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와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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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70년대 : (2) 청계천 속 네오리얼리즘과 할리우드

‘한국의 피터 브뤼겔’이라 칭할 만한 고바우 김성환이 2004년 발표한 청계천 풍속화 <파고다공원 근처>를 잠시 들여다보자. 1956년 낙원동의 어느 저녁 풍경을 김성환이 2003년 11월 복원한 그림이다. 1950년대 청계천 주변에는 판자촌이 즐비했다. 그 곳은 인도 갠지즈강처럼 삶과 죽음, 모두가 어우러진 생활터전이었다.

2012-03-26 장상용
‘한국의 피터 브뤼겔’이라 칭할 만한 고바우 김성환이 2004년 발표한 청계천 풍속화 <파고다공원 근처>를 잠시 들여다보자. 1956년 낙원동의 어느 저녁 풍경을 김성환이 2003년 11월 복원한 그림이다. 1950년대 청계천 주변에는 판자촌이 즐비했다. 그 곳은 인도 갠지즈강처럼 삶과 죽음, 모두가 어우러진 생활터전이었다. 아낙네들이 저고리 사이로 젖가슴을 드러낸 채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들락날락하고, 물을 끼얹어가며 빨랫감에 방망이질하고, 아이에게 오줌을 누이고, 지게꾼은 그늘을 비집고 들어가 팔자 좋게 오수를 즐기고, 식모아이는 군불을 떼며 솥에 부채질하던 청계천. 화장실이 따로 없어 집에서 판자를 들추고 볼일 보면 똥, 오줌이 그대로 물 위에 둥둥 떠내려가는 것이 일상인 곳.
 
청계천에서 길 하나, 둘 안쪽으로 접어들면 <파고다공원 근처>의 무대가 자리한다. 이 그림의 배경이 된 대폿집인 ‘진주집’과 ‘전주댁’ 골목에선 이 날도 서민들이 복닥거린다. 술상을 받은 취객은 옆에 앉은 작부의 저고리 사이로 쓰윽 손을 집어넣고, 또 다른 취객은 2층 난간에서 오강을 든 채 볼일을 보고, 한 작부는 양손에 젓가락을 들고 술상을 두드린다. 보름달을 배경으로 작부의 입이 벌어진 걸로 보아, 아마도 <성불사의 밤>을 부르고 있는 듯하다. 전주댁 지붕 위에서 뭔가 기회를 엿보는 고양이와 그 밑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견공도 이 그림의 빼놓을 수 없는 조연이다. 그런데 취객이 구토를 하고 있는 진주집 측면 벽과 그 맞은편 벽돌집에 두 개의 영화 포스터가 붙어있다. 영화 포스터에선 두 총잡이가 마주보고 있는 ‘베라 크루즈’와 이탈리아 여배우 소피아 로렌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河女’라는 타이틀이 눈에 들어온다. 판자촌의 인간군상 사이에서 당시 절찬리 상영되고 있던 두 개의 최신 영화 포스터를 김성환의 ‘매의 눈’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폐허 속에서도 문화는 살아 있었다. 6.25 동란 후에도 외화는 꾸준히 수입됐다. 일본에 본사를 둔 불이(不二)무역주식회사가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등 외화들을 들여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총천연색을 찍을 수 있는 인쇄기술이 없어, 포스터조차 일본 인쇄소에서 제작해 가져와야 하는 실정이었다. 일본식 활자로 찍어 한글같은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대중은 조악한 포스터를 보고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다.
 
불이무역주식회사는 지금은 클래식이 된 수준급 유럽 영화들을 다수 소개했다. 2차 세계대전과 그 후의 비극적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린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대표작인 <무방비 도시>(1945년 작)와 <자전거 도둑>(1948년 작), 세계 최고의 라스트신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는 영국 영화 <제3의 사나이>(1949년 작) 등이 우리나라의 극장에 걸리기 시작했다. <무방비 도시>에서 레지스탕스에 동조한 돈 피에트로 신부가 죽기 직전 게슈타포 장교에게 마지막 말 한 마디를 남긴다.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올바르게 사는 것이오’. 이 대사는 전쟁으로 고통 받은 우리 관객의 가슴을 짠하게 했다.
 
‘진리의 십자가’란 뜻을 가진 미국 서부영화 <베라 크루즈>(1954년 작)는 화끈한 총격전으로 우리나라 관객을 사로잡았다. 총잡이 게리 쿠퍼와 버트 랭커스터의 강렬한 캐릭터도 서부영화의 붐을 일으켰다. 서부영화 <쎈> <황야의 7인> 등도 총잡이를 내세운 우리 만화들의 등장에 한몫했다.
 
문화란 물과 같은 속성을 가진 생명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며 환경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꾼다.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 문화는 대중에게 확산되어 보편화되고 고급문화를 밀어 올리는 힘으로 순환 작용한다. 포크를 예로 들어보자. 영국 귀족들은 17세기 후반까지도 모든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었다. 포크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 반면 이탈리아는 14세기경 포크 문화가 전파됐다. 결국 3세기의 간격을 두고 양국의 식탁이 포크 일색이 된 것이다. 영국 귀족은 이탈리아 귀족과 한 식탁에서 식사는 동안 고깃덩어리를 맨 손으로 집어먹는 자신의 모습에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영국과 3~4세기의 격차를 두고 포크가 상륙했지만 한국인의 우수한 두뇌를 촉진시켰다고 학자들이 지적하는 젓가락 문화가 주류로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레스토랑이나 가야 사용하는 한정적 기능의 식자재가 됐다.
 
네오리얼리즘과 할리우드의 명작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우리로선 탐나도록 잘 만든 문화상품이면서 참혹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판타지였다. 이 선망이 한국 영화로, 한국 만화로 흘러들어가 1960년대 대중문화를 꽃피우는 자양분이 됐다.
 
빈털터리 학생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위험천만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만화가 김동화는 중학생 시절인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을 너무 보고 싶었다. 친구와 함께 기도가 서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작정 극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기도가 미친 듯이 쫓아왔다. 기도에게 잡힌 친구는 극장 안 간판 그리는 방에서 시쳇말로 ‘먼지 나게’ 두들겨 맞았다. 한 명이 공짜로 영화 보는 대신, 다른 한 명이 희생당하는 전략이다. 문화에 대한 ‘허기’가 얼마나 컸으면 그랬을까.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만화가들은 다양한 영화에서 얻은 영감을 작품 속에 놓여냈다. 시내 극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들은 새로운 스토리와 연출을 갈구하는 만화가에게 따끈따끈한 ‘교본’ 역할을 했다. 자연스럽게 천재성을 드러내는 만화가들도 나타났다. 오명천은 서부극과 슈퍼히어로물의 결합시킨 자신의 최고 히트작 <싼디만> 2부 6권(1961년 6월, 제일문고) 소개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 만화를 완성하기 위해 영화사 몇 군데를 뛰어다니며 근래에 개봉된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 <헤라크레스> <십계명> <뻰허>(개봉되지 않은 것) 등 네 가지 영화에서 재료를 수집하였습니다. 복장과 건물은 로마시대의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사실을 근거로 하여 애독자 여러분에게 올바른 그림을 보여드리려고 힘썼습니다.’
 
오명천은 최신 영화들을 보고 만화에 반영했음을 자랑스럽게 밝힌다. 비주얼을 살리기 위해 당시로는 드문 큰 판형인 사륙배판으로 제작한 <싼디만> 2부 6권의 앞날개 사이에 전장으로 수록한 ‘정의의 독수리’ 싼디만의 독자 서비스용 일러스트레이션은 네 개의 영화가 만화가의 머리 속에서 어떤 기발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지를 보여준다.
 
 
그림 1. 오명천 <싼디만> 중  
  
콜로세움같은 이국풍의 원형경기장에서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싼디만, 월계관을 쓴 헤라클레스를 연상시키는 거대 조각상, 장창을 들고 그를 향해 다가오는 전사들과 거대한 코끼리, 환호하는 군중석. 곧 싼디만의 심장을 갈라 자신의 신에게 바치려는 제의의 집행자들 같은 인상적인 장면이다.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 멸망할 운명임을 모른 채 최후의 순간까지 향락을 즐기는 귀족들, <벤허>에서 벤허와 메살라가 목숨을 건 전차전을 벌인 운동장, <헤라크레스>에서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하다가 켄타우로스족 네소스의 피가 묻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온 몸에 독이 퍼져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는 영웅 헤라클레스, <십계명>의 열렬한 기도 장면이 이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합체’했다고 주장한다면 무리일까.
 
산호가 <라이파이>의 성공을 발판으로 1964년 내놓은 후속작 <피터링>의 표지는 더욱 영화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라이파이와 제비양의 아들인 피터링의 활약을 스펙타클하게 보여주기 위해 산호 역시 사륙배판으로 출간한다. 비주얼의 혁명을 일으키고 싶은 작가의 내적 욕망이 사륙배판 속에서 읽혀진다.
 
외화 뿐 아니라 한국 영화도 만화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1960년 SF만화 <인조인간 XO>로 데뷔한 박문윤은 1961년 김승호 주연의 영화 <바보 칠성이>를 극장에서 보고 곧바로 같은 제목의 만화로 그려냈다. 상전의 딸을 짝사랑하는 우직한 머슴 칠성이가 출가한 후 돈을 벌어 금의환향 했을 때 몰락한 상전 딸은 창녀가 되어 죽어가고 칠성이는 상전 딸의 무덤을 지킨다는 순정이 눈물겨운 작품이다. 박문윤이 같은 해 자신의 대표작인 순정만화 <봄의 노래>를 그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만화가들 사이에선 ‘먼저 그리는 게 임자’란 말이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그러면서 만화가들은 작가적 역량을 키워갔다.
 
일본 영화나 소설 역시 만화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56년 발표된 고미가와 준페이의 반전(反戰)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인간의 조건>이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부작으로 제작돼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며 일본 열도를 휩쓸었다. 고미가와 준페이는 1945년 8월 소련군 탱크부대와 교전에서 부대가 전멸한 가운데 살아남은 최후의 4인 중 하나였다. 그런 무시무시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조건>은 태평양 전쟁에 동원된 주인공 눈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지고, 인간 이하의 상황에 내던져 지는가를 그렸다. 영화 속 ‘인간이란 성욕과 탐욕으로 이루어진 고깃덩어리’라는 신랄한 대사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소설 <인간의 조건>은 1960년대 초반 무렵 번역본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영화 <인간의 조건>이 국내 극장에 걸리진 못했지만 마니아들은 명동 뒷골목 밀수 서적, 잡지상에서 에이가노 도모, 스크린 같은 일본 유명 잡지를 통해 스틸 사진을 접했다. 이 작품을 당시 번역 소설로 접한 영화배우 신성일은 “당시 웬만하면 이 작품 안 읽은 사람이 없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이상의 감동”이라고 회상한다.
 
이런 인기 작품이 만화화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1970년대 만화 <불나비> 시리즈로 유명세를 떨치는 김민이 <인간의 조건>을 1974년 <인간0(제로)지대>란 제목으로 만화화 했다. 당시 한국 만화가의 전형으로 삼아 소개할 만한 사람이 김민이다.
 
그는 1960년대~70년대의 외국 영화나 소설을 먹고 자란 재기 번뜩이는 만화가였다. 임창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가 스토리 능력을 인정받아 특별대우를 받은 재주꾼이었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느낌이든 이미지로 표현해내는데 탁월했다. 그건 작가로서 타고난 감각이었다. 지금도 1970년대 만화를 읽은 사람이면 누구든 김민을 이야기한다. 1970년대 중반 이상무가 떠오르기 전까진 ‘김민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시인> 시리즈에선 순수한 시골뜨기가 상경해 도시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원시인처럼 생활하는 모습을 코믹하게 보여주었다. 비록 아동만화였지만 거기엔 도시문명에 대한 날선 비판이 담겨있었다, <불나비> 시리즈도 일본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연상시키지만 스타일리시한 분위기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확실히 <불나비>는 뭔가 여운이 있고 멋져보이는 작품이었다. 아동만화들과 달리 준삽화체에 말풍선 속 글자도 작은 활자체여서 청소년들이 이 작품을 좋아했다. 중원을 배경으로 하는 <불나비>의 시리즈인 <불나비와 천하검왕>은 ‘천하검왕’으로 불리는 불나비가 무예가로서 끊임없이 고뇌하는 모습과 심리를 조명한다. 예전의 불나비는 칼로 상대를 베어서 이겼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득도의 단계를 추구하는 불나비를 절간의 나한상이 조롱한다. “그건 무예가 아니라 살인이야. 살인자, 살인자, 호호” 나한상은 불나비의 또 다른 자아일 뿐이다. 당시로선 세련된 심리 표현 방법이다.
 
김민은 검을 통해 불나비의 깨달음을 전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미야모토 무사시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그건 이 글의 논쟁 대상이 아니다. 불나비는 검을 사용해 강함을 추구하는 왕의 군대를 물리친 후 이같이 독백한다. ‘허무... 인생의 허무...! 이제 곧 모두 스스로 무덤을 팔 것이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는 법. 천하제일인자는 없다. 나 또한 한 순간 검으로 망할 것이다.’
그림 2. 김민 <불나비> 중  
  
마지막 장면은 불교적 허무주의의 냄새를 더욱 짙게 한다. 시간이 흐르고 불나비를 이해하는 아곤스님은 제자들에게 설법한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조그만 실개울의 물일지라도 그 흐름을 막으면 그 힘은 자꾸만 커지느니라....” 그리고 마지막 컷은 법당의 실루엣만 보이는 가운데 “땡... 땡...” 종소리만 여운으로 울려 퍼진다.
 
김민은 중원을 배경으로 한 <불나비>란 대접에 미야모토 무사시, 불교와 도교, 소림사, 권력을 지키기 위해 친적마저도 잔인하게 죽이는 중국 왕실 등의 각종 재료를 넣고 맛나게 비벼낸 것이다. 같은 라면을 끓여도 남보다 더 맛나게 끓여내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바로 김민이었다.
 
그는 자기자신이 천재성을 지닌 만화가임에도 불구하고 만화 창작 행위 자체를 하찮게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작품을 가볍게 여겼다기 보다는, 천재성을 가볍게 사용해 버렸다고 할까. 때론 원고지를 들고 스토리를 쓰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스케치까지 해버렸다. 끝이 남으면 ‘소림사는 어떻게 됐다’는 식으로 쓱싹쓱싹 대사를 써놓고 마무리 지었다. 만화 스토리 쓸 때도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극장에서 하루 서너 편을 보고는 곧장 스토리로 써버렸다. 그를 두고 ‘게으른 천재’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후배 이현세는 김민의 재능을 사랑했지만 그런 태도 때문에 실망했다. “술을 마시면 김민은 ‘한국 만화의 천재는 나와 허영만’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건 인정한다’고 수긍하면서도 ‘더 진지할 수 없냐’고 물었다. 김민은 ‘나는 만화 스토리 갖고 고민하는 사람 보면 이해할 수 없다’고 자랑하듯 떠들었다. 내가 그를 존경할 수는 없는 이유였다.” 
 
김민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이 있다. 김민은 본질적으로 ‘갈등하는 천재’였다는 것이다. 후배 장태산은 그가 ‘상식적인 길’을 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김민은 항상 갈등하고 자학하는 햄릿 같은 사람이었다. 스승인 임창이 거액을 제시하며 붙잡았지만 독립했다가 극도의 빈곤에 빠졌다. 나보다 10배는 빠른 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작품은 내 반 정도밖에 그리지 않았다. 신상에 다른 일이 일어나 양자택일을 해야 했을 때 그는 만화 대신 다른 것을 잡았다. 그 때도 고갱이 말다툼한 후 자신의 귀를 자른 고흐의 심정이었을 거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선배다.”
    
김민은 자신의 천재성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겠지만 어찌되었든 행위를 값지게 사용하지 못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는 다른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김민의 만화가 이재학이나 황재의 무협만화로 명맥이 이어진 부분이 있겠지만 그는 당시의 인기로 볼 때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했다.
 
김민은 1980년대 중반 갑자기 만화 창작을 중단하고 외유하다가 거의 10년이 지난 1990년대에 만화를 그리기 위해 돌아왔다. 불행하게도 시대의 감성은 이미 변해버렸다. 김민의 기존 독자층은 만화책에서 졸업한 세대가 됐고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독자층은 스토리와 연출이 더 정교한 코믹스풍 혹은 하드코어적인 성인만화들을 선호했다. 김민의 감성은 무뎌지고 ‘올드’로 낙인 찍혔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시대정신은 더 좋은 것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 국민은 김동화의 표현대로라면 ‘무엇에 홀린 듯이’ 일했고, 멋진 외국 영화나 소설을 모방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경제는 급성장하고 문화는 서서히 정체성을 확립해갔다. 만화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위안을 주는 인기 매체로 성장했다. 만화를 그려서 먹고 살고 돈을 벌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천재 작가들도 튀어나왔다. 열악한 외적 환경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다. 이 시대에는 만화 창작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 돈벌이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 작가, 만화 대신 다른 선택을 한 작가 등 다양한 만화가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결국 만화 창작 행위를 소중히 하며 만화를 끝까지 붙들고 있던 작가들이 후세에 기억되고 남는다. 그것이 역사의 진리다.
 
21세기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세계의 지성으로 꼽히는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생전 11권의 책을 썼으나 500권 남짓 밖에 팔지 못했다. 주변에선 그를 천재성이 있는 광인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니체는 평소 자신의 위대함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었기에 후대 사람들이 자신을 ‘성인(聖人)’으로 취급할 지 모른다고 걱정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그를 바그너와 함께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지금도 만화가들은 스포츠신문, 잡지, 웹툰 연재 및 단행본 발간 등의 분야에서 창작을 하며 매순간 사투를 벌이고 있다. 여러 환경은 급변했지만 본질은 1960년대~70년대와 바뀐 것이 없다. 순간적으로 누린 인기는 시대의 벽을 뚫고 미래로 전해지지 않는다. 작가가 창작 행위에 어떤 의미를 두느냐에 따라 그 위대성이 평가될 수밖에 없다.
 
필진이미지

장상용

작가, 만화평론가
초이락컨텐츠컴퍼니 웹툰사업팀장, 前 부천국제만화축제 사무국장, 前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