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이란 이상과 현실을 양축으로 한 어느 좌표일지 모른다. 만화도 시대정신의 틀 속에서 작용한다. 따라서 만화는 어떤 만화가에겐 이상이고, 또 다른 만화가에겐 현실이 된다.
지금 소개하는 만화가는 만화를 이상의 푯대로 붙들고 50년 이상의 세월을 버텨왔다. 선과 악, 주류와 비주류로 가르는 시각을 벗고 있는 그대로 그 존재를 바라보자. 그의 인생을 따라가면 만화와 만화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까지 들어가게 될 터이니.
1961년 순정만화 <봄의 노래>로 히트를 친 박문윤. 1944년생인 그는 자신을 ‘만화계의 이단자’라 부르기를 꺼리지 않는다. 반골기질이 다분해 젊은 시절부터 누구에게 고분고분해본 적이 없으며, 나이 서너 살 위쯤은 “야, 자”를 텄다. 줄 서고, 무리 짓는 데는 영 젬병이어서 출세 줄을 타 본 적도 없다. 예술적 기질이 다분한 클래식 광의 기운이 만화 원고로 간 탓일까. 그의 만화는 대체로 대중적이진 못했다. 그는 만주 하얼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만주에서 무역업을 해 제법 큰 돈을 벌었다.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만주에서 전화교환수였던 어머니와 만났다. 그의 분당 화실은 지금도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가져온 전축과 클래식 음반들로 가득하다. 만화계에서 신동헌 다음 가는 클래식 고수로 순위를 매겨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넉넉지 못한 만화가로 지내면서도 전축과 음반을 모으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은 물론,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살리에리의 음악까지 졸업한 지 오래다. 지금의 그를 형성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만주 이야기다.
아버지는 큰 유성기와 LP판이 가득한 방에 어머니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박문윤을 임신 중이던 어머니는 일본 잡지 《주부의 벗》에서 클래식이 태교에 좋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그 방에서 배를 두드리며 클래식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클래식 음악을 들은 지 70년 됐다고 여긴다. 중학교 3학년 무렵 영화 <오케스트라의 소녀>를 보고 세계적 지휘자가 되겠다고 꿈꾸기도 했다.
그는 용산고로 진학하면서 김용환이나 김성환같은 시사만화가를 꿈꿨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60년부터 한국 최초의 만화학원인 한국만화연구소에 다녔다. 학교를 마치고 저녁이 되면 그 곳에서 만화를 배웠다. 고등학교 8년 선배로 한국만화연구소 강사로 나오던 만화가 신동우를 만났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도 접했다. 강사인 만화가 김경언이 수업 중 일본 문예춘추지 부록인 <만화독본>을 꺼내면서, “독일에선 이미 1940년대에 추상만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추상만화’라는 단어가 어린 그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고1때 만화가 데뷔 기회를 잡았다. 한국만화연구소에서 강사를 하던 만화가 임수가 박문윤의 습작 만화 <인조인간XO>를 보고는 대뜸 “너, 이거 책 낼래?”라고 말했다. 임수는 <거짓말 박사>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박문윤은 스스로 “출판이 되겠어요?”라며 반신반의했다. 데뷔작 <인조인간XO>가 메이저 출판사 중 하나인 부엉이문고에서 출간됐다. 화폐개혁 이전의 시대다. 지금 돈으로 50만원 정도라고 할 수 있는 7000환을 받았다. 고등학생에겐 큰 돈이었다. 마침 아버지가 실직해 집안이 쪼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는 만화를 그리면 돈이 된다는 걸 알고 자연스럽게 그 길로 걸어갔고, 잠시 김윤명 화실에서 일을 도왔다. 1961년 다음 작품으로 순정만화를 준비하고 있을 때, 크로버문고를 운영하고 있던 박기준이 그를 발견했다. 박기준은 한 권 분량의 스토리를 주며 만화로 내자고 제안했다. 그 작품이 바로 권당 128 페이지 분량으로 13권까지 출간되며 큰 성공을 거둔 순정만화 <봄의 노래>였다. 이북에서 따로 넘어온 모녀와 작곡가 아빠가 재회할 듯하면서 엇갈리는 애틋한 만화로 클래식 음악들이 스토리 속에 녹아있었다. 이 작품의 성공은 메이저 출판사인 크로버문고가 전략적으로 밀어준 것에 힘입었다. <봄의 노래> 1권을 당시 최고 히트작인 방영진의 만화 <약동이와 영팔이>와 합본해 판매했다. <약동이와 영팔이>를 보려면 <봄의 노래>도 같이 사야하는 것이다. <봄의 노래>의 작가 이름을 ‘박정혜’라고 지은 것도 박기준이다. 그러나 반골인 그는 박기준의 스토리로 시리즈를 이어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2권부터는 자신의 스토리로 작품을 만들었다.
“<약동이와 영팔이>로 합본해 성공하게 해준 건 고맙지. 하지만 그건 자기네(크로버문고) 판매전략일 뿐이지. 날 자기네에게 종속시키려는 의도를 참을 수 없었어.”
박문윤은 ‘박정혜’라는 이름으로 크로버문고에 전속되는 것도 거부했다. <봄의 노래>가 크로버문고에서 13권까지 나왔지만 내용적으로는 제대로 완결되지 못했다. 박문윤이 진흥문고로 옮겨 또 다른 순정 음악만화 <엄마와 크리스마스>를 출간했기 때문이다. 진흥문고에선 ‘박정혜’ 대신 ‘평일’이란 새로운 필명을 만들어야 했다. <봄의 노래> 1권은 화폐개혁(1962년 6월 9일) 이전인 1961년 말 출간돼서 1만 5000환, 2권부터 13권까진 화폐개혁 직후 출간돼서 권당 3500원씩 받았다. 크로버문고에선 가불을 잘 해주었다. 박문윤이 3만원의 가불을 갚지 못한 상황에서 진흥문고로 옮겼기 때문에 양측은 갈등을 빚었다.
1962년에는 향수, 향원(이향원), 이상모 등이 자리잡고 있는 마포 공덕동 화실에 합류했다. 박문윤은 한희작과 함께 그 곳에 놀러갔다가 하숙집 주인 딸에게 반해 눌러앉았다. 30평쯤 되는 방 네 개짜리 한옥집에서 화장실 쪽 작은 독방을 얻었다. 얼마 후 강철수도 그 곳에 들어왔다. 그 곳은 자연스럽게 재능 있는 젊은 만화가들이 모인 공동 창작실이 됐다.
당시 향수(본명 박옥환)는 나름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고, 마포 화실의 대장 격이었다. 1950년대 후반 상경한 그는 방기훈 밑에서 일본 만화를 베끼는 일부터 배웠다. <반달가면>을 베낀 작품에서 펜을 댄 사람이 향수였다. 1962년 무렵 요시다 다츠오(吉田?夫)의 프로레슬링 만화 <챔피언 후토시>을 베낀 <챔피언 쟁탈전>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실 향수 조직의 실력자는 향원이었다. 이향원(본명 이동호)는 ‘향수’란 필명을 확립하기도 전이다. 향수는 향원과 손잡으면서 창작을 전적으로 맡기고, 자신은 일본 만화책을 구하고 마케팅 하는 데 주력했다. 향수 팀은 치바 데쓰야 만화를 거의 독점해 베끼듯 했다. 일본 만화책 구하는 것이 하나의 사업이었다. 일본 교포에게 숨겨 들여오게 하거나, 명동 뒷골목 수입상에서 구했다.
박문윤은 향수 팀과 같은 하숙방, 같은 출판사(진흥문고)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독자적 노선을 확실히 했다. 더구나 향수가 대장 노릇 하려는 것도 받아주지 않았다. 향수는 그를 왕따시키려 했다.
어느날 그는 방에서 혼자 전기 라디오로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었다. 당시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는 채널은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 두 군데 뿐이었다. 향수는 방으로 들어가 대뜸 아니꼬운 투로 말했다. 클래식 음악 때문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박문윤은 대답하지 않고 화판에 그림을 그렸다. 라디오는 스위치를 당기면 켜지고, 넣으면 꺼졌다. 향수가 라디오를 두 번 껐다. 박문윤은 외쳤다. 향수는 라디오를 끄고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싱글거렸다. 어떻게 할 거냐는 표정이었다. 박문윤은 각진 화판을 들어 향수의 얼굴을 찍어버렸다. 박문윤이 말하는 “내 최초의 폭력이자 최후의 폭력”이었다. 하숙집은 난장판이 됐다. 향수는 “죽인다”면서 덤벼들었고, 향원이 그를 말렸다. 얼마 후 박문윤은 그 집을 나와 금호동 본가로 들어갔다.
금호동 시절인 1964년 <빤찌왕>이란 복싱 만화가 탄생됐다. ‘박평일’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빤찌왕>은 실컷 얻어맞던 주인공이 헝그리 정신으로 챔피언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작품이 중요한 건 박문윤과 허영만을 연결시키는 통로가 됐기 때문이다. 여수의 고등학생 허영만이 ‘‘빤찌왕’을 보고 만화가의 꿈을 키우게 됐습니다. 습작품을 보아주십시오‘라며 박문윤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박문윤은 허영만의 습작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허영만은 천재였다. 나보다도 잘 그렸다. 내가 모차르트라면, 허영만은 베토벤이었다.”
한 눈에 물건임을 알아본 박문윤은 허영만에게 당장 올라오라고 연락을 넣었다. 허영만이 합류하면서 금호동에 박문윤의 팀이 꾸려졌다. 박문윤은 도제식의 집단창작 시스템을 싫어했지만 자신도 그 방식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박문윤은 팀을 유지할 여력이 없었다. 화실이 무너지는 과정을 허영만은 이렇게 회고한다.
“박문윤 선생님이 굉장히 게을렀다. 인기가 있는데도 안 그리셔서 결국 그 화실이 문을 닫았다. 그 이후에 엄희자 선생님의 순정만화를 그리게 됐는데, 그 사이에 이향원 선생님으로부터 같이 하자는 제의가 왔다.”
1966년 무렵 화실을 정리한 박문윤은 허영만을 데리고 엄희자, 조원기 밑으로 들어갔다. 박문윤이 무너지는 동안, 향수 역시 몰락하고 있었다. 1967년 무렵 박기정, 박기당 등을 중심으로 하는 ‘만화정화사업’이 전개됐다. 아동만화가라고 하는 사람 전체를 심사해서 무자격자, 외국 것이나 남의 작품을 무단으로 베끼는 사람들을 가려내겠다고 선언했다. 향수와 같이 만화를 그리지 못하면서 베끼기만 하는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한 조치였다. 박문윤은 향수가 만화를 그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변에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 결과 향수는 박기당 앞에서 실력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지만 오랫동안 사업가였던 탓에 자기 주인공조차 그려내지 못했다. 자격박탈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향수’란 필명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필명이 가장 중요한 브랜드 아닌가. 향수에겐 큰 타격이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만화가 1967년 발행된 향수의 야구 만화 <배팅찬스>다. 이 만화는 치바 데쓰야의 인기 만화 <하리스의 선풍>을 베낀 작품이다. <배팅찬스> 1권은 ‘향수’로 시작된다.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중간부터는 표지에 향수가 빠지고 ‘향원’이 등장한다. 시리즈의 마지막 부분 표지에선 향원도 사라지고 ‘유성’이 등장한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같은 작품의 시리즈에서 작가 이름이 두 번이나 바뀌다니.
향수도 인기가 보장된 <배팅찬스> 시리즈에서 끝까지 자기 이름을 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필명을 사용할 수 없게 돼 어쩔 수 없이 ‘향원’을 내세우게 된다. 이동호도 향원이란 필명을 얻어가는 과정이었다. 향수 입장에선 끝까지 향원 이름을 달 경우 자신의 지분을 빼앗기는 문제를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다른 필명 ‘유성’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1960년대 한국 만화사의 슬픈 단면을 보여주는 기막힌 일화다. 향수는 내리막길을 걷다가 1970년 무렵 만화를 접고 고향인 부산으로 낙향했다.
박문윤은 조원기, 엄희자 부부의 화실에서 일하는 신세로 고착됐다. 그 동안 아내와 아이가 생겨 생활비를 조달해야 했다. ‘친척이 땅 사도 배 아프다’는 옛말이 있다. 그 까칠한 성격에, 한국만화연구소 동기인 엄희자의 하수인이 됐으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까.
조원기, 엄희자 밑에서 쥐죽은 듯 있었던 것은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군 기피자였다.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는 ‘군대 가면 잘 돼봐야 죽는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돌았다. 군 기피자가 당국에 발각되면 남한산성으로 끌려갔다. ‘남한산성’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군 입대 대상 만화가의 70~80가 군 기피자였다. 술자리에서 싸움이 붙을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군 기피자는 무조건 도망쳤다. 만화가 장태산은 “군 기피자들이 화실에 쳐 박혀 그림 그린 탓에 좋은 작품이 나오는 효과도 있었다”고 설명한다.
조원기, 엄희자 부부는 최고의 수입을 올리는 작가였다. 1971년 무렵 신촌의 합동출판사와 소년한국도서가 양강 체제를 형성하며 만화가들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했다. 사활을 건 세(勢) 싸움이었다. 그 해 12월 25일에는 대연각호텔 화재사건이 발생했다. 조원기, 엄희자 부부는 소년한국도서로 들어가면서 현금 1,000만원을 받았다. 가수 이미자가 지구레코드에 전속되는 대가로 500만원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박문윤은 생활고에 찌들었다. 조원기, 엄희자의 작품을 한 권 스토리 쓰고 데생하는데 9,000원을 받았다. 월세는 1만 2,000원. 그는 허영만을 데리고 있을 처지가 못돼 1968년 향원에게 보냈다. 월세로 밑지면서 살아가는 삶을 견딜 수 없던 그는 조원기에게 20만원의 원고료 선불을 요청했다. 20만원이면 전세로 옮길 수 있었다. 조원기가 큰 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 요구였다.
다음날 신촌 아테네 다방에서 가진 미팅에서 조원기는 “돈은 못준다. 지금 조건으로 일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마라”고 단칼에 잘라 말했다. 박문윤은 “오냐, 알았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조원기와 박문윤 당사자가 아닌 한, 아무도 이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자.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아내에게 고했더니, 아내는 누군가 지프차를 타고 두 번이나 찾아왔노라고 했다. 어떤 직감이 그의 머리를 찔렀다. 단골 술집을 찾아갔더니 합동출판사 편집장 김기옥이 일행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김기옥은 “야 임마, 너희 집에 두 번 갔어. 너 다방에서 기다려”라고 박문윤에게 외쳤다.
곧 이어 ‘신촌 대통령’이라 불리는 합동출판사 이영래 사장의 수하인 홍순창이 지프차에 그를 태웠다. 지프차가 지금의 홍대역 근처 구 청기와 주유소 뒤편으로 들어갈 때, 박문윤은 모든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는 김기옥에게 물었다. 신촌 대통령의 집은 위세가 대단했다. 넓은 정원에 집 안에 당구대까지 있었다. 이영래가 나오더니 임금님이 사용하는 듯한 보료에 누운 채 말했다.
“자네 오랜 만이야. 너, 만화계에 오래 있었는데 빛 못봤다며? 만화가들 많이 알지? 기옥이와 잘 상의해봐.”
이영래는 그 자리에서 20만원을 주었다. 만화가들을 합동출판사로 끌어오는 공작금이었다. 그들은 운전사와 지프차까지 붙여주었다.
박문윤 역시 이 사안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합동출판사 일을 돕는다면 동료 만화가들에게 ‘역적’이 될 수도 있었다. 그의 판단은 이러했다. 어차피 합동출판사 쪽에 붙던, 소년한국 쪽에 붙던, 어중간한 만화가들은 이용당하기 마찬가지라고. 돈 20만원 가지고 치사하게 나오는데, 나도 내 갈 길 가겠다고.
결심을 굳힌 박문윤이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김마정이었다. 자, 김마정이 누구인가. 1961년 한국만화연구소에서 박문윤과 만난 가장 친한 친구였다. 경상북도 강구 출신이어서그들 사이에선 ‘강구’라고 불렸다. 본명은 김정직. 그를 1961년 박기준에게 소개시켜 박기정 문하로 들어가게 연결시켜 준 사람이 박문윤이었다. 그 때까지 김마정은 박기정의 핵심 데생맨으로 일했다. 박문윤이 스카우트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기존 작가의 밑에서 일하는 실력자들이었다. 박문윤은 나이가 두 살 많은 김마정을 불러냈다. 그는 술을 마시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 나 이영래 만났어. 어차피 작전이다!”
박기준 밑에서 일하고 있던 이상무도 만났다. 박문윤은 김마정과 이상무 등 젊은 만화가들을 독립시켜 합동출판사의 깃발 아래 모아놓았다. 이상무가 이를 계기로 첫 야구만화 <주근깨>를 합동출판사에서 발표하게 됐다.
소년한국도서 진영으로 옮겨간 만화가들은 박문윤에게 앙심을 품었다. 사무실을 얻어 움직이고 있던 박문윤은 주먹을 잘 쓰는 선배 박광현이 벼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습공격에 대비해 책상 속에 셔터 내리는 쇳덩이를 넣어두었다. 다행히 그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박문윤은 만화계의 이단아가 됐다. 합동출판사의 특별대우는 오래가지 않았다. 합동출판사는 박문윤의 작품을 권당 1만원에 사주었다. 그러나 그의 만화는 팔리지 않았다. 박문윤은 미국 만화가 찰스 슐츠의 <피너츠(Peanuts)>에 반해 한국에 그러한 개념의 만화를 도입하려 했다. <피너츠>는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 같은 캐릭터를 활용한 네 컷 만화다. 그는 이런 스타일을 장편으로 만들어냈다. 편집장인 김기옥은 그를 보더니 “꼴찌에서 두 번째로 책이 안 나가”라고 말했다. 박문윤은 시니컬하게 답했다. 책이 안 팔리면 출판사에서도 더 이상 봐줄 수 없다. 박문윤은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가 됐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박문윤을 합동출판사에 연결시킨 김기옥이 얼마 후 한국일보 진영으로 넘어간 것이다. 박문윤은 어느날 점심 무렵 인사동 한국일보 건물에서 나오는 김기옥을 목격했다. 김기옥은 “밥 먹자”고 손짓했다. 박문윤은 생각했다. ‘날 거기 밀어 넣어 실컷 욕먹게 하고 혼자 사라진 자식!’ 박문윤은 “안 먹어”라고 단칼에 잘랐다. 그 때부터 오랜 지인이던 두 사람은 남이 됐다.
그는 1972년 추석을 앞두고 다시 조원기에게 찾아갔다. 완성한 만화책 두 권을 넘기고 추석 샐 돈 2만원을 받으려는 생각이었다. 이미 조원기를 만난다는 자체가 그에겐 굴욕이었다. 다방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원고를 훑어보던 조원기는 그냥 만원을 놓고 갔다. 돈이 다급했던 박문윤은 만원을 아내 손에 쥐어준 후 베개를 붙잡고 울었다. 그 다음날 아침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조원기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 질렀다. “내가 진짜로 너하고 끝이다. 두 권 보낼 테니 만원 더 내라!”
조원기 쪽에서 만원을 보내왔다. 그게 조원기와 마지막 인연이었다. 이년 후 조원기와 엄희자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조원기가 미국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보자고 부모님을 통해 연락해왔다. 당시 박문윤 가족은 생활고로 부모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문윤은 만화를 접고 청량리에서 안경, 라이터 등을 파는 노점상을 했다. 돈만 따지자면 노점장이 훨씬 나았다. 하루 몇 천원은 기본이고, 어떤 때는 만원씩 벌었다. 20일 가까이 등골 휘게 만화 그려 만원 버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어떤 날은 김원빈 등 선배들이 청량리로 와 “왜 이런 것 하고 있냐. 돌아오라”며 안타까워했다.
돈을 모아서 오디오업에 뛰어들었다. 워낙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던 터라 일도 신났다. 그러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됐다. 비싼 오디오를 마구 사들였다. 팔 땐 손해를 봐야 했다. 1980년 오디오업을 접을 땐 1000만원의 빚이 쌓였다. 그의 아내가 미술학원을 운영해 근근이 생계를 꾸렸다. 결국 돌아갈 고향은 만화. 그는 1980년 1월 1일부터 15일까지 겨울 추위 속에서 작심을 하고 만화 한 권을 완성했다.
청출어람, 제자 허영만은 그 무렵 이미 인기작가였다. ‘잘 키운 제자 하나가 열 자식보다 낫다’고 해야 할까. 한창 서점용 만화가 잘 팔리고 있을 때였다. 박문윤은 완성한 서점용 만화책 한 권을 들고 허영만 사무실에 찾아갔다. 작품을 본 허영만이 한 마디 했다.
10년의 공백을 느낄 수 없다는 제자 겸 아우의 격려였다. 문학적 색채가 짙은 만화였다. 지금 원고를 볼 수 없지만 아마도 대중적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지 않았을까? 허영만과 거래를 하던 물고문고 사장은 원고료로 70만원이나 되는 큰돈을 박문윤에게 내놓았다. 물개문고는 1980년 허영만의 <각시탈>을 12권짜리 시리즈로 복간하기도 했다. 만원 짜리 70장이 든 두툼한 봉투. 하도 궁할 때 그런 돈을 손에 쥐자 신체에서 이상한 반응이 일어났다.
책은 역시 잘 안 나갔다. 1981년 허영만에게 전화가 왔다. 허영만은 계몽사가 학습만화를 준비하는데 자신이 계몽사 편집장을 잘 안다며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큰 일감이 들어왔다. 그는 2년에 걸쳐 <그림과학백과> 20권, <그림사회백과> 20권을 합쳐 40권을 그렸다.
1987년엔 비주류인 그가 만화잡지 편집장이 될 뻔했다. 그 해 5월 1일 창간하는 격주간 만화지인 주간만화의 편집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지인으로부터 받았다. ‘동료 만화가들을 모아서 작품만 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마음이 있었지만 ‘난 만화가다’라는 울림이 그것을 뒤집었다. 편집장은 거절하고 주간만화 창간호에 4페이지 극화 <만만디>를 발표했다. 주인공의 형은 돈이 많지만, 정작 주인공은 가난하다. 형은 돈을 주진 않으면서 대기업의 젊은 부인에게 접근해 돈을 얻으라고 한다. 동생은 형의 말대로 하다가 그 부인의 차에 치여 죽고, 보상금은 형이 챙긴다. 돼지 같이 생긴 형이 돈을 산더미처럼 들고 “아유~싸모님, 그깟 못난 제 동생 위자료를 뭐 이렇게 많이 주십니까? 현금으로 5000만원이나... 감사, 감사합니다요!”라고 하는 마지막 장면은 박문윤식 시니컬함의 절정이다. 없는 자는 있는 자에게 끝없이 이용당한다는 메시지다. 그런데 박문윤의 선은 부드러운 카툰 냄새가 난다. 심각한 내용을 여유롭게 담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작가는 ‘만만디’란 제목의 뜻을 설명한다.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데 한 번의 행동에 앞서 열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지.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에 실매어 쓰겠는가.’
1987년 7월 21일 발행된 매주만화 창간호에선 <빠담 빠>로 연재를 시작했다. 이 잡지의 표제작인 이현세의 <머나먼 제국>등을 비롯해 허영만의 <벽>, 이두호의 <객주>, 방학기의 <데카메론>, 주완수의 <보통 고릴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박문윤은 <빠담 빠>에서 정치권력을 가진 인간들이 마담에게 당하는 모습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대머리 권력자들은 그의 메시지가 정확하게 겨냥한 대상이다. 매주만화에서 기억해야 할 박문윤의 연재작은 <인류문명 퇴보사>다. 인류문명이 퇴보해 결국 원시시대로 돌아간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박문윤은 <인류문명 퇴보사>에 각별한 의미를 둔다.
“<인류문명 퇴보사>는 내 대표작으로 꼽고 싶어. 지금도 그렇게 되고 있지만... 인류문명은 퇴보해서 망할 거라는 것이 내 철학적 견해야.” 까칠하고 솔직한 그는 비관적이기까지 하다. 그의 진의는 무엇일까.
“비관적이라? 그것은 더 긍정하기 위한 전초전이지. 본질적인 긍정을 위해선 지독한 회외와 비판을 거쳐야 해.”
그의 방법론은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회의주의와 비슷해 보인다. 데카르트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선 회의의 과정으로 들어간다. 의심이나 비판을 하는 것이 곧 부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에 있어 현실을 유보하는 것은 더 높은 차원에 있는 세계의 존재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깔린 포석이다.
박문윤은 ‘주류’ ‘주류문화’라는 단어와 맞서 싸운다. ‘만화는 재미있어야 한다’와 ‘만화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작가관 중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작가는 창조자이면서 독자를 깨워야 할 의무가 있어. 작가는 ‘이걸 봐, 정신 차려!’하면서 독자에게 작품을 던지는 거지. 내가 실패자로 통하는 지는 몰라도, 난 지금도 창조하는 현역 작가야. 지금도 비판적이라고. 주류들이 하는 짓거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대중을 속이고 눈을 가리는 거지. 왜 그런 작품을 보고 우리가 돈과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 건가?
작가는 지금의 현상을 비판해야 해. 그래야 베토벤이 나오고, 창작이 나와. 나머지는 베토벤 비슷한 걸 만들어 돈이나 벌려고 하지. 창작의 정신이 뭔가? 여태까지 하던 것이 아닌 것을 하는 사람이 진짜 작가야!“
박문윤은 ‘현역 작가’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는 추상만화라는 장르를 완성하기 위해 오랜 세월을 보내고 있다. 1960년 김경언에게 전해들은 추상만화라는 개념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꽂혀있다. 붓으로 그린 흑백의 추상적 그림이다. 그의 추상만화를 본 사람들은 “어렵다”고 한 마디씩 한다. 그에게 “무엇을 그렸냐”고 묻는 것은 우문이다. 판단은 독자 혹은 관객의 몫이다.
그에 따르면 추상만화는 계속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개척한 새 장르는 ‘만시(漫詩)’다. 추상만화에 시를 곁들인 것이다. 박문윤은 만시집 발간을 준비한다. 그에겐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구입해온 전축과 오래된 LP판들이 더할 나위 없는 벗이다.
“70뿐 짜리 베토벤 LP판을 틀면 그 시간 동안 나는 베토벤과 노는 거지. 그 시간은 행복하지. 만화는 나같은 인간에겐 이상일 뿐인지, 현실을 해결하진 못해. 그래도 추상만화를 해. 또 다른 만화, 혁명을 꿈꾸니까.”
만화를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현실이 되지 못하고 이상으로만 남아있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그 모순을 온몸으로 껴안고 50여년의 세월을 헤쳐 가는 사람들도 있다. 박문윤처럼 ‘비주류’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과거 박문윤을 ‘이단자’라 불렀고, 지금은 ‘돈키호테’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박문윤은 자신을 ‘혁명가’라 부른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은 타인에 의해 규정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혁명의 길은 끝이 없으리라.
1960년대~70대는 획일화되고, 주류들이 주도하고, 다양성은 인정받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분위기를 형성한 시기다. 이제는 대한민국 땅에 공부 잘 하고, 네트워킹 잘 하고, 말 잘 듣는 사람만 필요한 건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 시대가 박문윤에게 ‘혁명’의 씨앗을 뿌려놓았다고 믿는다. 그 토양에서 싹튼 박문윤 같은 비주류적 시대정신이 인정받고, 재조명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