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게, 일명 ‘대본소’는 자신의 룰에 따라 만화가들을 장기말로 사용하는 거대한 체스판이었다.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대본소는 합동출판사와 소년한국일보의 양강 체제에 군소 출판사들이 형성한 ‘야당’이 책을 납품하는 시장이었다. 만화가는 출판사에 선택돼야 대본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출판사마다 작가 티오, 즉 장기말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기존 작가 한 명이 어떤 이유로든 없어져야 다른 한 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본소에서 유통되는 만화책은 두 권(상, 하/전, 후) 또는 세 권(상, 중, 하)으로 마무리됐다. 작품이 짧게 끊어져야 현금 회전이 빨라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세 권 안에서 끝나면 중간에 비는 권수가 생겨도 주인이 짝 맞춰서 넣기가 편리한 점이 있었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도 1983년 첫 출간 당시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3부작으로 끊어서 발표됐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출판사가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부마다 출판사 이름을 달리 했다. 당시 만화 출판은 영세 업종으로 분류됐다. 출판사는 3년을 넘으면 세무담당자의 관리를 받게 됐지만 그 전까지는 세금을 피할 수 있었다. 출판사들은 브랜드를 포기하고 세금을 안 내는 쪽을 선택했다.
이미지 : 대본소 정경
각 대본소 업주가 권당 몇 권씩 구매한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30권의 장편으로 이어진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이후 대본소 책 출간 방식에 급격한 변화가 왔다. 장편에 맛을 들인 대본소 독자들이 인기작의 다음 권을 애타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대본소에서 ‘악덕’이던 장편 스타일이 ‘미덕’으로 바뀌었다.
한국인의 ‘빨리, 빨리’ 근성은 유전자 변형 식물을 만들어내듯 대본소에서 이상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독자들은 대본소에 ‘장편은 좋다. 그러나 빨리 완결지어 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것이 시장이었다. 긴 이야기를 빨리 끝내야 하니까 화실은 분업화되고, 점점 비대해졌다. 만화가의 눈앞에서 큰돈이 어른거렸다. 출판사들은 장편을 끌어내기 위해 작가들에게 한 권 분량을 두세 권 분량으로 늘려 그리라고 주문했다. 이야기를 필요 이상으로 늘리거나, 제작공정을 빨리 몰아치면 작품이 망가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만화가들도 서서히 시장에 동조해갔다.
대본소는 만화가가 들어가고 싶어도 돈 없으면 진입할 수 없는 돈벌이 시장이 됐다. 출판사의 전폭적 지원을 받거나 장편을 한꺼번에 쏟아낼 수 있는 팀을 꾸릴 자금력을 가진 제작자에게만 입장권이 주어졌다.
대본소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시장인지 한 번 따져보자. 대본소의 절정기엔 그 수가 1만개에 이르렀다. 한 업소가 한 부씩 사면 권당 판매 부수가 1만부가 된다. 이때부턴 내는 권수마다 곱하기를 하면 된다. 한 달에 30권을 생산할 수 있는 만화가는 30만권을 팔게 된다. 일 년이면 365만권, 3년이면 1000만권 이상이다. 게다가 대본소의 책 판매는 모두 현금 거래다. 이 엄청난 노다지판에 모두들 군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면서 대본소 만화는 양과 속도의 격전장이 됐다. 한 달에 한 권 내는 작가는 시장에서 존재할 수 없었다. 시장에 적응하는 작가는 점점 비대해지고, 적응하지 못하는 작가는 낙오됐다. 돈 냄새를 맡은 주먹들도 지방 총판을 장악하고 대본소 영업에 뛰어들었다. 모 대기업이 대본소 사업에 진입하려 했다가 실패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미지 : 박봉성 작가
대본소를 최고의 홈그라운드로 만든 만화가는 부산 출신 박봉성이었다. 오명천 문하의 박봉성은 만화가로 성공하지 못해 30대 중반까지 한복 금박 붙이는 일을 하며 살았다. 만화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1983년 <공포의 외인구단>과 함께 대본소 시장이 급성장하자 30대 중반의 나이에 만화가로 재도전했다.
히트작 하나 없는 박봉성이 원고를 들고 간 출판사는 거의 부도 상황에 있던 가난한 출판사인 도서출판 프린스였다. 장태산, 이희재, 강경옥, 신일숙, 김혜린 등이 프린스에서 책을 냈지만, 이들은 출판사에 돈 벌어 주던 작가들은 아니었다. 프린스의 정병현 사장은 궁색한 출판사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현세, 장태산, 이희재 등과 인간적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이미 대본소는 <공포의 외인구단>이 평정했다. 많은 작가들이 이현세 그림을 따라 그렸고, 출판사들도 이현세 흉내를 낸 그림들을 선호했다. 이현세는 모작들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까치 캐릭터에 특허등록까지 했다.
박봉성이 프린스 정 사장에게 들고 온 원고 역시 이현세의 까치 캐릭터를 베낀 작품이었다. 프린스 정 사장은 나이가 많은 무명의 박봉성을 측은하게 생각해 책을 내보려 했지만 이현세를 의식했다. 프린스만 놓고 보자면 박봉성 원고가 히트 못해도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프린스 정 사장은 박봉성의 원고를 이희재에게 보여주었다. 이희재는 열심히 그 원고를 보고 처음 세 권 분량 중 한 권 분량을 드러냈다. 군더더기를 걷어내자 스토리가 꽤 재미있어 졌다. 이 작품이 박봉성의 출세작이 된 <20세 재벌>이었다. 프린스 정 사장은 장태산에게 <20세 재벌> 원고를 보여주고 이현세와의 만남을 중재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느날 이현세, 박봉성, 장태산, 프린스 정 사장이 만난 자리가 만들어졌다. 프린스 정 사장은 이현세에게 <20세 재벌>에 ‘이현세’ 이름을 달아서 ‘박봉성 글, 이현세 그림’ 형태로 찍게 해달라고 했다. 마음이 모질지 못한 이현세는 “그렇게는 해줄 수 없다. 대신, 박봉성 이름으로 책을 찍어라. 묵인해주겠다”고 말했다.
가난한 출판사와 작가가 만나 출판된 <20세 재벌>은 뜻밖에 대본소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천성적으로 성실한데다 사업을 해본 박봉성은 한 번 기회를 잡자마자 물량 공세로 대본소를 휩쓸어버렸다. 처음엔 한 달에 10권씩 내다가 점점 가속도가 붙어 한 달에 40~50권씩 쏟아내는 체제를 구축했다. 대량의 납품을 원하는 대본소 업주들과 출판사들의 요구에 가장 잘 부응하는 작가가 박봉성이었다. 그들에겐 한 달에 40~50권을 뽑아낼 수 있는 박봉성 한 명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됐다. 이현세, 장태산, 이희재가 측은하게 봤던 박봉성이 대본소의 판도를 바꾸어버렸다. 장태산과 이희재는 후에 박봉성을 두고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호랑이였다”며 도와준 것을 후회했다. 박봉성은 크게 성공한 후에도 이현세, 장태산, 이희재 등에겐 떳떳하지 못했다.
이미지 : 박봉성 <신의 아들> 중
한 타이틀이 수십 권의 장편으로 제작되면서 되면서 만화 출판 및 유통업은 ‘돈 넣고 돈 먹기’ 판이, 화실은 하루 한 권 이상의 만화, 즉 ‘일일만화’를 찍어내는 ‘공장’이 됐다. 박봉성은 부산에 5층 건물을 사서 1층은 세를 주고 나머지를 화실로 썼다. 건물 안에 구내식당까지 갖춰놓고 화실 인원들을 돌렸다. 만화책 한 권 안에서도 여러 명이 데생을 나누어 맡았다. 당연히 그림의 일관성이 떨어졌지만 많은 권수를 뽑아내는 데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이런 시스템에서 가장 애를 먹은 작가 중 하나는 장태산이다. 이현세의 친구이자 박봉성의 대본소 진출을 도운 그는 장편만화를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괴물 같은 대본소 시스템에서 낙오자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장태산은 1984년 평생의 대표작이 된 권투만화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를 도서출판 프린스를 통해 발표했다. 원고가 늦게 나오는 걸로 유명한 장태산이 다시 21권이나 되는 긴 만화를 그릴 수 있을까? 권당 100페이지 분량이었지만 그림의 밀도를 감안하면 대단한 분량임에 틀림없다. 대본소는 책을 출간할 때 두세 권을 한꺼번에 내는 방식을 선호했다. 장태산이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를 펴낸 속도는 서너 달에 두세 권 정도이었다. 근근이 한 달에 한 권을 맞춰나갔다.
분량을 압도적으로 뽑아내는 박봉성이 출판사에는 돈이 되는 작가였다. 프린스 정 사장은 장태산에게 “박봉성은 권당 이익은 적지만 한 달에 40~50권이라 박리다매로 이익이 훨씬 크다”고 말했다. 장태산도 대본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4~5명을 데리고 팀을 꾸렸지만 문하생들 고료 주고 나면 손에 남는 게 없었다. 장태산은 자신의 생활비를 1983년부터 보물섬에서 연재한 <소림사의 바람> <나간다 용호취> 등으로 충당했다.
장태산의 대표작들은 대본소 만화와 잡지 만화를 병행하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가운데 나왔다. 대본소 만화로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의 후속인 <빈들에 서다>(1987), 아이큐점프 연재작인 <스카이레슬러>(1990) 등도 독자들에게 장태산의 힘을 각인시켰다. 프로레슬링 만화 <스카이레슬러>의 비하인드 스토리. 아이큐점프 연재 당시 큰 기대를 모은 이 작품은 일본 만화 <타이거 마스크> 표절 논란에 휩싸이며 제대로 끝내지도 못했다. 이 만화의 스토리작가 노진수가 뒤늦게 <타이거 마스크>를 참조했음을 고백했을 때는 작품이 한참 진행되고 난 후였다. 뒤늦게 전말을 안 장태산은 노진수와 대판 싸우고 작품을 마무리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만화스토리 작가 노진수는 2010년 세상을 떴다.
이미지 : 장태산 작가
장태산은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대본소 시스템 속에서 일에 치였다. 그림 그리기도 바쁜 데 겨우 굴러가는 화실에서 팀까지 관리해야 하는 건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대본소란 당시 만화계 각계각층의 의지가 모여 형성한 일종의 소용돌이였다. 그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동력은 돈이었다.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빼기가 쉽지 않았다. 대본소의 소용돌이 속도에 맞춰 함께 돌지 않으면 파멸이었다.
속도를 따라가진 못하지만 묵직한 장태산의 그림은 여전히 대본소에서 활용 가치가 있었다. 한 출판사가 장태산에게 본격적으로 대본소 공장을 해보자고 유혹해왔다. 팀 관리를 출판사에서 해줄 테니 장태산은 그림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출판사의 전폭적 지원을 약속받은 그는 1993년 한 달에 서너 권씩 뽑아내는 것을 목표로 20명의 인원을 데리고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에 화실을 차렸다. 그러나 1년도 안 되어 장태산의 공장은 무너졌다. 그림을 깊이 파는 장태산의 스타일은 본질적으로 공장과 맞지 않았다. 장태산을 따라온 인력들 사이에서 “여기서 한 장 그릴 시간이면 밖에선 세 장 그린다”라고 불만이 섞여 나왔다. 그들은 장태산이 많은 양을 생산해 공장 근로자인 자신들에게 더 많은 수익을 분배해주기만 바랐다. 웃돈주고 데려가겠다는 다른 공장도 많았다.
‘흑나비’ 시리즈로 유명한 황재도 대본소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기를 썼지만 곧 절망감을 느꼈다. “나는 매월 12권을 하면서 버텼지만 5~6권 하는 작가는 도태됐다. 총판은 5~6권 하는 작가를 무시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매월 20권을 안 하면 밀어주지 않는 분위기가 됐다. 대본소라는 곳에 정이 떨어졌다. 나는 내 이름으로 나가는 작품은 다 손봤다. 그러니까 양을 많이 할 수 없었다. 사실 내 규모로는 하루 24시간 일하면서 한 달에 권당 100페이지 8권을 만들면 딱 맞았다. 10권을 넘을 때부터는 내 머리에서 떠오른 소재를 스토리 작가에게 불러주고 쓰게 했다. 15권이 넘으니까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도 고칠 수 없었다.”
황재 역시 자신의 의지와 달리 박봉성의 <20세 재벌>의 성공에 한 몫 한 작가다. 그는 도서출판 프린스의 정 사장에게 박봉성의 작품을 띄울 수 있는 방법을 귀띔했다. 황재의 주문대로 정 사장과 박봉성은 총판 외무사원들을 다 불러 모아 놓고 거나하게 술 접대를 했다. 외무사원들은 신인 만화가 박봉성을 위해 발 벗고 뛰었다.
“화실을 분업화한 박봉성은 한 달에 40권을 해도 놀러 다닐 시간이 있었다. 난 매월 15권 하다가 (자포자기로) 대강 갔다. 박봉성처럼 못했다. 2000년 무렵이었다. 난 지쳤다. 가요계와 다를 바 없었다. 열정이 식은 채 스스로 일판만화 등한시 하다가 독자에게 잊힌 거다. 종수는 줄어들고.”
공장 이야기가 나올 때 가장 거론이 많이 되고, 욕먹는 작가는 박봉성이다. 만화가가 아니라 사업가라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것 하나만은 밝히고 싶다. 박봉성은 호인이었고, 인간적으로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가 공장을 운영한 주된 이유 중 일부는(전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수백 명이나 되는 식솔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장태산이 “이제 (대본소를) 그만 접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을 때, 박봉성은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꼴이라 그만 둘 수 없다. 데리고 있는 식구들도 많고, 쉽게 정리하기도 어렵다”고 답했다.
박봉성 만화는 공장 체제로 생산됐지만 웬만한 만화보다는 훨씬 재미있었다. 박봉성은 최강타라는 확실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다. <신의 아들>의 최강타는 이현세의 오혜성 다음으로 광기 넘치는 인물이었다. 최고의 작화력을 자랑한 허영만도 최강타처럼 강력한 캐릭터를 창조하진 못했다. 최강타는 1990년대의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에서 피터팬으로 진화했다. 다작으로 생산된 박봉성 만화가 21세기까지 버티고 있는 근원은 역시 캐릭터다.
이미지 : 장태산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
어쨌든 만화 공장은 기본적인 상도의도 없었다. 같은 밥을 먹고 사는 다른 만화가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시스템이었다. 게다가 공장 관계자들은 대부분 비정상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가불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 선급금이 출판사, 총판과 작가의 관계를 얽어매고 있었다. 만화로 만났다고는 하나 그들은 실상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고 물린 채무 관계자들로 변질돼 갔다. 대본소 시장은 강촌, 박원빈, 장훈, 조남기, 장훈, 조명운, 조명훈 등 ‘이현세 아류’들이 지배했다. 자기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는 만화는 시장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대한민국의 모든 만화가가 대본소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고우영, 허영만, 이현세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중반 대본소 만화 <무술 팔비당> <이심초> 등은 고우영이 이름만 빌려주고 죄다 남이 그린 작품이다. 허영만은 “내 만화 인생에서 공장을 차린 게 가장 후회스럽다. 생각하기도 싫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는 다른 작가들에게 뒤쳐질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에 내키지 않지만 조운학을 영입해 B팀을 맡겼다. 하지만 만화 독자 사이에 “허영만의 작품은 잡지 연재 이외에 모두 가짜다”라는 소문이 났다. 허영만은 공장을 차렸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다. 만화가 사이에선 이를 두고 “그림을 너무 잘 그려도 안 된다니까”라는 말이 돌았다. 한편 김철호, 고행석, 하승남, 이재학, 황성, 천제황, 사마달, 야설록 등은 1980년대~90년대 대본소에서 어느 순간이나마 자기 영역을 확보했다.
영세한 대본소 업주들은 팔리는 책만 샀다. 이현세 작품이 대본소에 출시되는 날은 다른 만화들이 배본되지 않았다. 이현세 아류들은 그 날을 피해서 책을 내고, 서로 출간 날짜를 조정했다. 신인 작가의 책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이현세는 1980년대 말 아류들의 힘을 줄이고 자신의 책을 더 팔기 위해 ‘이현세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이현세 프로덕션’ 아래 4~5개 팀이 작품을 쏟아내면서 대본소에서 이현세 작품이 급증했다. 만화계 최고의 실력자란 자부심을 가진 ‘이현세 프로덕션’ 문하생들은 원하면 ‘이현세’와 자신의 이름을 함께 붙여서 독립할 수 있었다. 이현세는 만화계에서 문하생들에게 가장 많이 이름을 빌려준 작가였다.
그렇게 몇 팀이 독립해 시장에 나갔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이현세 프로덕션’ 문하생들은 이현세 아류와의 경쟁에서 이기지 못했다. 일단 분량에서 뒤쳐졌다. ‘이현세 프로덕션’에 속해 이현세의 전성기를 고스란히 누린 문하생들은 온실 속 화초였다. 반면 이현세 아류들은 거친 들판에서 싸우며 생존한 잡초였다. 그 누구도 자연발생적 현상인 그들을 시장에서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현세에겐 더 이상 ‘이현세 프로덕션’을 유지할 동력이 없어졌다. 1990년대 초 ‘이현세 프로덕션’은 해체됐다. 1994년 <남벌> 연재 전의 일이다. 물론 ‘이현세 프로덕션’도 엄청난 가불 관계로 얽혀있었다. 어느 프로덕션 또는 화실이나 해체할 때 가불 관계나 퇴직금 문제로 크고 작은 분쟁이 생기곤 했다. 이현세는 자작을 할 능력이 있는 문하생은 독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내보내고, 자작 능력이 안 되는 문하생에겐 돈으로 보상했다.
그는 프로덕션에서 가장 가불이 많은 사람을 기준으로 정리했다. 핵심은 공정성이었다. 즉 가불이 가장 많은 사람이 1000만원을 빌려갔다고 가정하자. 가불이 한 푼도 없는 사람은 1000만원을, 가불금 100만원인 사람은 900만원을 추가로 받게 된다. 퇴직금에 더한 보너스의 개념으로 말이다. 문하생들은 프로덕션을 떠나며 목돈을 챙겼다. 얼마나 권수를 많이 했는가도 보상 기준으로 작용했다. 이현세는 당시 프로덕션을 정리하면서 약 4억5000만원을 썼다. 이현세는 이 문제에 대해 떳떳하게 말했다.
“문하생들이 가불금 가져간 것을 돌려받아본 적이 없다. 이현세 프로덕션에서 지내면서 자신을 존재감 없게 만들었다고 욕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돈 문제에 대해선 지금까지 이현세를 두고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무도 손해 봤다는 말을 할 수 없으니까.” 이 부분에 대해선 장태산이 다시 확인해주었다.
“대본소 화실이 정리될 때 지저분한 일이 많았다. 이현세는 정리만큼은 깨끗하게 했다. 친구인 현세가 자랑스럽다.”
이현세를 거쳐 간 수많은 만화가 지망생 중에서 작가로 이름을 굵게 남긴 사람은 문정후, 김성모 정도에 불과하다. 분량이 중요한 덕목이 된 대본소에서 작가로 성장하긴 정말로 어려웠다. 작가를 하지 않아도 돈벌이가 충분히 됐기 때문이다. 이현세는 그 때를 회상하며 한숨을 쉬었다.
“문하생들에게 물리적인 시간은 여유 있었다. 그러나 도리어 작가로서 도전할 수 있는 시간은 촉박했던 거다. 실력 있는 데생맨들은 대부분 작가로 홀로서기 하는데 실패했다. 누가 목돈을 주고 데생 10권만 해달라고 하면 그 쪽에 덤벼들었다.”
이현세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데생맨이 <아마게돈>을 맡았던 김일민이다. 훗날 <빅리거>, <끗발> 등을 발표하긴 했지만 그가 가진 역량을 감안했을 땐 아쉬움이 커진다.
“난 일민이가 <아마게돈>을 끝낸 후 잡지 연재를 하길 바랐다. 일민이는 천성적으로 양을 많이 못 그렸다. 그래서 대본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아마게돈>을 그린 작가라면 어느 잡지에서도 연재가 가능했다. 일본 만화 <드래곤볼>이 나오기 전에 잡지 연재를 통해 작가로 이름을 세웠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민이는 나한테 작가로 폼 잡는 건 다 배우고, 광기는 안 배웠다. 미친 듯 작업해야 그런 광기가 생기는 건데….”
1990년대 중반 무협스토리 작가 사마달, 야설록, 천제황과 현대물 작가 박인권이 대본소의 주요 작가로 합류했다. 대본소의 기득권은 쉽게 얻어지지 않지만 웬만하면 무너지지도 않았다. 코믹스와 성인물을 휘어잡았던 김성모는 2000년부터 야심만만하게 대본소에 도전했지만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대본소는 워낙 대규모다. 팀 조직력과 자금력이 다 맞아떨어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대본소를 직접 경험해보고 내가 애송이였다고 생각했다. 대본소는 되새겨보고 싶지 않은 추억이다.”
이미지 :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 중
공장에서 생산된 대본소 만화는 2000년을 넘어서면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질적 하락을 나타냈다. 더 이상 대본소에 새로운 독자가 공급되지 않았다. 권당 부수는 점점 떨어지고, 대본소 작가들은 공장 제작 단가를 낮추었다. 스토리와 그림을 담당한 공장 노동자들의 수입은 점점 떨어졌다. 일부 작가를 두고 ‘도장을 찍어서 그린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았다.
박봉성은 2000년 초 국내 시장은 이미 글렀다는 판단을 내리고 중국 시장 진출을 모색했다. 다른 대본소 작가들이 인건비가 싼 동남아 화실 설립 등을 추진한 시점도 이 때다.
위기를 맞은 대본소는 2003~2004년 무렵 생존을 위한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신작을 제작할 상황이 안 되자, 대본소 만화가들은 10~20년 전 이름을 떨친 구작들을 유통경로, 가격, 판형 등을 바꾸어 재출간했다. 한때는 1만개 이상의 대본소에 수십 명의 작가(프로덕션)가 일일만화를 발표하던 영화를 재현해 보려는 헛된 몸부림이었다.
2004년 대본소에서 신작을 내는 작가는 황성 박봉성 하승남 사마달 야설록 고행석 이재학 등 고작 7명뿐이었다. 그나마 이재학은 1996년 타계했으니 ‘유령작가’였다. 한 푼이라도 손해를 덜 보려는 대본소 업주와 작가들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2004년 2월 정가 3500원으로 도저히 수지가 안 맞는다고 판단한 작가 진영이 가격을 7000원으로 올리는 방안을 시도했다가 대본소 업주들의 반발로 뜻을 접었다.
구작을 신작인 듯 포장해 재출간하는 궁여지책이 독자들을 더욱 실망시켰다. “2003부터 신작을 발표할 여건이 안 되자 작품을 약간 손질하거나 제목만 바꾸어서 3500원 신작으로 내보내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독자들이 신작인 줄 알고 봤다가 실망하면서 판매 부수가 더욱 급감하고 있다”는 대본소 관계자들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침몰하는 대본소엔 백약이 무효였다. 권당 130페이지의 일일 만화 구작들이 권당 180~300페이지, 가격 5000원의 성인만화 판형으로 변형돼 출간됐다. 박봉성 프로덕션은 1986년 작인 <나는 왕이다> 같은 작품들을 일일만화 그대로 내면서 권당 175페이지로 늘리고 가격은 3000원으로 낮추기도 했다. 130페이지, 3500원이라는 당시 일일만화의 불문율을 깬 가격정책이어서 대본소 업계에선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5년 말엔 17개 대본소 만화 출판사로 구성된 한국만화출판인협회(1986년 출범) 곽중열 3대 회장이 “한국 만화의 원조들이 없어지고 있다. (대본소에) 관심을 가져 달라”며 대본소의 재건을 호소했지만 작품의 질적 저하와 수익성 악화의 악순환에 빠져버린 대본소를 회복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당시 대본소 만화 살리기에 나선 곽중열씨를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새로 차리는 대본소에 무상으로 대본소 만화를 공급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가 2005년 회장 취임한 이후 한 달 반 동안 15개 대본소가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신설됐다. 17개 회원사가 지원에 동참했다.
"현재 전국 1500개 대본소가 남아있다. IMF 전까지 1만 개가 성업하던 상황과 비교하면 처참한 수준이다. 1500개라면 만화를 제작해도 수지 타산이 안 맞는다. 최소 500개 점포는 더 있어야 작가들에게 수익이 돌아갈 수 있다. 지금부터 500개 점포가 생길 때까지 신설하는 점포에 한해 무상으로 책을 계속 공급하겠다."
그는 대본소 만화가 정부 정책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출판사와 업주들의 불만을 대변했다. “정부는 대본소 만화를 만화로 봐주지도 않는다. 물론 지원도 없다. 하지만 대본소 만화를 보는 사람이 지금도 전국에 10만 명이나 된다. 작가, 총판, 외무사원, 대본소 업자 등 대본소로 먹고 사는 수도 엄청나다. 큰 고용창출 효과가 있는 분야다. 그리고 이렇게 많이 봐주는 책이 어디 있는가. 대중문화로서 인정해줄 만하다.”
그는 대본소를 금연구역으로 법제화 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반대 운동을 벌였다. 라면이나 담배는 대본소의 오랜 전통이 아니었던가.
"정부가 대본소를 잘 모른다. 대본소에는 청소년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다. 철저히 성인의 공간이다. PC방의 경우 이용자가 주로 청소년이기 때문에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르다. 철저히 성인의공간이다. 금연구역 지정은 대본소를 죽이는 행위다. 학교 주변 반경 200m 이내에 만화가게를 차릴 수 없도록 하는 학교보건법도 대본소의 목을 죄고 있다. 이미 청소년보호법으로 온갖 규제를 받고 있는데 또 무슨 규제인가."
금연구역 확대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대세였다. 보건복지부는 2005년 말 PC방, 만화방을 금연구역으로 지정하는 법안을 발표했다. 세상은 일 년이 빛의 속도로 바뀌는데 비해 대본소는 오랫동안 시간이 정지한 공간처럼 보였다.
2013년에는 가장 잘 나간다는 대본소 만화 부수가 권당 500~600부 선으로 떨어졌다. 대본소 만화 톱이라는 황성의 경우 데생만 국내에서 떠서 저렴한 중국, 미얀마 화실에서 원고를 완성한다. 대본소 만화에서 원고의 완성도는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김성모는 2010년에도 40명의 미얀마 화실을 확보해 대본소에 뛰어들었지만 일곱 번째 타이틀을 내고 접었다. 특별히 공들인 첫 타이틀 <용주골 깡패>는 권당 350부 정도 나갔지만 그 뒤로 책이 움직이지 않았다. 약 1억 7000만원의 손해만 봤다.
그는 사실 대본소 시장의 체력이 떨어졌다고 판단해 다시 뛰어들었다. 진입장벽이 헐거워졌을 때 파상 공세를 하면 한 자리 꿰찰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대본소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무너져 있었고, 무협만화 정도만 경쟁력이 있는 시장으로 남았다.
대본소 만화가들이 공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인터넷이다. 만화책 판매 수입 밖에 없다면 동남아에 화실을 차려도 제작 단가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공장이 오랜 세월 쌓아온 분량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목돈을 만들어냈다.
대본소는 부인할 수 없는 우리나라 만화가들의 젖줄이었다. 극화의 명작들이 탄생한 산실이고, 만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이 모이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고, 만화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일터였다. 특히 대본소에서 먹는 라면 맛은 별미였다. 어느 순간부터 대본소는 기형적으로 변질돼 과도하게 부풀었다가 지금은 껍데기만 남게 됐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든 만화시장 대본소는 자본주의 시장의 무서움을 되돌아보게 한다. 돈이 돈을 낳는 메커니즘이 유일한 선(善)인 시장에선 인간도, 예술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1980년대를 거치고 IMF를 맞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시장의 환상에 취해 거품 속에서 살았다. 부동산 투기를 일삼고, 자연을 파괴하고, 법을 악용하면서 약자를 유린하는데 거리낌 없었다. 거품이 걷힌 대한민국. 대본소는 그 모습을 압축해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