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와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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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70년대 : (5) 누구의 죄인가?

분노의 시대다. 2008년 시작된 세계금융위기가 언제 끝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미국을 상징하는 월가에선 ‘부유한 1퍼센트에 맞선 99퍼센트’가 못살겠다며 점거 시위를 했고, 유럽의 그리스와 스페인은 재정위기로 휘청거리고 있다. 한국은 8퍼센트대에 이르는 청년실업률, OECD 최정상권의 이혼율 및 자살률이 모든 걸 설명한다. 혹독한 긴축과 구조조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파도에 떠밀려 물가 주변에 잠시 머물렀다가 수거되는 찌꺼기 신세가 된다.

2012-06-22 장상용
분노의 시대다. 2008년 시작된 세계금융위기가 언제 끝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미국을 상징하는 월가에선 ‘부유한 1퍼센트에 맞선 99퍼센트’가 못살겠다며 점거 시위를 했고, 유럽의 그리스와 스페인은 재정위기로 휘청거리고 있다. 한국은 8퍼센트대에 이르는 청년실업률, OECD 최정상권의 이혼율 및 자살률이 모든 걸 설명한다. 혹독한 긴축과 구조조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파도에 떠밀려 물가 주변에 잠시 머물렀다가 수거되는 찌꺼기 신세가 된다.
 
산업화, 자본주의의 무서움은 빈익빈, 부익부, 더 나아가 양극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2012년 6월 발표된 미국 연방준비제도(FRB)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 중산층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총자산의 40.4퍼센트를 잃은 반면, 상위 10퍼센트의 재산 소유자들은 1.8퍼센트 자산이 늘어났다. 중산층의 자산은 1992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20년 동안 번 것을 몇 년의 금융위기 동안 몽땅 까먹었다는 말이다. 중산층도 이 정도인데, 서민이나 하층민의 삶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문제가 처음으로 발생한 시점은 1960년대~70년대다. 1960년대의 대한민국 국민은 너나 할 것 없이 굶주렸다. 그냥 ‘참 못 살았다’는 말로 정리하면 되겠다. 그러나 1970년부터 경제가 체질적으로 달라졌다.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울산조선소가 만들어지고, 수출이 경제성장의 주요 동력으로 떠올랐다. 1970년대에 대한민국은 10배 이상의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
 
대한민국에 본격적으로 아파트가 올라가기 시작한 시점은 1970년대 초반 무렵이다. 지금은 ‘탑 블레이드’, ‘연지’, ‘하얀마음 백구’ 등을 발표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완구기업 손오공을 경영하고 있지만, 당시 ‘협성금속’이란 영세 수도꼭지 제조사를 운영한 최신규 대표의 행적을 따라가면 우리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 수 있다. 대규모 아파트 건설 붐으로 협성금속에도 수도꼭지 주문이 폭주했다. 수도꼭지 핸들을 일일이 선반으로 깎아 만들던 시절로, 온종일 생산할 수 있는 한계가 일일 500개에 불과했다. 그는 새로운 다이캐스팅 기법으로 핸들을 만들어 수요를 맞추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수도꼭지는 아파트 개발에서 하나의 상징이었다. 집을 다 지어도, 수도꼭지 핸들을 돌려 물이 ‘쏴아’하고 시원스레 쏟아지지 않으면 최종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종 인가의 키는 수도꼭지가 쥐고 있었다.
 
이와 맞물려 수세식 화장실이 보급됐다. 이 전까지는 재래식 공동화장실이 대부분이었다. 수세식 화장실의 핵심은 볼탑이었다. 용변 후 줄을 잡아당기면 물 위에 둥둥 떠있는 공 모양의 볼탑이 열려 물을 아래로 쏟아냈다. 볼탑에 들어있는 고무 패킹이 불량이어서 물이 화장실은 물론 집의 정원까지 흥건히 적시는 일도 종종 있었다. 단단한 고무 패킹 하나 구하기 쉽지 않았다. KS 패킹을 사용한 최 대표는 고장이 없는 볼탑을 개발해 직접 영업까지 뛰었다.
 
최 대표의 회사는 1980년대 초 녹즙기 생산에 뛰어들었다. 그 때 처음으로 대한민국에서 녹즙기 열풍이 불었다. 각 가정에서 가장들은 아침마다 ‘당근 주스’를 갈아 마시며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다. 엄청난 변화가 아닌가. 1960년대만 해도 ‘오늘 당장 굶냐, 아니냐’가 당면 과제였다. 불과 10여 년만에 우리 사회가 웰빙을 맛보게 된 것이다.
 
아파트 붐은 도서와 미술 시장을 급속도로 확장시켰다. 정부가 저리의 융자금을 내주어 너도, 나도 아파트를 샀고, 사우디를 갔다 온 사람에겐 17~19평 아파트 한 채가 떨어졌다. 아파트에는 소파가 필수다. 소파 뒤에는 서가나 미술품이 있어야 폼이 난다. 기존의 저가 단행본은 아파트 서가에 어울리지 않았다. 번쩍이는 금박이 박힌 양장 전집이 아파트 서가를 장식했다. 못 배운 콤플렉스를 가진 부모들은 자식 교육을 위해 위인전집, 세계문학전집 구입에 아낌없이 돈을 썼다. 자금력을 가진 출판사들은 전집 판매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문 영업자들이 발로 뛰며 전집을 팔았다.
 
마루 문화를 형성하는 전통 가옥의 벽에는 동양화가 꼭 맞는 짝이다. 반면 아파트에는 서양화가 더 격이 맞다. 아파트 거주 부유층이 서양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양화 가격이 상승했다. 약삭빠른 미술상들은 주 업종을 동양화에서 서양화로 바꾸었다.
 
날림 건축으로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1970년 4월 8일)같은 참사도 발생했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15동 건물 전체가 와르르 무너졌다. 1969년 12월 준공 후 불과 4개월 만의 일이었다.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은 이 사건으로 한 때 아파트가 기피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강남 개발과 땅값 상승으로 중산층이 형성됐다. 만화가 김동화가 한 택시운전사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그 운전사는 1970년대 들어 동료와 함께 하사관으로 제대하면서 목돈을 손에 쥐었다. 똑같은 자금력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은 자금을 전혀 다른 곳에 투자했다. 택시운전사는 서울이 종로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발전해가고 있다고 판단해 난지도에 땅을 샀다. 종로, 광화문, 마포, 신촌, 김포, 인천으로 이어지는 큰 개발 축을 본 것이다. 서울 내에서 쓰레기 버릴 곳을 찾던 정부는 난지도를 매립장으로 지정했고, 난지도는 1978년부터 쓰레기매립장이 됐다. 난지도에 땅을 산 사람은 택시운전을 하는 신세로 만족해야 했다. 반면 강남에 투자한 동료는 땅의 절반을 팔아 빌딩을 지어 큰 재산을 모았다. 1970년대는 똑같은 돈을 가지고 사람의 팔자가 180도 바뀌는 급변의 시기였다.
 
산업화의 촉발로 웃게 된 사람도 있었지만 어두운 그늘에 들어간 사람도 많았다. 1970년대 초부터 서울에 크고 작은 공장이 생기고, 공장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상경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이 심화됐다. 시골은 보릿고개를 벗어나지 못했다. 가을에 추수한 쌀이 떨어지고 보리가 패이지 않은 춘궁기가 여전했다. 시골 젊은이들은 서울에 아는 친척만 있으면 무조건 상경했다. 그래서 ‘군식구’라는 말이 생겼다. 서울의 친척집은 일종의 취업 대기소였다. 여자들은 부엌일을 거들며 붙어있었고, 남자들은 취직하러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공장으로 취업하는 남녀 젊은이들도 많았다. 어느 세계나 그렇듯, 다수의 공장노동자,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일용노동자, 실업자들이 도시 빈민으로 편입됐다.
 
공장이 빚어내는 모순은 사회문제로 비화됐다. 공장노동자로 붙어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공장에서 내쫓기면 벌이가 없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과 그 다음해 광주대단지 사건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에 비해 어떤 자본가와 공장 경영자는 떼부자로 둔갑했다. 누가 봐도 빈익빈, 부익부가 분명해졌다. 있는 자는 있는 자대로, 없는 자는 없는 자대로 ‘하면 된다’라는 캐치프레이즈에 매달렸다.
 
도시 빈민을 형성하는 다수의 울분과 분노는 희생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휴머니즘의 형태로 문화, 예술작품에서 승화됐다.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별들의 고향>과 순박한 시골 처녀 영자가 무작정 상경해 창녀로 전락하는 <영자의 전성시대>가 각각 1974년과 75년 스크린에서 모두 30만명 이상을 동원하며 최고의 흥행 성적을 올렸다. 유신 체제 이후 검열이 강화되면서 사회적 메시지와는 거리가 있고 관능과 주먹으로 어필하는 영화 위주로 개봉된 결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별들의 고향>의 주연을 맡은 영화배우 신성일은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그 시대의 아픔을 썼다.
 
‘1970년대 초 여동생 같은 처녀들이 여직공, 버스안내원 등이 되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했다. 소외받는 사람도 생겨났다. 도시 뒷골목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거친 발길에 차이는 호스티스다. 바로 <별들의 고향>의 경아다.
 
암울한 정치상황과 경제성공은 주변부 인생을 불러왔다. 모두 돈만 좇는 사이에 누군가는 쓰러지고 있었다. 최인호 원작 <별들의 고향>은 산업사회 속에서 ‘도시가 죽인 여자’의 이야기다. 나는 80년대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캣츠>의 그리자벨라를 보며 경아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경아가 살아 있다면 그리자벨라 같은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는 그 운명이 더욱 비참했다. 도시에 발을 디딘 그녀의 올가미는 몸부림 칠수록 더욱 옥죄었다. 상경한 집 사장 아들에게 능욕을 당한 영자는 여직공, 빠걸, 버스 승차장을 전전하다가 사고로 팔을 잃고 결국 창녀가 된다. 나약한 희생자를 통해 냉혹한 사회를 고발하는 이런 휴머니즘풍의 작품들이 큰 인기를 모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1976년 발표됐다. 문학은 도시의 그늘진 곳에서 희생당하고 있던 소시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에 사는 난장이 가족에게 철거 계고장이 날아들면서 소시민의 작은 행복은 깨진다. 아파트 입주권이 나오긴 하지만 입주할 돈조차 없는 이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마침 난장이 아들은 공장에서 쫓겨난다. 난장이는 추락사하고, 나머지 가족은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 소설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팔리고 있는 것은 도시 확장과 산업화의 희생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고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시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이 저항적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도 아니다. 시대의 아픔에 대해 대중에게 공감을 구했던 작품들로 ‘당신의 아픔을 알아’라고 대중의 가슴에 속삭였다.
 
이쯤에서 대중가요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MBC는 창사 20주년 기념으로 1981년 설문 조사한 ‘한국 가요 전국 대조사’에서 연대별 대표곡을 발표했다.
 
1920년대 - <황성옛터>(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
1930년대 - <눈물 젖은 두만강>(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 김정구 노래)
1940년대 - <신라의 달밤>(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1950년대 - <이별의 부산 정거장>(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1960년대 - <노란 샤쓰의 사나이>(손석우 작사/작곡, 한명숙 노래)
1970년대 - <돌아와요 부산항에>(황선우 작곡, 조용필 노래)
 
조용필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최고 스타에 등극한 시점은 1976년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재일교포들을 위해 재취입한 곡이지만 이같은 반응을 얻었다는 점은 의미가 남다르다. 연대별 히트곡들을 보면 눈물을 글썽이도록 감정에 호소하는 곡들이 많다. 사회적 소외계층이 확산되고 있던 1976년, 피를 토하는 듯한 조용필의 격정적 창법은 그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대변했다. 대중은 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산에서 출발해 전국에서 열광적 반응을 얻었다.
 
만화도 그런 분위기와 무관할 수 없었다. 시골에서 상경해 호주머니가 얇은 젊은이들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대본소를 찾았다. 지금 돈으로 1000~2000원만 있으면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대본소다. 공장에 취직한 젊은이들에게도 대본소는 괜찮은 안식처였다. 그 전까지 대본소는 어린이용 만화책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대본소를 찾는 연령대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젊은 만화가 이상무는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풋풋한 인간미를 풍기는 주인공 독고탁을 내세워 대중의 감수성을 자극했다. 박기준의 제자로 출발한 이상무의 만화는 명랑만화의 DNA를 갖고 있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중학생 이상이 볼만한 홈드라마였다.
 
1970년대 초부터 등장해 야구만화로 두각을 드러낸 이상무 만화는 1978년 소년중앙에서 연재된 <비둘기 합창>으로 완성됐다. 이 작품은 격정적이지는 않지만 독자들의 코끝을 찡하게 했다. 사회에서 소외됐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독고탁의 가족. 그들의 모습이 곧 독자 자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탁이네는 넉넉하지 못한 여섯 가족이다. 나이 많은 아버지는 작은 형 봉구의 한 학년 선배집 운전사로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 자존심 센 탁이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다. 탁이로선 아버지가 그 집에 고용됐다는 이유로 절절 매는 모습이 보기 싫다. 아버지가 봉구형의 일로 억울하게 해고당했을 때, 탁이의 집은 위기를 맞는다. 탁이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 마당에서 탁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뛰어나와 몸을 부비는 누렁이가 부담스럽다. 탁이는 개장수에게 누렁이를 잡아가도록 해놓고 후회한다. 누렁이가 떠난 후에야 자신이 그 개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인이지만 다리를 저는 큰 누나는 당시 각 가정에 한 명 쯤은 있던, 몸이 불편한 가족을 대변했다. 천사같은 마음씨의 소유자로 우마돈이란 순박한 청년의 구애를 받는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할 능력이 있는 청년은 아니다. 탁이는 누나의 상대로 만족스럽게 여기진 않지만 그 마음씨를 보고 받아들인다.
 
펀치력이 출중한 작은 형 봉구가 복싱 선수로 대성할 자질을 보이면서도 결국 뇌종양으로 죽는 대목은 독자들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한 장면이었다. 봉구가 사회 문제나 환경 탓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것인지에 대한 부분은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대중의 공감을 얻기 위해선 봉구라는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런 생각은 얼핏 들게 한다. ‘봉구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과연 그 병에 걸렸을까’라는. 독자는 이 만화를 읽으며 위안을 얻었다. 봉구는 세상을 떴지만 아버지는 다시 직업을 찾았고 나머지 가족들은 꿋꿋하게 삶을 살아가므로, ‘희망적’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소설 응모에 당선된 작은 누나가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이 가족에겐 작은 희망의 씨앗이다.
 
이상무 외에 주목해야 할 만화가가 한 명 더 있다. 1970년 새소년에 제2차 세계대전의 파일럿을 다룬 <유령편대>로 만화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양정기다. 1980년대~90년대 <권법소년> <용소야> 시리즈 등을 펴내 인기를 끈 다이나믹 콩콩 코믹스의 ‘저자’로 표지에 이름을 자주 드러낸 ‘양정기’가 바로 그이다.
 
1970년대의 정서를 담아낸 영화 <별들의 고향>에서 여주인공 경아가 심심풀이로 만화책을 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표지가 클로즈업된 그 만화책은 놀랍게도 양정기의 대표작 <어느 사랑의 이야기>였다. 이 작품은 1974년 개봉한 <별들의 고향>에 비해 불과 몇 달 빨리 발표됐다. <어느 사랑의 이야기>는 <별들의 고향>에서 인용될 정도로 그 시대의 정서와 부합한 만화라 할 수 있다.
 
우선 만화가 양정기를 살펴보면 그 시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양정기는 1941년 12월 5일 일본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일본 유학 생활 중 만나 연을 맺었다.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귀국한 그를 만화가의 길로 인도한 계기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동대문 오관수교 옆 판자촌 부근의 문방구 앞을 지날 때 일이다. 문방구 바깥에 설치된 판자 서가와 고무줄 사이로 박광현의 만화 <푸른 망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작품은 극화체로 평상시 바보 노릇을 하지만 배트맨 같은 가면에 푸른 망토를 걸치고 일본 헌병과 싸우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허영만의 <각시탈> 선배 격이라 할 수 있는 극화체 작품이다. 양정기는 한 눈에 그 작품과 사랑에 빠졌다. 그에게 큰 영향을 준 또 다른 작품은 일본 만화가 야마카와 소오지의 <밀림의 왕자>였다. 서봉제가 베껴서 국내에 보급한 이 만화에선 원시 마사이족 추장과 일본 소년이 만나 모험을 하고, 아나콘다 같은 괴물도 나타났다. 양정기는 만화를 그리고 싶어 죽을 지경이 됐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소개로 월간지 만화세계와 인연이 닿았다. 숭인동에 자리한 이 출판사에는 김경언이 관계하고 있었다. 양정기는 학교를 다니고 남는 시간엔 이 곳으로 달려가 그림을 배웠다. 어느날 편집장 심상천은 그에게 “베껴보라”며 데즈카 오사무의 <백조의 호수>를 던져주었다. 그는 트레이싱지에 대고 첫 작품을 만들어냈고, 그 후로 2~3페이지 짜리 단편만화를 만화세계에 게재했다.
 
그 무렵 잡지와 더불어 대본소 만화의 시대가 열렸다. 그는 구와다 지로의 <월광가면>을 트레이싱지 없이, 눈썰미로 베껴 그려냈다. 그 방식으로 제작한 첫 작품이었다. 편집장은 여전히 그를 트레이닝 시켰다. 그는 본격적으로 대본소 만화 제작에 뛰어들었지만 손이 느렸다. ‘이 원고가 세상에 나가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그의 가슴 한 구석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답답한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강철수(본명 배윤식)가 “양형, 그렇게 해서 언제 끝나?” 하면서 자신도 바쁜데도 불구하고, 무료로 한 권 전체를 펜터치해주었다. 오죽했으면 그럴까. 그럼에도 양정기는 ‘단 한 컷도 책임감 없이 넘긴 것은 없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 와중에 합동출판사가 만화 세계를 휘어잡으면서 양정기가 설 곳은 없어졌다. 남의 일이라도 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가 된 그는 동료 만화가 이영복을 만나게 됐다. 이영복의 원고를 거들던 그에게 갑자기 기회가 찾아왔다. 1970년 어느날 새소년이 밀리터리 만화 연재 제의를 해왔다. 그는 새소년에 <유령편대>를, 소년세계에 킥복싱 만화 <도전자>를 동시 연재하게 됐다. <유령편대>의 시리즈로 이어간 <마지막 편대>는 지금도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양정기는 <마지막 편대>의 최종 40페이지를 그려내지 못했다. 당시 왜 완성하지 못했는지는, 그 자신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단단히 뿔난 새소년 편집장은 <마지막 편대>를 펑크낸 호의 가제본에 ‘작가 사망으로 연재가 중단돼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린다’는 문구를 앉혀서 양정기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정식 발매 때는 그 문구를 바꾸었지만.
 

  
  
  
  
  
  
  
  
  
  
  
  
  
  
  
  
  
  
   
 
1974년 또 다시 기회가 왔다. 합동출판사에서 나와 새 출판사를 차린 이국전이 “사랑 이야기 하나 해달라”고 그에게 주문했다. 그 때는 가판대에서 고우영의 <수호지>가 잘 나가고 있었다. 가판대에서 성인만화 수요가 있다고 본 이국전은 “가판에는 성인물이 없으니, 완전 성인물을 해달라. 단, 음란성 짙으면 안 되고, 사회비판을 해선 절대 안 된다”고 조건을 달았다.
 
작품을 놓고 고민하던 양정기는 어느 여죄수를 다룬 시노하루 도오루의 만화 <사소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여러 에피소드로 끊어지는 단편 모음이었다. 그는 남자에게 배신당한 여자가 복수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어느 사랑의 이야기>다. 돈 많은 남자로는 약했다. 그보다는 형사를 여자의 연인으로 등장시켜 배신하게 한다면, 배신이 더 커 보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악질 형사 애인으로 풀어간 설정은 그의 것이다.
 
<어느 사랑의 이야기>는 사회성이 두드러지진 않지만 불쌍한 여자 희생자를 클로즈업하는 면에서 지극히 1970년대적이다.
 
여주인공 수미는 가난한 신참 형사 준과 사랑하는 사이다. 그런데 출세를 꿈꾸는 준은 부잣집 딸에게 마음을 둔다. 일편단심 열녀 스타일인 그녀가 매달리자, 그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수미에게 호스티스가 된 다음, 마약을 구하는 것처럼 행세해 국내 최대 마약조직에게 접근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그 조직을 일망타진하면 큰 포상금을 벌어 수미와 결혼하겠다는 청사진을 이야기한다. 수미는 일체의 의심 없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폭력조직에게 몸만 빼앗긴다. 준은 수미 사건을 빌미로 폭력조직에게 돈을 뜯어내고, 수미를 여자 교도소로 보내버린다.
 
독자의 시각에선 이가 갈리는 악질 형사다. 이 작품은 1970년대 정서대로 비극적 결말로 마무리된다. 수미는 <별들의 고향>의 경아나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재미있는 부분은 <어느 사랑의 이야기>의 연출 기법이다. 고우영의 <수호지> 스타일을 좇아, 한 페이지 안에서 칸을 잘게 나누었다. 그것은 출판사의 주문이었다. 뭔가 만화 안에 많은 것이 담겼다는 인상을 주려는 전략이다. <수호지>를 모델로 삼다보니, 고우영 스타일의 나레이션 부분도 많아졌다. 거침없는 고우영식의 대사가 아닌 한, 자칫 지루함을 줄 수도 있는 연출법이다.
 
양정기는 <어느 사랑의 이야기>의 후속작으로 <밤의 여인>을 1976년 무렵 발표했다. 역시 32페이지짜리 가판용 10회분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작품은 창녀 등 도시화, 산업화의 희생자들에게 더 직접적으로 다가갔다. 창녀를 다룬 한 회분을 보자. 시골에서 김학수란 노인이 딸에게 받은 편지 하나 들고 상경한다. 그의 손에는 계란 몇 개와 떡이 담긴 보따리가 들려 있다. 편지의 주소대로 왔는데, 딸이 다닌다는 가발공장은 없고 벌집과 벌거벗다시피 한 젊은 여자들만 왔다갔다 한다.
 
노인은 게걸음으로 딸을 찾아 밤거리를 누빈다. 그 때 뒷전에서 딸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니, 틀림없는 딸이었다. 시골에서 입혀 보낸 치마저고리는 온데 간데 없다. 포주는 “야, 이년아. 손님 받지 않고 뭘 싸돌아 다니냐?”며 딸을 면박한다. 이보다 더 기막힌 일이 있을까. 딸과 아는 척 못한 노인은 버스터미널로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외친다. “야, 이놈들아. 우리 딸은 큰 공장에 다니더라. 내가 봤다!”
 
이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그 때 뒤에서 노인에게로 차가 달려든다. 어쩌면 그 사건은 노인에게 행운이었을지 모른다.
 
의식 있는 작가로 성장하던 양정기는 1980년 등장한 신군부가 가판대 만화를 정리하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그 역시 시대의 희생자였다. 1983년 발표한 <종착역>이 사실상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종착역>은 친구에게 배신당한 남자의 복수 이야기였는데, 신군부의 지나친 심의로 힘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가 추구하는 성인만화를 뒷짐지고 보아줄 아량이, 대한민국에는 없었다. 그는 거기서 더 이상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유령편대>나 <어느 사랑의 이야기> 같은 작품은 독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는 분명 한국 만화사가 외면해선 안 되는 작가다.
 
그는 그 후로 이영복이 운영하는 다이내믹 콩콩 코믹스에서 일본 만화에 맛깔스런 대사를 입히는 일을 2000년 무렵까지 했다.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아예 재창작한다는 기분으로 한 일이다. ‘통배권’ 등의 추억을 가진 독자에게 ‘양정기’는 예사이름이 아니다. 그를 비판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만난 그는 개인적으로 누구보다 만화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는 도시화와 산업화 속에서 더 많은 사회 소외계층과 빈민을 양산했다. 어떤 이들은 고통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어갔다. 그것은 누구의 죄인가? ‘누구의 죄인가’는 19세기 러시아 혁명가이자 작가인 알렉산드르 게르쩬의 소설 제목이다. 삼각관계로 설계된 이 작품은 결혼 생활에서 비롯된 모든 불행은 ‘누구의 죄인가?’라고 묻는다. 개인의 불행도 사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메시지다.
 
1970년대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공동체적 정서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희생자들을 다룬 작품을 보며 공동의 책임, 안타까움, 가책, 불의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기력을 느꼈다. 한편으로 그런 작품은 카타르시스 역할도 했다. 희생자들은 약육강식이 본격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속죄양이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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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용

작가, 만화평론가
초이락컨텐츠컴퍼니 웹툰사업팀장, 前 부천국제만화축제 사무국장, 前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