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아 물이 되기까지
안녕달의 〈눈, 물〉
“겨울밤, 여자는 어쩌다 눈아이를 낳았다.” 그림책 《수박수영장》, 《할머니의 여름휴가》, 《메리》를 통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온기와 사랑을 꺼내 보여주었던 안녕달의 〈눈, 물〉은 한겨울 세찬 바람보다 싸늘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모두가 마음을 모아 축복해야 할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문장에 ‘어쩌다’라는 수식어가 끼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첫 문장이 나오는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어쩌다’라는 단어가 절망적인 탄식인 걸 알게 된다. 여자는 품고 있던 눈아이의 몸이 자신의 체온을 타고 물이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이 낳은 갓난아기를 차가운 바닥에 내려놓아야 했다. 당혹스러웠지만 여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 전 내가 낳은 아이를 만질 수 없었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여자는 자기가 가진 온기로 눈아이가 다칠까 봐 눈으로 담을 쌓은 채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을 보여주었고, 눈아이도 여자의 사랑 덕분에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둘은 짧게나마 평온한 행복을 누리게 된 것 같다. 여자와 눈아이에게도 드디어 봄날이 오는 것인가 기대했다.
▲<그림1> 〈눈, 물〉 Ⓒ 안녕달
아니다. 봄이 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저 너머에서 초록이 몰려오는 날, 눈아이의 몸에는 다시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몸뚱아리가 녹아 물이 되는 눈아이는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으아아앙 울고, 온몸으로 문틈을 막아서도 밀고 들어오는 초록을 감당할 수 없던 여자는 좌절감에 흐아아아 운다. 절망의 초록이 밀고 들어오던 문틈 사이로 희망의 전단을 뿌리고 가는 오토바이가 있다. 전단지 속 ‘언제 나 겨울’이라는 제품만 있다면, 여자는 눈아이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는 문틈으로 밀려드는 온기를 막고 눈아이에게 금방 돌아오마는 말을 남긴 채, ‘언제나 겨울’을 구하기 위해 도시로 달려간다. 간판의 분명한 메시지들을 보자면 이 도시가 천국이라도 되는 것 같다. 고르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이 마련된 것만 같다. 하지만 여자는 ‘언제나 겨울’을 가질 수 없다. 돈이 없으므로. 그것이 이 도시의 법칙이므로. 상냥하게 대출을 권유하는 사람들을 지나 고단하고 험난한 여자의 ‘돈벌이’가 시작된다.
▲<그림2> 〈눈, 물〉 Ⓒ 안녕달
눈, 물〉은 사랑에 관한 속 깊은 이야기면서 우스꽝스럽고 광기 어 린 우리 시대에 대한 풍자이다. 가치 있고 중요한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 가난한 이가 사랑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고, 〈눈, 물〉은 오늘도 내 아이에게 더 좋은 교육 조건을 마련해 주기 위해 돈벌이에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하는 부모에 관한 이야기, 아이들 사랑하기에 사랑할 시간이 없는 어른들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고, 〈눈, 물〉은 눈아이를 지키기 위해 여자가 하는 모든 돈벌이가 결국 초록을 더 빨리 부르는 역설, 우리 시대의 모든 엉망진창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반드시 지키고 싶은 것, 절대로 잃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어른이 되면 그들 중엔 반드시 지킬 수 없는 것, 잃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 자명한 패배의 끝을 마주하고서라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겨울아이를 낳은 그 여자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의 두려움과 용기, 처절함과 인내에 공감하는 것은 내가 지키려 했지만 지키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 패배했지만 반짝였던 분투의 기억 덕분이었다.
원고지 10매가 채 되지 않을 텍스트 분량이지만 288쪽 한 권의 책 안에는 읽고 다시 또 읽어야 할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출판사는 장편 서사라는 단어로 이 창작물을 홍보했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이 책을 그래픽노블로, 혹은 그림책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어떤 장르의 책으로 읽더라도 이 책은 매우 훌륭한 책이다. 물론, 만화의 다양성을 고민하는 창작자라면 꼭 한번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