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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달의 〈눈, 물〉: 눈이 녹아 물이 되기까지

<지금, 만화> 17호 '방구석 그래픽노블' 에 실린 글입니다. 〈눈, 물〉/글, 그림 안녕달

2023-07-29 위원석

눈이 녹아 물이 되기까지

안녕달의 〈눈, 물〉

겨울밤, 여자는 어쩌다 눈아이를 낳았다.” 그림책 수박수영장, 할머니의 여름휴가, 메리를 통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온기와 사랑을 꺼내 보여주었던 안녕달의 , 은 한겨울 세찬 바람보다 싸늘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모두가 마음을 모아 축복해야 할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문장에 어쩌다라는 수식어가 끼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첫 문장이 나오는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어쩌다라는 단어가 절망적인 탄식인 걸 알게 된다. 여자는 품고 있던 눈아이의 몸이 자신의 체온을 타고 물이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이 낳은 갓난아기를 차가운 바닥에 내려놓아야 했다. 당혹스러웠지만 여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 전 내가 낳은 아이를 만질 수 없었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여자는 자기가 가진 온기로 눈아이가 다칠까 봐 눈으로 담을 쌓은 채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을 보여주었고, 눈아이도 여자의 사랑 덕분에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둘은 짧게나마 평온한 행복을 누리게 된 것 같다. 여자와 눈아이에게도 드디어 봄날이 오는 것인가 기대했다.

<그림1> 〈눈, 물〉 Ⓒ 안녕달


아니다. 봄이 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저 너머에서 초록이 몰려오는 날, 눈아이의 몸에는 다시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몸뚱아리가 녹아 물이 되는 눈아이는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으아아앙 울고, 온몸으로 문틈을 막아서도 밀고 들어오는 초록을 감당할 수 없던 여자는 좌절감에 흐아아아 운다. 절망의 초록이 밀고 들어오던 문틈 사이로 희망의 전단을 뿌리고 가는 오토바이가 있다. 전단지 속 언제 나 겨울이라는 제품만 있다면, 여자는 눈아이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는 문틈으로 밀려드는 온기를 막고 눈아이에게 금방 돌아오마는 말을 남긴 채, ‘언제나 겨울을 구하기 위해 도시로 달려간다. 간판의 분명한 메시지들을 보자면 이 도시가 천국이라도 되는 것 같다. 고르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이 마련된 것만 같다. 하지만 여자는 언제나 겨울을 가질 수 없다. 돈이 없으므로. 그것이 이 도시의 법칙이므로. 상냥하게 대출을 권유하는 사람들을 지나 고단하고 험난한 여자의 돈벌이가 시작된다.

<그림2〈눈, 물〉 Ⓒ 안녕달


, 은 사랑에 관한 속 깊은 이야기면서 우스꽝스럽고 광기 어 린 우리 시대에 대한 풍자이다. 가치 있고 중요한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 가난한 이가 사랑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고, , 은 오늘도 내 아이에게 더 좋은 교육 조건을 마련해 주기 위해 돈벌이에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하는 부모에 관한 이야기, 아이들 사랑하기에 사랑할 시간이 없는 어른들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고, , 은 눈아이를 지키기 위해 여자가 하는 모든 돈벌이가 결국 초록을 더 빨리 부르는 역설, 우리 시대의 모든 엉망진창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반드시 지키고 싶은 것, 절대로 잃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어른이 되면 그들 중엔 반드시 지킬 수 없는 것, 잃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 자명한 패배의 끝을 마주하고서라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겨울아이를 낳은 그 여자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의 두려움과 용기, 처절함과 인내에 공감하는 것은 내가 지키려 했지만 지키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 패배했지만 반짝였던 분투의 기억 덕분이었다.

원고지 10매가 채 되지 않을 텍스트 분량이지만 288쪽 한 권의 책 안에는 읽고 다시 또 읽어야 할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출판사는 장편 서사라는 단어로 이 창작물을 홍보했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이 책을 그래픽노블로, 혹은 그림책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어떤 장르의 책으로 읽더라도 이 책은 매우 훌륭한 책이다. 물론, 만화의 다양성을 고민하는 창작자라면 꼭 한번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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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석

딸기책방 대표, 동화작가
前 휴머니스트 교양만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