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미, 신영옥, 홍혜경 같은 성악가 목소리는 아무나 넘볼 수 없는 재능이다. 조금만 기스를 내도 깨질 듯한 맑은 음정, 옥타브를 넘나드는 기교, 폭발하는 격정, 악보를 읽고 해석해내는 지적 능력, 오케스트라와의 호흡, 그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톱이 될 수 없다. 인간이 금관악기나 목관악기를 넘어서는 훌륭한 악기임을 입증하는 이들을 세간에선 국보로 여긴다.
동양인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의 디바가 된 홍혜경은 “밤새 노래를 부르고 나면 성대가 빨갛게 충혈된다.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들여다볼 수 없는 성대라는 작은 근육에 온 삶을 걸고 살았다”라며 성악가라는 직업을 정의한다.
‘성대라는 작은 근육에 온 삶을 걸고 사는’ 세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장기간 유지하기 위해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홍혜경이 2010년 무렵 한 매체와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열다섯에 혼자 뉴욕에 왔다. 정말 순진했다. 줄리아드 예배학교 전체 장학금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모든 게 흥분됐다. 하지만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곧 깨달았다. 1985년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따찌아나 역을 했다. 나를 눈여겨본 지휘자가 하자고 했다. 따찌아나는 내 목소리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런데도 몇 번을 설득해서 결국 넘어갔다. 하지만 실수였다. 그 후로는 절대로 무리를 안 한다. 젊을 때는 소리를 지르면 막 나온다. 그럴 때 시키는 대로, 하자는 대로 다 하면 안 된다. 음악의 세계에는 항상 나 이외에 또 다른 사람(대체할 성악가)이 있다. 한창 때의 성악가를 데려와서 반짝하게 시키고 또 다른 사람을 찾는 식이다. 나는 내가 보호해야 한다.“
이들은 공연을 앞두고 특히 예민하고 민감해진다. 목은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몸이 아파도 안된다. 일반인의 눈으론 ‘뭐 저렇게 호들갑을 떠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세계적 디바로선 자기자신을 지키는 방편이다. 타고나고, 갈고 닦아 완성한 재능과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 성악가들이 가진 목소리는 한 인간이 개체로서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도록 해주는 최고의 무기인 셈이다. 따라서 이들은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대로 ‘이기적 유전자’로 살 수밖에 없다.
그림의 재능은 또 어떤가. “나는 펜이고 펜이 곧 나다”라고 한 고우영의 말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물아일체의 경지, 그것을 추구해 살아가는 장인다운 명언이다. 과학 기술이 발달해 고우영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정부가 수백억 원을 쏟아 붓더라도 전혀 아까운 일이 아니다. 영국이 “셰익스피어와 인도 전체를 바꾸지 않겠다”고 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손목을 몇 번 쓱쓱 움직이면서 자기만의 선을 만들어가는 재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상상력을 시각화하는 결정체다.
만화가의 재능은 이기적 유전자다. 구한말, 일제시대부터 최고의 그림 실력을 가진 화가들은 만화를 그렸다. 관제 이도영, 청전 이상범, 노산 심수현, 춘곡 고희동, 월북화가 정현웅, 코주부 김용환, 김의환, 운보 김기창이 만화를 겸업했다는 사실은 만화라는 장르가 그들의 피를 당기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술 세계에서 이기적 유전자는 경쟁자나 후배들에게 자연스럽게 모방된다. 2007년 무렵 신동우의 형이자 클래식 음악의 초절정 고수인 신동헌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서로 연관된다. 모차르트의 <아흐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3악장 미뉴에트가 하이든의 <심포니 21번> 3악장과 스타트 자체가 똑같다. 선배의 것을 모방했다. 하이든도 마찬가지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레고리안 찬트에서 따온 것도 있다.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1악장 스타트 부분은 트란실바니아 민요다. 베토벤의 발명품이 아니다. 멋지게 전개시키는 것이 위대한 작곡가의 힘이다. 모방이 크게 흠이 될 건 없다. 선배보다 더 멋있게 만들면 그만이다. 나 역시 김용환의 스케치 스타일과 닮은 데가 있다.”
탁월한 그림의 재능을 가진 ‘이기적 유전자’들은 회화와 만화의 세계를 넘나들었다. 그 영향을 받아 만화의 치명적 매력에 빠진 이들이 1960년대~70년대 대거 등장했다. 더 탁월한 재능은 최고의 대우를 받고, 안타깝지만 잠재력을 극대화하지 못한 재능은 경쟁에서 졌다. 1960년대~70년대가 ‘암흑기’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대본소가 형성된 1960년부터 합동출판사가 독점체제를 구축하기 직전인 1965년까진 만화계의 대단한 중흥기였다.
그림 실력을 무기로 그 시대를 이끌었던 최고 만화가 중 하나는 두말 할 나위 없이 박기당이다. 1922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출생해 오사카 미술전문대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8.15 해방과 함께 귀국한 그는 미군 초상화와 극장 간판을 그리다가 1952년 무렵부터 코주부 김용환의 권유로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코주부 캐릭터를 닮은 김용환과 박기당의 사이는 각별했다. 둘 다 일본의 미대에서 정통 미술을 공부한 후 해방과 함께 귀국한 선후배 사이여서 공감대가 컸다. 김용환이 박기당의 집을 종종 방문했다. 6.25 당시 육군정훈국 소속 종군화가로 참전했다는 사실만 봐도, 박기당은 화가로서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박기당의 만화는 초창기에 조잡해보였지만 빠르게 발전했다. 1957년 발표한 <괴걸 손오공> <예수님>같은 작품들에서 사실적이면서도 역동적인 그림으로 어린이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1959년엔 역작이랄 수 있는 <만리종>이 탄생했다.
1960년이라면 국민 대부분이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살았던 때다. 그러나 만화가들은 대중문화의 점령자로 살았다. 대본소의 시대가 왔을 때 그는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며 만개했고, 업계를 평정했다. 박기당의 셋째딸 박강월씨가 2004년 쓴 라이프 스토리 <그래 그래 괜찮아>를 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박씨는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60년의 집안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버지의 만화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군소 만화출판업자들은 앞다투어 선물 상자를 들고 우리 집 대문을 닳도록 들락거렸다. 아버지의 만화를 한 편만 출판했다 하면 문을 닫던 출판사도 다시 살아나는 정도였으니 요즘 말로 하자면 “박기당을 잡아라!”가 업자들 사이에서는 사활의 관심사였다고 할까? 아무튼지 그 덕분에 셋집을 전전하던 우리 집의 형편은 날로 부요해져서 자하문 근처에 제법 큰 기와집도 사게 되었다. 집이 크니 자연 군식구들도 늘었다. 서울로 올라와도 몸담을 곳이 없던 친, 외가쪽 살붙이들과 아무런 연고도 없이 우리 집 주소만 달랑 구해 들고 오직 만화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상경한 청년들이 그들이었다. 아버지는 그들 중 키워봄직한 청년들로 골라 제자를 삼고 그들에게 학교 공부도 시켜주었다.
1960년 4.19의거 직후 박기당은 서울 자하문 집을 정리하고 부산 해운대로 낙향했다. 4.19 로 인한 정치적 회의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부산에서의 전원생활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그 시기에 최고의 작품들이 나왔다. <불가사리>, <파고다의 비밀>, <저승피리>, <유성인 가우수>, <엽전 열닷냥>, <가나다라 왕궁>, <눈물의 호궁> 등을 발표한 1961년은 그의 전성기였다.
서울에서 출판사 사장들이 그를 붙잡으러 부산에 내려왔다. 결국 광문당 사장의 집요한 러브콜과 선물공세에 못 이겨 박기당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서울 동교동으로 이사한 직후인 1962년, 박강월씨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박기당의 집은 그야말로 잔칫집이다. 음식과 웃음이 넘치는 분위기를 보라.
아버지의 만화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제자들은 더욱 늘어나 우리 집은 늘 대가족으로 차고 넘쳤다. 인기에 비례하여 아버지가 벌어들이는 돈도 엄청났다.
그 당시 신촌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낸다고 소문이 나서 ‘신촌 대통령’이라는 별명에 ‘만화계의 대부’라는 별명까지 달고 있던 아버지는 거기에다 몇몇 유명 만화가들과 함께 만화를 출판하는 출판사까지 차려 사장이라는 직함까지 보태어 달고 있었다. 만화계의 대부집답게 우리 집은 늘 만화가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은 늘상 음식 만드는 내음으로 코를 찌르고 밤이 깊어갈수록 모여드는 만화가들로 시끌벅적하였다. 아버지는 틈만 나면 낚시와 사냥을 즐기셨는데 그런 날이면 언제나 잔치판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샴페인 마개가 ‘펑펑’ 소리와 함께 하늘로 연달아 솟았을 지도 모른다. 박강월씨의 회고는 1960년대 전반기까지를 아우르고 있다. 박기당이 최초로 작가 중심의 출판사인 오성문고를 설립한 것이 1964년이니 말이다. 오성문고는 신촌역 바로 옆에 자리했고, 그 건너편이 박기당의 집이었다. 가장이 종종 현금다발이 가득 든 포대를 가져와 집에 쏟아놓으면 박기당의 가족들은 깜짝 놀라곤 했다. 신촌 일대의 대본소에서 수금해온 돈이었다.
그는 1960년대 중반에는 합동출판사와 손을 잡으며 만화계의 권력자로 떠올랐다. 많은 작가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그는 합동출판사의 편에 선 탓에 동료들의 원성을 샀다. 한국일보사가 만화출판에 뛰어들면서 합동출판사의 독점 체제가 무너지고, 그의 ‘옛날 이야기’가 점차 대중의 관심에서 밀려나면서 박기당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1972년 무렵 박강월씨가 회상한 글에는 암울한 긴장감이 가득 차 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아버지가 손수 설계하여 지으신, 방이 일곱에 넓은 잔디 정원 가운데 제법 규모가 큰 잉어 연못까지 갖춘 연희동의 근사한 이층 양옥이었는데, 지금 와서 그 때를 생각해 보노라면 어쩐 일인지 우리 집 하늘 위로만 늘 검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던 환상에 젖고는 한다. 그 당시 그토록 무거웠던 우리 집의 분위기가 그와 같은 이미지로 나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박기당은 그 무렵 만화 출판에 회의를 느끼면서 새로운 사업에 손댔다. 탈 같은 공예품을 만드는 공장을 차렸다가 망하고,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했다. 재산을 거의 잃었고, 두문불출했다. 1976년 제8대 한국만화가협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1979년으로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떴다. 타계 전 2년 동안 완전히 움직이지 못한 채 투병생활을 했다. 파리 들끓듯 집으로 몰려들던 만화가들이 그의 투병 이후 발길을 뚝 끊었다. 박기당으로선 야속하단 생각을 했을 법하다. 원래 화가의 꿈을 꾸었던 박기당은 그 길로 가지 못한 데 대한 콤플렉스로 술을 많이 마셨다. 그림에 소질을 가진 어린 박강월씨가 만화를 그리는 모습을 본 그는 “또 다시 만화를 그리면 손모가지를 잘라 놓겠다”고 불호령을 내렸다. 그 길로 박강월씨는 만화를 그리지 못하게 됐다. 박강월씨는 1960년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을 회상하며 “나 자신은 아버지의 직업에 상당한 수치감을 갖고 있었다. 학교에 갔다 하면 선생님들로부터 ‘불량 만화를 보지 마라. 만화는 모두 저질이니 동화를 읽어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작업이 무슨 범죄라도 저지르는 것쯤으로 여겼다”고 털어놓는다. 그러한 사회적 인식이 박기당에게 심적인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불량만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만화가 얼마나 호황기를 맞았는가를 입증한다. ‘만화가 돈이 된다’는 인식 때문에 너도 나도 몰려들어 질이 떨어지는 만화가 양산된 탓이다. 박기당은 말년에 종교에 귀의해 예수의 그림을 회화로 그리곤 했다. 만화가 생계는 되지만 꿈을 가로막고 있다는 딜레마를 스스로 극복했더라면 그의 비극은 좀 더 줄어들었을 지도 모른다. 박기당과 같은 시대를 풍미한 또 한 명의 만화가는 박현석이다. 그를 통해 ‘이기적 유전자’의 또 다른 면모를 읽어낼 수 있다.
1932년 만주 용정에서 출생한 그는 신동우의 선배이면서 신동우의 <검호 날쌘돌이>에 영향을 준 <바람돌이>를 1957년 발표해 인기를 모았던 만화가다. 그의 아버지는 유한양행 만주지부 총책임자였다. 일제 강점기에 조혈강장제 네오톤, 감기약인 코프시럽, 위장병약인 이드렌 등 값비싼 약들이 그의 집에 쌓여있었다.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인들도 명문 제약사의 간부인 그의 아버지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는 일본인 학교에 다니면서 일본 만화를 엄청나게 탐독했다. 그 경험이 그를 만화가의 길로 인도했다. 1945년 8.15 직전 미국의 B-17이 중국 텐진항을 폭격했다. 텐진에 머물고 있던 박현석의 가족들은 용정으로 피신했으나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군대의 내전 때문에 길이 막혀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해방 이후부터 6.25 때까지 그들의 가족은 원산에 머물렀다.
* 분당에 자리한 딸의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박현석 작가
그림에 재능을 갖고 있던 박현석은 원산에서 화가 이중섭을 만나 사제지간이 됐다. 6.25 직전 원산에서 인민군 징용이 시작됐다. 원산 삼중학교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하던 그는 인민군 입대를 종용하는 징집관에게 “평양 미술학교 가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감언이설을 펼치던 징집관은 “너 어디로 가든, 자유야”라고 한 걸음 물러섰다. 징집관이 사라진 다음, 담임 선생이 “이 자식이 학교 시켜도 분수가 있지. 무조건 가겠다고 하라우”라고 다그쳤다. 호기롭게 그 자리에서 입대를 약속한 그의 친구 하나는 그 후 “죽는 길이야”라며 후회했다. 그 학교 미술선생은 기뻐하면서 박현석을 이중섭 화실로 데려갔다. 이중섭은 당시 일본 여자 마사코(한국 이름 이남덕)과 결혼해 원산 사범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 곳은 이중섭이 운영하던 미술학원이었다. 몇 번 다니면서 목탄화를 그린 직후 원산에도 UN군의 폭격이 시작됐다. 박현석은 미술 데생용 석고상을 기억해내곤 그 곳으로 뛰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그냥 두면 폭격에 다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는 미친 듯 그 많은 석고상을 건물 지하실로 옮겨놓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잘못된 행동이었다. 석고상은 습기가 차면 금방 망가진다는 걸 모른 탓이다.
박현석 가족 일곱 명은 함경남도 원산부터 부산까지 걸어서 피난길을 떠났다. 그 먼 거리를 죽음과 추위, 허기와 싸우며 걸어갔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경상북도 평해에서 사단이 났다. 막내 여동생이 어머니에게 업혀오다가 사경을 헤맸다. 병원에 가보니 폐렴 판정이 나왔다. 그의 가족은 손씨의 집에서 3~4개월 동안 머슴살이를 하며 지냈다. 담요, 금반지 등은 팔아먹은 지가 오래였다. 박현석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화투를 그려 제작했다. 그 곳 사람들에게 화투는 최고의 인기 품목이었다. 널빤지에 종이를 계속 붙여 두껍게 한 다음, 먹물로 검은 화투를 만들었다. 피난길에도 휴대한 사쿠라 물감이 한 몫을 했다. 박현석표 화투는 컬러여서 인기가 좋았다. 평해에서 천재라는 소문이 났다. 처음에는 한목(48장)을 그리는데 하루가 꼬박 걸리다가, 손에 익은 후부턴 안보고도 척척 그려냈다. 하룻밤만 놀면 손에서 난 땀에 그림이 벗겨져 화투는 계속 팔렸다. 박현석은 배짱이 생겨 기존 화투의 뼈대를 가져오는 사람에게만 팔았다. 돈을 꽤 벌어 여동생의 병원비를 지급했다. 얹혀 살고 있는 집 주인 아줌마는 박현석에게 사위 삼겠다고 나섰다. 그는 “저희는 피난민입니다. 저희를 믿지 마세요”라며 거절했다.
부산 피난생활에서 박현석은 운명적인 인연을 만났다. 부산은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로 북적였다. 특히 길에는 양 담배나 온갖 물건을 파는 아이들이 많았다. 신동우는 길거리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즉석에서 만화를 그리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본에서 자전거 뒷좌석에 그림틀을 올려놓고 만화 <황금박쥐>같은 작품들의 컬러 그림을 한 장씩 넘기면서 성우 흉내를 내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가미시바이’(종이 연극)를 연상케 한다. 신동우는 학생 때부터 천재적인 속필과 입담의 소유자여서 즉석에서 아이들에게 만화를 팔아치웠다. 사내당이란 만화 출판사를 운영하는 이영근이 그에게 ‘딱지만화’를 그리게 했다. 딱지만화는 손바닥만큼 크기의 16페이지 간이만화로 인쇄가 조악했지만 부산에서 읽을거리를 찾는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박현석은 피난기에 부산에서 용산고에 다니면서 신동우의 존재를알게 됐다. 신동우의 만화는 부산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신동우는 학교 선배인 박현석을 보자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그는 신동우에게 대뜸 말했다.
“너 만화 그린다면서? 나도 그리자우.”
신동우는 이영근에게 보내는 소개장에 ‘이 분(박현석)은 우리 학교의 미술부장이시며...’라고 썼다. 박현석은 미술부장이 아니었지만. 그 길로 ‘스카우트’ 돼 만주 흥안령을 배경으로 한 딱지만화 <흥안령의 비밀>을 납품했다.
만화 제작에 재미를 붙인 박현석은 56학번으로 서울대 미대에 합격했다. 서울대 입시에선 이중섭이 직접 입시장 창문에 서서 응원을 해주었다. 대학 입학이 한 해 늦어 신동우와 같은 반, 같은 책상을 쓰게 됐다. 두 사람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 공책 한 권에 릴레이 만화를 그리며 킬킬 댔다. 예를 들어 한 명이 바위 떨어져 주인공이 놀라는 장면을 그려놓으면, 다른 한 명이 그 다음 장면을 즉석에서 이어받아 그렸다.
박현석도 빨리 그리는 스타일이지만 신동우는 더 대단했다. 대학 1학년 여름 방학 때 즈음의 일이다. 박현석과 신동우 일행은 대천해수욕장에 가기 위해 서울역에 모였다. 일행 중 아무에게도 시계가 없었다. 신동우는 즉석에서 16페이지 만화를 그려 남대문 근처 북창동에 자리한 이영근의 출판사로 달려갔다. 일행은 신동우가 수금해온 돈으로 시계를 사고 열차 시간에 맞춰 떠났다.
서울대 미대의 장발 학장은 만화를 그리는 신동우와 박현석을 괴롭혔다. 신동우는 본명을 고수했지만 박현석은 만화를 그리기 위해 필명을 썼다. ‘박현석’이 필명이다. 박현석은 1960년대 후반 출판사 권유로 ‘박형’으로 필명을 바꾸고, 지금은 ‘하림’이란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현석은 1957년 <바람돌이>를 발표하면서 만화계에서 주목받는 작가가 됐다. 하얀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하늘을 붕붕 날면서 악당들을 혼내주는 정의의 소년이 바람돌이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 <아기도깨비>, <발발이 사장님>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발발이 사장님>은 어린 나이에 사장이 된 소년이 회사를 경영한다는 설정으로 100편이 넘게 출간됐다.
사실 박현석은 서울대 미대 시절 약학대로 전과하려 했다. 1951년 아버지의 동업자인 유한양행 유명한 사장(창립자 유일한 박사의 동생)이 다대포여객선 침몰 사건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의 아버지는 유유산업이라는 제약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박현석의 집안은 유한양행과 경쟁할 수 있는 약들을 개발했고, 그는 가업을 이어받아야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 그가 만화를 그려 벌어들이는 수익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돈이 쏟아져 들어온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했다. 당시 집에 전화기가 세 대나 있었다. 집안에서도 그가 만화를 그리는 걸 반대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1966년 무렵 ‘독점 기업’인 합동출판사가 등장해 만화계를 장악했다. 합동출판사는 소수 작가들만 받아들이고, 재구매가 빨리 이루어지도록 만화책을 엉망으로 만들어냈다. 박현석 역시 합동출판사에서 밀려났지만 그 곳에 붙으려하지 않았다. 작품을 발표할 곳이 없었다. 박현석은 뜻을 같이 하는 작가들과 대지문고를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합동출판사에게 점점 더 미운털이 박혔다. 정치깡패 유지광이 깊이 관여한 대지영화사가 만화 쪽까지 관여했다. 그러나 대지문고의 유명 작가 규합 작전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다수가 합동출판사의 횡포에는 뜻을 같이 하면서도 막상 수입을 보장할 수 없는 대지문고에는 합류하지 않았다. 작가 섭외가 늦어지자, 대지문고 사장이 부도를 냈다. 그 직전 합동출판사 쪽과 대지문고 사장의 딜이 있었다. 대지문고는 합동출판사에 넘어갔다. 그 다음날 ‘점령군’이 대지문고의 캐비넷에서 출간을 기다리고 있던 원고들을 싹 쓸어가 버렸다. ‘반란군’은 진압됐다.
후암동의 큰 단독주택을 두 채에서 살던 박현석은 그 사건으로 망했다. 그 집들은 사채여왕 장영자에게 팔렸다. 장영자의 하수인이 슬픔을 가득 찬 박현석을 무교동의 방석집으로 데려갔다. 장영자 측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전부터 일본에서 선풍기를 들여올 정도로 일본의 메이저회사들과 거래를 트고 있었다. 장영자의 하수인은 “한 마디 하겠습니다. 일본에 가서 만화영화(애니메이션)을 배워 오십시오. 그러면 한국에서 일인자가 될 것입니다. 저희가 일본 라인을 통해 연결하겠다”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제안이다. 박현석은 “전 합동과 싸우겠습니다”라며 거절했다. 일본어를 일본인처럼 구사하던 박현석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국내 애니메이션계의 지형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에게서 우직스러울 정도의 고집이 엿보인다.
기회를 놓친 그에게 기다리는 건 시련뿐이었다. 눈이 빗발치는 12월 어느 날, 그의 가족은 리어카에 가재도구를 싣고 이사를 떠났다. 그 후 한 달 동안 길거리를 전전했다. 1970년대 그의 수입은 보잘 것 없었다. 1960년대 제작한 원고들을 팔아서 생활비로 썼다. 가장 아끼던 10권 분량의 원고도 그의 손을 떠났다.
그의 가족은 1978년 이란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러나 다음해 2월 호메이니가 이란 혁명을 일으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는 바람에 박현석의 가족은 다시 한국으로 보따리를 싸야 했다. 정의감이 강해 동료들의 신망을 받은 그는 1980년부터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맡아 활동을 재개했다. 가난한 회장이 협회를 끌어가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박현석은 각종 CF를 따서 협회비를 충당했다. 당시 럭키금성 축구단의 황소 캐릭터는 박현석의 작품이다.
1984년 미국 뉴욕으로 떠났고, 지금은 워싱턴 DC 부근 윌리엄스버그에 정착했다. 윌리엄스버그는 미국 초기 정착민들이 삶의 터전을 닦았던 곳이다. ‘하림’이란 필명으로 글과 삽화를 곁들인 세계문화유적지 여행기 등을 미국 현지 신문에 연재한 그는 현재 자서전을 준비 중이다.
박현석은 그림에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변화에 취약점을 보였다. 서울대 시절 약학대로 옮기지도 못했고, 일본으로 애니메이션 유학할 기회를 놓쳤고, 1970년대 성인만화로 옮겨가는데 실패했다. 그가 자신의 호를 뒷북이란 의미로 ‘후고(後鼓)‘라 지은 까닭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기적 유전자를 완성하는 조건은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다.
만화가들의 이기적 유전자가 여러 가지 형태로 빛나고, 시련을 당한 시대가 1960년대다. 따라서 만화 자체가 그 당시의 시대정신이라고 보는 게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