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대학생들은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 마음 편하게 캠퍼스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우울한 일상에도 기분전환제 한 방울 쯤은 필요했다. 프로스포츠 결과, 연예인 가십, 연재만화, 문화 소식 등을 올 컬러 사진과 함께 정리한 스포츠신문은 가판에서 며칠에 한 번 사 봐도 재미있었다.
스포츠신문은 스포츠 빅 이벤트가 획을 그은 1980년대~90년대와 함께 성장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을 거쳐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온 국민이 대한민국 선수들의 선전에 열광했다. ‘라면 소녀’ 임춘애부터 ‘거미손’ 이운재까지 스포츠 영웅들이 탄생했다.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와 프로씨름, 1997년 프로농구 등이 출범하면서 프로 스포츠의 시대가 열렸다. 컬러TV는 선수들의 활약상을 시청자들에게 라이브로 전달했고, 스포츠신문은 다음날 아침 더 자세한 결과와 분석을 내놓았다.
‘삼국지’ 시대의 위, 촉, 오가 경쟁하듯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 스포츠조선이 3강 체제로 스포츠신문의 전성기를 누렸다. 스포츠신문들은 양보 없는 판매부수 전쟁을 벌였고, 연재만화도 그 전쟁의 한 축을 담당했다.
스포츠신문과 만화의 상업성은 코드가 딱 맞았다. 고우영의 연재만화 <임꺽정>은 1972년 1월 일간스포츠 연재를 처음으로 시작하자마자 장안의 화제가 됐다. 1991년 12월 <통감투>를 끝낼 때까지 일간스포츠에서 무려 18개 작품을 연달아 내달린 고우영은 1980년대 중반에 이미 최고 인기 작가로 올라섰고, 연재만화는 스포츠신문의 판매 부수를 좌우하는 핵심 콘텐트로 인식됐다. 만화를 주 6일 연재하는 시스템은 살인적이지만 만화가의 입장에선 이보다 더 확실하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매일 4페이지 혹은 6페이지씩 연재를 하면 한 달 남짓한 시간 만에 단행본을 한 권 묶어낼 수 있었다.
1969년 한국일보가 창간한 일간스포츠의 아성에 스포츠서울(1985년 창간)과 스포츠조선(1991년 창간)이 거세게 도전장을 던졌다. 후발 주자인 스포츠서울은 창간 초기에 저가정책을 쓰며 몇 년 만에 일간스포츠를 따라잡았다. 신문을 가판 판매업자들에게 절반 값에 덤핑으로 제공하는 정책이었다. 가판 판매업자들로선 스포츠서울 한 부를 팔 때, 일간스포츠 두 부를 판 것과 비슷한 이득이 생겼다. 가판이 스포츠서울을 밀면서 일간스포츠와 스포츠서울, 양사 간의 감정대립이 심해졌다. 양사는 신문 가판시장에서 각각 10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그것은 곧 3사의 작가 쟁탈전이 시작됐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우영, 이현세는 일간스포츠가 선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매일 성인독자들을 웃고 울릴 수 있는 검증된 작가는 제한돼 있었다. 아무리 인기 있는 잡지, 어린이 만화가도 스포츠신문 시장에서 통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잡지 시장(1974년 주간여성에 <사랑의 낙서>, 1980년대 들어 주간경향 <팔불출>)에서 스포츠신문으로 넘어온 강철수가 스포츠신문 3사 사이에선 공히 ‘뜨거운 감자’였다. 그는 스포츠신문에서 남자로선 이해할 수 없는 여자의 ‘괴팍한’ 심리를 (전적으로 남자의 시각에서) 밑바닥까지 파내려가고자 했고, 남자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미지 : 강철수 <사랑의 낙서>, <발발이의 추억> 그의 연재처 변화를 살펴보자. 강철수는 1988년~89년 스포츠서울에서 <발바리의 추억>을 연재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어리숙해 보이는 ‘카사노바’ 달호가 입담 하나로 여러 여자들을 섭렵한다는 이 만화는 ‘순진한 추억’을 내세우면서도 은근히 야한 표현으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도록 만들었다.
강철수의 다음 행선지는 일간스포츠였다. 그는 1990년 6월부터 1991년 7월까지 <돈아, 돈아, 돈아>로 인기를 끌며 이름값을 했다. 강철수는 어느 스포츠신문 편집국장이라도 기용하고 싶은 흥행보증수표가 됐다.
그런데 강철수의 다음 행선지를 보라. 1991년 창간한 스포츠조선은 그 해 8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강철수 만화 <사랑이 무엇이더냐>를 등판시켰다. 일간스포츠 연재작 <돈아, 돈아, 돈아>와 스포츠조선 연재작 <사랑이 무엇이더냐>가 잠시의 휴식기도 없이 이어졌다. 작가는 연재처를 갈아탔다. 그럼에도 강철수와 스포츠조선의 궁합은 좋지 않았다. 강철수는 <사랑이 무엇이더냐>에 이어 곧바로 <잠순이>를 연재했지만 3개월 만에 스포츠조선을 떠났다. 그는 1994년 11월 <화초의 반격>으로 일간스포츠에 컴백했다. 1995년부터 연재한 <밤 사쿠라> 역시 꽤나 인기를 모았고, 2000년까진 <반디> <취중일기>로 일간스포츠와 호흡을 같이 했다.
강철수는 2001년 3월 <하수의 법칙>으로 스포츠서울 지면에 다시 나타났다. 강철수만큼 스포츠신문 3개사를 자주 옮겨다닌 만화가는 없다. 3개사가 작가 쟁탈전을 벌이던 시기에 신문사 내부에선 연재처를 라이벌 신문사로 옮긴다는 것을 ‘배반’으로 보는 정서가 팽배했다. 인기 작가는 웬만하면 쭉 가는 분위기여서 지면을 맡아 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작가의 연재처가 바뀌는 건 딱 두 가지 경우다. 연재작의 반응이 생각보다 신통치 않아 작가와 신문사 양쪽이 내심 언짢아하고 있을 때, 혹은 신문사와 작가 간의 원고료 분쟁이 일어날 때다. 작가가 연재처를 옮기는 건 기존의 연재처로부터 미운 털이 박히는 걸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기질적으로 고분고분한 것과 거리가 멀고, 요구조건을 서슴없이 말하는 강철수는 신문사 쪽에선 상대하기 까다로운 작가였다. 강철수가 어느 한 곳을 떠나면 나머지 두 신문사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 개의 라이벌 매체가 공존하는 시기에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었다. 강철수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화를 그려가며 미친 듯이 글을 썼다... 지나고 나니 남는 것이 없는 소모전이었다. 어느 분야든 걸작 욕심을 가지고 일을 했다면 남을 만한 작품도 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다. 마음이 약해 들어오는 청탁들을 거절 못하고 시작하다가 또 고료문제로 헤어지기도 하고... 발목이 빠져 허우적거리며 지나온 진흙탕길 같기도 하지만 열심히 살았다는 점에서 후회하지 않는다.”
이미지 : 이상무 <야수의 링> 반면 1970년대 만화계의 지배자였던 이상무는 스포츠신문에 정착하는데 실패했다. 1992년 스포츠조선 연재작 <야수의 링>, 1998년 스포츠서울 연재작 <맨발의 신화>를 발표했으나 두 작품 모두 불과 몇 달을 버티지 못했다.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이상무의 스타일이 거칠고 자극적인 코드를 선호하는 스포츠신문 독자들에게 어필하지 못한 탓이다.
스포츠신문들은 연재만화의 수를 점점 늘렸다.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각 신문마다 매일 3~4개씩 연재만화를 실었다. 스포츠신문 3개사는 가능성 있는 새 작가들을 발탁하며 프랜차이즈 스타를 만들려했다.
스포츠신문들은 연재 만화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야하거나 폭력적인 장면을 요구했다. 독자들의 말초 신경을 자극해 조금이라도 시선을 끌어보려는 몸부림이었다. 만화에 무지한 검열기관 직원들이 검열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스포츠신문들 역시 논란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만화 전쟁이 과열된 결과였다. 그러면서 스포츠신문 만화들은 조금씩 성인 취향으로 발전해갔다.
이미지 : 방학기 <다모>, <바람의 파이터>, <감격시대> 고우영을 제외하면 스포츠신문이 발굴한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는 방학기였다. 고우영을 도와 작업하다 독립한 그는 선데이서울에서 <임꺽정>을 연재하며 출중한 작화력을 뽐내고 있었다. 스포츠서울은 1985년 창간과 동시에 방학기에게 시대극 <감격시대>를 맡겼다. 기회를 잡은 방학기는 <감격시대>(1985년 6월~1988년 6월)부터 <청산별곡>(1988년 6월~1989년 8월), <바람의 파이터>(1989년 8월~1993년 7월), <조선조 여형사 다모>(1993년 7월~1994년 6월), <바람의 아들>(1994년 7월~1996년 6월), <피와 꽃>(1996년 8월~1998년 9월)까지 무려 14년 동안 쉼 없이 내달렸다. 그는 매일 모든 에너지를 작품에 쏟아 부어 스스로를 고갈시켰고, 높은 완성도를 이룩해냈다. 그 후 유감없이 연재의 세계에서 손을 떼고,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다.
이미지 : 만화가 방학기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먹을 갈고 있다. 어린이 만화, 잡지 만화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두호는 스포츠신문 시장에서도 데뷔하자마자 곧바로 통했다. 이두호는 1991년 스포츠조선 창간과 함께 <임꺽정>으로 스포츠신문 연재에 뛰어들었다. 어린이와 성인, 양쪽의 정서를 충분히 만족시킨 만화가는 허영만과 이두호 밖에 없지 않을까. 허영만과 이두호는 어떤 장르를 맡겨도 다 소화해내는 작가란 뜻이다.
이두호가 원래 미대생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64년 홍익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군 입대했다. 3년의 군 생활 후 제대했지만 복학할 돈이 없어 만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1968년 한 해 동안 그가 우연히 박기정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건 행운이었다. 이두호는 당시 최고의 극화 작가에게 스토리, 그림 수업을 동시에 받은 셈이었다.
그는 1969년 <투명인간> 연재를 통해 소년중앙과 인연을 맺었다. 소년중앙 삽화 작업을 해주고, 일본 만화도 베끼면서 만화적 감각을 익힌 이두호는 1972년 축구만화 <폭풍의 그라운드>를 연재하면서 인기를 끌었고, 1979년엔 <암행어사 허풍대>를 발표하며 ‘바지저고리 만화’만 그리는 전문 작가로 나섰다. 이두호의 실력과 성실성은 이미 소년중앙 시절 검증이 끝났다.
이미지 : 이두호 <투명인간>, <허풍대> 스포츠조선 쪽에서 원고 청탁이 왔을 때, 이두호는 여러 작품을 하느라 엄청 바쁜 상황이었다. 이두호는 “못하겠다”는 거절의 말을 돌려서 “임꺽정이면 하겠다”고 말했다. <임꺽정>은 고우영이 일간스포츠에서, 방학기가 선데이서울에서 이미 시도했던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스포츠조선 쪽에선 “우리도 임꺽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이두호는 스스로 올가미에 걸려든 꼴이 됐다.
한편으로 이두호의 마음 한 구석에 임꺽정에 대한 향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1970년대부터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 네 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벽초의 소설은 보관 자체로도 구속감이었다. 다른 작가들의 소설 <임꺽정>은 에로적 성격이 짙은데 반해, 벽초의 소설은 깨끗했다. 그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두호는 스포츠조선 쪽에 “연재 준비 기간으로 6개월을 달라”고 말했다. 스포츠조선은 정반대로 “일주일”을 제시했다. 스포츠신문의 섭외는 대체로 무리하고, 급박했다. 결국 이두호가 받은 여유는 20일이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벽초의 소설을 다 읽어보고, 녹음해서 듣는 일을 반복했다. 매일 4페이지, 주 6회 연재한 <임꺽정>은 이두호가 “암만 길어도 2년”이라고 장담했던 작품인데 5년 2개월까지 가고 말았다. 5년 2개월이란 연재 기간 자체가 대단한 성공을 뜻했다.
이미지 : 고우영, 방학기, 이두호의 <임꺽정>, 위로부터 “연재 중엔 아플 수도 없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4시부터 작업 시작하면 신문사 마감이 오후 3시에 끝났다. 작업은 스토리, 데생, 펜터치 세 가지로 나눠 각각의 과정에 두 시간씩 배분했다. 미리 스토리 써놓고 연재 시작하는 작가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뭐든 스토리를 해놓고 시작해야 작품이 되는데... 오전 9시까지 스토리 못쓰면 땀이 바짝바짝 났다.”
문하생 두 명은 오전 9시까지 출근했다. 오전 12시까지 원고를 끝내서 신문사로 보내야 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주고받을 수도 없어 작가에겐 시간이 더욱 부족했다.
스포츠신문 3사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일간스포츠가 일요일까지 주 7일 발행을 단행했다. 스포츠조선도 주 7일 발행으로 따라갔다. 만화가들 역시 주 7회 연재를 강요받았다. “난 죽어도 일요일까지 연재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 것만 일요일에 안 실렸다. 독자에게 직접 연락이 오면 나도 일요일엔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꺽정> 연재 1000회 기념으로 스포츠조선 사장이 요리집에서 이두호를 대접했다. 한 잔 걸친 스포츠조선 사장은 그에게 “이 선생 때문에 6~7번 회의했다. 자를까, 말까를 놓고”라고 털어놓았다. 연재하는 동안 간섭은 전혀 안 받았지만 작가 자신에겐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
연재 펑크 직전까지 간 에피소드다. 문하생 하나가 “오늘 신문의날이니까 놀 겁니다”라고 말했다. 화실 전체가 그 말을 믿고 아침부터 놀았다. 그런데 낮 12시쯤 신문사에서 “오늘 원고 안 옵니까?”라면서 연락이 왔다. “쉬는 날 아니냐?”고 묻자, 그 쪽에선 “신문의날이니까 신문이 더 나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답이 왔다. 그 문하생은 기절초풍하기 직전이었다. 정상적인 연재는 이미 불가능했다. 이두호는 네 페이지에 임꺽정 얼굴 하나 크게 그리고, 다른 인물들을 모아 지난 줄거리를 소개하는 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한 시간 만에 원고를 해치웠다.
이미지 : 만화가 이두호가 임꺽정 액자를 들어보이고 있다.
일간지 연재는 장단점이 뚜렷했다. 독자가 신문을 오늘 보고, 내일 아침 또 볼 수 있는 점은 좋았다. 이두호에겐 네 페이지 안에서 매일 기승전결을 담는 게 힘들었다. 네 페이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일 어떻게 될 건가?’ 궁금하게 만들어야 했다. 마빡이가 임꺽정과 작별 인사를 하면서 끝나는 화(話)가 있었다. 임꺽정과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 마빡이는 땡추 떠벌스님과 함께 벽초의 원작에 없는 캐릭터로 당대 세도가인 윤원형의 첩 정난정의 연인으로 설정됐다.
마감을 하고 보니 끝이 맹숭맹숭했다. 이두호는 그 칸을 반으로 뚝 자른 후 맨 마지막 칸을 마빡이가 뒤를 돌아보며 “아, 참!”하는 장면으로 채웠다. 그 때문에 독자는 ‘또 무슨 일이지?’하고 궁금하게 된다. 순간적으로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두호는 다음 화에서 “아, 참!”에 대한 자연스러운 연결을 만들어내느라 고민에 빠졌다.
스포츠신문 연재만화 중에서도 네 페이지는 가장 짧은 형식이며, 극화 만화에 대단한 압축미를 요구한다. 여섯 페이지나 아홉 페이지는 네 페이지에 비하면 좀 더 이야기가 많이 들어간다. 그러나 이런 형식은 이두호처럼 혼자서 스토리와 작가를 겸하는 작가가 매일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극화 연재를 할 수 있는 팀만 여섯 페이지나 아홉 페이지로 간다. 이현세의 일간스포츠 연재작 <남벌>은 1993년 당시로선 아주 파격적으로 아홉 페이지의 호흡을 선택했다. 큰 스케일의 이야기를 담아내려면 매일 아홉 페이지는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판단이었다. 아홉 페이지 안에 이야기만 쓸어 담는다고 재미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현세는 거의 매화에서 한 페이지 전체를 전장 연출해 비주얼적으로 강조점을 두는 전략을 선택했다. 한,일 가상 전쟁이라는 소재, 파격적 지면 할애, 이야기의 충분한 분량, 강조점이 분명한 연출까지 어우러진 <남벌>은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미지 : 이현세 <남벌>
대가조차도 네 페이지 연재 지면에선 고전을 면하지 못하기도 한다. 허영만이 마음먹고 칭기즈칸을 그린 대작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2012년 초 스포츠조선에서 일방적으로 연재 중단됐다. 지면 연재는 스포츠조선, 온라인 연재는 다음에서 동시에 진행한 이 작품은 스포츠조선 독자들에게 분량 면에서 충족감을 주지 못했다. 경쟁지의 연재만화들은 대부분 하루 아홉 페이지를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의 일생을 쫒아가는 정통 극화가 네 페이지라는 분량 속에서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과거 스포츠조선에 <타짜>와 <사랑해>라는 선물을 안겼던 허영만은 연재 중단 통보에 분노하며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스포츠조선에 연재 중단 했다고 말무사가 끝난것이 아니요!!! 스조랑 동시 연재허든 포탈 다음에는 암시럽지안케 말무사가 여전히 달리고 있답니다. 열독 부탁드립니다잉. 스조에서 받았든 충격은 잘 소화시키고...」
이런 결별은 신문사와 작가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싸우고 헤어지면 결국 양측에게 큰 상처만 남을 뿐이다.
이미지 : 허영만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
월간지는 페이지가 많아 풀고 싶은 것을 다 집어넣을 수 있었다. 서른 두 페이지나 되는 지면은 네 페이지에 비하면 바다와 같다. 이두호는 보물섬에 연재한 <어름산이>에서 주인공이 낫에 베인 손을 물에 넣었는데 피 냄새 맡고 다가온 물고기를 손에 쥐었다 펴서 놓아주는 연출을 세 페이지에 걸쳐 시도했다. 작가의 예술적 심안을 반영한 연출이 가능했다. 그러나 월간지는 독자들이 한 달 기다렸다 보아야 해 내용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두호는 주간지 연재를 가장 선호했다. 주간지는 연출 분량도 어느 정도 있고, 작가가 약간의 개인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일주일 만에 발행돼 독자들이 내용을 가물가물 기억하지 않아도 됐다.
“일간지 연재 할 때 친구들과 약속 못했다. 약속하면 펑크 나니까. 200m 떨어진 데 있던 이현세와 잠시 술 한 잔 하고 헤어지는 게 고작이었다. 중고등학교 동창들은 ‘너만 일하고 사냐’고 핀잔을 했다.”
일간지 연재는 ‘만화 왕국’ 일본도 놀라게 하는 스케줄이다. 이두호는 NHK와의 인터뷰를 하면서 마감 때문에 새벽 4시에 출근한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난 다음날,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NHK 촬영진이 그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그 시간에 화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뚝심의 사나이 이두호는 <임꺽정> 후에도 스포츠조선에서 <째마리>와 <판돌이>, 두 작품을 더했다. 질적으로 만족감을 주는 연재로 인해 적은 연재 분량에도 불구하고 신문사의 신뢰와 사랑을 받은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여기저기서 연재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동시 연재작 7~8개를 끌어안고 있던 이두호가 일본에서 한 작가와 술자리를 한 적이 있다. 일본 작가는 보통 한 달에 60페이지 연재한다고 밝히면서 이두호에게 몇 페이지를 하냐고 물어왔다. 이두호는 매달 270페이지를 마감하고 있었지만 “문하생 둘을 데리고 100페이지를 한다”고 줄여 말했다. 그런데 그 작가는 100페이지라는 분량에도 무척 놀라워했다. 그의 일생에서 “얼굴이 화끈화끈한” 순간 중 하나였다. 다작을 하면서도 작품의 완성도를 유지한 것은 “일요일에 할 일 없어서...”라며 주말에도 화실에 나가는 이두호의 초인적 근면성과 남다른 재능으로 가능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전쟁을 통해 과학 기술이 발달한다고 했던가. 돌이켜보면 스포츠지들의 만화 전쟁을 통한 가혹한 제작 환경 속에서 고우영의 <삼국지>, 이현세의 <남벌>, 이두호의 <임꺽정>, 방학기의 <조선조 여형사 다모>, 허영만의 <타짜> 등 수많은 만화 명작들이 탄생했다. 만화가들은 살갗에서 피와 땀을 흘린다는 한혈마(汗血馬)처럼 달렸다.
마감, 즉 데드라인(Deadline)은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사선이다. 그래서 매일 마감하는 궤적에 올라탄 작가는 오늘 원고에 대한 생각과 함께 눈뜨고, 내일 원고를 구상하며 잠자리에 든다. 물론 작가 스스로의 선택이지만. 그 스트레스와 압박감 속에서 양과 질을 모두 충족시키기 위해 싸운 한국의 만화가들은 그 자체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주목할만한 도서]
만화규장각지식총서의 19번째 도서, <만화와 시대정신(1960~1979)>는 만화를 통해 나타나는 그시대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1960년대, 1970년대의 만화를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 각 분야의 주요이슈와 당시의 사회상을 끄집어내며 이와 연결된 여러 작품들을 통해 만화 속에 깃든 시대정신을 제시한다.
저자 : 장상용 / 출간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 정가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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