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말 인물 감식가로 명성을 떨친 여남 사람 허소. 출세하고픈 욕망이 가득한 젊은 조조가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그에게 물었다. 허소는 “치세의 능신(治世之能臣), 난세의 간웅(亂世之奸雄)이오”라고 짧게 답했다. 그 말에 “하하하”라는 조조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훗날 군사를 일으킨 조조는 금간 둑처럼 급속히 붕괴한 한나라 제국의 중심부를 차지하며 영웅으로 떠올랐다. 후대 기술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난세의 간웅’이라는 일방적 시각에서 조조를 그려냈지만.
시대는 영웅을 낳는다. 이문열의 <영웅시대>라는 소설도 있듯, 시대와 영웅은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 영웅은 주로 전사(戰士)의 이미지를 갖는다. 영웅은 물리적 힘과 지혜, 고귀한 희생정신을 발휘해 암흑과 혼란, 곳곳에서 횡횡하는 악의 세력을 종식시킨다. 민중은 영웅의 출현을 고대하며 추앙한다.
영웅에 대한 개념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9세기 영국 최고의 지성으로 추앙받는 토마스 칼라일은 저서 <영웅숭배론>에서 인격적 성실성과 도덕적 통찰력이라는 정신적 자질을 갖춘 ‘위인’을 영웅으로 본다. 따라서 칼라일이 선정한 영웅은 나폴레옹이나 크롬웰 같은 군사적 영웅은 물론,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 오딘, 예수와 마호메트, 종교개혁자 루터와 녹스, 문인 단테와 셰익스피어 등을 아우른다.
여기선 ‘난세’를 평정하는 전통적 영웅상에 국한시키자. 그러면 영웅은 진정한 마초라고 정의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마초가 떳떳하게 살 수 없는 시대가 됐지만 예나 지금이나 대중은 영웅을 그리워한다. 신화와 역사, 문화와 예술은 끊임없이 영웅을 그렸고, 영웅의 이야기를 후대로 전했다.
6.25 동란은 전쟁영웅들을 배출했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맥아더 사령관 같은 거물 영웅도 등장했지만 한조각의 땅을 지키기 위해 초개와 같이 몸을 산화한 이름 없는 영웅들이 훨씬 더 많았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아무리 천박한 인간일지라도 좀 더 고귀한 무엇을 갖고 있습니다. 총알받이로 고용되어 상소리나 지껄이는 가련한 병사들도 훈련 규정과 하루 1실링의 급여 외에 그 나름의 ’군인의 명예‘라는 것을 갖고 있는 법입니다. 아무리 가련한 인간일지라도 그가 막연히나마 그리워하는 것은 달콤한 사탕 맛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상하고 진실한 일을 하고, 신의 하늘 아래서 그 자신이 신이 만드신 인간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일입니다. 그에게 그것을 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아무리 둔해빠진 날품팔이일지라도 빛을 발하며 영웅이 될 것입니다.’
전쟁영웅들은 1960년대 접어들며 가장 인기 있는 오락물의 주인공이 됐다. 스크린은 ‘6.25이후 10년’의 새로운 전장이었다. 김기덕 감독의 <5인의 해병>(61년. 출연 최무룡, 황해, 후라이보이), 김묵 감독의 <전쟁과 사랑>(62년. 출연 김승호, 황해), <싸우는 사자들>(62년. 김석훈, 엄앵란),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63년. 장동휘, 구봉서),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64년. 신영균, 최무룡, 최은희), 조긍하 감독의 <인천상륙작전>(65년. 김혜정, 장동휘), 최무룡 감독의 <피어린 9월산>(65년. 신영균, 김지미), 이만희 감독의 <돌아온 여군>(장동휘, 문정숙), 정진우 감독의 <8240KLO>(66년. 박암, 남궁원), 김기덕 감독의 <검은 무늬의 마후라>(66년. 김지미, 신성일), 임권택 감독의 <전쟁과 여교사>(66년. 김진규, 엄앵란), 고영남 감독의 <소령 강재구>(66년. 신성일, 고은아), 김동학 감독의 <509전차대>(67년. 신영균, 양훈), 남태권 감독의 <사나이 UDT>(68년. 박노식), 신상옥 감독의 <육군 김일병>(69년. 신영균, 윤정희), 이성구 감독의 <지하실의 7인>(69년. 허장강, 이순재) 등등 수많은 전쟁영화가 등장했다.
1950년대의 영화들이 전쟁과 휴머니즘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60년대에 들어선 본격적인 전쟁영화다운 면모를 강조했다. 관객들은 전쟁 영웅들이 인민군을 쳐부수는 모습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일제시대 만주대륙을 무대로 한 독립영웅(독립투사 및 애국자)도 전쟁영웅에 못지않게 스크린에서 사랑받았다. 정창화 감독의 <대지의 지배자>(63년. 김석훈, 엄앵란), <대평원>(63년. 김석훈, 이경희), 김묵 감독의 <대륙의 밀사>(64년. 신성일, 엄앵란), <광야의 호랑이>(김혜정, 신영균), 이용호 감독의 <불붙는 대륙>(장동휘, 황해), 신상옥 감독의 <무숙자>(68년. 신영균, 최은희) 등이 제작됐다. 제목만 들어도 호방함이 느끼지는 작품의 주인공들은 일본군, 비적 등을 상대로 활극을 벌였다.
반공과 반일감정은 대중에게 가장 먹히는 소재였다. 작품의 성격이 분명하면서도 영웅상을 제시했다. 게다가 영웅은 악당을 혼내주면서 화끈한 액션까지 선사했다. 전쟁물이든, 대륙물이든 일종의 액션영화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만화 역시 반공과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소재를 외면할 순 없었다. 만화의 주독자층인 어린이들도 본질적으로 피가 끓는 남자이긴 마찬가지였다. 만화는 그 시대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 구현할 수 없는 전쟁 이야기까지 표현할 수 있었다.
당시 만화가라면 누구나 전쟁영웅과 독립영웅을 그렸다. 우선 전쟁 명랑물로 두각을 나타낸 만화가는 왕현이었다. 지금도 인터넷에선 1960년부터 선보인 그의 <얼룩유격대> 시리즈, <얼룩외인부대> 시리즈, <얼룩공수부대> 시리즈 등을 회고하는 글들이 적지 않다. 왕현의 ‘대장편 전쟁 모험 만화’인 <얼룩유격대> 3권 ‘결사의 정찰’편에선 국내 영화로는 볼 수 없는 스케일의 무기가 등장한다. 북한군이 맹호대장인 털보, 그의 부하인 뚱보와 똘만이가 지키는 비행장을 거대한 장거리포로 포격한다. 일명 ‘열차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개발한 이동식 열차포인 ‘레오폴드’는 구경 283mm, 포신 길이 21.6m, 중량 218t에 달하는 대형 화포였다. 유효사거리가 130km나 됐으니 얼마나 어마어마한 지 알 수 있다. 열차포는 장거리를 포격하면서 적에게 위치가 노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얼룩유격대> 속에서 ‘장거리포’라 불리는 이 포는 굴속에 있다가 발사할 때만 밖으로 나온다. 뚱보와 똘만이의 부대는 레일 위를 굴러다니는 장거리포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애를 먹는다. 장거리포의 위력은 또 얼마나 대단한가. 장거리포의 포탄이 떨어지자 모두들 엉덩이만 남기고 흙속에 묻힌다. 털보는 장거리포를 해치우지 못하고는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뚱보와 똘만이를 정찰대로 보낸다. 두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위치를 알아내고, 장거리포는 파괴된다. 대단히 스케일이 큰 작품소재이지만 주인공들은 3등신의 만화체 캐릭터로 시종일관 코믹 연기를 한다. 이 작품은 컷 연출이나 캐릭터 면에서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를 무척 닮았다.
<얼룩유격대>의 장거리포는 독일군의 레오폴드 사진을 참조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얼룩유격대>에선 레오폴드를 조작하는 독일군이 북한군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실제로 6.25에서 이런 괴물 같은 무기가 사용되지도 않았다. 아무리 긴박감 넘치는 국내 전쟁영화도 기껏해야 참호 속에 설치된 북한군의 기관총과 싸울 뿐이었다. <얼룩유격대>의 진짜 영웅은 장거리포를 파괴한 폭격기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해낸 무명의 두 군인이었다.
1961년 5.16이 발생하면서 군인들이 만화에 검열을 가했다. 초창기의 박정희 정권은 만화에서 폭력성 있는 연출을 제한했지만 전쟁영웅과 독립영웅 만화에 대해선 비교적 관대했다. 이런 작품들은 사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대중의 울분을 풀어주는 데도 어느 정도 기여했기 때문이다. 만화가들은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몰렸다.
5.16 무렵 독립영웅 만화로 큰 인기를 큰 작품이 임수의 <챠이나 박>이다. 1961년 빅타씨리즈에서 출간된 이 만화는 1930년대 중국 여순을 무대로 일본 헌병을 혼내주는 권총의 명수 챠이나 박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챠이나 박은 ‘박 동지’라고도 불리는데 형이 일본 헌병이다. 이야기가 형제의 비극적 대결로 흐를 것임은 끝까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임수는 <챠이나 박>의 시리즈로 <박 동지>를 펴냈다.
이 만화의 매력포인트는 ‘챠이나 박’이란 캐릭터다. 머리를 감싸는 중국 모자에 중국옷을 입고 고글을 쓴 이 캐릭터는 요즘말로 ‘쩌는’ 매력을 갖고 있다. 바에서 술을 먹다가 등 뒤로 일본 헌병이 나타나면 돌아보지도 않고 옆구리에서 권총을 발사하는 카리스마 덩어리였다. 표지만 보면 멋진 실사체 그림일 것 같은데 안쪽의 만화는 독특한 만화체였다. 챠이나 박은 1970년대 이우정의 모돌이 탐정 캐릭터에, <챠이나 박>에 등장하는 일본 헌병의 얼굴은 박재동이 시사만평의 캐릭터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57년 <거짓말 박사>로 데뷔한 임수는 자신의 그림과 캐릭터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항상 영화 스크린을 옮겨놓은 듯 시작됐다. <챠이나 박> 도입부에선 배가 파도를 가르며 다가오는 장면을 롱샷 기법으로 칸을 나누어 몇 페이지에 걸쳐 연출했다. <챠이나 박> 표지 안쪽 하단에는 ‘禁. 無斷 複寫 模寫 描寫’라는 글귀가 굵은 글씨로 박혀있다. 1961년에 이처럼 저작권을 강하게 주장한 만화가는 아주 드물다. 그의 그림체가 그만큼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임수는 작품마다 그림체를 바꾸어 그릴 수 있을 만큼 그림에 탁출한 재능을 가진 작가였다.
이 시기에 독립군만화 전문작가인 향로가 등장했다. 향로는 <무궁화> <고향초> <애국자> <봉화> 등 오로지 독립군 만화만을 그렸다. 모든 작품의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대표작은 1962년 4월 대한만화문고가 출간한 <무궁화>다. 향로 만화의 주인공 이름은 무조건 경배다. 챠이나 박처럼 캐릭터의 개성을 갖춘 경배는 둥근 영국군 전투모를 닮은 모자에 망토를 펄럭이며 활약했다. 경배가 수감된 동지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영화제작자 신철의 부친인 신현성은 비행기를 가장 잘 그리는 만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1962년 7월 제일문고가 출간한 신현성의 <요격편대>는 전투기들이 공중전을 벌이는 다이내믹한 연출을 시도했다. 지금 보아도 1960년대 초반에 어쩌면 이렇게 실감나는 묘사를 해낼 수 있을까라는 감탄이 나오는 그림이다. 같은 시기의 <철인부대>는 탱크만화다. 건축학을 전공한 그는 미군 부대 근처에서 자유의 벗 같은 잡지를 구해 참조하며 비행기나 탱크를 습작했다.
이 시기의 전쟁만화를 다루면서 이근철, 권웅을 다루지 않는다면 모순이다. 1963년 서부만화 ‘캉킬캉’으로 데뷔한 이근철은 이듬해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히틀러와 나치군과 싸우던 연합군의 첩보전을 다룬 ‘조국을 등진 소년’ 시리즈로 서양 스타일의 전쟁만화를 그려내는 실력파 작가로 떠올랐고, 권웅은 1965년 한국군과 공산군의 전투를 그린 ‘켈로부대’ 시리즈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권웅의 거칠면서도 화끈한 그림 스타일은 꽤나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기관총 한 자루로 독일군을 격파하는 이근철의 <기관단총 케리>도 대단한 수작이었다. 서정철, 유세종, 이종진 같은 인기 작가들도 전쟁영웅 만화에 가담했다.
이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아무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전쟁영웅과 독립영웅 만화로 획을 그은 두 명의 걸출한 작가가 튀어나왔다. 1941년생(호적상의 나이)으로 부산을 터전으로 만화를 창작한 오명천이 다양한 활극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아티스트라면, 1937년 함경남도 흥남 출생으로 20대 초중반 1960년대를 맞이한 손의성은 시대가 낳은 활극만화의 종결자였다. 두 스타일리스트의 멋진 액션 장면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김형배, 이현세, 장태산, 허영만 등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등장한 만화가들은 적어도 어린 시절 대본소에서 오명천, 손의성의 만화를 보며 넋이 나갔던 세대였다.
먼저 치고 나간 사람은 오명천이었다. 손의성의 만화는 자연스럽게 경쟁하면서 동료 오명천을 따라잡았다. 1961년 무명의 오명천이 천지가 개벽할 작품 <싼디만>을 세상에 내놓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천재적 작품이었다. 손의성은 2년 후인 1963년 시대물 <운명의 死死死死>를 첫 히트작으로, 1964년 <민족의 반역자 매국노>, 1965년 <동경4번지>를 잇달아 발표하며 최고의 작가로 떠올랐다. 특히 <민족의 반역자 매국노>와 <동경4번지>는 일본인들을 통쾌하게 쳐부수는 스토리로 장안의 화제가 됐다.
손의성의 예술적 감각은 손재주가 뛰어난 극장 영화기사였던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영화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인 그의 부친은 전쟁 발발 후 부산의 극장에서 영사기와 필름을 관리하는 주임 기사로 일했다. 당시 극장이나 영화사가 보유한 기계들은 고장이 상당히 잘 났다. 손의성의 부친은 작동이 멈춘 기계의 부속품을 하나하나 손질해 멀쩡하게 만들어냈다. 이미지 4. 한 모임에서 생일 축하를 받고 있는 손의성 부산 시내에서 그의 부친은 몸이 두 개는 되어야 할 정도로 잘 팔리는 기사였다. 1961년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는 모든 직장에서 나이든 사람을 은퇴시키고 젊은 사람을 고용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부친의 나이가 50살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 가이드라인에 따라 직업을 잃었다. 군사정부는 그것이 혁신이라 생각한 것 같다. 50살이라면 ‘청년’이라는 말까지 듣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이런 조치는 너무나 터무니없다. 어찌 되었든 손의성은 이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됐다.
부산 피란 생활은 그를 만화가의 길로 이끌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손의성은 돈 버는 생각보다는 그림을 전국에서 최고로 잘 그리겠다는 순수한 꿈을 꾸었다. 만화책 표지에서 ‘손의성’이란 이름 석자가 박히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고 생각했다. 항상 공부보다는 그림이 먼저였다. 시험 때 답안지에 그림을 가득 채우고 교실에서 나온 적도 있었다.
만화 <푸른 만또> <숙향전>의 작가 박광현은 그에게 우상이었다. 스토리가 재미없기는 했지만 대한민국에서 박광현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1952년 무렵 어느 날 그 우상을 눈으로 직접 볼 기회가 생겼다. 손의성은 박광현이 부산 동광국민학교 앞 동광인쇄소에서 화공일을 하고 있는 걸 알게 된 후 그곳을 자주 기웃거렸다. 동광인쇄소에선 여러 사람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환경이 아니더라도, 박광현은 감히 말을 붙여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1953년 중학교 3학년이 된 손의성은 부산 국제시장에서 만화도매점 겸 출판사를 겸한 국제문고에 원고를 들고 찾아갔다. 그 원고는 데뷔작이 된 <원수의 딸>이었다. 출판을 해달라고 그 원고를 들고 갔을 때 오명천은 이미 그 국제문고와 거래를 트고 있었다. 손의성과 오명천은 서로 ‘씨’자를 넣어 호칭을 부르며 동년배로 대했다. 오명천은 당시 코밑에 거무스름한 수염을 기른 데다 듬직하고 과묵해 어른스러웠다. 오명천과의 첫 인연이었다.
손의성은 1956년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리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에 자리를 잡고 출판사인 소년소녀문고와 거래를 했다. 제일문고와도 인연을 맺게 됐는데 제일문고는 일거리가 많았다. 그는 1959년 무렵 부산에서 알고 지내던 작가들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그 중 한 명이 오명천이었다.
단독주택을 출판사 건물로 쓰고 있던 신촌의 제일문고는 손의성과 오명천에게 문간방을 주고 같이 지내도록 했다. 손의성이 그린 만화는 대체로 잘 팔렸다. 하지만 손이 느린데다 한 권 작업을 끝마치면 진탕 술을 마시는 습관 때문에 약속한 마감을 제대로 맞춰주지 못했다. 서너 권쯤 가면 책이 안 나오는 바람에 인기가 떨어지고, 그러면 그 타이틀을 접고 다른 타이틀을 하는 방식이 반복됐다. 출판사 입장에서 손의성은 점점 다루기 어려운 작가로 인식됐다. 손의성이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도 일류 작가로 도약하지 못하는 근본적 이유였다. 작가 혼자서 스토리와 데생, 펜터치까지 다 해내야 하는 상황에서 게으름은 곧 경쟁에서 뒤처지는 걸 의미했다.
반면 1960년 <올챙이 형사> <월광괴물 코코> 등이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자 실망한 오명천은 심기일전하고 다음해 6개월간 집중해 <싼디만> 1권을 완성했다. <싼디만>의 대성공으로 손의성까지 덩달아 바빠졌다. 제일문고로선 <싼디만> 후속권을 빠르게 뽑아내야 돈을 벌 수 있었다. 오명천 역시 손이 느렸다. 같은 방을 쓰는 손의성은 자기 작업을 하면서 틈틈이 오명천의 <싼디만> <사이드 카> <태양호13> 등 10여 권을 맡아 그렸다. <싼디만> 몇몇 권에는 작가로 손의성이 올라있다. 손의성은 결국 제일문고에서 신용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제일문고는 오명천과 같이 쓰던 방에서 손의성을 쫓아냈다. 지금의 용어로 치면 ‘방출’이다. 손의성은 여러 출판사를 전전하는 생활을 하게 됐다. 진흥문고와 거래할 때의 일이다. <곰> 1권이 꽤나 잘 나갔다. 보름 안에 후속 원고가 들어와야 하는데 한 달이 되도 소식이 없자, 진흥문고는 <곰> 타이틀을 폐기해버렸다. 그럴 때마다 다른 출판사를 찾던 손의성조차 정신이 바짝 났다고 한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각성과 함께 기획한 작품이 인기 만화가라는 명예를 안겨준 <운명의 死死死死>였다. 1962년 신성출판사에서 출간한 경마만화 <흑마>는 제법 인기를 끌었다.
1963년 손의성은 모비딕을 잡듯 <운명의 死死死死>에 죽기 살기로 달라붙었다. ‘죽을 사(死)’를 연속 네 개 붙여서 제목을 쓴 작품은 지구상에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금기 단어인 ‘死’는 손의성의 인생 승부수였다. 미신 따위는 개의치 않는데다, 남이 안 쓰는 제목으로 승부한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잠 안 오는 약을 먹으며 밤새워 그림을 그렸다. 뜨거운 코피가 쏟아졌다. 책상이 없어, 밥상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장시간 원고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그는 <운명의 死死死死> 4권을 끝내고 늑막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 주변에선 “‘死’자를 쓰더니 재수 없어서 저렇게 됐다”고 쑥덕댔다. 만약 그 때 죽거나 만화가로서 생명이 끝났다면 손의성이란 작가는 후대에 ‘死’의 저주를 받은 만화가로만 기억됐을지 모른다. 손의성은 ‘‘死’가 4개면 오히려 잘 산다‘는 옛말을 기억하고 있어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았다. 이런 걸 보면 그는 예사 사나이가 아니다.
손의성이 분투하고 있던 1963년 10월, 오명천은 새로운 독립영웅 만화로 다시 앞서나갔다. 미문사가 펴낸 <조국을 위해선 죽어도 좋아>. 이 작품은 여자 독립투사 애숙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때려잡는 이야기였다. 여자 독립투사의 얼굴로 꽉 채운 만화책 표지는 형언할 수 없는 포스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이 작품에서도 오명천은 두 페이지를 펼쳐 한 장면을 그려냈다. 그림에 자신이 없으면 감히 시도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이미지 6. 독립영웅을 그린 손의성의 만화 <매국노>
<운명의 死死死死>를 끝마친 손의성은 1964년 <민족의 반역자 매국노> 작화에 착수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일제시대 배경이다. 형은 일본 헌병이고, 동생이자 주인공 활민은 독립군이다. 막내 여동생 분이는 이중간첩 노릇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총탄에 죽는다. 제대로 반일감정을 건드린 <민족의 반역자 매국노>는 <운명의 死死死死> 인기를 능가했다. 손의성은 “나는 일본인들을 싫어했어. 옛날 사람들은 개인적 원한이 없어도 일본이라면 무조건 싫어했지”라고 창작 동기를 밝힌다. 오명천의 <조국을 위해선 죽어도 좋아>는 손의성의 <민족의 반역자 매국노> 탄생에 직접적 자극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의 반역자 매국노>는 반일감정에 호소하는 성격이 훨씬 강했다. 이 작품의 2부 14권에서 손의성은 주인공 활민이 총에 맞아 쓰러진 여동생 분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비분강개하는 장면에 무려 9페이지를 할애한다. 주인공은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되더라도 살아나며, 총에 맞고도 할 말 다하고 한참 떠들다가 죽는 영화적 수법이 만화에도 도입된 사례다. 당시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는 독자가 많았겠지만 지금 시각으로 보면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다. 주인공의 눈물 후에는 응징만 남아있을 뿐.
독자가 이 시기에 오명천과 손의성의 그림이 닮았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손의성은 원래 박광현처럼 붓으로 그리는 삽화체를 선호했다. 반면 오명천은 펜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1961년 손의성은 <싼디만>을 일부 맡으면서 펜화를 사용하게 됐다. 당연히 오명천과 펜을 쓰는 수법이 비슷하게 됐다. 오명천은 “손의성의 그림을 따라 그려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도 두 사람은 독자적 스타일을 추구했다. <민족의 반역자 매국노>에서 주인공 활민의 얼굴은 당시 영화배우 장동휘의 두툼한 얼굴을 연상시킨다. 손의성은 <민족의 반역자 매국노>를 어떻게 바라볼까.
“인물은 펜으로, 건물 같은 배경은 입체감을 주기 위해서 붓으로 그렸지. 내 스타일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이야. <동경4번지>에선 주인공을 좀 날씬하게 그렸어. <동경4번지>는 원래 내 스타일이 아니라 변형된 것이지. 펜으로만 그렸으니까.”
이야기는 손의성의 1965년작 <동경4번지>로 뛰어넘고 말았다. <동경4번지> 역시 넓게 보면 독립영웅 만화에 속한다. 주인공이 도쿄의 뒷골목을 무대로 악질 일본인들을 혼내주고 있으니. 구두닦이 아이가 일본인에게 “재수없는 쪽발이가”라고 외치며 시작하는 <동경4번지>에서 손의성은 일종의 폭력미학을 구축했다. 그 전까지 신나고 통쾌하게 일본인을 패는 면에서 <동경4번지>에 견줄 수 있는 작품은 없었다. 욕을 제대로 하고 나면 속이 후련하고 시원함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손의성의 독립영웅 만화는 1967년 <육혈포> <북만주의 독수리> 등으로 맥을 이어갔다. 손의성의 전쟁영웅 만화에서 대표작은 1965년 발표한 <분이와 해병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5인의 해병>(1961),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 1966년작 <공수부대>는 손의성의 작품 치고 그림 밀도가 떨어져 보인다. 손의성이 전력투구를 한 작품으로 볼 수 없다.
언제나 먼저 앞서나간 쪽은 오명천이었다. 그러면 손의성이 자기 스타일의 근사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오명천은 1962년 <택견소년 창>, 1963~64년 <창> <칼> <탕> 시리즈 등으로 무협만화 분야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무협만화의 주인공도 일종의 영웅이다. ‘창’ ‘칼’ ‘탕’ 처럼 무기가 부딪히는 의성어로 제목을 뽑아내는 세련된 감각을 보라. 멋들어진 그림에 기막힌 센스가 가미된 이 작품은 오명천이 자기 그림에 도취돼 그렸음을 보여준다. 검도 15단인 중국인 주인공 탕이 서부로 가서 칼로 악당들을 혼내주는 <탕>은 황당무계함을 넘어 무예의 종교적 경지를 추구한다. 탕이 칼로 총알을 막아내고 총알을 손으로 잡아내는 정도에 그친다면 다른 무협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탕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던진 칼은 불타는 초의 정중앙을 가르고 그 상태로 멈춰있다. 1mm만 무게중심이 기울어도 칼이든, 초든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 번 명상에 들어가면 몇 시간이나 꼼짝하지 않는 오명천의 비범함이 만화 속에 스며들어 있다.
오명천의 <창> <칼> <탕> 직후인 1964년 8월, 손의성이 발표한 무협만화는 <낫>이다. 이 작품의 표지는 주인공이 양손에 낫을 들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낫’이란 외자의 무기 제목은 오명천의 작품들과 따로 떼서 생각할 수 없다. 대신 손의성의 <낫> 주인공은 오명천의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했다. 오명천의 정점은 폭력과 민족교육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는 영웅을 그린 만화 <길>이다. 1966년 오성문고가 전 9권으로 발행한 이 작품이야말로 완숙기에 접어든 오명천의 멋진 만화다. 표지와 속지 그림에서 주인공의 분노를 서정적으로 표현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엿보인다. 친일 인사인 형을 두고 있는 길은 고집불통에 비뚤어진 성격이다. 길에서 거지를 보면 교복을 훌렁 벗어주고, 일본인을 기막히게 혼내주는 길은 인간적인 반항아다.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인을 패던 그는 시골에서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친다. <길>의 독창적인 연출은 데즈카 오사무의 전성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압축된 그림은 한 편의 영화 콘티다.
이미지 8. 오명천의 만화 <탕> 표지
눈 내리는 기차역에서 여학생들이 길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 헌병을 막아서며 얻어맞는 연속 장면은 어떤 시보다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기차에 한 손으로 매달려 쓰러지는 여학생들을 바라보는 길은 이렇게 독백한다. ‘내 한 평생! 울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지금은 울어야 한다. 지금은 사나이가 울 때다!“ 신파조의 대사이지만 그림과 함께 보면 그렇게 멋있을 수 없다. 만화가 이혜경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길>의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미지 9. 오명천의 만화 길에서 주인공이 기차를 타고 도망치는 장면은 아름답다 못해 시적이다.
그러나 만화 속 영웅들은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점차 힘을 잃었다. 사상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해서 전쟁영웅 만화, 독립영웅 만화에 다소 관대했던 검열은 폭력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숨통을 죄어왔다. 검열에 따르면 국군은 무조건 정의롭고, 북한군은 나쁘게 묘사돼야 했다. 형사는 범인을 무조건 잡아야 했다. 주인공은 총과 칼을 들 수 없다. 이런 강요가 만화의 서사구조에 악영향을 주었다. 전쟁만화의 대가인 권웅에게 기관단총을 못 그리게 한다면 작품의 파괴력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작품은 맥이 빠졌다. 영웅을 그리는 만화가들은 점점 인기작가에서 밥만 먹고 사는 작가로 전락했다. 만화 그리기는 더 이상 공정한 게임이 아니었다.
왜 군사정권은 체제 유지에 지장을 주지 않는 영웅들을 검열이란 수단으로 고사시켜 갔을까. 그 시대를 지켜본 이현세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는다.
“별 5개 가진 사람들은 유치한 본성을 드러냈다. 자기들을 뒤엎을 전쟁영웅을 만드는 걸 싫어했던 거다. ‘우리는 구국의 영웅이지만 너희들은 순한 양이 되라’는 심보다. 5.16도 처음엔 혁명이지만 그 다음엔 수구세력이 되고 만다. 칼로 흥한 자는 칼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에 (대중에게) 칼을 못 들게 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것만 강요하면서 어용 작가들만 살게 해준다. 그래도 액션을 좋아하는 만화가는 액션만 그린다. 팔다리가 잘리면서도 권웅 같은 작가는 전쟁만화를 추구한 거다. 그는 전쟁만화 밖엔 그릴 줄 모르니까. 그게 좋으니까. 그걸 못하게 하면 만화를 떠나는 것만 남는다.“
물론 영웅 만화들이 소멸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합동출판사의 독점 체제, 1970년대 초 TV의 보급 등도 작용했지만 검열은 영웅 만화들에 결정타를 날렸다. 1970년대 중반 선배들의 영웅만화를 살짝 비틀어 내놓은 허영만의 <각시탈>도 잠시 인기를 끌었지만, 그마저도 검열에 엄청나게 시달렸다. 일부 만화가는 펜을 놓고 해외로 떠났다. 다른 일부는 시장에서 팔리지 않아 다른 직업을 선택하고 살아가게 됐다. 순정만화와 이상무 식의 감성만화들이 영웅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했다.
군사정권이 영웅의 존재를 잠재적으로 두려워했다는 이현세의 해석은 설득력을 갖는다. 1970년대 초부터 유신반대 운동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번지자 두려움을 느낀 군사정권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을 일으켜 대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180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대학생 가운데 1심에서 사형 및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9명이나 됐다. 그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윤보선 전 대통령마저 77세의 노구를 이끌고 법정에 서야만 했다. 군사정권은 영웅이 나타나기 전에 무조건 그 싹을 삭둑 잘라버렸다. 군사정권이 통치하는 사회에서 그들 외에 영웅은 존재하면 안됐다.
시대 자체가 모순이었다. 통치자들은 수구세력으로 변질돼 가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이 없어지는 걸 느꼈다. 반대로 ‘어린이들에게 영웅의 존재를 심어주는 만화는 위험하다’는 인식은 그들의 머릿속에서 굳어갔다. 그들은 영웅의 자리에 앉은 가짜 영웅이었다. 가짜 영웅에 의해 만화의 진짜 영웅들은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1980년 또 다른 가짜 영웅이 정권을 접수한 것도 우리 사회의 비극이었다. 그 때도 만화의 영웅들은 여전히 설 자리가 별로 없었다. 영웅이 아니라 수준이 떨어지는 뒷골목 주먹들 정도만 허용됐다. 대한민국에 영웅이 부재한다면 그건 진정한 영웅을 시대정신으로 키워내지 못한 우리 모두의 잘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