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7월 3일 남아프리카연방공화국 수도 더반. 아놀드 테일러를 이기고 WBA 밴텀급 챔피언 벨트를 차지한 홍수환은 경기 직후 중계석으로 달려와 어머니와의 전화 통화에서 외쳤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이 유명한 말의 ‘챔피언’ 자리에 ‘로또’를 넣어보자.
“엄마, 나 로또 먹었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홍수환은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백만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우승했다며 눈시울을 붉히는 청년들 중 누군가도 홍수환만 아니었다면 이 말을 그대로 했을지 모른다.
스포츠는 1960년대~70년대에 희망 없는 청소년에게 로또나 마찬가지였다. 그 시대 사람들은 ‘가지고 태어난 건 불알 두 쪽’이란 말을 참 많이 했다. 어느 동네를 가도 ‘주먹’이 꼭 외지인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여기서 주먹이란 조직폭력배가 아니라, 할 일이 없어 빈둥대거나 울분에 차 있는 동네 청년들이다. 두세 명 이상이 어울려 낯선 곳에 가면 꼭 시비가 붙었다. 싸움이 일반적인 세상이었다. 그렇다고 상대방을 고소하는 인간도 드물었다. 피해자가 억울함에 고소하려 치면, 주위에선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런 것 갖고 뭘 그러슈?”라는 반응을 보였다. 참, 묘한 정서였다.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을 보면 인간 세상이란 어찌 그리 똑같은지.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48년은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직후로 거리에 실업자가 넘쳐나는 시절이다. 주인공 안토니오는 자전거로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 사는 노동자로 자전거를 도둑맞는다. 훔친 청년을 추적해 그 동네로 가니,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청년을 두둔하는 동네 사람들 수십 명이 나타나 안토니오를 둘러싸고 “우리 동네에서 꺼져!”라고 외친다. 몇 명도 아니고! <자전거 도둑>을 보며 쓴 웃음을 지은 대목이었다. 결국 안토니오는 목전에서도 도둑을 잡지 못하고 도리어 남의 자전거를 훔치려다 체포된다. 무조건 우기고, 싸우고, 경찰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죽박죽인 세상. 복싱이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유는 딱 하나다. 맨 주먹만 있으면 세계 챔피언이 되어 출세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자본, 기술, 학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꿈이 어디 있겠는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헝그리 정신을 가진 파이터들이 튀어나와 대한민국은 알아주는 복싱 강국이 됐다. 과거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전통적 ‘금밭’이 복싱과 레슬링 등인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흐름은 2012년 런던올림픽에 와서 종식됐다고 할 수 있다. 런던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사격, 펜싱, 양궁 등의 종목으로 금맥을 이어갔다. 돈 들어가는 장비를 사용하는 스포츠 종목으로의 체질 변화다. 죽기 살기 식의 헝그리 스포츠가 아닌, 여가형 스포츠로의 진화를 보여준다. 금메달 외에 은메달과 동메달도 소중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예전과 달라진 양상이다.
당시 역도산, 김일로 대표되는 프로레슬링, 국가대표 축구경기, 고교야구 등도 큰 인기였지만 복싱이 더 대단했다. 프로레슬링은 일본 쪽에서 터를 닦은 김일의 활약에 힘입은 것이고, 1965년 장영철이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폭로하면서 진정성에 타격을 받았지만 복싱은 쇼가 아니었다. 축구와 야구 등은 단체 종목이어서 튀기가 쉽지 않다. 혼자 잘 해서 가장 빠르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스포츠는 복싱이었다. WBA, WBC 챔피언 벨트는 세계 최고란 지위를 시각화한 상징물이다. 후진국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분야는 거의 없던 시절이어서 챔피언의 열망은 더욱 뜨거웠다. 복싱 챔피언은 곧 국민 영웅이었다. 어느 동네든, 뒷공터에는 샌드백이 걸려 있었다. 제2, 제3의 김기수, 홍수환, 유제두가 되기 위해서였다. 남대문의 유명한 소매치기 출신 김성준이 1978년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이 된 일은 인생역전의 신화였다. 그러나 그가 오래 타이틀을 지키지 못하고 링 밖에서의 실패로 자신이 첫 상경한 남대문의 한 건물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 것은 시대의 비극이었다.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원진체육관, 동아체육관, 대원체육관, 와룡체육관 등 복싱 체육관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부흥했다. 복싱 신인왕전은 1971년부터 시작됐고, 1978년에는 MBC가 중계에 뛰어들었다. 준결승과 결승은 생중계로 안방에 전해졌다.
스포츠가 로또의 일환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는 1973년의 탁구붐이다. 그해 이에리사, 정현숙이 이끄는 한국 여자탁구가 유고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중공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남녀 통틀어 한국 최초의 구기 종목 세계 제패였다. 냉전 시대 공산주의 국가 수도에서, 6.25 때 북한을 도운 중공을 꺾고 우승했다는 점에서 국민들은 더욱 열광했다. 탁구는 기본적으로 단식이다. 이에리사가 순식간에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탁구도 복싱처럼 로또의 대상이 됐다. 탁구장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탁구가 누군가에겐 1980년대의 당구처럼 용돈을 버는 ‘소박한 도박’으로 여겨졌다. 스포츠가 국민의 울분을 푸는 역할을 한 부분도 크다. 홍수환의 4전5기 같은 기적의 승리와 함께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등의 아나운서 멘트가 터지면 모두들 전율에 몸을 떨었다.
전세계적으로 스포츠가 본격적인 상품으로 변모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들어서면서 골프 대회를 중심으로 스포츠 협찬에 의한 각종 스포츠 이벤트가 기획되기 시작했다. 1976년 6월 26일 일본 무도관에서 ‘세기의 대결’이 펼쳐졌다. 복싱 영웅 무하마드 알리와 악당 거인을 연상시키는 일본 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처럼, 경기 내내 알리는 주먹 날리는 시늉만 하고, 이노키는 링에 드러누워 로킥만 시도했다. 무적의 철권과 거구의 레슬러는 싸우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아무 결론 없이 무승부로 끝났지만 두 파이터는 큰 돈을 챙겼다. 알리와 이노키의 기상천외한 쇼는 우리나라에도 중계됐다. 다방은 순식간에 극장으로 변신했다. TV 관객에겐 입장료를 받았고, 쇼파를 극장처럼 여러 개의 열로 배치했다. 열을 내면서 모두 한 통속이 되어 경기를 지켜봤다. 원래 이런 경기는 같이 보는 게 더 재미있다. 이런 장소엔 상이군인들도 자주 나타났다.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상이군인들은 갈고리로 탁자를 내리찍으며 “물건 하나 사주슈”라고 압력을 넣었다. 앞서 훑고간 상이군인의 다른 물건을 보여주면, 상이군인은 강요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상이군인은 “그럼 술이나 한 잔 주슈”하고 술을 넘기고는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우리나라에서 스포츠의 상품화는 전두환 정권이 스포츠를 장려한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본격화된다.
만화가들이 스포츠란 소재를 그냥 둘리 없다. 1960년대~70년대 수많은 스포츠 만화가 발표됐다. 헝그리 정신을 통한 출세의 열망은 자연스럽게 스포츠만화에 녹아들었다.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최고 인기였던 복싱과 레슬링을 다룬 만화보다는 야구만화가 더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1960년대만 해도 그림의 종류는 박기당, 김종래 풍의 극화체와 만화체 정도로 단순했다. 복싱과 레슬링 만화는 근육질의 몸을 그려내야 한다. 박기정은 이미 1964년과 67년 각각 복싱 만화 <도전자>와 레슬링 만화 <레슬러>를 발표했다. 다른 만화가들도 이런 스포츠만화를 하고 싶어 했지만 데생력이 따라가질 못했다. 데생이 제대로 되려면 해부학에 대한 공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만화가들이 절감한 것도 훨씬 후의 일이다. 박기정의 그림은 독특하기 때문에 함부로 따라 그릴 수도 없었다. 복싱이나 레슬링 만화는 심의를 통과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격투기 만화는 심의에서 폭력 만화로 분류되기 쉬웠다. 선수의 얼굴에 땀이 흘러내리는 장면도 피로 보일 수 있다는 이유로 제재를 당할 수 있었다. 만화가 장태산은 당시 복싱, 야구 등을 비롯한 스포츠의 룰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었고 지적한다.
“대중의 수준이 그랬다. 만화가 야구팀도 마찬가지였다.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플라이볼이 났다고 치자. 주자는 공이 떠 있는 동안 무조건 달렸다. 작전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었다. ‘선수가 잘 하면 그만이지, 감독이 왜 칭찬받아야 하는가’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이상무, 허영만, <공포의 외인구단> 스토리를 쓴 김민기가 야구를 가장 잘 아는 만화가였다.”
야구만화도 그리기 쉽지 않은 종목이다. 그런데 왜 야구만화가 가장 활발하게 창작이 됐을까? ‘2012 SICAF(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축제)’에서 인기를 끈 야구만화 전시 ‘달려라, 야구만화로!’의 부대 이벤트로 열린 ‘3대 야구만화왕, 마구톡’(7월 21일)에 참가한 허영만, 이현세는 “무얼 그려도 심의에 다 걸렸다. 심의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야구만화를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반면 이상무는 심의와 상관없이 야구만화 <주근깨>로 일찌감치 데뷔했다. 고교야구가 열리면 동대문야구장의 스탠드에 죽치고 앉은 그는 야구를 진정으로 좋아해서 야구만화에 손을 댄 경우다. 자기가 좋아하고, 잘 아는 분야를 가지고 창작을 알 때 최고의 성과를 내는 건 당연하다. 이상무는 야구만화로 1970년대 만화계를 석권했다. 축구, 복싱만화 등도 창작했지만 이상무는 전체적으로 볼 때 야구만화가라고 한정짓는 편이 낫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스포츠만화가라 부를 수 있는 별종이 나타났다. 신촌에 터전을 잡은 박기당 라인으로 손의성, 하고명, 이근철과 함께 ‘백구두 사총사’로 불린 백산(본명 최일부)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차림으로 다니는 멋쟁이를 ‘마카오 신사’라고 부르던 시절, 그는 백구두를 신은 멋쟁이였다. 1959년 무렵 만화계에 나타난 그는 1960년대 중후반 스포츠만화로 전성기를 맞으며 만화계에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손의성과 함께 신촌의 술집을 전세내듯 하고 호방하게 술을 마신 ‘영웅담’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고 있다. 만화가들의 호주머니 사정이 잠시 넉넉했던 시절, 만화를 그린 그는 돈 잘 벌고, 잘 생기고, 남자다운 성격을 가진 호남이 될 수 있었다.
백산은 처음엔 어린이 동화책을 출판하던 지인의 부탁으로 삽화를 그린 인연으로 아동 만화가가 됐지만 약 3년 후부터 스포츠를 좋아하는 취향을 살린 만화를 잇달아 발표했다. 1962년 출간된 <빅토리 야구단>은 우리나라 야구만화의 효시와 같은 작품이다. 박기정의 야구만화 <황금의 팔>보다도 출간 시기가 약간 빠르다. 백산은 중학교 시절 선수 생활을 해서 야구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빅토리 야구단>은 야구를 통해 올바른 스포츠맨십을 발휘하려는 주인공이 온갖 유혹으로 그를 파멸시키려는 자들과 대결하는 작품이다. 작가의 호방함과 사내다움이 그림체에서 묻어나는 백산의 <빅토리 야구단>은 어린이들에게 야구의 묘미를 일깨워주며 제법 인기를 끌었다. <빅토리 야구단>에 이어 <빅토리 홈런왕> 등이 시리즈화 됐다.
백산은 지나가는 작품으로 스포츠만화를 그리던 다른 만화가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의 스포츠만화는 복싱, 축구, 농구, 프로레슬링, 가라데, 합기도, 태권도, 육상, 럭비 등으로 확대됐고, 심지어 1985년에는 <당구황제>라는 당구만화도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했다. 올림픽 선수촌이나 코치 등도 따로 조명한 스포츠물도 그려냈다.
‘스포츠 전문만화가’라는 타이틀은 1960년대엔 다른 작가들의 분명한 차별성을 프리미엄으로 제공했다. 스포츠만화란 결국 만만한 장르가 아니다. 위에서도 지적했듯, 데생력과 스포츠 룰에 대한 지식도 갖춰야 하고, 스포츠 룰에 맞춰 스토리를 짜야하기 때문이다. 다른 만화가들이 함부로 뛰어들지 못하는 분야였다. 현재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백산은 “다른 작가와의 차별화보다는 진정으로 스포츠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초지일관 스포츠만화를 파고든 이유를 설명한다. ‘어떤 종류의 스포츠만화가 가장 까다로웠나’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스포츠를 즐기다보면 작품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답한다. 작가의 실제 캐릭터와 만화의 궁합이 잘 맞은 걸로 볼 수 있다.
백산에겐 정의한이라는 붙박이 주인공과 사한이라는 붙박이 라이벌이 있었다. 박기정에게 훈이, 이상무에게 독고탁, 허영만에게 이강토, 이현세에게 오혜성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정의한은 이름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는 절대 불의와 타협하거나 굴하지 않았다. 정의한이란 캐릭터는 만화 독자들에게 분명한 매력을 주었다.
백산은 1960년대 여자농구만화 <영광의 별>, 럭비만화 <꼬마마인>, 격투기 만화 <일격> 등을 거쳐 1970년대에 접어든 후에도 스포츠만화를 줄기차게 발표했다. 1970년 7월 합동출판사 계열의 신진문화사에서 나온 스포츠만화 <태양을 향하여 달려라>(상, 하권)는 야구와 마라톤을 복합적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주인공 정의한은 아르바이트로 일본 헌병 간부의 인력거를 끈다. 그가 인력거꾼이 된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장비 구입할 재원마저 끊기고 해체 위기를 맞고 있는 한일중학교 야구부에 돈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정의한 뿐만 아니라 한일중학교 야구부 담당 선생도 사비를 턴다. 만화 속 사나이들의 행동은 호쾌하다. 한일중학교 야구부는 일본 에이또 중학교 야구부와 대결한다. 일본 선수들은 한국팀을 아주 우습게 여기고 몇 수 아래로 깔본다. 백산은 한국팀이 울분을 느끼는 장면을 통해 공감지수를 확실히 끌어올린다. 한국팀은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일본팀의 코를 납작하게 해준다. 야구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정의한은 마라톤 대회에서 일본 선수들과 겨룬다. 정의한이 누군가. 호의호식하며 자란 일본 선수들과 달리, 인력거를 끌며 체력과 스피드를 단련한 몸이 아닌가. 그는 모두의 예상을 뒤집는 레이스를 펼친다.
백산은 스포츠와 독립운동을 결합시키기도 했다. 1972년 출간된 <비운의 복서>에서 천부적인 복싱 자질과 불굴의 정신력을 지닌 복서 정의한은 독립군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독립군의 비밀회의 결과가 자꾸 누설된다. 의심 가는 곳은 독립군 아지트에 이웃하고 있는 일본인 권투구락부다. 정의한은 그 권투구락부에 입관하고자 하나, 일본인들은 까다로운 테스트를 조건으로 내세워 입관을 막는다. 정의한은 권투구락부 최고의 강타자들과 격전을 치르고 기절한 듯한 상태에서 받아들여진다. 그가 이 곳에서 알게 된 사실은 권투구락부와 독립군 아지트 밑에 비밀통로가 있으며, 일본 헌병이 독립군 비밀회의를 속속 엿듣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한은 일본 헌병이 독립군 아지트를 덮치기 직전, 동료들을 피신시킨다. 정의한과 독립군은 상해에서 자유롭게 복싱을 하며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며 조국을 떠난다.
백산의 스포츠만화도 역시 로또의 열망이 밑바닥에 깔려있다. 1970년에 나온 축구만화 <맨발의 제왕>에서 고아 출신의 정의한은 우연히 마주친 사한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천재적 축구 실력을 드러내 보인다. 자기를 여기서 끄집어내어 축구를 하게 해달라는 몸짓이다. 놀란 사한의 아버지는 정의한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축구선수로 키운다. 정의한은 사각고교에서 불세출의 센터포드로 자리 잡는다. 정의한은 코너킥 자리에서 바나나킥으로 득점을 할 정도다. 문제는 사한이 정의한과 라이벌 팀의 골키퍼라는 점이다. 사한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청소년 대표로 만들고 싶어 정의한에게 고의 패배를 부탁한다. 그러나 사한은 아버지의 구차함을 원망한다. 정의한이 은인의 부탁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실력대로 할 것인가.
백산은 스포츠를 소재로 한 성인만화에도 진출했다. 1973년 4월부터 6월까지 극진가라데의 창시자 최영의의 삶을 그린 만화 <괴력주유천하>를 ‘최일봉’이란 필명으로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다. 이 작업은 나름 의미가 크다. 일간스포츠는 대중지 사상 처음으로 1972년부터 고우영의 만화 <임꺽정>을 실었다. <괴력주유천하>는 고우영의 <임꺽정>과 <수호지> 틈바구니에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작품이다. 3개월이란 연재 기간은 극화를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는 기간은 아니다. 연재 도중 사고가 있었다. 이 작품은 신문윤리위원회로부터 두 남녀가 끌어안은 장면을 두고 ‘실재인물(최영의)를 소재로 한 만화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고 비공개 경고를 받았다. 지금 보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당시로선 경고를 받은 부분이 연재에 불리하게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스포츠 용어 사전’을 통달하다 시피 하며 디테일을 살리려 노력했다. 프로레슬러 김일의 전기를 만화로 옮겼을 때는, 김일에게 프로레슬링 기술을 직접 배우기도 했다. 초지일관 스포츠만화를 하다 보니, 만화 팬들로부터 실제 대단한 스포츠 실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오해’를 자주 받았다. 고아원 출신이나 재일교포 출신 야구선수들을 자주 그린 아상무가 만화 팬에게 고아원 혹은 재일교포 출신 아닌가라는 오해를 자주 받았듯. 백산은 “독자들은 태권도만화를 그리면 몇 단이냐, 당구만화를 그리면 몇 점 치냐는 등의 질문을 하면서 나를 만화 주인공과 동일시해 난처한 입장에 처하곤 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백산은 작품으로서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만화가 김형배는 “백산에겐 손의성의 <동경4번지> <사사사 死死死>, 박기정의 <도전자> <폭탄아>같이 ‘뭐다’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이현세는 “백산이 물론 내게 영향을 주긴 했지만 차라리 스포츠만화라면 호러만화 스타일의 스포츠만화를 한 조치원의 영향이 더 컸다”라고 설명한다. 만화수집가 오경수는 “백산의 만화 스토리는 평범하고 싱거웠다. 결말도 독자의 예상대로 전개되는 편이었다”고 분석한다. 그에겐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약 60권 분량을 쏟아낸 박기준의 <올림픽 소년>처럼 집중력을 가진 작품도 없었다. 두 번이나 아르헨티나와 미국으로 이민 가면서 만화를 꾸준히 발표하지 못한 것도 지금의 독자에게 기억되기 어려운 이유다. 백산은 꽤나 박력있고, 오리지널이라 할 수 있는 그림체를 갖고 있었다. 1960년대 다양한 스포츠만화로 한국 만화가 대부분을 매혹한 치바 데쓰야의 영향을 안 받았다곤 할 수 없지만. 치바 데쓰야의 스포츠만화를 카피하거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늘은, 정부의 만화 규제로 질적 하락이 불가피해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백산은 스포트라이트에서 점점 빗겨나게 됐다. 가장 문제는 지적된 대로, 스토리의 경쟁력이었다. 그는 박기정의 스포츠만화만큼 정교하고, 인물의 심리를 파고든 스토리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의 스토리는 대체로 단선적이었다. 백산이 입체적이고 심층적인 스토리를 썼다면, 지금의 판도나 평가는 크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백산이 진정한 스포츠만화가였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국민 수준이 낮던 1960년대에 온갖 스포츠만화를 창작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그의 스포츠만화 역시 ‘로또의 열망’이란 시대정신에 부응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백산은 “내가 스포츠만화에서 추구한 시대정신은 그 시대의 ‘정의’였다”고 전한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 나름의 정의와 불의가 존재한다. 백산은 스포츠만화를 빙자해 거대 담론으로서의 ‘정의’를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현재 미국의 개인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