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해권 바다 이야기다. 2014년 8월 영화 <명량>이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300여 척의 왜선을 깨부순 무대는 진도 우측의 울돌목이다. 우리나라 바다 중 물살이 가장 빠른 울돌목에서 이순신은 목숨을 걸고 홀로 적 함대와 맞섰다. 남해안의 백성들은 그 리더십에 매료돼 이순신에게 모여들었고, 이순신은 그 힘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승리를 따냈다. 이순신의 진정성, 울림은 400여 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도 우리 가슴 속에서 크게 공명한다. 과연 우리에겐 이순신 같은 지도자가 있는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3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며 침몰했다. 그 장소는 우리나라 바다 중 물살이 두 번째로 빠른 맹골수도다. 꽃다운 나이에 피지도 못하고 진 안산단원고 학생들이 130여 명이나 됐기에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세계적 비극이 왜 유독 한국에서 일어나는가? 도대체 이런 사건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고 떠드는 나라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이틀 째인 2014년 광복절에 “이 비극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모든 한국 사람들이 슬픔 속에 하나가 됐으니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고 협력하는 그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 사건으로 전 국민이 울었다. 또 다시 되묻게 된다. 과연 우리 사회엔 이순신 같은 어른들이 얼마나 있는가?
자, 이제 시간을 거슬러 1980년대로 돌아가 보자. 이 이야기를 이끌어줄 인물이 태어난 곳은 명량, 맹골수도와 같은 서남해권 지역의 신지도다. 이 섬 바로 위의 고금도는 이순신이 명량해전과 노량해전 사이에 수군본영을 꾸렸던 역사적 장소다. 그래서일까? 신지도가 고향인 만화가 이희재는 1980년대를 진정성과 울림의 자세로 겪어내며 시대를 만화 속에 담아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만화 <간판스타>다.
이미지 : 만화가 이희재
전두환의 5공이 들어선 1980년대는 국민들이 억눌리고 갑갑함을 느낀 시대였다. ‘도대체 이건 말도 안돼’라고 생각하면서도 숨죽이고 지낸 시간들이었다. 이 시대의 변곡점은 1987년이었다. 5공은 그 해 선거 없이 권력을 연장하고자 호헌(護憲) 조치를 발표했고, 후임 대통령 역시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의 헌법으로 선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 와중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경찰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 등이 겹치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압제에 반발하는 기운이 전국적으로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국민들은 6월항쟁으로 사회를 바꾸어나가고 있었다. 깜짝 놀란 5공은 노태우를 앞세워 직선제를 수용한다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이미지 : 6월 항쟁의 한 장면. 1987년 6월 18일 낮 명동 신세계 백화점 앞 광장에서 시위대가 전경들의 최루탄발사기, 방패, 헬멧 등을 모아 태우고 있다.
1952년 전남 신지도에서 태어난 이희재는 스물 여덟의 나이로 1980년대를 맞이했다. 1970~71년 김종래의 문하생 생활을 거친 후 떠돌이의 삶을 체험한 그 역시, 누구보다 갑갑한 마음이었다. 만화가 그림만 그려서 되는 분야가 아니고, 역사와 인문학적 소양, 삶의 경험 등이 절대적으로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부가 부족했다. 그는 그 때까지 ‘이건 아니다’라고 느끼면서도 큰 틀에서 사회를 볼 수 있는 시야를 갖추지 못했다. 만화계도 불량만화라고 탄압받고, 표현, 출판의 자유가 없는 가운데 건강함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1983년 월간만화지 보물섬에 <악동이>를 발표하며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이희재는 앞으로 도래할 시대의 변화를 예측했다.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서울올림픽은 5공이 벌여놓은 대형 이벤트였다.
‘독재권력일수록 외국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된다. 늦어도 1988년 안에는 출판의 자유를 허용할 것이다. 나는 아직 작가로서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내가 원래 하고자 한 만화는 일반 시민들이 볼 수 있는 성인 만화다. 1988년까진 3~4년의 시간이 남았다. 우리 시대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연재해보자. 그러기엔 장편보다 단편이 낫다. 우리 사회의 이야기를 그냥 담아내자. 그게 대중과 소통하기 더 쉽다.’
마침 1985년 12월 성인만화지 만화광장이 창간됐다. 이희재는 만화광장 연재에 들어가기 전, 노트에 40개의 단편을 메모해놓았다. 매달 한 화씩 매듭지으며 넘어가는 단편 연재를 철저하게 준비해왔기에 첫 회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단편 만화 모음집 <간판스타>(1987년)는 표제작이 된 <간판스타>를 비롯해 <새벽길>, <승부> 등 1986~1988년 만화광장에서 연재한 일곱 편의 단편들을 통해 격동기·산업화 과정에서 양산된 밑바닥 인생들, 해체된 농촌, 몸을 팔아 살아가는 우리의 누이들을 조명했다.
이미지 : 이희재 작가의 <간판스타>
이 시기를 거치며 작은 체구이지만 화산처럼 뜨거운 열정을 뿜어내고, 따스하며, 사회를 관찰하는 냉정한 시선을 가진 이희재라는 캐릭터가 완성됐다. 시대와 만화의 관계도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유신의 그늘에 있었다. 그 속에서 만화는 관리되고 있었고, 자기의지보다는 다른 힘에 휩쓸렸다. 1980년대에 접어들며 가파르고, 폭력적인 시대로 변했다. 속도가 더 빨라지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끝장난다는 강한 압박이 사회를 지배했다. 1987년 6월까진 군부가 그 힘을 밀고나갔고, 만화는 고개를 숙이고 걸어갔다. 6월 항쟁 이후 국면이 달라지고, 온순한 화초 같던 만화도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1986년 제 목소리를 내고자 ‘간판스타’ 시리즈를 발표했다. 길고 강하게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자기 색깔로 만화를 주장하고자 했다. 1988년 신문만화에선 박재동이 등장했다.”
이미지 : 만화가 이희재와 박재동
노골적으로 저항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 목소리를 내는 만화의 출현은 만화계의 지형도를 바꾸어놓는 토대가 됐다. 절친한 친구인 박재동은 1996년 <간판스타> 단행본 발간사에서 이희재를 이렇게 묘사했다.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어린애처럼 웃는 만화가
보물단지.
근데 그 천진한 웃음 안에는
삶을 곧게 보는 누구보다 냉철한 눈이 있더라고.
그 웃음 뒤에는 그 웃음을 지켜내는
진실과 옳음을 움켜잡아 놓지 않는
쇠말뚝같은 팔뚝이 있더라고.
여무지더라고.
근데 그 무섭도록 강인함 속에는
자상하고 사려깊고 애정깊은
마음씨가 숨어 있더라고...
당신이 그린 통통한 나뭇가지를 보면 말이오,
한 잎 베어먹으면 단물이 사각사각 나올 것 같단 말이오.’
‘단물’을 운운하는 박재동의 표현대로, <간판스타> 시리즈의 리얼리티는 정말 대단하다. 단편 <김종팔씨 가정 소사>에서 넉넉하지 못한 집 가장이 퇴근길에 돌아와 연탄불을 가는데 마누라가 투정을 부릴 때 받아치는 넉살 좋은, 그러면서도 깊은 배려가 깃든 대사를 보라.
‘그야 연탄불이 중하제. 마누라야 없어도 그만이지만 연탄불이 꺼지면 등이 시려 어찌 산당가. 한여름에도 사지가 찌뿌드드해지는디... 당신 신경통도 그래서 도지지 않았남.’
단편 <새벽길>(1988년 2월 발표)에서 KAL기폭파사건(1987년 11월 29일)의 주범 ‘마유미’를 놓고 청소부들이 포장마차에서 노가리를 풀어대는 걸진 입담을 구경해보자.
‘그저 광화문 네거리에다 패대기를 쳐 놓고 오각을 쳐서 잘근잘근 썰어 죽여야 되네. 어느 놈은 요만한 일에도 잡아다 족치는데, 눈 깜짝 않고 500명을 잡아묵은 년을 살려준다니 말이나 되는가?’
어린이 만화 <악동이>조차 당시 만화가들과는 차별화되는 삶의 구체성이 있다. 이희재의 시각에서 리얼하고 현실적인 어린이들의 삶이 있을 텐데 일반 어린이 만화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강했다. “아이들의 구체적인 삶에는 외로움, 왕따, 눈물도 있고, 터질 것 같은 기쁨 있다. 거기서 진정성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난 내 만화를 ‘리얼리즘’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논객들이 리얼리즘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이희재가 삶의 구체성을 표현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작가는 동화작가 권정생이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는 이희재가 꼽는 명작 중 명작이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부터 월남전까지를 배경으로 7명 아이(복돌이, 차돌이, 삼돌이, 딸 큰분이, 또분이, 아들 막돌이, 무돌이)의 엄마와 무명옷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아기에게 지어주었던 무명옷이 내리물림 되면서 너덜너덜해지고, 기워지고, 그 옷을 거쳐 간 아이들(독립운동을 하러 떠나는 아빠-독립운동을 떠나는 복돌이-도쿄로 유학을 떠난 차돌이-징용으로 끌어간 삼돌이-삼돌이의 전사소식-해방-시집가는 큰분이-6.25전쟁으로 다리 잃은 막돌이-양공주가 된 또분이-북쪽으로 끌려간 큰분이-무돌이의 군입대-무돌이의 전사 통지-엄마의 죽음)은 시대의 희생양이 된다.
이미지 : 이희재 작가의 <아이코 악동이>
“권정생은 우리 귀에 감미로운 소리만 들려주는 문학을 넘어서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권정생의 글은 진정성 덩어리다. 저고리 하나로 우리나라의 전 역사를 훑었다. 저고리 하나에 생생한 삶, 개인과 국가의 역사를 담아냈다. 이 작품을 읽을 때 온몸으로 전율하면서 울었다. 그 때부터 이 세상의 구체적 삶을 담기로 했다.”
이희재 개인적으로는 1984년이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그 해 서울 상계동에서 400만원 짜리 반전세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아버지에게 “전세값 꿔주세요”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값아라”라며 돈을 내주었다. 월 20만원씩 값아나가면서 지금까지 용돈을 드리게 됐다. 그 후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은 그의 삶의 터전이 됐다. 의정부에 잠깐 나가서 산 것이 ‘외도’의 전부였다. 1988년 만화광장에 발표한 단편 <새벽길>에서 그는 온갖 공사 장비들이 동원돼 상계동이 개발되는 과정을 묘사했다. 다음은 나래이션의 일부다.
‘진작부터 공사 현장의 크레인 해머는 땅심에 정수리를 박고 지축을 때리고 있었고 사방에서 일어나는 파열음은 건너편 봉우리에 부딪쳐 되질러 돌아오곤 했다. 그것은 상계골이 으스러지며 토해 놓는 신음 소리였다.’
이희재는 이 장면에서 상계동 개발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동네가 좋아지면 왜 안 좋겠는가. 그로 인해 어려운 사람들도 혜택을 같지 보지 못한다. 땅이 개발될 때 밀려나가는 사람들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는다. (어려운 사람들의) 현실적 슬픔, 처해진 사정은 사회적으로 후순위가 된다. 시간이 지나보면 결산은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과정의 민주화다. 우리 사회에서 점점 부의 격차가 벌어진다. 돈이 돈을 만들어간다. 돈 있는 사람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간다. 병원을 봐도 그렇다. 미국의 의료제도가 쿠바보다도 나쁘다. 가난한 사람은 죽어야 한다. 돈은 무엇으로 버는가. 돈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쥐고 있는 게 다르다.”
이희재가 사회에 대해 눈을 뜨게 된 시점은 1980년대 초였다. “서른 살(1982년)이 될 때까지 나는 ‘까막’이요. 근본적인 것은 아무 것도 몰랐다. 노력하는 서글픈 청년의 성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만화 탄압받으면서도 정치가 나쁜 탓인 걸 몰랐다. 정치만 바꾸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 때 숨죽이고 고분고분한 내 자신에 대해 화나 죽겠다. 다 같은 인간인데 누구는 바람 한 번 불면 숨을 죽여야 하는가.”
1980년대 중반 단편만화를 연재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나가던 그는 6월항쟁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를 직감했다. 一盧三金(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6월항쟁의 열매라 할 수 있는 대통령 직선제(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에 대선 후보로 뛰어들었다. 민주화 세력은 분열됐고, “나는 보통 사람입니다”를 외친 노태우가 대권을 거머쥐었다. 민정당 후보 노태우가 36.6%, 통일민주당의 김영삼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이 각각 28%와 27%,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8%를 득표했다.
이미지 :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과 3金이 모임을 갖고 있다.
“1980년대 말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국민들의 열망을 완성하지 못한 게 패착이다. ‘YS와 DJ가 단결하면 되는데 왜 저럴까’라는 안타까움이 컸다. 두 사람 만의 문제가 아니라 계파의 감정이 적보다 더 안 좋은 상태였다. 내 눈에 노태우는 ‘양김’에 비견이 안되는 인물이었다.”
당시 주간만화에 시사만평을 연재하고 있던 이희재는 그 과정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선 YS, DJ, 노태우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주간만화 발행인은 한국일보 정치부장 출신의 안희명씨로 이희재가 대선후보들을 인터뷰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1987년 9월 무렵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만난 대선후보는 YS였다. YS를 만나러 들어간 통일민주당 여의도 당사 건물 엘리베이터 안에서 안희명 주간만화 발행인은 전직 정치부장의 직감으로 “아마 단일화는 안 될 거야”라는 말을 이희재에게 건넸다. 김덕룡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희재 일행을 맞아 접견실로 안내했다.
“그 때 YS가 내 나이(예순) 정도였다. 노인 티는 안 났지만. YS는 친화력이 대단했다. 난 무척 YS를 친근하게 느꼈는데, 사람들이 늘 YS의 장점이라고 하는 것이 성격이었다. 확실히 YS는 상대방의 속을 헤아리는 능력이 있었다.” YS는 몸이 굳어있는 이희재의 손을 잡으면서 “이 화백, 우리 사진 한 장 찍어야지”라고 말했다. 그 기억은 이희재에게 친근함, 따스함으로 남아있다.
YS 다음에 만난 상대는 DJ였다. 이희재는 DJ의 카리스마 앞에서 얼어붙었다. 논리적 합리성이 뛰어난 DJ는 통일 문제에 대해 묻자 “우리 시대에 욕심내서 통일하는 건 무리다. 청년들이 커나가고 있으니 추후 통일의 주역이 되도록 우리가 기초작업을 해야 한다. 정전 상태로는 위험한 상황이니, 평화체제로 바꾸고 민족이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같은 질문을 받은 YS는 “통일, 당연히 되야지. 자유민주주의체제로”라고 큰 틀만 이야기했다. 구체적으로 준비된 DJ와는 사뭇 비교 됐다.
이희재는 그 자리에서 DJ에게 의료보험 문제를 이야기했다. “1985년 큰 아이를 얻었을 때 산부인과에서 100만원 들었습니다. 이번 달 둘째를 얻었을 때 똑같은 조건에서 20만원 들었습니다. 2년 사이에 의료보험 구축된 덕을 본 겁니다. 출산에 100만원 들어가니까 피눈물이 나대요. 얼마나 많은 원고를 해야 100만원을 벌 수 있는지 아십니까. 공무원은 의료보험 되고, 자유직업은 안 되고,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예총(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에선 만화가는 못 들어오게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얼마 전 둘째를 얻고 두 아이의 출산을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고 있던 DJ의 얼굴에서 불편한 기색이 돌았다. 독제권력을 지지하는 예총에 만화가들이 가입하겠다고 한 탓이었다. 민예총이 만들어진 건 그 후인 1988년이다. 지금도 그 문제에 대한 이희재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예총이건, 민예총이건, 가난한 백성에겐 복지혜택이 되면 들어가야 한다.”
1987년 10월 노태우 민정당 총재와의 만남이 여의도 민정당사에서 이루어졌다. 20분도 안 되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희재는 접견실 테이블에서 노태우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노태우는 시사풍자에 대해 “대통령도 마음껏 그릴 수 있는 사회로 가겠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이희재는 만화가로서 그 말에 큰 반가움을 느끼고 있었다. 독재정권 때 시사풍자를 하면 잡혀가는 상황과 비교하면 얼마나 큰 자유인가.
이미지 : 노태우 대통령 취임 후 한 삽화가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임금 얼굴에 노태우를 그려넣은 것을 만화가 이희재가 재현한 그림.
이희재는 노태우 후보에게 대뜸 질문을 던졌다. “루리를 아십니까? 미국에선 루리가 시사만화가로 유명합니다.”
노태우 후보는 “루리? 루리?”하며 어리둥절해했다. 군 출신의 노태우가 문화, 예술을 잘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이희재의 눈에 노태우가 시간을 10분, 20분 단위로 쪼개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옷을 갈아입으며 여미는 모습이 코미디처럼 보였다. ‘저 사람 머릿속에 뭐가 들어가겠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는데 비서관이 봉투 하나를 노태우에게 건넸고, 그는 재빨리 봉투를 이희재에게 넘겨주었다. 촌지였다. 이희재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넣고, 마포의 주간만화 사무실로 돌아왔다. 몰래 봉투를 열어볼 곳은 화장실 뿐이었다. 그것은 예쁘게, 격식을 갖춘 이중봉투였다. 봉투 안에 봉투가 하나 든 모양새였다. 그는 당시 관례로 10만원 짜리 수표 한 장이 들었으려니 생각했다.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억’ 소리가 터져 나왔다. 봉투 안엔 10만원권 수표 5장이 들어있었다. 당시로선 꽤나 큰 액수였다. 다시 한 번 노태우 후보가 10분, 20분 단위로 수많은 사람을 줄지어 만나던 상황이 떠올랐다. ‘이 돈이 다 어디서 나왔을까? 나같은 사람에게도 이 정도를 주는데 외신기자에겐 얼마를 줄까? 권력이란 게 이런 거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돈은 노태우가 상상도 못한 쪽에 쓰였다. 이틀을 꼬박 고민하던 이희재는 50만원에 자신의 돈을 조금 더 보태 한겨레신문사 주식을 샀다. “노태우 대통령이 한겨례신문사 주식을 사준 셈이다.”
권력이란 비틀리고 비틀리면 B급 코미디가 되기도 한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 취임 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가 교과서에 실렸다. 유독 귀가 큰 노태우를 홍보하기 위해 선택된 이 설화는 ‘귀가 큰 임금님이 백성의 소리를 잘 들어 좋은 임금님이 됐다’는 식으로 실리기도 했다. 실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주인공은 신라 48대 경문왕(861~875년)이다. 그런데 교과서 삽화가는 아첨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부의 지시로 그런 것인지, 임금의 얼굴 자리에 노태우를 그려 넣었다. 훗날 노무현 정권의 대통령 비서실 교육문화비서관이 된 김진경 시인이 이를 비판하고 나서면서 논란이 됐다. 당시 이 이야기를 집필한 교수는 “신라시대 이야기다. 경상도 상주에서 내려오는 민담을 내가 정리해서 쓴 것뿐이다. 여기에 이데올로기 운운하면 넌센스”라고 얼버무렸다.
게다가 그림에서 시대고증이 엉망인 문제가 냉정한 시대의 관찰자인 이희재의 눈에 띠었다. 삽화 속 노태우의 얼굴은 조선시대 왕이 쓰는 익선관을 쓰고 있었다. 익선관의 위쪽 부분은 매미 날개 모양을 본떴다. 매미는 끊없이 소리를 내는 곤충인데, 그것은 일을 열심히 한다는 뜻이다. 익선관은 왕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주인공인 경문왕은 신라 후기 왕이다. 김춘추가 당나라 이세민을 만나 중국 관제와 복장을 도입하기 전까지 신라 왕의 관모는 북방계의 영향을 받아 ‘出’ 모양이었다. 중국 복장을 따른 후 신라 왕들이 쓰던 관모는 신라 전기 왕들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이희재가 혀를 차는 부분이다. “노태우의 얼굴을 그려 넣으려면 고증이라도 제대로 하던가. 설화의 주인공은 당나라 관모를 쓴 왕인데, 아무 것도 모르는 삽화가가 노태우에게 조선 익선관을 씌워 놓았다. 코미디가 아닌가.”
당시엔 김진경 시인도 이 부분을 지적하지 못했다. 이희재는 시대물을 할 땐 고증에 아주 신경을 쓰는 편이다. “만화 처음 배울 때는 정교한 삽화에 혹하게 마련이다. 김용환의 그림이나 미국 뱀파이어 만화 같은 것을 보면 감탄을 하게 된다. 내 판단력과 자아의 나무가 크면 수십 년 전 보았던 그 그림들이 기능적으로 잘 그린 것뿐이란 생각이 든다. 오히려 못그린 것 같은 박수동의 그림이 훨씬 운치가 있다. 김용환이 사실적이고 고증에서 뛰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고증이 어긋난 것도 많다.”
역사는 항상 그에게 중요한 화두다. 그의 서재엔 역사책만 2500권이 있다. “난 예전부터 인생을 길게 보기로 하고 살아왔다. 나이 마흔은 어린 거다. 60대에 완숙한 전성기를 맞겠다”는 그의 야심을 지켜줄 디딤돌은 끊임없는 공부다. 요즘은 <사기>를 만화화하고 있다.
만화가 이희재는 1980년대란 폭력의 광풍 속에서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색깔을 냈다. 이순신의 명량과 세월호 사건, 그를 지켜준 진정성과 울림이 다시 시대의 부름을 받고 있다. 남도 바다를 끼고 자란 이희재는 여전히 피 끓는 청년으로서 시대가 자신을 부를 때를 기다리며 또 다시 묵묵하게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