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아파트를 지배한 신 중산층이 강남에 입성한 시기는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 중반까지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와 한양아파트는 76년,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77년, 역삼동 개나리아파트는 78년에 건립됐다. 잠실 주공5단지아파트, 장미아파트도 78년과 79년 송파의 중심부(지금의 롯데월드 사거리)에 들어섰다.
아파트는 이 시기에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를 특징짓는 랜드마크가 됐다. 1985년도 인구 및 주택조사는 대한민국의 광적인 아파트 집착증을 보여준다. 서울특별시 전체로 보면 주택 수 117만 6162호 중 아파트가 30만 6398호로 전체의 26.5%에 불과하지만 강남구에선 전체 주택 수 13만 7335호 중 아파트가 9만 9830호로 전체의 72.7%에 이른다. 강남 아파트 가격은 빠르게 올라갔고, 근로소득과는 비길 수 없는 이득을 안겨주었다. 1970년대 중, 후반에 여윳돈을 만든 이들은 직종을 막론하고 강남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1940년대생 부모들이 강남 아파트 단지의 주요 입주자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방의 명문 고교를 나와 서울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후 직장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아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했다. 이들이 30대 중반 이상의 나이가 됨으로써 내 집 마련의 여력을 갖춰갔다. 대출이 낀다고 해도 아파트 가격이 더 빠르게 올라갔기 때문에 구매를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부동산금융그룹으로 성공해 100억원 규모의 대형 장학재단을 설립한 문주현 한국자산신탁 회장은 “이 때가 대한민국의 부가 첫 번째로 재편된 시기였다. 두 번째는 1990년대 말 IT붐 때 다시 부가 재편된다”고 말한다.
1980년대 개포아파트 단지. 지금에 비하면 허허벌판처럼 보인다.
제2차 베이비붐 시대(1968년~74년)에 태어난 이들의 자녀는 ‘아파트 키드’라 부를 수 있다. 강남권 아파트에서 살면서 초등학교를 다니게 된 어린이들이다. 비슷한 수준의 부모를 두고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어울렸기 때문에 정서가 비슷했다. 이들은 부모의 경제적 여유 속에서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 같은 월간 어린이 잡지를 자연스럽게 구독했고, 선물 받을 일이 있으면 장난감 진열대에서 RC카 같은 완구를 집어 들었다. 어린이 잡지를 정기구독하며 연재만화를 탐독한 어린이들은 ‘어린이 시장’에서 최고 파워를 가진 구매자들이었다. 1940년대생 아버지나 삼촌은 해외 출장을 다녀와 미국, 유럽, 일본에서 산 메이커를 ‘아파트 키드’들에게 선물로 꺼내놓았다. 1980년대 초 강남 어린이들의 교실에서 외제 필기구류는 흔하게 돌아다녔다. 그 결과 대중문화에 관한 ‘아파트 키드’들의 안목은 급격히 높아졌다.
1940년대생 부모들은 전두환 정부의 과외 금지 정책 덕에 재산 축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각 가정이 경제력에 맞지도 않게 빚을 져가면서 사교육에 올인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자식들에 아낌없이 투자를 한 부모들 덕분에 ‘아파트 키드’는 이전 세대와 달리 자신을 위해 소비하는 습성을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혔다. 키덜트 족 상당수가 ‘아파트 키드’ 출신일 수밖에 이유다.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 중반까지 계속된 강남 아파트 분양 열풍은 80년대 중반 이후 목동, 상계, 과천에서, 90년을 전후해 신도시에서 모방, 복제됐다. 87, 88년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의 3저 호황이 있었고, 주택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아파트 가격이 또 올랐다. 88년부터 94년 사이 분당, 평촌, 일산, 중동, 산본에서 매 분기별로 아파트 분양이 이루어졌다. 지지율 반등을 노리는 군부 출신의 노태우 대통령이 주택 200만 호, 수도권 5개 신도시에 주택 30만호를 건설해 심각한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90년대 초반은 정부의 아파트 중심 주택 보급 정책이 효과를 보면서 집값이 비교적 안정세를 보였다. 강남 아파트 입주자는 물론, 신도시 아파트 입주자들까지 ‘나도 중산층 대열에 들어섰구나’라는 자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정부와 시민이 ‘야합’ 한 결과로 서울과 그 주변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아파트 숲으로 변했다. 서울과 변두리 곳곳에서 눈살을 찌푸리게하는 아파트 난개발은 그 부작용의 일면이다.
또 다른 부작용은 이 시기에 부동산 열풍과 함께 우리사회에 뿌리내린 물질만능주의다. 1980년대, 90년대는 산업화 붐이 결실을 맺는 시기였다. 부동산을 사야 그 결실을 남들과 함께 따먹을 수 있는 구조였다. 부동산으로 쉽게 축적한 부로 샴페인을 터트렸다. 그 틈에 경쟁적으로 부를 과시하고, 무슨 짓을 하든 돈만 벌면 된다는 식의 물질만능 가치관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게 됐다. 2014년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 후보자들이 온갖 결격 사유로 청문회에 올라가보지도 못한 채 연달아 낙마하는 사태는 과거 두 번의 부의 재편을 겪은 상류층이 물질만능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아파트 키드’들은 1970년대 중반을 전후해 신문수, 윤승운, 이정문, 박수동, 김삼 등을 주축으로 한 명랑만화가들에게 열광했고, 1980년을 넘어서면서 명랑만화가들에게 더 다양한 상상력을 요구했다. 명랑만화가들은 선배인 길창덕보다 상상력의 공간을 더 자유롭게 사용하며 ‘아파트 키드’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명랑만화는 다른 세상으로의 공간이동과 모험, 외국 체험, 어린이 잡지의 단골 소재인 외계인, UFO, 아프리카 식인종, 네스호의 괴물, 설인, 로봇 같은 신비하고 미스터리한 존재를 컷 안에 자유롭게 끌어들일 수 있었다. 매일매일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를 고민하는 소년, 소녀 가장의 지위에서 벗어나 다양한 정보와 접하며 현실 이외의 세상, 즉 판타지를 꿈꿀 수 있게 된 중산층 어린이들에게 삶의 활력소였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82년 나치스와 U.F.O의 연관성을 다룬 <라스트 바탈리온>이란 책이 나왔다. 수업시간에 한 선생님이 히틀러의 패망 이후 남미 아마존으로 숨어든 나치스 잔당들이 U.F.O를 개발해 또 다시 세계 제패를 노리고 있다는 내용의 <라스트 바탈리온>을 소개해주었다. U.F.O가 외계인의 비행물체라는 설보다는 40년대 나치스가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을 동원해 개발한 비밀병기라는 논리가 초등학생들에겐 훨씬 설득력 있게 들렸다. 일본 저널리스트 오치아이 노부히코가 유럽과 남미로 흩어진 나치스 잔당들과 인터뷰해 썼다는 이 책은 ‘나치스는 어디로 숨은 거지?’, ‘U.F.O의 존재는 뭐지?’라는 두 가지의 전혀 다른 미스터리를 그럴 듯하게 꿰매어 붙였다. 어른이 된 지금에 와서는 외계 비행접시 설이 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말이다. 그 선생님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라스트 바탈리온’이란 단어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라스트 바탈리온’도 여러 어린이 잡지에서 비슷비슷하게 각색돼 어린이들에게 전파됐다. 당시 어린이들은 주로 어린이 잡지들을 통해 어른들이 잘 알려주지 않는 세상의 ‘비밀’들을 알아갔다.
1979년부터 십 년 이상 <로봇 찌빠>를 소년중앙에 장기 연재한 만화가 신문수 역시 ‘아파트 키드’를 겨냥해 작품을 만들었다. “먹고 살만한 가정만 어린이 잡지를 살 수 있었다. 아이가 만화방에 가는 걸 싫어하는 중산층 부모들이 ‘공부 열심히 해’라며 아이에게 어린이 잡지를 사주었다. 당시 어린이 잡지들은 큰 회사에서 이름 걸고 하던 것이라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었다. <로봇 찌빠>에 등장하는 팔팔이 아빠도 중견 회사의 직장인이었다. 그런 가정의 어린이를 내 만화의 주요 독자로 의식했다.”
미국에서 업그레드 수리를 받고 돌아온 찌빠는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자극하며 어린들에겐 불가능한 경험을 채워주었다. 신나게 날다가 방향을 잃어 북한 땅에 불시착한 찌빠가 인민군들을 따돌리고 귀환한다든지, 하늘을 나는 탱크 혹은 잠수함으로 변신한다든지 하면서 찌빠는 도라에몽식의 만능로봇이 됐다.
명랑만화가들은 전국적인 인기를 얻어 신 중산층 대열에 들어섰다. 재미있는 것은 <아기공룡 둘리>(1983년 등장)로 유명해진 도봉구 쌍문동의 원조 타이틀은 사실 <로봇 찌빠>(79년 등장)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팔팔이네 집은 쌍문동으로 설정돼 있다. 작가 신문수가 당시 쌍문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산을 모은 신문수는 80년대 초반 강남구 도곡동 진달래아파트로 들어갔다. 윤승운은 같은 시기에 송파구 잠실로, 고우영은 강남구 반포의 아파트로 옮겼다.
<아기공룡 둘리>의 작가 김수정.
1980년대 초반 중산층의 삶을 순정만화의 감성으로, 코믹하게 다룬 만화가 두 명이 나타났다. 보물섬에 <아기공룡 둘리>(83년)와 <달려라 하니>(85년)를 발표한 김수정과 이진주였다. 이들은 기존 명랑만화와는 약간 다른 코드로 ‘아파트 키드’들에게 어필하는 순정명랑 스타일의 만화를 추구했다.
<아기공룡 둘리>는 ‘아파트 키드’들이 전형적으로 좋아할 법만 요소로 가득하다. 둘리가 1억년 동안 빙하에 갇혀 있다가 깨어났으며, 외계인이 탄 U.F.O에서 뇌수술을 받고 신통한 능력을 가지게 된 공룡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김수정은 둘리를 쌍문동에 자리한 만년과장 고길동의 가정에 들여보내 1980년대 초반 중산층 가정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렸다. 고길동이 그리 능력이 출중한 회사원 같지는 않지만 그의 가정은 나름 평온하고 안정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둘리가 나타나기 전까지. 단란한 4인 가족(아들, 딸 하나씩)과 서울 변두리이긴 하지만 단독주택을 소유한 그 시대 중산층의 전형적인 삶이다. 둘리의 시각에서 ‘악랄한’ 고길동은 주말이나 휴일에는 충분히 쉬고 가끔씩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직장인, 중산층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자신의 아들, 딸인 철수와 영희에겐 특별히 흠 잡을 데 없는 아빠다.
고길동 가정은 1960년대~70년대 대가족과는 전혀 다르다. 고길동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지 않는다. 아빠, 엄마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 고모부인 고길동에게 맡겨진 희동이도 천덕꾸러기 신세다. 둘리는 서울에서 집을 갖지 못한 채 얹혀사는 존재를 대변한다. 먼 친척이라도 숟가락 하나 얹어서 함께 서울살이를 하는 삶은 1980년대 초반에 이미 서로 불편해진 것이다. 고길동은 불청객 둘리에게 틈만 나면 “반항하냐”, “불만있냐”며 잽을 날린다. 둘리는 고길동에 의해 ‘반항아’의 이미지를 갖게 된다. <아기공룡 둘리>의 웃음은 자신의 삶을 오롯이 지키려는 이기적인 중산층 가장과 어떻게 해서든 빌붙어 살려는 ‘반항아’ 둘리의 대결 구도에서 쏟아져 나온다. 만화계에선 ‘고길동이 불쌍하게 보이면 어른이 됐다는 뜻’이란 우스갯소리가 있다.
실제로 보물섬 연재 당시 <아기공룡 둘리>는 ‘불량만화’의 대명사로 주부들과 시민단체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둘리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다던가, 어른에게 말대꾸 한다던가 하는 모습이 어린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리는 고길동 나이의 어른들에게 반항아로 인식됐다.
<아기공룡 둘리>의 캐릭터들. 고길동과 둘리의 쫓고 쫓기는 생활상을 보여준다.
김수정보다 약간 뒤에 출세한 이진주는 명랑만화식 소재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중산층 삶을 생생하게 재현해 시대의 공감을 얻었다. ‘하니’, ‘맹순이’, ‘오추매’ 같은 당차고 순수한 소녀 캐릭터들을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중산층 가정에 대비하는 방식이었다.
1952년 서울에서 출생한 이진주(본명 이세권)는 80년대 초, 중반의 만화계 흐름을 바꾼 새로운 감성이었다.
<달려라 하니>의 작가 이진주.
그는 군 입대 전까지 그림으로 각종 알바를 하며 살았다. 고교 졸업 후 불교신문에서 소설 삽화를 담당했고, 1976년 군 제대 후 김기백 문하생들과 어울리며 만화 일을 하기도 했다. 78년 4월 동료 만화가 이보배와 결혼하면서 그 해 겨울 만화가 데뷔를 준비했다. 결혼 후엔 김영하의 일을 도와주며 돈을 벌었지만 데뷔할 기회가 없었다. 서점용 로봇 만화 단행본들을 그리던 그는 이 일도 접어야 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창작 환경이 완전히 변했다. 전두환 정권은 싸우고 부수는 로봇물을 전면 금지했다. 로봇물의 TV 방영도 막혔다. 이진주의 아내 이보배는 정통 순정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 서점용 단행본 시장에서 <캔디 캔디> 스타일의 만화들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진주 부부는 그 해 외국 배경으로 왕자, 공주의 사랑을 다루는 로맨스 만화를 구상했다. 말괄량이 여자 주인공 캐릭터는 지금의 하니지만 이름은 ‘포니’로 지었다. 이진주와 이보배의 합작은 시너지가 됐다. 이보배의 정통 순정 스타일에 이진주의 코믹한 코드가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1981년 미모사출판사가 이 작품을 찍기로 했다. 제본까지 다 된 상태에서 심의실에 들어갔는데 ‘포니’란 제목을 쓸 수 없게 됐다. 현대자동차 포니(75년 생산 시작)가 있다는 이유였다. 이진주 부부와 출판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목과 캐릭터 이름을 ‘하니’로 바꾸었다. 서점용 단행본 만화 <하니와 함께 사랑을>이 처음 나온 후 프린스출판사가 이진주를 스카우트 했다. 프린스출판사와 함께 한 첫 작품은 <하니를 백작 품에>였다. 이어 83년 출간된 코믹명랑순정물 <하니의 동그라미 사랑>은 1권부터 엄청나게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한 달에 한 권씩 15권을 마치는 동안, 매 권마다 원고료가 올랐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이진주는 어느 날 선배들로부터 “너 떴더라”란 말을 듣고 바깥의 반응을 알게 됐다. 이 때 그는 필명을 ‘이진주’로 바꾸었다. 84년에 들어서도 <하니의 동그라미 사랑>으로 원고료가 계속 들어왔다. 강동구 성내동에 화실을 마련한 것도 그 해의 일이다.
성내동 하니공원에 자리한 하니와 나애리(왼쪽) 동상.
이진주는 ‘이진주’란 필명을 아내에게 주고 자신의 작품을 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 1학년으로 삐딱한 성격의 나애리가 육상으로 울분을 삭히고 역경을 이겨낸다는 청소년물을 성내동 화실에서 구상했다. 인근 성내중학교 체육시간에 운동장을 달리는 아이들을 취재했다.
남자 문하생을 둔 그는 20여 페이지 샘플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해 가을 남자 문하생이 홀연 군 입대했다. 월간 어린이 만화잡지 보물섬과 중학생 잡지 주니어(1985년 1월 창간)가 그 해 11월 동시에 연재 요청을 해왔다. 이진주는 다시 이보배와 힘을 합쳐 보물섬용 작품을 준비해야 했다. <달려라 하니>의 탄생을 위한 작업이 착착 진행됐다. 성내동엔 반지하에 2층 단독주택이 한창 많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 중 한 단독주택(강동구 성내동 562-15)이 훗날 하니의 집으로 정해졌다. 당시엔 슈퍼마켓을 ‘연쇄점’이라 불렀다. 인근 연쇄점 한 곳은 만화 속에서 ‘도레미 연쇄점’으로 바뀌어 홍두깨 선생의 자취 공간이 됐다. 보물섬의 독차 층에 맞춰 나애리를 13살의 하니로 변화시켰다. 보물섬은 ‘이진주’로 히트치고 있으니 이진주란 필명을 써달라고 요청해왔다.
강동구가 발행한 하니 주민등록증. 850101이란 주민등록번호는 하니가 보물섬에 처음 연재된 날(1985년 1월 1일)을 뜻한다.
1985년 1월은 이진주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달려라 하니>가 보물섬 첫 회부터 1위로 치고 나왔고, 주니어 창간호에 실린 <하니야, 하늘땅 별땅>도 히트했다. <달려라 하니>는 24페이지에서 32페이지로, <하니야, 하늘땅 별땅>은 8페이지에서 16페이지로 연재 분량이 늘었다.
<하니야, 하늘땅 별땅>은 아버지 친구의 병원에서 허드렛일 하며 공부하는 고아 소녀 하니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다. 하니는 재벌의 아들이자 야구선수와 사랑에 빠지는데 남자친구는 백혈병에 걸린다. 영화 <러브 스토리>의 감성을 받아들인 작품이다.
보물섬과 주니어 양쪽에서 성공하면서 인터뷰가 쇄도했다. 이미 <공포의 외인구단> 덕분에 만화가 매스컴에 등장하는 일은 낯선 것은 아니었다. ‘이진주’란 필명은 이보배의 것이었지만 이보배는 인터뷰를 할 만한 사회성이 없었다. 인터뷰를 도맡은 이세권은 할 수 없이 ‘이진주’가 됐다. 대신 이보배는 1986년 1월부터 보물섬에 <내 짝꿍 깨몽>을 발표했다. <내 짝꿍 깨몽>은 <내 사랑 깨몽> <키스 미 깨몽>같은 시리즈로 이어졌다.
이진주는 1987년 소년중앙에 선보인 <8동 808호 맹순이>에서 강남 아파트촌에 사는 부동산 졸부의 가정을 소재로 삼았다. 계룡산에서 서울 신랑감을 만나러 상경한 소녀 맹순이가 그 가정에 뛰어들어 서울 사람들의 속물근성, 사회 비리와 모순, 병폐가 드러나도록 했다. 맹순이 할아버지 대에서 약속으로 점지한 약혼자 황수일은 외아들을 오냐오냐 하는 강남 부모 밑에서 자라며 매일 징징거리기만 한다. 여기에 비하면 맹순이는 지리산 인동초처럼 푸릇푸릇하고 꿋꿋하다.
반면 맹순이 약혼자의 아버지 황만길은 강남 53평 아파트에 살면서 근처에서 대망부동산을 운영한다. 도사인 맹순이 할아버지가 팁을 준 덕분에 많은 부동산을 거느리고 있는 준재벌이다. 그런 인간이 짜장면을 한 그릇 배달시켜 먹으면서도 꼭 외상을 단다. 짜장면 배달원이 “칫, 부자로 사시는 분이 더 째째해”라고 투덜거리자, 황만길은 “내가 뭐가 부자냐? 봐라, 난 지금 담배도 떨어졌다”며 궁상을 떤다. 짜장면 배달원이 작심하고 외상값을 받으려 하자 100만원 짜리 수표를 내밀며 거스름돈을 달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수백만 원 짜리 분재를 사서 ‘1년만 가지고 있으면 가격이 뛸 것’이라며 남몰래 즐거워한다.
이진주 작가의 <명랑소녀 맹순이>
복부인을 연상시키는 황만길의 아내는 보석만 밝히는 ‘싸모님’이다. 남편이 선물한 18금 반지가 성에 안 찬다. 그녀는 “613호 장부장 마누라는 생일 선물로 야구공만한 물방울 다이아 반지를 받았다고 재고 다니는데 당신은 18금 반지가 뭐예요?”라고 쏘아 부친다. 식욕을 억제하지 못해 몸이 불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헬스장, 수영장 다니기에 바쁘다. 맹순이가 외제옷을 물빨래하자, ‘싸모님’은 “국산옷하고 외제옷하고 같이? 같아! 다시는 못 구할 프랑스 정통패션 원피스인데~ 어쩌나”라며 소파에 주저앉는다. “역시 나같이 지식인이나 문화인은 양담배를 피워 물어야 제격이지”라며 양담배 피며 폼 잡던 황만길이 “여보! 그 하마같은 몸집으로 깔고 뭉개서 내 양담배 다 짜부러졌어요”라고 울상을 짓는다. 외제라면 죽고 못 사는 졸부 근성은 부부가 막상막하다.
황만길의 아파트 단지 주민들도 똑같다. 203호 이씨 부부는 최고급 중형차를 뽑아서 다른 주민들이 쳐다보지도 못하게 한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온갖 학원 수업을 받으며 힘겨워하는 모습을 맹순이가 안타까워하자, 아이의 엄마는 “현준이와 한 반인 1014호집 아들은 새벽에 테니스까지 배우고 있다고. 흥! 내 아들을 그 집보다 못나게 키울 줄 알아? 좋다. 우리 현준이에겐 골프를 가르치자”라며 한 수 더 뜬다. 황만길은 “걸레같은 차라 창피하다”며 자신의 차를 걷어차고, 황만길 아내는 “그런 다이아 반지 하루만 끼어보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네”라고 탄식하고, 수일이는 “딴 애들 다 있는 무선자동차 한 번 사 줘 봤어요?”라고 불만을 터트린다.
<8동 808호 맹순이>의 에피소드들은 그 당시 만연하던 강남의 과열 교육, 맹목적인 외제 선호, 물질만능주의, 아파트 단지 이기주의 등을 보여주는 시대의 보고서다. 사회를 직접 꼬집기보다는 사회와 인간의 뒷면을 찾아내고자 했던 것이 이진주의 스타일이자 철학이었다. 그게 진정한 재미의 요소였다. 강남에 아파트 바람이 불고, ‘돈이 최고다’라던 시대에 가장 순박한 애와 돈만 밝히는 형이하학적 인간이 만나도록 한 것이다.
<달려라 하니>의 주인공 하니는 이현세의 오혜성과 함께 한국 만화계가 낳은 캐릭터 중 가장 개성이 강한 반항아 중 하나다. 하니의 반항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사랑에 목이 마른 청소년의 모습이다. 세상을 부정하기만 하던 하니가 세상을 긍정하고 바로잡아가는 인물로 바뀌면 그게 바로 맹순이다. 또한 맹순이는 물질적 부가 더 보편화된 사회에서 태어난 또 다른 하니다.
이진주 작가의 <명랑소녀 맹순이> 중
물오른 이진주의 필력은 <8동 808호 맹순이>에서 중산층의 속살을 다 까발린 2부 <슈퍼마켓 맹순이>,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한 3부 <감초소녀 맹순이>로 이어졌다. 이진주는 자연을 동경해 경기도 곤지암에 화실을 만들었다. <감초소녀 맹순이>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메시지를 담았다. 맹순이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바라보게 된 맹순이와 약혼자 가족은 자연으로 떠난다. 이 시기에 하니 캐릭터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진주의 고민이었다. <8동 808호 맹순이>는 물론, 1988년과 89년 발표한 <소녀전사 토리>와 <오추매의 빵점일기>도 그런 몸부림의 결과물이었다.
이진주는 1978년 결혼 당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단칸방에서 출발했다. 이듬해 화실을 넓게 쓰려고 부천으로 옮겼다. 서울에 전세로 다시 들어온 건 큰 딸이 태어난 1981년이었다. 82년엔 강동구 천호4동에 방 3개짜리 연립주택을 샀고, 83년 강동구 성내동의 강동구청 앞에 화실을 마련했다. <달려라 하니>의 모델이 된 대추나무가 있는 단독주택은 85년 사서 입주했다. 이진주는 빌라로 개축된 하니의 탄생지를 30년 가까이 지키고 있다.
둘리와 하니는 공동적으로 반항아의 면모를 가진다. 인간미가 살아있는 순수한 반항아들이다. 만화가 박재동은 “김수정은 어릴 적 지지리도 가난했다. 그런 정서가 ‘아기공룡 둘리’ 를 만들어냈다. 그 작품 속에는 서민의 애환, 가난한 사람의 눈물, 약자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다”고 말했다. 김수정, 이진주 두 순정만화가가 탄생시킨 키 작은 캐릭터들은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물질적 풍요를 향해 질주하던 우리 사회에 사랑과 인간미를 호소하는 일종의 브레이크였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