 1960년대 만화와 영화에서 가장 큰 방점을 찍은 작품들이다. 맨발의 청춘의 두수는 사회에 대한 울분에 가득 찬 뒷골목 청년이다. 한 마디로 반항아다. <도전자>의 훈이는 일본인에게 차별받고 권투를 통해 반항하고 울분을 터트리는 재일교포 청년이다. 맨발의 청춘이 아카데미극장서 개봉되며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시점은 1964년 2월이다. <도전자>가 같은 해 발표돼 공전의 히트를 친 것이 우연일까? 두 작품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았던 것일까?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은 모두에게 상흔을 남겼다.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불러온 재앙 앞에서 좌절하고 방황했다. 미국에선 제임스 딘이 에덴의 동쪽, 이유 없는 반항(1955) 등을 통해 1950년대 젊은이의 울분을 대변했다. 같은 시기 일본에선 소설가 이시하라 신타로, 영화배우 이시하라 유지로가 태평양 전쟁 후의 반항적 시대정신을 표면화하며 쓰나미처럼 일본 사회를 강타했다. 현 도쿄 도지사인 형 신타로는 1955년 발표한 소설 <태양의 계절>에서 전후 몰락하는 황족의 후예와 기성 질서에 반항하는 젊은이들을 그리며 태양족(太陽族)이라는 용어를 일본 사회에 유행시켰다. 동생 유지로는 짧은 스포츠 머리로 형이 쓴 작품의 주인공 역을 멋지게 소화해냈다. 젊은이들에게도, 기성세대에게도 배출구가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일본을 강타한 반항의 시대정신은 10년의 간격을 두고 한국에 건너왔다. 6.25 동란으로 젊은이가 번듯한 일자리를 갖는 것은 불가능했다. 두수 같은 뒷골목 청년이 요안나 같은 요조숙녀의 남자친구로 당당하고, 멋지게 살 수는 없었다. 아무도 기회를 주지 않았다. 누구의 탓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탓은 아닌데. 게다가 혁명정부는 일말의 정치적 저항을 허용하지 않았다. 미국이나 일본보다도 우리 젊은이들의 숨구멍은 더욱 막혀 있었다. 그 울분이 맨발의 청춘에서 폭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들은 만화가게에서 <도전자> 만화책을 넘기며 훈이의 주먹에 자신의 울분을 얹었다.
결과가 비슷하다고 원인까지 같다고 속단하기엔 이르다. 1960년대의 대한민국을 관통한 시대정신으론 젊은이의 반항 이외에도 반일 감정이 있었다. 박기정은 어떻게 <도전자>를 만들게 됐을까?
“<도전자>에선 반일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 6.25 때 한국은 불바다가 됐다. 그런데 일본은 6.25 당시 무기수출로 일어섰으니 약 오르는 일 아닌가. 우리 국민은 매번 당하고만 사는 셈이다. 우리 국민의 좌절에 배출구를 만들어주고자 한 것이 <도전자>다. <태양의 계절>은 보지 못했고, 이유 없는 반항은 보았다. 난 기본적으로 다른 작품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흉내 내는 것을 내 자신이 참을 수 없었다.”
어여쁜 숙녀를 때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나 <도전자>의 훈이는 미모의 일본여자 하나코의 따위를 올려붙인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울분의 표현이었다. 팬들은 불에 기름 부은 듯 열광했다.
이글거리는 훈의 눈동자는 제임스 딘이나 이시하라 유지로, 신성일의 것이나 다름 없다. 따라서 <도전자>는 그 시대에 가장 인기 있던 만화 정도로 평가되어선 안 된다. ‘암흑기’의 시대정신을 가장 응축하고 있는 동시에 세계의 시대정신을 공통분모로 삼고 있는 작품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