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이 빚어내는 풍경은 어디나,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1830년대의 제정 러시아나, 1940년대 군국주의 일본이나, 1960~70년대 군사정권의 대한민국이나, 거기서 거기다. 검열이 인간의 자유정신을 억누르면 풍선효과가 생겨 그 반대편에선 풍자의 정신이 싹튼다.
차르 니콜라이 1세의 전제정치가 혹독하던 1830년대 러시아, <외투> <코>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니콜라이 고골은 1836년 희극 <검찰관>을 발표했다. “당시 러시아의 모든 추악한 것을 한데 엮어서... 실컷 웃음을 터뜨려 보자고 결심했다”는 작가의 고백은 이 작품이 풍자로 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인생은 한 편의 희극’이라고 누군가 정의한다면, 이 작품은 거기에 딱 어울린다.
어느 지방 도시에 검찰관이 찾아올 것이라는 소식이 퍼진다. 시장을 비롯해 평소 부정한 짓을 밥 먹듯 하던 관리들은 빈털터리인 흘레스따꼬프를 검찰관으로 오인, 극진한 대접과 아부를 퍼붓는다. 영문도 모르는 채 극진한 대접을 받은 흘레스따꼬프는 관리들을 실컷 농락하다가 도망쳐 버린다. 모두들 흘레스따꼬프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 진짜 검찰관이 그 마을에 도착한다.
고골은 검열을 피해가는 수단으로 풍자를 사용했다. 풍자가 아닌 방식으로 관료사회의 병폐를 꼬집을 수는 없었다. 즉, 직설법으로 직격탄을 날리기엔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시종일관 관객의 웃음을 터트리면서 더 큰 해프닝으로 마무리 짓는 결말. 고골의 목적은 관객은 웃음 속에서 현실을 뼈아프게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웃음=고발’이란 등식이 성립된다. 이 작품이 연극 무대에 오르던 첫날, 니콜라이 1세가 친히 극장을 방문했다. 공연을 본 차르가 “우리 모두가 호되게 얻어맞았다. 가장 호되게 맞은 건 바로 나”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가 있다. 작가의 재능을 알아본 니콜라이 1세가 호평을 해주는 바람에 사건이 확대되진 않았다. 그러나 관주도의 문단에서 호된 공격을 받은 고골은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 되어 한동안 러시아를 떠났다.
일본 극작가 미타니 고우키의 연극 <웃음의 대학>은 검열을 소재로 한 유명한 작품이다. 패전을 앞둔 1940년대 군국주의 일본. 모든 예술작품은 ‘전시’라는 미명하에 엄격한 검열을 당했다. 검열관이 찾아와 작품에서 웃기는 부분을 고치는데, 고칠수록 더 웃겨지고 결국 검열관도 극단에 동화된다는 희극이다. 검열받은 작품이 더 웃기게 되는 아이러니, 검열이 인간을 궁극적으로 억압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깔려있다.
일본 전쟁광들은 스포츠마저도 금지했다. 1940년 12월 20일 오사카에서 가장 먼저 복싱 금지령이 시행됐다. 40세 이하의 남자는 모두 전장 혹은 군수공장으로 징용당하는 비상시국이었기 때문이다. 야구가 ‘적성(敵性)스포츠’라 하여 전면 금지됐고, 프로복싱도 준적성 취급을 당했다. 일본 군부는 복싱에서 라운드제를 폐지하라는 황당한 주장도 폈다. 그들은 ‘전쟁에는 라운드가 없다’면서 복싱에서도 승부가 결판날 때까지 쉬지 말고 싸우라고 명령했다. 이 같은 엉터리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풍자는 작가가 검열의 방패를 가진 권력층과 싸우는 가장 강력한 창이기도 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풍자논란을 일으킨 사람은 19세기 초 왕정복고 시기의 화가 겸 삽화가 필리봉이었다. 출판의 자유와 검열 폐지를 주장한 그는 1830년대 국왕인 루이 필립을 격렬한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가 재판장에 섰다. 필리봉은 국왕의 얼굴이 배로 변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누어 그린 <배>를 제시했다. 제 1의 그림이 국왕과 닮았다는 이유로 죄가 된다면 제 4의 배 그림도 죄가 된다. 그렇다면 배를 재배한 농민은 모두 국왕을 모욕한 것으로 고발되어야 하는가. 그의 반문에 재판장은 웃음의 도가니가 됐다. 필리봉은 유죄 판결을 받고 향후로도 감옥을 들락날락했지만 풍자를 멈추지 않았다. “길이 울퉁불퉁하다고 두려워하는 여행자를 본 일이 있는가. 나는 압수도, 발행 정지도, 재판도, 결투도, 비난도, 공격도, 조롱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박정희 군부가 집권한 대한민국은 어떠했는가.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도전하는 정신이 표현된 예술작품 혹은 대중문화는 검열에 의해 가혹하게 난도질 됐다. 검열에 의한 문화탄압은 각 분야별로 자행됐다. 그것은 전두환 군부가 박정희 군부를 대체하면서 1988년까지 약 10년 동안 연장됐다. 창작자들은 모두 피해의식과 자기검열에 빠져 있었다. 검열은 창작자들을 24시간 따라다니는 망령이었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던 만화는 군홧발에 밟히기 딱 좋은 대상이었다. ‘심의가 한국만화 죽였다’는 울분은 아직도 만화가들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남아있다. 만화 심의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수준이었다. 조막손 만화가‘로 유명한 박경근은 1985년 무렵 무협활극 <싸울아비>를 제작했으나 출간을 앞두고 폐기 판정이 나왔다. 당장 심의실을 찾아간 그는 작품 심의를 담당한 사람이 알바생인 여고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여고생에게 “너, 스토리 설명해봐”라고 물었더니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항의를 받은 심모 심의실장은 박경근에게 엉뚱한 말을 했다.
“위에서 공문 내려왔습니다. 만화가 중 간첩으로 추천할 사람을 찾으라던데.”
위란 국가안전기획부를 뜻한다. 자꾸 따지면 간첩으로 몰아버릴 수도 있다는 엄청난 협박이다. 화가 난 박경근은 “날 집어넣어라!”라며 소란을 피웠다. 결국 칼이 날카로우니 지워버리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것을 고치는 선에서 타협을 하고 책이 출간됐다. 액션 장면에선 주먹이나 발, 무기 등이 사람을 직접 때리는 연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주먹이 하나 날아간 후에는 컷이 바뀌어 사람이 넘어져 있는 식이 된다. 마찬가지 원리로, 칼이 지나간 후에는 누군가 죽어있는 장면이 오게 된다. 피가 튀는 장면도 금지다. 박진감 없는 액션은 작가들의 탓이 아니었다. 만화가들은 상상 대신 분노만 채워갔다. 만화가 고행석은 1994년 펴낸 단행본 <스포츠 가족>의 서문을 보자.
‘내가 처음 만화계에 발을 디딘 1970년대 이전부터 80년대 말까지는 사전심의제도가 고루하고 답답해서 젊은 남녀가 한 방에 누워 있는 장면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님이 자식 걱정하며 이불 속에 같이 누워 이야기하는 장면도 그리지 못했고, 사랑의 삼각관계 같은 것도 다룰 수 없었다.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고 있어도 고쳐 그리라는 말이 곧잘 나왔으니 수영장도 아예 그릴 생각을 말아야 했다. 돌이켜보면 우습기조차 한 그 제도 밑에서 만화가들은 너나 없이 주눅이 잔뜩 들어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며 만화를 그려야 했다.’ 모든 만화가는 사전심의제도의 그물망 속에 든 새였다. 원고가 검열관에 의해 마음대로 오려지거나 폐기됐다. 원고에 지시사항을 직접 볼펜으로 써넣는 건 일도 아니었다. 산호의 1964년작 <피터링> 5권, 10권 표지(시간여행 소장품)는 당시 검열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별 문제가 없던 5권의 표지 뒷면엔 ‘통과(通過)’라는 심의 도장이 찍혀있다. 10권의 표지는 수정된 곳이 군데군데 보인다. 아마 담배가 그려져 있었던 것 같다. 뒷면엔 심의관의 요구사항이 붉은색 볼펜으로 적혀있다.
‘담배삭제. 표지엔 어느 경우이건 담배를 나타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 밑에 수정을 요구한다는 ‘요수정(要修正)’ 도장이 찍혀있다. 이대로 수정을 하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남산’이란 두 글자가 주는 압박감은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결국 산호는 1965년 26세의 나이로 남산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라이파이> 중 ‘라이파이의 적이 옷에 단 붉은 별과 해방군‘이란 명칭이 문제가 됐다. 미국으로 갑자기 떠난 이유에 대해 “더 큰 세계를 만나고 싶었다”고 말했지만 진짜 이유는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현실과 굴욕감이었으리라.
남산을 다녀온 만화가는 산호 뿐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 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남산 기슭의 비밀 장소에 수십 명의 만화가들이 집합해 있었다. 이들은 우울한 얼굴로 앞에서 시키는 대로 구호를 외쳤다. "나쁜 만화 그리지 않겠습니다."
그 구호가 남산에 메아리 칠 때마다 그들의 가슴에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쿠데타와 함께 등장한 국보위가 만화가들을 모조리 한자리에 모아 놓고 정신교육을 시킨 것이다. 죽기보다 싫은 끔찍한 복창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현세, 이희재 등 젊은 작가들은 자아비판의 시간이 끝난 후 자리를 옮겨 중국집에서 빼갈을 마셨다. 그들은 어린이로 한정되어 있는 만화 독자를 성인까지 확대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수모를 계속 당하겠다며 분노했다. 성인 독자를 잡을 수 있는 만화를 하자고 분노의 다짐 속에서 1983년 태어난 작품이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었다.
공권력은 걸핏하면 만화를 ‘불량만화’로 낙인찍고 불태우며 존재 가치를 알렸다. 만화가 ‘화형식’을 당할 때마다, 만화가들은 가족에게 낯 뜨거운 가장이 됐다. 만화가가 심의 내용에 항의하면 “당신, 능력 있으면 마음대로 내보쇼. 대신 출판사에서 책임져야 할 거요”라는 답변을 들으며 분노를 삼켰다.
다른 분야는 체제비판이나 사회고발과 관련해 된서리를 맞았다. ‘아침이슬’의 작곡가 김민기가 <김민기 1집>을 낸 시점은 1971년이다. 이 음반에는 ‘아침이슬’이 포함돼 있었다. 1972년 3월 그는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식에서 수록곡 중 하나인 ‘꽃 피우는 아이’를 불렀다. 그 곡은 사회변혁의 의지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없었다. 작가는 서정적으로 내적 고백을 한 것뿐이었지만, 군사정부는 노랫말을 ‘저항적’이라고 낙인찍고 이튿날 동대문경찰서로 연행했다. 음반이 전량 압수되고, 제작 관련자 전원이 수차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 그의 노래는 ‘금지가요’가 됐고,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1975년 한 해에만 88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아침이슬’을 포함해 송창식의 ‘고래사냥’, 이장희의 ‘그건 너’, 신중현의 ‘거짓말이야’등 다수의 인기곡이 검열의 희생양이 됐다.
1964년 11월 11일에는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해프닝이 발생했다. 지금의 광화문 동화면세점 골목에 자리한 초원다방에서 오전 9시부터 10분 동안 소련 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 다방은 아카데미극장 바로 옆이어서 손님이 북적였다. 손님 중 하나가 다방 측에 자신이 가지고 온 <세계국가집>이라는 LP판을 틀어달라고 주문했는데, 수록곡 중 하나인 소련 국가가 손님이 많은 가운데 흘러나왔다. 관련자들은 모두 연행됐고, 다방 측은 경찰에서 “실수였다”고 하소연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공산국가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나라였다.
영화 검열도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이만희 연출, 전옥숙 제작, 신성일 주연의 영화 <휴일>은 1968년 제작됐으나 암울하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상영 금지돼 필름조차 찾을 길 없다가 37년만인 2005년에야 발견됐다. 체제를 비판한 건 아니었지만 1960년대 젊은이들의 절망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정부의 미움을 받았다.
젊은 주인공 허욱이 애인의 임신중절 비용을 구하러 다니는 사이, 애인은 수술을 잘못 받아 죽고 만다. 친구의 돈을 훔쳤다가 잡힌 허욱은 “날 더 때려, 날 죽여”라며 자학한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표현해선 안 된다’ ‘미풍양속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요한 검열 기준이었다. <휴일>은 주인공의 자살을 암시했다. 당국은 “주인공이 취직하거나 군에 가는 결말을 내라”며 이에 따르면 상영 허가를 내주겠다고 했지만 사회주의자 성향이 짙은 제작자 전옥숙은 ‘상영 포기’를 선택했다. 이만희나 하길종 같은 의식 있는 감독들은 수시로 남산에 끌려가 호된 고문을 당했다. 고문 후유증이 그들을 따라다녔고, 두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단명했다.
1960~70년대 영화 검열의 중심지는 경복궁에 자리했던 중앙청 안 문화공보부 영화과였다. 박정희 정권의 기반인 국가최고재건회가 지금의 광화문 문화체육관광부 건물(최근 이전)을 썼다.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이 당시엔 중앙정보부 보안과 소속 대위로서 문공부 영화과에서 살다시피 하며 검열을 도맡았다. 아침이면 그 곳으로 출근해 사전심의를 통해 사상성에 문제가 있는 부분을 ‘가위질’을 했다. 문공부 영화과에는 경찰관 경위도 나와 있었다. ‘이 대위’와는 업무가 다소 달랐다. 경찰관 경위는 미성년자 보호규정에 위배되는 장면을 점검하고 영화등급을 부여하는데 참가했다.
이러다 보니 문공부 영화과에선 영화 제작자와 공무원 간의 신경전이 끊이질 않았다. 영화는 개봉이 급하기 때문에 제작자들이 심의통과에 사활을 걸었다. 정진우 감독같은 다혈질 제작자는 수시로 영화과로 쳐들어와 휘발유통을 들고 분신하겠다거나, 아래로 뛰어내리겠다는 식의 액션을 취하곤 했다. “뛰어내려 보라”든가, “참아라”는 식의 통사정이든 간에, 실랑이가 이어졌다. 어떤 제작자는 영화과 과장에게 “왜 심의를 빨리 안내주냐”고 삿대질을 퍼부었다. 심의통과 속도를 앞당기려는 제작자와 공무원 간에 뒷돈이 오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거친 영화 제작자들에게 시달리다 고통 받는 공무원들도 많았다.
영화과에서 공연 심의도 함께 했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공연법에 따른 사전 대본심의가 필수였다. 심의 난 대본대로 안하면 중간에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심의에 보고된 출연자가 바뀌어도 안 됐다. 문공부 담당 공무원들이 대본을 보고 통과시켜야 공연이 가능했다. 극단 대표들은 문공부에 들어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심의를 맡았다. 공무원들이 심의를 빨리 통과시켜주기만 해도 그들은 무척 감사했다.
문학을 통해 체제저항을 시도했던 작가들은 지명수배자 신세가 됐다. 1970년 오적(五賊)을 발표해 정권의 미움을 산 시인 김지하가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영화 쇠사슬을 끊어라 촬영장에서 체포됐다. 1971년 무렵 흑산도 근처 작은 섬이 촬영지였다. 김지하는 그리로 숨어들어 이만희 감독과 밤새워 마음 놓고 술을 마시며 신랄하게 정권을 비판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엿들은 한 스태프가 김지하를 체제비판자로 섬의 경찰에 신고했다. 밀고자는 그 사람이 김지하인 줄은 전혀 몰랐다. 김지하는 섬에서 체포됐다가 여수경찰서로 압송됐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가 김지하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수경찰서는 뜻밖에 대어를 낚은 셈이었다. 택시에서 정권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면 택시운전사가 경찰서에 차를 대고 승객을 신고하는 시대이니, 별로 놀랄 것도 없다.
1970년대가 낳은 최고의 걸작은 만화가 고우영의 고전 시리즈였다. 그의 등장은 시대의 필연이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 고골이 <검찰관>에서 웃음으로 검열의 칼날을 피해갔듯, 고우영도 풍자와 해학의 언어를 발전시켰다. 합동출판사에서 쫓겨나 어문각 출판사의 동화 삽화를 그리던 고우영에게 기회가 온 것은 1971년 말이었다. 합동출판사의 독점체제를 깨뜨린 소년한국도서를 설립하고 만화가들을 영입한 장기영 한국일보 사주는 고우영의 재능을 높이 사고 조선시대 민초의 영웅 임꺽정을 소재로 한 만화 연재를 주문했다. 고우영이 성인만화에 뛰어든 첫 무대는 일간스포츠 지면이었다. ‘도둑의 수괴’를 그리는 일은 검열관이 보기에 따라선 ‘미풍양속을 해치면 안된다’는 심의기준에 어긋날 수도 있었다. 발주자인 장기영 사주는 웬만한 사안은 막아줄 수 권력자였다. 장기영 사주는 마음껏 임꺽정을 그려보라고 주문했고, 고우영은 ‘에라이, 샹~. 확 가보자’라는 마음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그는 ‘파격’이란 한 단어를 가슴에 두고 연재를 시작한 것 같다.
고우영의 만화는 술안주처럼 모든 대상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는 검열도 만화 속에서 우회적으로 조롱했다. 1978년 1월 1일 일간스포츠 연재를 시작한 <삼국지> 제 1회 두 번째 페이지에는 이장희의 금지곡 ‘그건 너’가 등장한다. 돼지고기 장사하는 장비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고우영은 이장희와 ‘그건 너’를 슬쩍 끼워 넣었다. 한 콧수염 가수가 마이크를 잡고 있는 장면과 함께 ‘그건~너! 바로 너! 때문이야!’라는 가사가 흐르고 있다. 1979년 10.26 전의 일이다. 이 얼마나 대담무쌍한 일인가! 금지곡 가사를 게재했으니. 검열에서 콕 집히는 것은 피하기 위해 ‘이장희’라는 이름은 기술적으로 뺐다. 대신 ‘연 전에 콧수염 기른 젊은 가수’라고 소개한다. 누가 봐도 ‘그건 너’의 이장희지만, 고우영은 장난치듯 빠져나간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 얼마나 많은 독자가 카타르시스를 느꼈을까! 고우영의 언어는 그런 것이었다. 그는 1972년 1월 1일 <임꺽정>으로부터 시작해 <수호지> <일지매> <삼국지> <서유기> <초한지> 등으로 1970년대를 쓸어버렸다.
고우영이 원하는 대로 연재를 할 수 있던 것은 신문이 사후검열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판물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다. 심의실은 칼로 원고를 잘라내고, 마음대로 대사를 바꾸고, 그림을 지우는 등 원고에 대한 훼손을 자행했다. 고우영의 원고에는 곳곳에 검열의 흔적이 남아있다. <삼국지>의 경우 원래 단행본 10권 분량, 1,700여 페이지였으나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100페이지 이상 삭제됐다. 오죽했으면, 2001년 6월 <삼국지> 무삭제판이 발간됐을 때 화제가 됐을까. 고우영은 당시 <삼국지> 무삭제판을 내며 ‘옛날 옛날에 일간신문(일간스포츠)에 연재했던 삼국지를 다시 일깨워 재생시킵니다. 매맞아 팔다리 부러져 불구자가 되었던 자식을 치료하는 심정입니다’라고 썼다. 고우영 만화는 ‘폭력과 섹스’의 표현에서도 파격을 이어갔다. 여포가 초선을 찾으러 시녀들 방에 갔다가 시녀들이 옷 벗고 있는 모습을 보는 대목. 시녀들이 나체로 있음을 연상시키는 연출이었다. 1986년판 단행본(우석출판사)에선 이 대목 전후로 8페이지가 통째로 잘렸다. 또 다른 단행본 버전에선 이 대목 2페이지가 칼로 잘려 1페이지로 실렸다. 여포가 동탁을 두고 “뭣 같은 시키!”라며 씩씩거리던 대사는 “어디 두고 보자!”로 바뀌었다. 고우영 특유의 대사발이 그대로 살아있는 일간스포츠 연재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고우영의 풍자와 해학은 어떤 청량제보다도 독자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고우영은 역사를 패러디해가며 암암리에 군사정권에 경고를 한 것이다. 또한 그의 고전만화 시리즈는 1970년대 젊은이들에게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 등과 같은 ‘해방, 자유로움의 코드’였다.
검열은 종종 작가가 의도한 풍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삼국지>에서 여자의 나체는 무조건 잘려나갔지만, 풍자는 오히려 삭제 당하지 않았다. 풍자와 해학을 무기로 들고 나온 고우영은 만화의 수준을 격상시켰다. “만화는 어디까지나 아이러니와 풍자, 경고, 비판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한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는 일본의 어떤 문학, 예술 작품보다 수준을 인정받고 있다. 1980년대 시사만화로 민주화를 추구한 박재동이 “고우영은 내 마음 속 최고의 문학”이라고 한 건 우연이 아니다. 풍자 정신의 시대적 계승이다.
만화가들이 검열을 그냥 당하고 있던 것만은 아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만화가들은 말도 안 되는 심의에 대해 항의의 수위를 높여갔다. 지금의 ‘자유’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2012년 초에는 대구 중학생 자살을 계기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웹툰을 무더기로 제재해 만화가들의 반발을 샀다. 21세기적 ‘검열’이다.
풍자는 분명, 직설어법과는 다른 격을 갖고 있다. 그 속에는 의식과 웃음이 동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풍자의 언어가 있기에 우리는 1960~70년대와 부드러운 접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문화의 힘은 찌꺼기 거품 같은 살벌함과 야만성을 걷어낸다. 뚜렷한 적도, 악당도 보이지 않는데 분노만 쌓여가는 경제전쟁의 시대. 물론 만화는 재미있어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고우영이나 박재동처럼 이 시대의 풍자 언어로 만화 독자들을 확 뒤집어놓았으면 좋겠다. 보통 어려운 주문이 아닐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의 가슴을 통쾌하게 하고, 시대에 위안을 줄 수 있는 유쾌한 만화는 또 언제 출현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