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와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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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90년대 : (12) 야후 종족의 멘붕

복종할 줄만 알고, 반항할 줄 모르는 인간은 노예다. 반항할 줄만 알고, 복종할 줄 모르는 인간은 반역자이다. 그는 분노, 실망, 원한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지 신념이나 원리(정당한 관념)의 이름으로써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014-09-29 장상용
20세기 초 프랑스 사회학파를 이끈 학자 에밀 뒤르켐은 명저 <자살론>(1897)에서 사회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허무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생은 어떤 존재 이유가, 즉 삶의 고통을 정당화시켜 주는 어떤 목적이 없고서는 살아가기 어렵다고 우리는 흔히 듣고 있다. 개인만으로서는 삶의 충분한 목적이 되지 못한다. 한 개인은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개인은 공간적으로 제약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시간으로도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 이외의 다른 아무런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 자신이 결국은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노력은 허사로 끝나고 만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용기, 즉 행동하고 투쟁할 용기를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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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1993년 10월10일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 침몰해 292명이 사망한 서해훼리호 사건.
 
또한 뒤르켐은 사회의 전통적 규제, 권위가 제거되는 혼돈기에 개인의 ‘아노미적 자살’이 상승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아노미’의 개념을 설명한다. 
 
규제를 잃은 사회적 세력이 아직 균형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의 상대적 가치는 불명확하고, 일시적으로 모든 규제는 결여된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한계가 불명확하고, 정당한 것과 정당하지 못한 것, 합법적인 주장과 부적절한 희망의 한계가 모호해진다. …전통적인 권위가 그 권위를 잃게 되는 순간에, 보상이 크면 클수록 욕망은 통제되지 못하고 견디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규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욕망이 규제를 받지 못하므로 일종의 무규율상태, 즉 아노미(anomie)가 더욱 고조된다. 

뒤르켐이 지적한 허무주의와 아노미 현상은 대한민국을 약 30년 동안 군홧발로 짓누르고 있던 박정희, 전두환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군부 출신의 노태우가 청와대의 주인 자리를 내놓은 직후인 1990년대 초부터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웠다. 총칼의 사슬로 단단하게 얽어맨 프레임이 풀리자,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자체가 아노미적 상태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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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1994년 아침 출근길에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사건.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성수대교 붕괴(1994년 10월 21일)와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6월 29일)다.  국가재앙인 두 사건이 연속으로 터지면서 YS 정권이 욕을 다 먹었지만, 그 재앙의 씨앗을 뿌려놓은 장본인은 군부 정권들이다.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시점이 1993년 2월 24일이다. 노태우는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 직전, 절묘하게 보따리를 싸서 청와대를 떠난 셈이다.  

강남 압구정동과 강북 성수동을 잇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아침 출근길에 발생한 재난이었다. 오전 7시 40분, 성수대교 중앙 교각이 거짓말처럼 끊어지면서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을 당했다. 당시 대학교 4학년이던 나는 TV화면을 통해 성수대교의 끊어진 교각이 기울어진 채 빙산처럼 한강에 떠있는 장면을 보며 눈으로 보면서도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서울 시민들이 매일 건너다니는 그 엄청난 다리가 어느 날 아침, 어떻게 뚝 끊어진단 말인가.     
 
서초동에 자리한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것은 오후 5시 52분이었다. 난 당시 서초동 대법원 부근의 군부대에서 육군 일병으로 복무 중이었다. 오후 6시 무렵이 됐지만 초여름에 가까워 날이 살짝 어둑어둑했다. 부대가 일과를 대략 마치고 저녁 점호를 준비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갑자기 부대 전체에, 입대 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긴급 사이렌이 길게 울려 퍼졌다. 갓 일병이 된 나는 그렇다고 치고, 그 사이렌 소리에 고참들까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쟁이 터진 것인가? 전면전이 아니고는 이런 신경질적인 사이렌이 울릴 것 같지 않았다. 이어 “전원 전투태세로 연병장 집합”이란 중대장의 호출이 스피커를 통해 온 부대에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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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1995년 서울 강남 심장부에서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곧 삼풍백화점이 붕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때의 그 사이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 부대가 전국에서 삼풍백화점에 가장 가까운 부대였다. 사고 현장에서 자동차로 10분 내의 거리였다. 모든 상병과 병장은 곧 인명구조작업에 투입되기 위해 트럭을 타고 현장으로 떠났다. 이등병과 일병들은 그냥 대기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등병과 일병들을 실은 트럭은 인근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지휘관이 절대 소속을 밝히지 말라고 우리에게 엄명을 했다. 그 병원에 진입한 트럭의 뒤칸 문이 열렸을 때, 취재진이 거기를 에워싸고 있었다. 가장 먼저 내린 내게 리포터가 마이크를 갖다 대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묵비권’을 행사한 내가 그 다음 한 일은 병원 침대에 누워 헌혈을 한 것이 전부다. 당당히 현장에서 힘껏 구조작업을 하고 싶었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0년대는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입이 딱 벌어질 만한 대형 사건이 터지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은 갖가지 물건이 보따리에 꾸려지듯, 단 한 편의 만화 속에 담긴다. 그 보따리가 바로 1998년 12월부터 2003년까지 만화잡지 <부킹>에서 연재한 윤태호의 만화 <야후(YAHOO)>다.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 보따리가 담은 실제 사건들은 1986년 김포공항 국제선 대합실 폭발사건부터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다. 
 
<야후>가 시대상이고, 시대상이 곧 <야후>다. 윤태호의 첫 장편연재작인 <야후>는 만화가 이현세가 “이 작품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이끼> <미생>은 없었다”고 단언할 정도로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고등학교 동기인 김현과 신무학은 전두환 정권이 창설한 수경대에 입대해 대형 사고들을 몸소 접하면서 점점 정신으로 내상(트라우마)을 입고 ‘괴물’이 되어 간다. 윤태호는 왜 이 만화를 시도했을까?  
 
“1990년대 초까지도 사회적으로 민주화 열망은 가득한데 정권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패배감, 무기력증이 팽배했다. 잇따라 터지는 해외 토픽급의 대형 사고들과 함께 그런 분위기가 극대화된 시대였다.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스포츠 중계를 보듯,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삼풍백화점 붕괴 때는 비참함을 느꼈다. 열패감에 쪽 팔린 느낌이었다. 집단교육을 받은 나라에선 개인이 사회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야후> 속 두 주인공인 김현과 신무학은 시쳇말로 ‘멘탈붕괴’, 즉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 반항적인 청소년기를 보낸 김현은 자신의 눈앞에서 아버지가 건물붕괴로 사망하자 도리어 전두환이 치안 및 정권 유지 목적으로 만든 수경대에 입소한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표현해보지도 못한 죄책감이 항상 무의식 속에 숨어 그를 괴롭힌다.   

졸부의 아들 신무학은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하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으로 탈선한다. 아들은 아버지를 괴롭히기 위해 탈선을 일삼고, 그의 아버지는 돈으로 아들의 사고를 막는 술래잡기를 벌인다. 인생의 목표가 없는 신무학은 김현을 쫓아 수경대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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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만화가 윤태호가 2003년 야후 연재를 끝낸 직후 주인공 김현의 포즈를 취해보고 있다.
 
연못가에 나란히 앉은 김현과 신무학은 수경대에 들어온 속내를 털어놓는다. 신무학은 “난… 도망 왔다. 아버지…, 세상…, 학교…. 거기에서 도망 왔어. (수경대에서) 가장 좋은 건 명령이 일관되다는 거…. 밖에선 입으로만 떠드는 아버지, 선생이 있는데…. 여기선 한 목소리로 한 가지 소리만 하는 대장이 있다는 거…. 그다지 많은 생각이 필요 없다는 게 맘에 들어.”라고 말한다. 김현의 입장은 정반대다. “난… 쫓겨 왔거든.” 
 
한 명은 세상을 피해서, 또 다른 한 명은 세상에서 쫓겨나 ‘수경대’라는 한 배를 탔다. 스스로 도피를 했든, 타의에 의해 밀려왔든,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전두환 정권의 수족인 수경대는 사회 속에서 가장 비인격적인 집단이다. 세상의 변혁을 꿈꿔야 할 청년들이 기댈 곳이 수경대밖에 없는 현실은 너무나 암울하지 않은가. 그것이 <야후>가 설정한 세계다. 
 
특히 김현은 수경대 활동을 하며 공황의 나락으로 한 걸음씩 빠져 들어간다. 김현에게 심각한 이상조짐을 초래한 사건은 1993년 7월 26일 아시아나 항공기 목포 인근 추락 사고다. 이 사건의 구조작업에 참가한 김현은 몸이 절단된 시신들을 본 후 목욕탕에서 코피를 쏟으며 정신을 잃는다. 의사는 수경대 최윤수 대장에게 김현을 진단한 결과를 이렇게 설명한다. 
 
“일단은 과도한 스트레스에 따른 극심한 히스테리라고 할 수 있는데….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강박적 신경증을 보인다는 점이 더 문제지. 요는 수경대의 경우, 계속 사건, 사고현장에 투입이 되다보면 높은 수위의 충격을 반복적으로 받게 되지. 그 하나하나의 충격들이 무의식에 저장되었다가 불시에 표면으로 드러나는 거지. 드러나는 형태로는 히스테릭한 반응, 또는 단순행동에 집착하며 계속 반복한다든지…. 거칠게 주위의 상황에 반응하고 폭력적으로 되기도 하지. 정신과 치료가 아니라 꾹꾹 눌러버린다…. (그러면) 폭탄을 키우는 거지.” 
 
전문적인 의학용어로는 ‘외상성 스트레스증후군’이다. 작가 윤태호는 “우리나라의 대형 사건, 사고를 가까이서, 지속적으로 목격하는 사람이 있다면, 뉴스 보듯 잊지 못하고 분노하게 될 것”이라고 김현 캐릭터를 설명한다. 
 
김현이 외상성 스트레스증후군에서 벗어날 틈도 없이, 아시아나기 추락사고 후 3개월 만인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군에서 292명의 사망자를 낸 서해 훼리호 침몰 사건이 발생한다. 수경대 작전에서 제외된 김현은 TV 중계를 통해 재난 현장을 다시 목격한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정신적으로 망치질을 당하고 있다. 작가 윤태호는 이후의 사회적 사건들을 간단하게 표 형식으로 정리한다. 

1993
12.9 쌀시장 개방. 격렬 시위.
 
1994 
3.29 조계종 분규 폭력 사태 
7.8  김일성 사망
9.19 지존파 검거  

이전 사전들에 비하면 다소 시시해 보인다. 독자들은 이 순간, 김현이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날 여유를 얻을 것이란 희망 섞인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폭풍전야다. 얼마 후인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수경대는 김현을 현장에 투입한다. 그는 무너진 채로 한강에 떠있는 교각의 버스 안팎에서 필사적으로 구조에 나서지만 부상자들은 곧 숨을 거둔다. 작가 윤태호는 흩뿌리는 비를 맞으며 앉아있는 김현을 공중에서 포착한 시각에서 보여준다. 얼굴을 푹 숙인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은 절망감이다.  
 
신은 어쩌면 그렇게 잔인한가. 김현은 1994년 12월 7일 아현동 가스폭발사고 현장에 또 다시 투입된다. 약간의 이상증세를 보이지만 그는 다시 정상이 된 듯 행동한다. 하지만 김현의 내면에는 공황 이외에 분노의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김현뿐만 아니라 수경대원이면 누구나 겪는 일이기도 하다. 수경대 최윤수 대장은 김현의 상급자에게 말한다. “(자기 감정을 감추는 걸 배우는 건) 중요한 거지. 우리 같은 사람은 머릿속이 하얘야 한다. 분노라든지…, 울분이라든지 하는 것은 곤란해. …너흰 거대한 기계덩이의 한 조각일 뿐이다.” 
 
수경대의 한 조각이 된 김현의 상급자조차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훈련을 받았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지만… 저희도 사람이고 감정이 있잖습니까? 지금이 전시상황도 아니고…. 범인이지만 사람에게 총을 쏘고, 사고현장의 찢어진 시신을 보면… 비행기 회사에 열받고 다리 시공회사에 화나고 그러지요.”  
 
수경대 대원들은 화가 나도 그것을 풀 곳이 없다. 대장은 무조건 감정을 감추고, 분노를 억누르라고는 지침만 준다. 분노의 감정이 눈덩이처럼 커진 채 몸을 떠돌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번엔 졸부의 망나니 신무학에게로 가보자. 삶에 대해 구체적인 목표를 찾지 못한 그는 세상에 대해 냉소와 반항으로 일관하다가 자포자기하듯 수경대로 걸어 들어간다. 신무학은 허무의자자의 성격이 강하다. 기계적일 망정, 명령은 일관적인 수경대에 대해 그는 좀 더 후한 점수를 준다. 그러나 그에게도 수경대는 인생의 답이 될 수 없다. 

김현과 신무학은 무의식적으로 개인을 사회와 동일시하는 대한민국의 청년이다. 사회와 아버지는 젊은이들에게 멘토가 되어야 하는데, 사회는 보아하니 엉망진창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아버지는 어떠한가? 청년의 방황은 많은 경우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서도 아버지 세대와 결별한 아들 세대는 급진주의와 허무주의의 길로 빠져든다. 아버지를 비참하게 잃은 김현은 수경대 최윤수 대장을 사회적 아버지로 받아들이며 방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새로운 아버지는 “분노를 억눌러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김현은 더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김현의 상급자는 그에게 쌓이고 있는 분노의 위험성을 직감하며 조언한다. “분노는 감추고 숨기는 것이 아니야. 이겨내는 거야. 감추고 숨기려 들다간 파괴될 거다. 넌 서서히 그 조짐을 보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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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우울한 얼굴 표정이 인상적인 만화 야후 1권 표지

신무학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다. 돈이 된다면 어떤 구린 일도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 돈 가방을 권력자들에게 전하며 원하는 것을 거래하는 아버지, 아들의 장래를 위해 그런 일을 한다고 위안을 삼는 아버지와 한 공간에서 숨조차 쉬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이 역력하다. 결정적으로 신무학의 아버지는 룸살롱 호스티스가 된 아들의 여자친구에게 돈을 펑펑 쓰며 외도를 하다가 들킨다. 대한민국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기득권층의 실체다.   
 
그들은 한 발, 두 발 절벽으로 내몰리면서도 거칠게 질주한다. 뭔가 돌파구나 방향을 찾아보려 하지만 시대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방황의 절박한 흔적들이 만화 <야후>의 스타일을 결정한다. 작가 윤태호는 <야후> 12권에 수록된 특별 메시지에서 ‘<야후>의 가치는 변절(성숙)하지 않는 쾌속질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시대의 패배감과 허무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변한다. 김현은 대한민국을 혐오하는 테러리스트로 변해 월드컵경기장으로 향한다. 2014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다국적 테러리스트 조직 IS의 대원 중 유럽, 미국인 출신이 상당수로 밝혀졌다. 그들 역시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김현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IS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수경대원인 신무학은 김현을 막으려 하지만 그가 총에 맞아죽는 걸 보면서 자신도 최후를 같이 한다. 그들을 구원할 것은 죽음밖에 없다. 

이 작품의 제목 ‘야후’는 조나단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 4부 ‘말들의 나라-휴이넘 기행’ 편에서 말들이 미개한 인간을 가리켜 부른 말이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야후를 ‘개화되지 않은 야만인의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만화 <야후>의 공간 속에선 온갖 야후들이 휘젓고 다닌다. 부패한 권력층, 가식에 찬 비즈니스맨, 모럴 해저드에 빠진 CEO, 무식한 졸부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야후>는 삼풍백화점이 붕괴하는 대목에서 그 계통에 있는 야후들을 한눈에 보여주려 시도한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기 몇 십분 전, 땅 덕분에 졸부가 된 ‘강남 아줌마’는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옷을 7번이나 바꾼다. 매장 지배인은 졸부 아줌마의 허영을 부추기며 더 비싼 옷으로 바꾸어가게 만든다. 곳곳에 금이 가고, 가스가 새자 삼풍백화점 경영진과 건축전문가가 모인다. 설계담당은 “5층 출입을 통제하고 공사를 해야겠는데요. 전다파괴현상입니다. 철근을 제대로 안 쓰고 위에다 그냥 콘크리트를 부은 거죠.”라고 경고한다. 그때라도 정신 차렸으면 애꿎은 희생은 피할 수 있으련만, 경영진은 돈벌이에만 급급하다. 삼풍백화점 회장은 “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라고 호통을 치며 경고를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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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야후로 변한 얼굴을 내세운 만화 야후 단행본 20권 표지
 
2014년 7월에는 지존파 사건과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을 동시에 다룬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가 등장하기도 했다. ‘논픽션 다이어리’의 연출을 맡은 정윤석 감독은 각기 별개의 사건으로 보이는 지존파와 삼풍백화점 참사를 관통하는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잔혹한 행위에 대해 대가를 받아야 함은 두 말할 나위 없지만, 사법부는 지존파를 일사천리로 사형시켰다. 반면 훨씬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간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사태의 책임자들은 비교적 가벼운 처벌만 받았다.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는 그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사회가 과연 공정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공황과 분노의 쌍날검이 김현과 신무학을 쉴 새 없이 난도질한다. 그 시대 속에서 이들은 짐승 같은 인간, 즉 ‘야후’로 변해간다. 야후는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피해자도 야후, 가해자도 야후다. <야후> 초판 표지(학산문화사 판)는 작가의 주제의식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1권부터 마지막 20권까지 표지는 그저 우울했던 인간이 야후로 변해가는 과정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각권의 표지는 각기 다른 청년의 얼굴로 꾸며져 있다. 초반, 중반 전개부의 표지들은 대체로 우울하거나 화나 있다. 중후반 표지를 장악하고 있는 얼굴들은 그 단계를 넘어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인다. 분노가 완전히 폭발한 마지막 19, 20권 표지의 얼굴들은 붉은 색 바탕에 아주 거친 터치로 그려졌다. 특히 20권 표지의 얼굴은 인간이 아니라 이미 야후로 탈바꿈한 형태다.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났더니 거대한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리고리 잠자처럼. 
 
거대한 부조리가 덮치면 인간의 이성은 마비되고, 감정과 충동에 사로잡힌다. 인간의 뇌는 3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아래층은 뇌간이다. 호흡과 체온, 맥박 조절 등 기본적 생명유지 기능을 수행하는 ‘파충류의 뇌’다. 가운데 부분은 변연계로 감정을 주관한다. 성욕, 식욕, 기억과 충동을 조절하는 ‘포유류의 뇌’다. 가장 윗부분에 자리한 전두엽은 학습, 기획, 정리, 조직, 판단, 예측 등 고급 기능을 담당하는 ‘영장류의 뇌’다. 화가 나면 온갖 감정이 변연계로 홍수처럼 들이치고, 전두엽은 마비된다. 어떤 합리적 생각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본능과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파충류나 포유류의 행동을 서슴없이 하게 된다. 에리히 프롬은 저서 <반항과 자유>에서 충동적 감정이 인간을 노예나 반역자로 만든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복종할 줄만 알고, 반항할 줄 모르는 인간은 노예다. 반항할 줄만 알고, 복종할 줄 모르는 인간은 반역자이다. 그는 분노, 실망, 원한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지 신념이나 원리(정당한 관념)의 이름으로써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윤태호는 <야후>에 대해 “시작할 땐 너무 어렵고, 자신도 없었다. 내게 맷집을 길러준 만화다. 가볍지 않은 소재로 청소년 잡지에서 이야기하려던 바를 전달했다.”는 의의를 둔다. 그러나 <야후>를 복기하면, 10여 년 간의 사회적 사건들과 정면으로 맞선 이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가를 깨닫게 된다. 사회적 부조리로 인해 멀쩡한 인간의 정신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차근차근, 고집스럽게 추적한 <야후>는 부조리의 악순환이 개선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집단 트라우마에 빠져들 것임을 예고하고 증명하는 일종의 사회학 텍스트다. 
 
<야후>의 연재 종료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현재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가끔씩 터지는 대형 사고에 예전보다 더 예민하게 내적 상처를 입는 것 같다. 그런 뉴스를 보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야후>가 경고한 세계가 연재 당시보다 세력을 확장했다는 뜻 아닐까. 
필진이미지

장상용

작가, 만화평론가
초이락컨텐츠컴퍼니 웹툰사업팀장, 前 부천국제만화축제 사무국장, 前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