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와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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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70년대 : (8) 밥은 굶어도 교육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건 교육이다. 가난한 집이건, 부잣집이건 교육, 즉 자식농사에 미래를 걸었다. 부모들은 연필심에 침을 묻혀가며 노트를 채워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고난을 감내했다. ‘밥은 굶어도 교육’이란 말이 나왔다.

2012-09-25 장상용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건 교육이다. 가난한 집이건, 부잣집이건 교육, 즉 자식농사에 미래를 걸었다. 부모들은 연필심에 침을 묻혀가며 노트를 채워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고난을 감내했다. ‘밥은 굶어도 교육’이란 말이 나왔다. 시골의 가난한 집은 소를 팔아 장남을 공부시키고, 나머지 가족은 공부하는 형제를 뒷바라지했다. 부잣집은 가정교육을 포함해 교육 전반에 더 열성을 기울였다. 정주영 고 현대그룹 회장의 자녀들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나 ‘아빠’ 대신 ‘회장님’이란 호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두려워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에게 에둘러 전달되도록 했다. 자녀들을 응석받이로 키울 수 없다는 정 회장의 자녀교육관은 단호했다. 교육이야말로 모든 계층이 공유했던 강력한 시대정신이었다.
 
대한민국의 교육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만화다. 1960년을 전후한 시기는 아동만화의 전성기였다. 어린이들이 한글을 깨우치고 대중과 문화적 동질감을 형성하도록 교육하는데 있어 만화는 일등공신이었다. 일제시대 방정환이 이끈 색동회를 비롯해, 1957년 마해송, 강소천 등이 발표한 어린이헌장 등은 어린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촉구했지만 실제로 어린이들의 살갗을 넘어 진피층까지 스며든 건 만화였다. 8.15 해방 직후부터 김용환, 김의환 형제, 정현웅, 김규택 등이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한글 보급, 탈식민지화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만화를 창작한 노력이 꽃핀 결과였다. 일제의 악랄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어른이건, 아이건 할 것 없이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글 교육은 더없이 중요했다.
 
6.25로 폐허가 된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교육은 죽지 않았다. 미군이 텐트 치고 야영하는 학교운동장 구석에서도 어린이들은 우리말 교과서로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6.25의 폐허를 딛고 경제력을 약간 회복한 1955년 무렵부터 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교과서의 질이 무척 좋아졌다. 새벗 같은 아동잡지도 존재했고, 아동문학가들이 펴내는 세계명작전집, 위인전집 등이 나오기 시작됐다.
  
1957년 동국문화사가 출간한 ‘세계명작선집’을 살펴 보자. <쟝발쟝>, <철가면>, <로빈슨 표류기>, <집없는 천사>, <삼총사>, <소공자>, <거지 왕자>, <톰 소야의 모험>, <십오소년 표류기>, <쉑스피어 명작집>, <보물섬>, <가리버 여행기>, <소공녀>, <암굴왕>, <서유기>, <괴적 루팡>(당시 표기대로 기록) 등이다. 그 때도 있어야 할 세계명작은 다 있었다. 세계명작은 세로 텍스트에 간간이 삽화가 들어갔고 하드커버 양장 형태로 권당 500환이란 비싼 가격에 팔렸다.
  
 
※ 이미지 소개 : 1957년 동국문화사가 출간한 ‘세계명작선집’에 속한 소설 <로빈슨 표류기> 표지
 
세계명작, 위인전은 서점에 진열돼 부잣집 어린이들의 선물용으로 팔려나갔다. 미국 문화가 밀려들어오면서 크리스마스 선물, 어린이 선물이란 개념이 퍼져나갔다. 농촌에선 어린이가 집안 노동력의 일부였고, 일손이 바쁘면 학교 안가는 걸 당연하게 여겼지만 도시는 달랐다.
 
선물이나 용돈이란 개념이 변화하는 시기였다. 그 전에는 있는 집이라 해도 어른들이 배금사상을 경계해 어린이에게 선물이나 용돈을 주는 걸 꺼렸다. 교육적 차원이었다. 용돈이라면 설날 세뱃돈이 거의 유일했다. 따라서 설날은 어린이에겐 대단한 축제의 날이었다. 설사 용돈이 있더라도 어린이가 하거나, 살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지만.
 
만화가 새로운 전기를 맞은 시점은 1956년 2월 만화세계의 창간이다. 그 전까진 아리랑 같은 대중잡지에서 김내성, 정비석 등 인기 소설가의 연재물과 함께 김용환의 <오성과 한음>, 김성환의 <고사리군>, 신동헌의 <너털주사> 등의 연재만화를 게재하고, 일단의 만화 단행본이 나오기도 했으나 만화세계의 창간은 만화의 대중성을 확인하는 기폭제가 됐다.
 
※ 이미지 소개 : 1957년 세계문화사가 펴낸 ‘정말 재미나는 걸작 만화문고’ 시리즈의 홍보 전단지. 김종래의 <눈물의 수평선>을 대표작으로 내세우고 있다.
 
만화세계는 제3호에서 10만부를 돌파했고, 이 잡지를 펴낸 세계문화사 김성옥 사장은 창간 1주년 기념호에서 100만부 판매기념 경품으로 비행기를 태워준 애독자 수기를 게재하며 위세를 과시했다. ‘창간 1주년 100만부 판매’는 다소 과장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낮춰 잡아도 당시로선 대단한 수치였다. 만화세계의 성공으로 만화학생, 칠천국, 만화왕, 만화학원 같은 만화 전문잡지가 문을 열었다. 대중적 지면이 생기면서 실력 있는 만화가들이 몰려들었다. 이미 만화가로 활동하던 김용환, 박광현, 김종래 외에 박기당, 신동우 등이 만화 전문잡지와 함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만화는 1957년 아동문학과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 ‘세계명작이나 위인전을 어린이 선물용 만화로 만들어보자’는 기획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메이저출판사라 할 수 있는 성문사와 세계문화사가 박광현, 박기당, 김종래, 신동우 등 인기 만화가들을 기용해 경쟁적으로 세계명작만화전집 출간에 뛰어들었다.
 
세계문화사가 1957년 12월 3일자로 펴낸 김박의 만화 <쌍권총 쾌남아>는 200페이지 분량의 하드커버 양장이다. 영화 <킹콩>을 연상시키는 이 만화는 미국 서부 테네시강 상류 지방의 밀림지대를 여행하던 기선이 물고릴라에게 습격을 받는 이야기다.
 
이 만화의 원작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기선을 덮친 물고릴라는 “이놈들!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다 잡아먹을 테다!”라는 대사를 한다. 괴물에게까지 인격을 부여한 작가의 각색이 재미를 준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주인공 괴물이 이런 대사를 하지는 않는다. 이 만화는 꽤 고급스러워 소장 가치가 충분했다. 표지를 포함해 1~16페이지까지 컬러, 17~200페이지까진 흑백으로 구성됐다. 가격은 300환으로 만화책 치곤 비싼 편이었다.
 
<쌍권총 쾌남아>는 세계문화사가 펴낸 ‘정말 재미나는 걸작 만화문고’ 시리즈의 일종이었다. ‘정말 재미나는 걸작 만화문고’는 세계명작과 유명한 이야기의 각색, 히트 만화의 모음이었다.
 
김종래의 <눈물의 수평선> <복수의 칼> <박문수 전> <이길저길> <꿈의 인생> 등이 이 문고의 주축이었고, 박광현의 <황야의 소년>, 서봉재의 <밀림의 왕자>를 비롯해 <쾌남아> <그림 삼국지> <소년 왕자> <밤송이> <암굴왕> 등으로 라인업을 구성했다.
 
성문사는 그 해 12월 30일 ‘호화판.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이란 문구를 앞세워 ‘성문사 걸작그림 이야기문고’를 발간했다. 추동식의 <쿼바듸스>, 김종래의 <충신비사>, 박광현의 <그림자 없는 복수> <임꺽정>, 박기당의 <괴걸 손오공> <예수님>, 신동우의 <삼총사>, 김정파의 <아 무정>, 이병주의 <수호전>, 김백송의 <사도세자>, 송방의 <무쇠탈> 등 명작만화 10여 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성문사는 대대적인 광고로 세간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하드커버 양장, 250페이지 분량인 이 전집의 권당 가격은 500환. 당시 책들 중 가장 비싼 편에 속했다. 성문사의 라인업을 보면 만화 전집은 세계명작, 위인전의 전 영역을 커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자 없는 복수>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아 무정>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각색작이다. <무쇠탈>은 헝가리 동란을 다룬 만화다. 성문사 시리즈는 완전한 만화라기 보다는 그림이야기 형식에 가까웠다.
 
추동식(고일영)의 <쿼바듸스>는 당시 수천 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고우영의 둘째 형인 고일영의 역작이다. 추동식은 이어 <짱구박사>로 두각을 나타내며 진짜 재미있고 기발한 만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만화는 어린 독자들에게 세계명작과 고전에 대한 갈증을 풀어준 중요한 교육 매체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 만화는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의 등장으로 고급화가 이루어졌다. 데즈카 오사무가 처음으로 하드커버본 만화를 펴낸 시점은 1948년 12월 20일이다. ‘Lost World 전생기’와 ‘Lost World 지구편과 우주편’ 두 권이다. 책 케이스본 형태로는 <메트로폴리스>가 1949년, <킹콩> <정글 대제> <화성 박사>가 1951년 발행됐다. 하드커버본 만화들이 활성화된 시기는 1950년대부터이며, 만화가 문학으로서 폭넓게 인식된 시기는 지쿠마쇼보(筑摩書房)가 ‘현대만화’ 시리즈를 발행한 1970년대라고 할 수 있다.
 
※ 이미지 소개 : 형 고일영의 사망으로 인해 동생 고우영이 이어그린 만화 <짱구박사>.
 
만화는 인기 면에서 아동문학을 압도했다. 같은 내용이라면 어린이들은 무엇을 집어 들까. 1957년 동국문화사가 출간한 ‘세계명작선집’은 빡빡한 세로 식자에 삽화가 몇 장 들어가 있다. 그 해 나온 만화 세계명작들은 훨씬 더 그림의 비중이 높다. 같은 값이라면 만화를 고를 수밖에 없다. 어린이는 이제 ‘시장을 움직이는 손’으로 떠올랐다.  
  
아동문학가들은 시장 경쟁에서 만화에 밀리자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1964년 4월 아동문학가 어효선이 주간을 맡고 어문각이 창간한 어린이 잡지 새소년은 창간의 변에서 ‘불량 만화가 범람한다’ ‘만화가 왜 나쁜가’ ‘만화를 보지 말자’라고 외치다가 1967년 어깨동무, 1969년 소년중앙 등 만화를 강화한 경쟁지가 창간되자 만화 부록을 만들어 대응했다. 이후 만화는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의 판매 부수를 좌지우지했다.
 
고급 만화책은 부잣집 이야기일 뿐 가난한 다수의 어린이들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난한 집 아이들도 만화를 보고 싶어했다. 만화책을 살 수는 없고 싸게 빌려보고자 하는 다수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1959~1960년 무렵부터 대본소가 등장한 것이다. 대본소는 더 다양한 종류의 만화가 빠르게 생산되는 시스템을 요구했다. <쿼바듸스> 같은 고급 만화책은 대본소 시스템엔 어울리지 않았고, 결국 시장에서 사라져갔다.
 
대본소에서 만화를 빌려보는 비용은 당시 물가수준에서 어느 정도였을까. 1960~70년대만 해도 가계부를 잘 쓰는 것이 주부의 최고 미덕 중 하나였다. 꽃무늬로 장식한 빨간색 ‘주부생활’ 가계부는 주부 사이에서 최고 인기품목이었다. 신용카드 거래가 활성화된 지금 보면 2.86 컴퓨터를 쓰는 일이나 구닥다리지만 가계부의 깨알 같은 글씨는 경제적으로 일어서고자 하는 주부들의 인내와 집념을 상징했다. 그 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단시간에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1970년도 주부생활 부록 가계부를 살펴보자. 중상류층 주부의 것으로 보이는 이 가계부의 적힌 일상 소비품 목록과 지출은 다음과 같다.
 
박카스 50원 / 갈비탕 200원 / 진로 포도주 120원 / 순두부백반 120원 / 오뎅백반 80원 / 자장면 50원. 
  

  
  
  
  
  
  
  
  
  
  
  
  
  
  
  
  
     
 
이 가계부에서 어린이와 관련한 항목은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주부의 1975년도 주부생활 부록 가계부다. 기록자는 아빠의 직장 월급이 5만원이고, 마늘값으로 5000원을 지출한 중산층 주부다. 지출 내역에 선풍기, 한약 구입까지 있는 걸 보면 1970년 무렵부터 본격적인 경제성장의 효과가 일반 가정에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장면 250원 / 라면 한 개 35원 / 담배 100원 / 목욕비 170원 / 이발비 500원 / 연탄 한 장 34원 / 과자 50원.
 
물가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5년 사이에 껑충 뛰었다. 1975년 가계부에선 자장면 가격이 두드러지게 상승했다. 어린이를 직접 거론한 항목은 없지만 ‘과자 50원’라고 적은 것이 자주 눈에 띈다. 어린이 용돈 항목을 그렇게 표시한 것인지, 과자를 직접 사서 준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1975년 당시 만화를 빌려보는 가격과 구매가는 어떤 수준이었을까. 그 해 발간된 <각시탈> 시리즈의 권당 구매가는 100원이다. 이 책을 대본소에서 빌려보는 가격은 5원이다. 어린이들이 만화책을 직접 구입하긴 어려워도 빌려보는데는 지장 없는 가격이다. 대본소로선 100원 이하로 책을 구입해 십여 번만 회전시키면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는다. 대본소가 급격히 늘어난 건 조금만 투자하고도 본전치기를 할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들어 아버지들의 일자리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용돈을 받게 됐고, ‘방앗간 앞을 지나는 참새’들을 노리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엔 구멍가게와 대본소가 들어섰다. 있는 집 자식은 돈을 가졌으므로 대장이 되고, 그를 중심으로 대여섯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은 흔한 광경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만화는 ‘환쟁이’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환쟁이’는 화가를 일컫는 비속어인데, 당시만 해도 그림쟁이라면 모두들 굶어죽기 딱 좋다고 인식했다. 그런데 만화 시장은 작가들에게 제법 괜찮은 수입을 보장했다. 김경언, 고일영, 백인수, 박현석, 박부성, 신동우, 송영방, 정태진, 박호석 등 최고 학벌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 미대 출신들이 만화계에 뛰어들어 만화를 발전시킨 점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아동만화 붐을 일으킨 선봉장은 신동우라 할 수 있다. 서울대 미대에 함께 다니던 송영방, 정태진, 박호석이 만화를 그리게 된 것은 신동우의 영향이었다. 학자의 풍모(동국대 예술대 학장 지냄)가 강하고 한국화의 대가로 우뚝 선 우현(牛玄) 송영방이지만 당시엔 ‘송방’이라는 필명으로 만화 <무쇠탈>(1957), <어사 유문열>(1959년) 등을 발표했다. 평생 단짝으로 아직도 신동우를 그리워하는 송영방에게 신동우 이야기와 아동만화의 성장사를 들을 수 있었다.
 
1936년생으로 고향이 경기도 화성인 송영방이 신동우를 만난 건 용산중학교 1학년 때였다. 하필 두 사람은 같은 반이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스타일이 달랐다. 신동우는 키가 작은데도 위풍당당했고, 자기 의견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스타일었다. 리더십이 뛰어날 뿐 아니라 공부도 잘 해서 반장을 맡았다. 반면 송영방은 수줍음이 많은 소년이었다.
 
 
 
 
 
 
 
 
 
 
※ 사진 소개 : 우현 송영방.
 
어느 날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훈시를 했다. 신동우는 조회가 끝나자 교실로 들어와 칠판에 교장선생님의 얼굴을 코믹하게 그렸다. 모두들 배꼽 잡고 웃었다.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리던 송영방은 ‘재주 좋은 놈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신동우의 재주에 부러움을 느꼈다. 신동우의 형제들은 천재의 피가 흘렀다. 신우동가 막내이고, 7형제 중 다섯째인 신동헌은 서울대 공대 출신의 수재로 우리나라에서 데즈카 오사무의 역할을 했던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형제 중 맏이는 의과대 학장을 지냈고, 신동우의 바로 윗형은 젊은 시절 5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다.
   
 
용산중 2학년 때 6.25가 터지면서, 두 사람은 헤어졌다. 송영방은 고향인 화성으로 피신했다가 1.4 후퇴 때 완행열차 꼭대기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부산으로 내려갔다. 송영방으로선 신동우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부산에서 <땃돌이의 모험>이란 만화책을 발견했는데, 작가 이름에 ‘신동우’라고 적혀 있었다. <땃돌이의 모험>은 1953년 신동우가 부산에서 창작한 데뷔작이었다.
 
“만화책을 보니 마치 그 친구(신동우)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어.”
 
두 사람은 부산 피난생활을 마치고 용산고에서 재회했다. 신동우는 그 때 이미 만화가가 되어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송영방은 걱정이 되어 슬쩍 물었다.
 
“너, 너무 일찍 나가는 것 아니야?”
 
신동우는 만화 그리기에 열중해 성적이 떨어졌지만 워낙 머리가 비상해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과에 합격했다. 송영방은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신동우는 서울대 미대 재학시 대학신문에 4칸 만화 <부엉이>를 연재하며 만화가의 커리어를 쌓아갔다. 신동우가 만화로 돈을 벌고 있을 때, 송영방은 학비를 내기도 버거운 궁핍한 형편이었다. 신동우는 “넌 데생이 좋으니 삽화를 그려보라”며 새벗, 소년 등의 잡지에 송영방을 삽화가로 소개했다. 송영방은 삽화가로 인정받아 자장면도 먹고, 스케치북도 살 수 있게 됐다. 그는 198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김성한의 대하소설 <임진왜란> 삽화를 맡으며 삽화가로서 전성기를 누린다. 송영방이 수 년간 만화를 한 것도 신동우가 다리를 놓아준 일이다.
 
송영방은 만화나 삽화가로 만족하진 않았다. 만화를 한 달 정도 그리면 지금 돈으로 500~600만원에 해당하는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언젠가 삽화를 떠나 내 본령인 순수회화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임진왜란> 연재 때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만큼 신동우와 송영방의 성향은 달랐다.
 
서울대 미대 재학 시절 신동우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발생했다. 1958년 서울대 미대 학장은 장면 총리의 친동생인 장발이었다. 장발 학장이 미대를 순시하다 만화를 그리고 있던 신동우를 발견했다. 장발 학장이 신동우를 꾸짖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응용미술과 학생이 만화 그리는 게 뭐가 잘못입니까? 서울대 미대에서 만화과를 신설하지는 못할 망정. 전 만화가로 나갈 겁니다.”
 
장발 학장과 신동우는 평행선이었다. 이 사건으로 신동우는 학교를 싫어하게 됐다. 신동우가 3학년으로 중퇴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송영방은 “너 졸업이라도 해야지”라고 달랬지만, 신동우는 “난 (만화 그리느라) 바빠”라고 슬쩍 넘어갔다. 신동우는 진짜로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학교를 떠난 신동우는 아동만화로 완전히 성공했다. 서울대를 중퇴한 즈음인 1958년 9월, 그는 <검호 날쌘돌이> 첫 권을 펴내 대히트시켰다. 모두 30권이 넘는 시리즈로 나온 <검호 날쌘돌이>는 만화계의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그 전까진 대부분의 만화가 두 권 정도로 끝났다. 만화계에서 장편 시리즈 만화의 출발점이 된 <검호 날쌘돌이>의 성공은 얼마 후 대본소 체제가 구축되는 기틀이 됐다. <검호 날쌘돌이>는 1960년대 초까지 <21세기 날쌘돌이> <혁명 날쌘돌이> <날쌘돌이 우주병> 등의 시리즈로 이어졌다.
 
신동우의 전성기는 1960년대까지 계속 됐다. 1963년 <빵점이>, 1965년 <심술 100단>같은 명랑만화로 사랑을 받았다. 1965년 2월 소년조선일보 창간호에 연재한 <풍운아 홍길동>은 어린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기 장편만화였다. 이 작품은 1967년 친형인 신동헌 감독에 의해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또 다른 화제를 낳았다.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 준수한 외모와 화려한 말솜씨까지 더해져 신동우는 TV의 단골 출연자가 됐다. 군부대를 돌며 위문공연을 하는 만화가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어린이와 군인 중 그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었다. 송영방은 신동우를 “천재 중의 천재”라고 부른다. 신동우에 관한한 그는 그 앞에서 항상 겸손하다.
 
송영방은 순수미술와 만화의 재목을 구분한다. “순수미술은 미련한 듯 하면서도 사람을 울렁이게 하는 것이고, 만화는 반짝반짝 해야 해. 신동우는 센스(유머)와 상상력이 있었어. 수필을 쓰는 문장가에게 번쩍 떠오르는 오묘한 글귀가 있듯이. 내겐 그런 센스는 부족했지.”
 
송영방은 만화가들에게 미술적 감각을 주문한다. “나는 만화가가 순수미술을 거쳐야 진짜 만화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나 역시 단원, 겸재의 붓놀림을 배워 내 것으로 만들었어. 만화 역시 선의 예술이야. 만화계에서 최고 작가는 김의환이야. 조선 사람을 조선 사람답게 그려낼 수 있는 최고의 작가였지. 일본에선 바바 노보루의 선이 구수하고, 미국에선 설 스타인버그의 선이 인간적이야. 신동우가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면 그의 만화가 더 풍성해질 수 있었겠지. 그가 중퇴한 게 못내 아쉬워.”
 
뼈있는 지적이다. 한국 만화가 앞으로 발전하려면 깊이 있는 선을 구사하는 작가들이 배출되어야 함을 뜻한다. 만화가들에게 더 공부하라는 채찍질이다. 송영방은 이름만 얻었다고 성공한 게 아니며 진짜 자기 스타일을 지닌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화는 1950년대 말부터 아동 교육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어린 시절 만화를 보며 한글을 뗐다거나 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는 명사들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다. 시선을 오늘날로 돌리면 묘한 순환 구조를 느끼게 된다. (아동)학습만화가 만화계에서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순수창작’의 성격을 두고 논란이 있을 순 있겠지만 많은 만화가가 이 분야에 매달려 있다. 학습만화가 아이들의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먼나라 이웃나라> <마법천자문> <메이폴 스토리> 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베스트셀러다.
 
아이들을 상대하고 있는 한, 만화가는 더욱 신경을 써서 질 좋은 만화를 그려내야 할 의무가 있다. 아이들의 미래와도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틀에 갇힌 정보 전달 형식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도 모색할 일이다. ‘2012부천만화대상’에서 송동근이 학습만화를 인문교양만화로 승화한 <피터 히스테리아>로 예상을 깨고 대상을 받은 것도 그러한 바람과 주문이라 여겨진다.
필진이미지

장상용

작가, 만화평론가
초이락컨텐츠컴퍼니 웹툰사업팀장, 前 부천국제만화축제 사무국장, 前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