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와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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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90년대 : (9) 을(乙)의 슬픔

‘갑을(甲乙) 문화’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 갑을관계 속에 얽히면 누군가는 상전이고, 누군가는 노예의 위치에 선다. 그런데 그 굴레를 벗을 길 없는 노예가 바로 당신이라고 가정해보자.

2014-06-24 장상용
‘갑을(甲乙) 문화’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 갑을관계 속에 얽히면 누군가는 상전이고, 누군가는 노예의 위치에 선다. 그런데 그 굴레를 벗을 길 없는 노예가 바로 당신이라고 가정해보자. 끔찍한 일이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저서 <소유의 종말>에서 지적한 ‘네트워크와 연결성의 (수평적) 세계’가 도래했지만 갑을관계가 삶의 심층을 지배하는 사회 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평등한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는 거짓말일 뿐이다.
 
비즈니스석에 탄 대기업 간부가 기내식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든다며 여승무원을 때린 ‘라면 상무’ 사건이 2013년을 떠들썩하게 했다. 고객과 서비스 제공자라는 대기업 간부와 여승무원의 관계는 껍데기일 뿐이다. 사실 여승무원은 그에게 세련된 유니폼을 입은 하녀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유명 의류업체 회장이 공항에서 항공사 용역 직원을 신문지로 때린 ‘신문지 회장’ 사건, 한 제과업체 회장이 호텔 직원을 때린 ‘빵 회장’ 사건, 남양유업 본사 영업직원의 폭언과 물량 밀어내기 사태 등이 SNS를 타고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강자가 약자의 생존권을 움켜 쥔 힘의 불균형을 바탕으로 한 이 사건들이 21세기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진 않다. 갑을 문화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도 대기업의 ‘갑질’ 논란이 있었다. 사회 문제가 되자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1987년 이런 기사를 썼다. ‘일부 대기업은 중소기업 육성을 입버릇처럼 떠들면서 실제로는 중소기업들이 하청을 받아 생산, 납품한 제품의 대금 결제를 고의적으로 미루거나 값을 후려쳐 깎거나 또는 하청을 더 이상 안 주겠다고 협박, 공갈해 대기업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간다.’
 
재벌은 1970년대부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커나갔다. 혹자는 재벌을 시골 부모와 다른 형제들의 희생을 담보로 혼자만 서울에서 공부하고 출세한 이기적 장남에 비유하기도 한다. 빠른 경제성장을 지상최고의 가치로 둔 대한민국 정부에겐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재벌(가족 중심적인 기업)은 한국 경제 개발 초기 단계에서 효율성을 발휘하며 고도성장을 역동적으로 이끌었고, 그 결실을 맛보는 주체가 됐다.
 
1970년대 한국 경제는 1, 2차 오일쇼크(1차 1973년 10월, 1978년 12월)의 여파를 제외하고 거의 매년 10퍼센트 내외의 높은 경제성장(1973년 12퍼센트, 1976년 10.6퍼센트, 1977년 10퍼센트, 1978년 9.3퍼센트)을 이룩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한국 경제는 고공비행(1982년 7.3퍼센트, 1983년 10.8퍼센트, 1984년 8.1퍼센트, 1985년 6.8퍼센트, 1986년 10.6퍼센트, 1987년 11.1퍼센트, 1988년 10.6퍼센트, 1989년 6.7퍼센트, 1990년 9.2퍼센트, 1991년 9.4퍼센트)을 계속했고, 이 성장세는 IMF(1998년 -6.9퍼센트)전까지 지속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흥청망청하는, 타락한 재벌 2세가 등장하기도 했다. 재벌급 회사 호남전기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심홍근 사장이 45억여원을 탈세했고, 6억 5000여만원의 재산을 챙겨들고 대구로 도피해 있던 중 과도한 팁을 받은 접대부들의 신고로 검거됐다는 뉴스가 1975년 11월 8일자 일간지 지면을 장식했다. 1960년대~70년대 금호그룹과 함께 호남 재벌 선두를 다투던 호남전기는 당시 로케트 건전지를 생산하던 국내 최대 건전지 업체였다. 젊은 사장과 연예인과의 치정, 거액의 탈세, 경영계승권을 둘러싼 가족 간 갈등 등으로 호남전기는 자멸했다. 회사가 부도난 지 2년만인 1977년, 당시 23세에 불과한 심홍근 사장은 얕은 물가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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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심홍근이 피서여행 중 신분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외제차 대신 이용한 피아트 승용차.
 
1980년대에는 ‘문어발식 확장’이란 표현이 재벌에 따라붙었다. 1979∼1980년의 불황을 거치면서 재벌 기업들은 주요 중화학공업 부문을 통폐합(자동차·중전기기·발전설비 등)하고, 부실기업 정리 시 제3자 인수를 통해 몸집을 키워나갔다. 일부 재벌은 돈 되는 사업이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뛰어들었다. 재벌의 독점과 정치권력의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과 노사분규로 우리사회는 몸살을 앓았다.
 
1999년 해체되며 한국 경제에서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를 깨뜨린 대우그룹은 대한민국 재벌의 성장사를 압축해 보여준다. ‘잊어라, 고도성장의 추억’이란 제목의 파이낸셜뉴스 기사(2013년 12월 8일자)다.
 
‘대우기업은 1967년 설립 당시 봉제품을 전문으로 수출하는 소규모 무역업체였다. 사무실은 서울 충무로 동남도서빌딩 3층에 있었으며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이 전부였다. 이 작은 무역업체는 1970년대를 시작으로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1974년 전자 산업에 진출하고 이듬해에는 전세계에 사무실을 둔 종합상사로 성장했다. 또 1978년 대우조선공업을 설립하고 새한자동차를 인수, 1983년 자동차 산업에도 진출했다. 확장에 확장을 이어간 대우실업은 1980년대 들어 기계, 자동차, 조선 등 중화학공업 뿐만 아니라 전자, 통신 사업까지 총 24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국내 최대 재벌로 급성장했다. 30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대역사를 이뤄낸 것이다. 공격적인 인수합병(M&A) 전략을 바탕으로 재계 2위까지 올랐던 대우는 1999년 부도를 내고 해체됐다. 운영자금도 부족한 상황에서 문어발식 M&A를 진행한 결과, 1999년 대우의 부채비율이 400퍼센트까지 늘어났고 자기자본비율도 5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대우 김우중 회장은 한 때 에세이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를 출간하며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는 기업가로 떠오르기도 했다. 1989년 해외여행자유화 조치와 맞불려 나온 이 책은 한국출판역사상 처음으로 출간 6개월 내 100만 부를 돌파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젊은이여!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아무도 가지 않은 곳에 가려 해야 한다. 그리고 개척자가 되라. 참된 인생은 개척의 길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물론 개척자는 외롭다. 그러나 여러분의 미래는 여러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라고 외친 김 회장 신드롬은 1999년 막을 내렸다. 무리한 사업 확장과 정경유착의 경제구조가 불러온 비극이었다. 5년 8개월의 해외도피를 끝낸 2005년 수감된 김 회장은 2007년 사면 후 베트남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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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1992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지의 표지인물로 선정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대우와 엇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 재벌 기업들이 프로스포츠를 지배했다. 1982년 개막한 프로야구는 OB베어스(두산), MBC청룡, 해태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 삼미 슈퍼스타즈 등 6개 구단으로 출범했다. 이듬해 개막한 프로축구에는 유공, 대우, 포항제철, 국민은행, 현대, 럭키금성 등이 가세했다. 전두환 정부가 주도한 프로스포츠 출범에 재벌 기업들이 호응했다.
 
대기업은 상명하달식으로 조직을 운영했다. 이런 수직적 기업 문화는 일반인의 삶에도 흘러들어가 갑을 문화, 관료주의, 집단사고 등을 형성했다. 대인 관계도 힘에 따른 노골적 서열화를 피할 수 없었다. 하이어라키의 하층에 자리한 사람은 불합리하고 잘못된 지시일지언정 무조건 받아들이는 태도를 체질화해 생존했다.
 
재벌의 삶은 서민에겐 부러움의 대상이며 판타지가 됐다. 지금도 박신양이 연기한 <파리의 연인>의 한기주 같은 재벌가 2세 혹은 ‘라면 상무’와 비슷한 대기업 고위직 임원을 그린 드라마가 얼마나 넘쳐나는가. 재벌 이야기는 식상함에도 불구하고 욕하면서 보는 인기 콘텐트가 됐다. 재벌의 성공이 ‘부러우면 당신이 갑이 되든가!’라는 식으로 우리 사회에서 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과 대기업들도 글로벌 비즈니스와 SNS의 시대를 맞아 무절제하게 이윤과 탐욕을 추구할 수 없게 됐다. 이들이 매년 통 큰 사회기부를 하고, 나눔을 실천하고, 골목상권에서 손을 떼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기업과 사회의 상생’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빌 게이츠와 MS 같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기업가, 기업이 한국에서도 나오길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대기업 이야기가 만화 속으로 스며든 시점은 1980년대다. 만화가들은 대기업을 배경으로, 혹은 기업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을(乙)로 살아가는 이들에 관심을 가졌다. 만화 속 을(乙)들은 둘 중 하나다.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주인공 리골레토처럼 중세시대 만토바 공작의 궁정(지금으로 치면 대기업)에서 슬픔을 감추고 어릿광대짓을 하며 살아가거나, 입지전적으로 자수성가해 통쾌하게 갑(甲)이 되든가.
 
1985년 보물섬에서 연재한 허영만의 <제7구단>은 프로야구 만화를 가장한 기업 풍자만화다. 허영만은 ‘그 때는 프로야구단이 여섯 개밖에 안 되던 때여서 지금보다 야구의 재미가 훨씬 떨어졌을 때였는데, 야구단이 더 생겼으면 좋겠다는 염원에서 이 만화를 그렸다’고 <제7구단> 복간본(2013년 판)에서 밝혔지만 나는 그것이 100퍼센트, 그의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머리 감독님>이란 야구 만화를 그려 ‘누군가’를 생각나게 한 허영만 아니던가? 그는 항상 “작품 속에서 정치색이나 현실비판을 의도한 게 아니다. 만화적으로 재미를 추구한 것 뿐”라며 특별한 의미를 두려하지 않지만, 작가의 진실은 말에 있는 것이라 작품 속에 있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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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허영만 만화 제7구단의 미스터 고가 표지를 장식한 보물섬 1985년 7월호.
 
제7구단으로 창단한 샥스 구단은 5승 25패로 최하위인데다 15연패에 빠져 있다. 대기업인 샥스의 구단주, 단장, 감독이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회의 중-용무자 외 절대 출입 금지-*개조심’이라는 푯말이 달린 회의실 문 앞에서는 사나운 도베르만이 지키고 있다. 이 회의실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보통 대기업의 회의장에선 보스가 가운데 앉고, 중역들이 양편으로 갈라져 앉는다. 발언권은 한가운데를 장악한 보스의 것이다. 보스의 질책이 날아들 때 중역들은 숨을 죽이고 고개를 쳐박고 있기 마련이다. 눈치의 달인들은 그 와중에도 보스의 속내를 읽으려고 힐끔힐끔 얼굴을 쳐다볼 것이다. 보스가 돌아가며 한 마디씩 하라하면 중역들은 자책, 아부, 상대비난, 책임 떠넘기기 등의 발언을 쏟아놓게 된다. 그래도 의자에 함께 앉아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런데 샥스 구단의 회의장은 아주 별나다. 큰 방에 회의 테이블은 없다. 층별로 ‘구단주석’ ‘단장석’ ‘감독석’ ‘코치석’이라는 자리표가 붙은 커다란 계단만 존재한다. 계단 맨 위에 구단주가 서 있고, 그 아래부터는 죄다 꿇어앉아 있다. 다른 대기업과는 종류가 또 다른 살벌함이다. 구단주는 계단 맨 위에서 초라한 성적표를 가리키며 “덕분에 우리 회사 제품의 판매량도 이 성적과 같이 밑바닥이오. 샥스표 아이스크림, 샥스표 운동화, 샥스표 아동복, 삭스표 시계 등등. 모두가 적자란 말이오!”라고 단장과 감독에게 외친다.
 
이 장면은 그저 만화잡지 보물섬에 실렸던 어린이 만화의 한 장면에 불과할까? 그렇게 치부하기엔 구단주의 대사가 너무 찜찜하다. 샥스 기업이 여러 사업에 손을 뻗힌 대기업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감은 해태 타이거즈와 ‘도깨비팀’ 삼미 슈퍼스타즈를 교묘하게 섞어 샥스 구단을 만들어낸 허영만의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1986엔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이글스)가 실제 제7구단으로 창단되기까지 했다.
 
샥스 구단의 단장은 구단주에게 받은 질책을 그대로 노 감독에게 하달한다. 노 감독이 화풀이를 해야 할 대상, 허 코치의 자리는 비어있다. 노 감독은 계단의 말석으로 허 코치를 불러내 기어이 혼을 낸다. 그러나 허 코치가 진짜 말석일까? 허 코치는 샥스 선수들을 불러모아 놓고 대인배처럼 말한다.
 
“나는 감독님처럼 너희들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 대신 노크볼 500개씩만 받아라.”
 
샥스 선수들은 허 코치의 화풀이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숨을 헐떡거린다. 허 코치는 노크볼 숫자를 1000개까지 늘려 화풀이 강도를 조절한다. 이 지독한 하이어라키의 바닥에 있는 샥스 선수들은 빈곤한 연봉과 화풀이도 모자라 성적 부진에 따른 해고 위협을 수시로 받는다. 그들은 해고 위협에 용감하게, 혹은 집단으로 맞서는 듯하면서도 뒤로는 각자 선물을 들고 노 감독을 찾아가 자신의 구명운동을 한다. 샥스 선수들은 이 만화에서 프로선수라기 보다는 대기업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생계형 직장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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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제7구단의 샥스 구단 경영진 회의실 풍경. 구단주가 계단 꼭대기에서 윽박지르고 있다.
 
<제7구단>은 대기업 오너가 감독 및 코치 해임, 선수 트레이드 등 구단 운영에 직접 관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구본무 LG회장은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해 LG구단을 창단하면서 야구에 큰 열정을 나타냈다. 그는 1998년 LG트윈스가 우승하면 MVP에게 주겠다면서 8000만원 상당의 롤렉스 시계를 LG구단 금고에 맡겨놓았다. 1994년을 마지막으로 가을야구에서 멀어진 LG 선수들을 독려하기 위한 당근이었다. 구 회장과 1992년 LG사령탑을 맡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이끈 김성근 현 고양원더스 감독이 구단 운영을 놓고 빚은 신경전은 유명한 일화가 됐다. 결국 김성근 감독이 LG를 떠났다.
 
반면 샥스 구단주는 프로야구를 철저한 돈벌이로 여기는 스타일이다. 미스터 고를 이용한 마케팅 성공으로 현찰다발을 가방에 쓸어 담으면서도 스태프나 선수들에게 조금도 나누어 줄 생각을 않는 짠돌이다. 허영만은 구단주들끼리 싸우고 담합하고, 선수들이 살아남기 위해 타구단에 정보를 파는 갑과 을의 이면, 양 진영을 동시에 희화화했다.
 
돈의 거점인 재벌가나 기업은 1980년대, 90년대의 성인 독자를 겨냥한 허영만에게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었다. 허영만은 <미스터 Q>(1987), <벽> (1988), <아스팔트 사나이>(1992) 등을 통해 재벌과 대기업의 속성을 독자들에게 전했다. <20세 재벌> 시리즈로 성공한 박봉성은 1980년대에 맨손에 야망뿐인 청년이 대기업과 얽히면서 대단한 성공을 이루어가는 통쾌한 모습을 그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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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만화가 박흥용이 2014년 아르코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후 식사 자리를 갖고 있다.
 
박흥용처럼 갑을의 사회구조를 만화 공간 속에서 환유적으로 재구성해낸 작가도 있었다. 박흥용은 1980년대 수십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그의 관심은 ‘지독히도 약한 자들’, 즉 사회의 낙오자들이었다. 1986년 동시에 발표한 단편 <연출서곡>과 <2등인간> 등이 그 시기를 대변한 작품들이었다. 1996년 발표한 장편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도 양반가에서 태어난 ‘2등인간’ 서자의 이야기다.
 
1959년 충청북도 영동 출생인 박흥용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고향을 떠나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했다. 그의 예술적 창작의 토대가 된 삼양동(지금의 강북구 미아동)으로 옮겨온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박흥용의 아버지는 목수이면서 탱화 화가였다. 그의 집안은 넉넉하지도 않았지만 아주 쪼들리지도 않았다. 세상을 뒤엎고 싶을 정도의 가난 속에 산 것은 아니다. 나이 차이가 열 살 나는 형님이 이미 그림을 그리고 있어 고급 예술을 접하며 자랐다.
 
하지만 삼양동은 택시를 타면 기사가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질척하고, 외진 산골동네였다. 시골에서 상경했다가 밀린 사람들이 모여든 달 동네였다.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촌이 들어서 상전벽해가 됐지만 여름에 개천이 흘러내릴 때 썩은 내가 나곤 했다. 박흥용은 주변에서 빈곤한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옆집에 사는 만화가 김수한을 만나면서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가 그림쟁이로 성장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2002년 1월 24일 작고한 형 박인용씨다. 형은 동생이 <그의 나라>를 연재하고 있는 도중 갑자기 지병으로 사망했다. 박흥용은 당시 저 세상에 보낸 형을 돕던 즐거운 기억을 글로 썼다.
 
가끔 형의 요청으로 그림 그리는 일을 도울 때면.
형의 200호 짜리 캔버스는
화폭이 너무 커서
방문을 열고 저 쪽, 마루 끝으로 달려나가야
캔버스 구석구석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뎃상 수정을 위해 마루 끝과 그림 앞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이해한 형의 공간.
마루턱,
문턱에 발이 걸려 비칠거리면 넓은 화살 하나 없는 가난뱅이 형의 현실이
턱에 채인 발가락의 통증만큼 아팠다.
그래도
큰 캔버스가, 손바닥 안에 잡힌 물건처럼 만져지고
짱짱하게 그림이 다듬어져 가면,
아,
가슴에 짱짱 퍼지던 희열.
 
1970년대 말 만화가 박기정 밑에서 약 1년 반 문하생 시절을 보낸 박흥용은 1981년 단편 <돌개바람>으로 데뷔했다. 그의 만화는 사회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약자이며, 사회에 출발할 때부터 패배자란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1980년대 작품경향을 대표할 만한 단편 <연출서곡> 도입부에서 회사원인 주인공은 회사에서 상사에서 결재서류를 올리고 야단을 맞는다. 고개를 숙이고 기가 팍 꺾인 젊은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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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박흥용 단편 연출서곡의 마지막 장면. 자신이 로봇이었음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반전이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의 꿈부터 찬찬히 되짚어본다. ‘대통령’ ‘소설가’ ‘의사’가 되려던 꿈은 물 건너갔다. 취직됐다고 좋아한 것도 잠시 뿐. 퇴근길 지하철 속에서 늦은 귀가로 파뿌리가 된 주인공은 혼잣말을 한다. ‘출근길 버스 잡아타는 것만큼 힘든 결재도장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퇴근 시간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과장님, 부장님의 잔소리... 소리..., 소리!’
 
지친 주인공의 눈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로봇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몸서리치며 그곳을 벗어나려 하지만 맨 마지막 컷이 반전이다. 주인공 역시 이미 로봇이었던 것이다. 박흥용은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을은 노동하는 기계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환유적으로 풀어낸다. 작가의 설명도 다르지 않다.
 
“1980년대 군부정치가 사회를 뒤흔들고 있었다. 군부를 낀 큰 기업도 많았다. 그걸 전면에 꺼내기보다는 내 방식대로 그렸다. <연출서곡>은 큰 꿈을 가지던 소년이 성장해 사회에 발을 내딛자마자 소시민의 대열에 이미 낀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1980년대는 꿈을 가질 수 없는 사회였다.”
 
<2등인간>은 배경이 원시시대다. 주인공 용맹이는 ‘용사가 되라’는 아빠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태어났다. 사냥 능력도 탁월하고 우성의 기질을 보이는 주인공의 유일한 약점은 마음이 약하다는 것이다. 항상 모질지 못해 잔인한 친구들에게 자리를 놓치고, 심지어 배우자까지 뺏긴다. 결투에서 용맹이가 살려준 친구는 비겁하게 용맹이를 찌르고 여자를 데려가면서 훈계를 한다. “한마디 일러줄까? 용사란 힘과 지혜만을 갖추었다고 되는 게 아냐!”
 
용맹이에게 없는 것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쟁취하는 잔인함이다. 박흥용은 용맹이를 찌른 친구를 1980년대의 승자들을 대변하는 인물로 세운 것이 아닐까?
 
“모호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비인간적 인간들이 세상의 주류가 되어 있고, 인간적인 주인공은 패배자가 되는 이야기다. 용맹이 역시 자기 아이에게 ‘최고가 되라’고 하지만 그 말은 결국 자신도 패배자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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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박흥용의 2등인간에서 패배자가 된 용맹이가 자신의 아들에게 "용사가 돼라"며 기원하고 있다.   
 
박흥용은 낙오자가 된 주인공들의 패배의식을 통해 역으로 당시 갑을의 사회구조를 환기시킨다. 좀 더 작가의식을 갖게 된 박흥용은 1990년대 말을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복궁학교> <그의 나라> <영년>에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무인도와 공동체가 키워드다. 무인도는 기업이나 군부가 지배할 수 없는 독립적 공간이고, 공동체는 대다수의 을들이 을로 살아가지 않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대안이다. 예를 들면 <경복궁 학교>에서 무인도의 변형으로 제시된 ‘뜬섬’은 남쪽과 북쪽 사이에 예상치 못하게 숨어있는 섬이다. 뜬섬의 진정한 주인인 박도하는 연좌제로 괴롭힘을 당하다 스스로 뜬섬에서 최후를 맞는다. 거기엔 “남도, 북도 싫다”는 메시지가 숨어있다. 그래서 박흥용의 철학에는 이상주의가 녹아있다. 박흥용의 이상은 유토피아가 아닐까. 진정한 유토피아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아니라, 그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이란.
 
박흥용은 주저 없이 유토피아에 대한 고민을 내놓는다.
“유토피아란 말이 왜 만들어졌을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그걸 달래는 진통제 같은 약이 아닐는지.”
 
그는 살아있는 동안 돈과 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뜬섬 같은 공간을 발견할 수 있을까? 2013년 발표한 <영년>은 미완결된 <그의 나라>의 공동체 테마를 이어받아 시작한 작품이다. 한 마을 사람들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과연 그들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박흥용은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한다고 털어놓는다.
 
“피난민 공동체를 끄집어내어 국가공동체를 고민하는 작품이다. 공동체에 끼어있지만 자기만 편하면 남이 어떻게 되든지, 그 공동체는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공동체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나를 놓고, 여러 이념들이 부딪힌다. 실제로 정부가 노인에게 20만원 지원하는 사업을 보류하자, 노인들이 ‘투표할 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며 떠들던 모습을 봤다. 공동체 안엔 다양한 조건의 사람들 간에 갈등이 일어난다. 피해 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그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겠다.”
 
결국 사회 대다수를 차지하는 을의 슬픔은 2000년대를 전후해 자조적 정서의 직장인 만화를 낳았다. ‘무대리’ 캐릭터로 더 유명한 강주배의 <용하다 용해!>가 인기를 누리며 스포츠 신문에서 10년 가까이 장수했다. 일본의 경우 1983년부터 연재되고 있는 ‘시마’ 시리즈가 직장인 만화를 대변한다. 주인공 시마 고사쿠는 파나소닉이 모델인 전자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사장하는 오르는 남자들의 로망이다. 멋진 직장인이다.
 
반면 한국의 직장인 만화는 웹툰 시대를 맞아 더욱 을의 애환에 치중하고 있다. 대형마트와 납품업체 간에 벌어지는 부조리한 관계를 다룬 김규삼의 <쌉니다 천리마마트>, 광고주의 횡포에 가까운 요구도 다 맞춰주어야 하는 광고회사 직원들의 힘겨운 노력을 그린 이현민의 <들어는 보았나! 질풍기획!>, 곽백수의 <가우스 전자>, 윤태호의 <미생> 등이다. 같은 을의 분투를 보며 위로받아야 할 정도로, 갑의 지배력은 더욱 강해지고 대한민국 을들의 애환은 깊어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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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용

작가, 만화평론가
초이락컨텐츠컴퍼니 웹툰사업팀장, 前 부천국제만화축제 사무국장, 前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