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와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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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70년대 : (3) 최고이자 최악의 독점 체제

만화계에도 전대미문의 제작 및 유통 체제가 만들어졌다. 경제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해도 될 분야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2012-04-23 장상용
‘하면 된다.’ 이보다 더 1960년대~70년대 시대정신을 잘 집약한 구호가 있을까.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 군사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후 산업화를 독려하면서 부르짖은 이 구호는 누군가의 책상 머리맡에, 회사, 학교, 체육관 벽 상단에 철썩 붙어 그 시대를 관통한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했다. ‘하면 된다’의 정신은 1960년대 독일 파견 노동자 및 베트남전 파병 용사, 1970년대 중동 파견 건설노동자들에게 인생 역전의 꿈을 심어주었다. 지구 반대편에선 1970년 비틀즈가 해체를 앞두고 마지막 곡 ‘Let it be(그냥 내버려 두세요)을 부르고 있었지만. 특히 독일에 광부로 파견돼 40도를 웃도는 지하 막장에서 ‘팬티를 다섯 번 짜서 입고, 장화에 고인 물을 열 번은 쏟아내야 비로소 일과가 끝나는’ 젊은 노동자들에겐 팍팍한 삶을 버티는 희망의 구호가 됐다.
 
군사 정부는 모든 국가 산업과 정책의 핵심을 직접 이끌었다. 지금의 재벌들은 1970년 무렵부터 정부가 유치해 온 외자를 종자돈으로 몸집 불리기를 시작했다. 기업가들은 당시 이낙선 상공부 장관의 집 앞으로 몰려가 외자를 분할 받기위해 줄을 길게 늘어서는 풍경을 연출했다. 이 장관은 집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지금이야 독과점이 시장에서 공개적으로 규제를 받지만 당시에는 ‘하면 되는’ 덕목이었다. 어느 책의 비유처럼 재벌이란 가난한 집안을 살리기 위해 다른 가족들이 희생돼 혼자 공부하고 성공한 큰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만화계에도 전대미문의 제작 및 유통 체제가 만들어졌다. 경제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해도 될 분야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 출발은 1960년대 초부터 서울에 들어선 만화 대본소였다. 1950년대의 만화란 서점용으로 제작됐다.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 박기정의 <별의 노래> <무적 송사리군> 같은 작품들은 서점에서 유통되던 작품이다. 서점은 팔리는 작품만 진열하는 반면 만화 종수는 많아졌다.
 
1960년대 접어들면서 이런 변화를 감지한 업자들이 있었다. 북한군 장교 출신의 이국전은 아현동 아현초등학교 앞에서 대본업을 시작했고, 오학원은 종로의 신광서점을 인수하고 만화를 팔았다.
 
서울 시내나 지방으로 만화책을 뿌리던 그들은 서로 손잡고 대본소를 개척해 전국 판매처를 조직하고 만화책을 유통시켰다. 비교적 장사 안되던 문구점들이 대본소로 돌아섰다. 총판의 자전거 부대가 서울시를 거미줄처럼 나누고 구역을 맡아 만화책을 보급했다. 처음에는 외상으로 돌렸지만 장사가 잘 되면서 현금 거래로 바뀌었다.
 
대본소가 점점 늘어나면서 대본소끼리 경쟁했다. 대본소에는 매일 새 만화책이 공급됐다. 옆집에 대본소가 하나 더 생기면 대본소 주인은 라이벌 업소에 만화책을 넣지 말라고 읍소했다. 결국 총판의 힘이 세졌다. 대본소 업주들은 장사가 잘 되면 만화책을 많이 사고, 안 되면 적게 샀다. 매일 그 날의 베스트셀러가 있었다. 여러 출판사에서 책이 쏟아지지만 팔리는 만화책은 네 권 정도였다. 군소 출판사들은 자전거 부대에 술을 사줘 가면서 내일 무슨 책이 나올 지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대본소의 만화책은 하루살이였기 때문이다. 내일은 또 새로운 책이 나왔다. 출판사들은 나중에는 통계를 내 출간 길일이나 적기를 정했다.
 
작가들은 당연히 이름 있는 출판사에 소속되려고 노력했다. 부엉이문고, 제일문고, 크로바문고가 3강 체제를 이루었다. 제일문고가 작가는 가장 많았으나 실속은 없는 편이었다. 제일문고의 주축인 박기당, 유세종, 이근철 등은 섬세한 필력을 요구하는 극화 작가여서 작업 기간이 오래 걸렸다. 부엉이문고에는 기동력있는 작가가 많았다. 김경언은 이틀에 한 권씩 만화책을 뽑아낼 수 있었다. ‘조랑어사’ 시리즈의 정한기, ‘바람돌이’ 시리즈의 박현석 같은 중견 작가들도 부엉이문고와 거래했다. 크로버문고는 박기정, 박기준, 박부성, 방영진 같은 작가들이 포진했다. 1권이 히트하자 그 후속권을 다른 출판사로 잽싸게 가지고 튀는 비양심적인 작가들도 나왔다.
 
그 과정에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등장했다. 1966년 무렵 삼류 인쇄업체를 운영하던 한 업자가 출판사를 설립하고 당시 유력 만화 출판업자 5~6명과 담합을 해 인기 작가 99퍼센트를 잡았다. 그가 훗날 ‘신촌 대통령’으로 불린 합동출판사의 이영래 사장이다. 머리가 비상한 그는 작가를 모두 모아 주식회사 형태의 독점 출판사를 만들면 큰돈을 벌거라고 내다보았다. 그가 유력 출판업자들을 설득한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합동출판사 아래서 담합하면 5~6부 팔 것을 10부까지 팔 수 있으며 그로 인한 수익은 합동출판사의 주주가 되는 유력 출판업자들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솔깃한 부엉이문고, 제일문고, 크로버문고 측은 회사를 접고 합동출판사의 깃발 아래 들어갔다. 부엉이문고가 가장 먼저 백기를 들었다.
 
부엉이문고 사장은 크로버문고를 운영하는 박기준을 찾아와 “합동출판사에 협조하는 길 밖에 없다”고 박기준을 설득했다. 크로버문고의 실질적인 사장으로 합동출판사 합병에 찬동한 장본인은 박기정, 박기준 형제의 형수였다. 박기정은 이 일로 인해 형수와 등을 지기도 했다. 합동출판사는 문어발식으로 합병한 후 나머지 출판사 사장들을 이사로 앉히고 우주문고 등의 5개 산하 브랜드를 만들었다. 모든 만화책의 인쇄는 합동출판사에서 이루어졌다.
 
독점 체제를 구축한 합동출판사는 못할 게 없었다. 이영래 사장은 한정된 시장에서 어떻게 하면 최대 이윤을 찾아낼 수 있느냐를 고민했다. 전국에 책을 찍어 파는 상황에서 최고가 된다고 해도 부가가치가 특별히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는 독점 체제가 아니면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외판시스템을 개발했다. 합동출판사에는 최고이자 만화계에는 최악인 시스템이었다.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판매지역을 서울, 지방거점도시, 지방 3개 권역으로 구획정리한다. 서울 대본소가 1,000군데라면 정확히 1,000부를 찍는다. 서울에선 5일 정도만 대본시켰다가 다 걷어간다. 그 책을 다시 광주, 대구 등 지방 거점도시로 보낸다. 책의 가장자리를 자르는 방식으로 재재본해 마지막엔 지방으로 보낸다. 그러면 한 권도 못파는 책이 없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지방에는 판매해버린다. 서울의 대여료와 비슷한 정도로 파는 거다. 식당에서 설거지물을 3군데로 받아놓고 그릇을 차례로 거처가게 해 물을 절약하는 방식과 비슷하지 않은가. 원하면 서울의 대본소 주인들에겐 새 책을 판다. 단 한 권의 반품을 받지 않는 시스템을 찾아낸 것이다. 이희재가 살았던 완도에는 만화책이 나온 지 6~7개월 후에 들어갔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합동출판사는 인쇄소와 제본소까지 독점했다. 만화책을 제작하는 전 과정에서 외주를 주지 않았다. 제작 단가를 낮추고 이익을 독식하겠다는 의도였다. 합동출판사의 이익 창출 욕심은 끝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턴 종이 질을 떨어뜨리고 종이 사이즈도 줄여버렸다. 가장자리를 조금만 줄여도 출판량이 많기 때문에 한 달이면 엄청난 이익이 떨어졌다. 책값을 올리지 못하면 제작 단가를 내리는 전략을 썼다.
 
합동출판사는 한 작가가 그릴 수 있는 권수를 제한했다. 이런 조치가 작가들의 목줄을 조였다. 합동출판사에 밉보인 작가는 아예 일감을 얻을 수 없었다. 작가별 권수 제한은 작가를 통제하고 작가에게 복수하는 수단이었다. 고우영도 ‘교과서 그리나’라는 비난을 받으며 합동출판사에서 쫓겨났다. 고우영은 한 때 오갈 때 없는 불쌍한 처지가 됐다. 반면 이영래 사장은 홍대 근처에 금싸라기 땅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만화가들의 고혈을 뽑아 얻은 부였다. 이영래 사장의 아들이 신촌에서 술을 마신다고 하면 그 가게는 문을 닫아걸고 다른 손님을 받지 않았다.
 
‘동심(童心)을 좀먹는 만화 공해(公害)’라는 제목의 당시 경향신문 기사(1970년 11월 28일자)는 합동출판사의 위세와 만화에 대한 사회적 멸시를 동시에 보여준다.
 
‘ 현재 서울서 나오고 있는 신종만화는 하루에 20종. 1종당 2000부 이상 찍어내며 이 숫자는 아동만화작가협회에 속한 120명의 만화 작가가 매일 또는 이틀에 한 작품을 그려내야 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그려진 만화는 출판사가 먼저 가져가 검토하고 명목만 심사위원회에 넘겼다가 인쇄하며 각 지방별 총판에 넘기면 여기서 전국의 대본소에 공급하는 것. 현재 아동만화 출판사는 합동출판사 한 군데 뿐인데 여기서의 1년 출판량은 1314만부, 한 권에 80원으로 치면 무려 11억 7000만원의 이익이 돌아가게 된다.
 
또한 점점 늘어가고 있는 만화대본업소는 현재 전국에 1만 2000개. 신간의 한 권 대본료 3원, 구간 2원으로 쳐 한 집의 1일 수입을 500원으로 잡으면 1년에 9억 1,000여만원이라는 돈이 대본소를 중심으로 하여 나돌게 되며 결과적으로 만화 주변에 나도는 코묻은 돈은 1년에 20억원, 순이익만 6억원이나 되며 덤핑 시장의 이익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엄청나다.‘
 
작가들에 대한 합동출판사의 횡포는 날로 더해갔다. 1968년 초대 만화가협회장이 된 박기정 정도만이 합동출판사에 대놓고 맞설 수 있었다. 박기정 역시 합동출판사 산하 우주문고에 이재화, 유세종 등의 동료와 함께 소속돼 있었다. 어느날 우주문고가 한강으로 야유회를 나갔을 때의 일이다. 우주문고 사장은 20여 명의 작가들에게 반말로 막대했다. 작가들은 얼굴이 노래졌을지언정, 한 마디 반박도 못했다. 참다 못한 박기정이 눈을 부릅뜨고 우주문고 사장에게 윽박질렀다.
  
“이봐, 당신 무슨 이야기 하는 거야?”
우주문고 사장은 합동출판사 이영래 사장과도 맞먹는 박기정에겐 꼼짝도 못했다.
“무슨 이야기라뇨?”
“출판사 하는 사람이 작가들 그렇게 대접해도 되겠어?” 
 
우주문고 사장이 쩔쩔 매는 모습을 본 다른 만화가들은 박기정의 카리스마에 복종했다. 만화가협회장인 박기정은 합동출판사의 독점 체제를 깨지 않으면 다수의 만화가가 노예같은 상태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박기정은 굉장한 각오로 이 일을 벌였다. 합동에 맞선다는 자체가 모험이 아닐 수 없다. 박기정은 동생 박기준에겐 “크게 생각하자”고 설득했다.
 
물론, 합동출판사의 횡포에 대항하는 또 다른 움직임도 나타났다. 합동출판사는 대본소에 납품하는 책들도 자기 마음대로 정했다. 즉 끼워팔기(세트 판매) 방식이었다. 대본소 업주 중 합동출판사의 영업 방식에 반기를 들고 총판과 싸우면 곧장 만화 공급이 끊겼다. 그 희생자가 된 사람이 박재동의 아버지였다. 1969년 임창처럼 땡이문고를 설립해 합동출판사의 독점 체제를 깨보려는 작가도 있었다. 임창은 이영래 사장의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땡이문고를 지속해보려 했으나 자금난으로 1년 반 만에 문을 닫았다. 합동출판사는 돈으로 작가들을 매수하고 공권력까지 동원해 전방위적으로 임창을 압박했다. 땡이 문고를 설립할 때 도왔던 향원(이향원)도 그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느라 밤잠을 설치곤 했다.
 
합동출판사는 상대를 짓밟을 수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거기엔 테러도 포함됐다. 1966년 무렵 합동출판사에 반감을 가진 만화가들이 충무로의 유력 인쇄소 제일정판사 사장을 설득해 국제문고를 설립하도록 했다. 합동출판사는 ‘사람’을 동원해 국제문고가 출간 준비하던 원고 300개를 훔치고 만화책 가격 할인 정책으로 국제문고에 타격을 주었다. 국제문고는 결국 합동출판사에 무릎을 꿇었다.
 
‘하면 된다’의 시대는 유력 인사와 통하면 정치적 힘으로 모든 문제가 풀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합동출판사의 억지 독점 체제가 비즈니스적인 차원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순진하다. 합동출판사에 대한 수많은 민원이 문화공보부에 빗발쳤지만 정부는 대체로 침묵했다. 합동출판사의 대외 창구는 이영래 사장의 수하로 정부 기관 출신의 이모씨였다. 유력 인사나 공무원과 줄 대는데 미숙한 만화가나 군소출판업자들로선 정치적 배경까지 갖춘 합동출판사의 장벽을 넘을 수 없었다. 합동출판사에 대항하는 군소출판사에겐 소속 작가들의 원고 심의에서 어처구니없는 수정 명령과 불이익이 떨어졌다. 합동출판사의 정치적 힘이었다.
 
1971년 합동출판사와 소년한국도서의 양강 체제가 구축된 후의 일이다. 1974년 5월 허영만이 소년한국도서 2회 공모전에서 <집을 찾아서>로 입선 없는 가작에 당선돼 만화가로 데뷔했다. 그 무렵 만화가들은 양강 체제에도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1975년 임창이 소년한국도서를 나온 후 다시 땡이문고를 만들었다. 임창을 주축으로 향원, 이상무, 김민, 김영하, 김철호 등 젊은 작가들이 땡이문고의 지지자였다. 양강 체제에 대항하는 야권의 출판사로는 ‘작가출판’과 ‘땡이문고’가 있던 셈이다.
 
1975년 어느날 이상무, 김영하, 김철호 등 삼인방이 <각시탈>로 유명해진 허영만을 찾아왔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삼총사다. 허영만, 그대가 달타냥이 되어 달라!”
허영만은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인으로 그럴 자격이 있는지 고민했지만 수년 전 스승인 향원이 합동출판사에 무참하게 깨지던 억울한 기억이 떠올라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했다. 좋든 싫든 간에, 자신을 데뷔시켜준 소년한국도서를 박차고 나와 땡이문고로 옮겼다. 원고료는 한 푼도 못받았지만 거대자본에 대항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원고 작업을 했다. 그러나 ‘독립투쟁’은 8개월 만에 좌절됐다.
 
어느날 새벽 허영만은 전화를 받고 땡이문고로 튀어나갔다. 도둑이 들어 캐비넷 안에 있던 원고가 몽땅 없어졌다는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원고를 훔친 자는 땡이문고의 물주였다. 거액을 제시하며 작가들의 원고를 가져오라는 합동출판사의 유혹에 그 물주는 굴복했다. 
  
허영만을 비롯한 젊은 만화가들은 배신감에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 갈 곳은 또 다시 합동출판사와 소년한국일보사 뿐이었다. 향원, 허영만, 김민 등은 소년한국도서를 선택했다. 한국일보사 장기영 회장은 가불로 280만원씩 선금을 지급했다. 그 때로서는 집을 살 수 있을 정도로 큰 돈이었다. 작가들은 한국일보 건물에서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 회장과 악수했다. 
  
허영만은 통유리에 들어오는 중앙청 쪽을 바라볼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돌았다고 한다. 온갖 만감이 교차하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혀영만은 280만원 중 80만원을 떼서 땡이문고의 빚을 갚았고 나머지 돈으로 18평 짜리 아파트를 얻었다. 세트 판매는 계속되고 만화가들의 무력감과 분노가 쌓여갔던 시절이다. 합동출판사와의 싸움은 모두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독점 체제의 피해는 고스란히 작가들에게 돌아갔다. 아이가 대학갈 때 직장을 잃는 부모의 심정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합동출판사에서 일방적으로 잘린 작가들은 오갈 데가 없었다. 어느날 밤 선배인 박광현, 유세종 등이 길음동의 박기정 집 문을 두들겼다. 이들은 “나 (합동에서) 잘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읍소했다. 화가 난 박기정은 “가십시다!”라며 이들을 데리고 새벽같이 ‘신촌 대통령’ 이영래 사장을 찾아갔다. 이영래 사장은 엄청난 수입으로 희희낙락하고 있던 때다. 
 
박기정은 대뜸 “당신이 만화가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작가를 마음대로 잘라도 되는 거요?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요. 출판할 거요, 말거요?”라고 그를 다그쳤다. 이영래 사장과 손을 잡은 만화가 김기율은 “박 회장, 이러면 되나? 인기 없으면 잘라버려야지”라고 나무랐다. 이영래 사장은 노회했다. 그는 결국 “박 회장, 다 살려줄게. 그만해”라고 항복했다. 
 
박기정은 합동출판사의 주주들이 얼마씩 수익금을 타갔는지도 알고 있었다. 합동출판사 내의 내부고발자와 줄이 닿아있었기 때문이다. 박기정은 그 정보를 들고 이영래 사장을 찾아가 “1/4 분기에 주주들이 얼마씩 받아갔다던데. 작가들은 몇 푼 받고 너무한 것 아니오?” 라고 따졌다. 배당금까지 이야기가 나오니 이영래 사장의 얼굴이 하얗게 됐다. 박기정은 “배당금의 30퍼센트를 작가들에게 넘겨주면 불만도 잦아들고 출판도 잘 될 거요!”라고 압박했다. 이영래 사장이 그 안을 받아들이면서 1년에 세 차례 작가 고료를 올렸다.
 
박기정이 한국일보 장기영 회장을 찾아가 만화출판을 제안하면서 합동출판사의 독점 체제는 1971년 막을 내렸다. 한국일보는 소년한국도서를 설립했다. 장기영 회장은 부총리를 지낸 거물인데다 1969년 일간스포츠를 창간할 정도로 최고의 사업 수완이 가진 사람이었다. 막강한 언론사가 아니면 합동출판사와 양강 체제를 이룰 수도 없다는 것이 박기정의 판단이었다. 한국일보로서는 합동출판사 소속 작가의 절반을 데려오겠다는 제안을 마다할 리 없었다. 김기율, 박현석처럼 합동출판사에 붙어있던 작가들도 박기정을 따라 소년한국도서로 넘어갔다. 소년한국도서의 장점은 40만원~50만원의 계약금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돈으로 2,000만원~3,000만원쯤 되는 목돈이다. 합동출판사가 아예 계약금이 없었던 데 비하면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영래 사장은 머리가 좋았다. 소년한국도서로 옮긴 작가들에게 웃돈을 제시해 다시 신촌으로 데려갔다. 만화가들은 엉터리였다. 돈을 더 준다고 하면 마구 옮겨갔다. 박기정은 ‘뭐가 안 통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일하려니 어렵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의성의 경우 소년한국도서로 넘어왔다가 합동출판사로 다시 도망갔다. 그렇게 같이 다니며 우정을 나누었는데 배신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박기정은 당시 손의성에겐 개인적으로 실망했지만 나이 들어 좋은 친구로 다시 만나고 있다.
 
박기정이 1차적으로 합동출판사에서 빼낸 작가는 30명~40명이었다. 박기정에게 제보를 하던 합동출판사의 내부고발자도 그 대열에 함께 했다. 그 사람이 피해보면 안 된다고 여긴 박기정이 장기영 회장에게 건의해 소년한국도서 편집장으로 앉혔다.
 
박기정은 “만화가들은 선배들이고 뭐고 사고방식이 얼라들이었다”고 회고한다. 박기정이 독점 체제를 깨려했을 때, 합동출판사의 방패막이로 나선 것도 동료 만화가들이었다. 어느날 새벽 합동출판사의 주주였던 박기당이 박진우 등을 데리고 박기정의 집을 찾아왔다. 자신이 운영하던 오성문고를 일찌감치 합동출판사에 넘긴 박기당은 “합동 시스템 아래서 만화를 발전시키자”고 제안했다. 가만 들어보니, 박기당과 합동출판사에 협력하는 일부 만화가는 살고 나머지 만화가는 죽는 구조였다. 박기정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박기당은 합동출판사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박기정은 만화계 뒤치다꺼리 하느라 창작의 에너지를 소진하고 히트작을 내지 못하게 됐다.
 
소년한국도서도 나중엔 합동출판사와 손잡고 협약을 했다. 싸워서는 어느 한쪽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양사는 시간이 지나자 각자 한 달에 책 얼마씩을 내기로 담합을 했다. 사업자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가만 앉아서 책 몇 권 찍으면 얼마가 들어온다는 것은 꽤 매력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안전장치로 두 회사는 상대 진영에서 잘린 작가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묵계를 맺었다.
 
허영만이 1975년 땡이문고에 합류해 좌절을 맛본 사건은 이런 구도가 형성된 후의 일이다. 사전심의에 정부의 만화 단속까지 어울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합동출판사는 ‘영원한 제국’이 아니었다. 일단 독점 체제에 간 균열을 막아낼 수 없었다. 합동출판사와 소년한국도서는 양강 체제 초반 작가 확보 전쟁을 벌였다. 상대 진영의 작가를 빼가고 다시 빼가기를 했다. 그 다음부턴 만화가들이 신났다. 양쪽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하는데다 제3, 제4의 출판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총판들은 밤 시간엔 동대문에 만화책을 깔아놓고 팔기도 했다. 이들은 양강 체제 속에서 틈새를 보며 군소출판사를 만들고 사업확장을 시도했다.
 
작가 수급에 차질을 우려한 합동출판사는 1971년 서둘러 60여명의 신인 작가를 뽑았다. 1966년 <노미호와 주리혜>로 데뷔하고 1971년 막 군대를 제대한 이상무에게도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낼 기회가 주어졌다.
 
이상무는 1972년 합동출판사에서 독고탁이란 캐릭터를 처음으로 등장시킨 야구만화 <주근깨>를 히트시켰다. 만약 양강 체제가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이상무라는 걸출한 작가가 얼마나 더 늦게 이름을 알렸을지 모를 일이다. 합동출판사는 소년한국도서와 휴전하면서 신인 작가들을 싹 정리했다. 신인 작가 중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이상무였다. 살벌한 정리해고였다.
 
이상무라는 신인 작가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이현세는 이상무의 만화를 보며 ‘한국 만화도 스토리를 이렇게 재미있게 쓸 수 있구나’라며 감탄을 했다고 한다.
 
이상무의 만화에는 김종래, 박기당 식의 만화에선 볼 수 없던 감성이 물씬 묻어났다. 그것은 독고탁을 내세워 성격 만화를 구현한 때문이다. 독고탁은 초상집에서 박장대소하거나 잔칫집에서 대성통곡하는 개성 있는 캐릭터였다. 박기정의 훈이 캐릭터가 있긴 했지만 한국 만화계에서 더 본격적인 캐릭터는 독고탁이었다.
 
희망의 싹은 바로 젊은 만화가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만화가 꽤 괜찮아졌다. 1972년 1월 1일부터 고우영의 만화 <임꺽정>이 일간스포츠에 연재되고 김철호, 김영하, 허영만, 이상무 등 젊은 작가들이 파이팅하기 시작했다. 가판대에선 강철수의 성인만화가 인기였다. 1974년부턴 박수동이 선데이서울에서 <고인돌>을 연재하며 성인만화의 붐을 조성했다. 윤승운, 신문수, 이정문 등 지금의 심수회 핵심 멤버들은 어린이 잡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무엇이든 ‘하면 되는’ 잔혹한 시대 속에 살아남은 젊은 만화가들은 1983년 만화계에 찾아오는 르네상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필진이미지

장상용

작가, 만화평론가
초이락컨텐츠컴퍼니 웹툰사업팀장, 前 부천국제만화축제 사무국장, 前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